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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어디 갔어!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요 근래에 아주 꿈같은 멋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무려 6년 동안에 걸쳐 뻔뻔스런 아들 녀석에게 악질적이고도
강제적인 노동 착취를 당해 오다가 드디어 잠시 동안이나마 달콤한
휴가를 얻게 된 것이었다.
처음, 아들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을 알아챘을 때는 속상한 마음에
야속함도 느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잠시' 뿐이었다. 아들이 없어
진 지금 감히 아르티어스 어르신께 노동을 강요할 만큼 간이 큰 놈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부족했던 수면을충
분하고도 넘치도록 보충했다. 그런 후에는 침대에서 잘 꾸며진 정원
으로장소를옳겼다. 따뜻한 햇볕을 쬐기도하고,햇볕이 따가을 때는
그늘에 들어가서 낮잠을 자거나, 좋아하는 주스나 포도주를 마시며
책을 읽기도 했다. 그로서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끝장날 가
능성이 농후한 이 오랜만의 휴가를 정말이지 알뜰하게 즐기고자 했
던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이 제발 빨리 돌아오지 말
아야 할 텐데.' 하던 생각이 서서히 바픽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물가에 애를 놔둔 부모처럼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고,또 한편
으로는 어딘지 모를 색다른 곳에서 아버지가 윌 하는지도 잊고 여행
을하고 있을 아들 생각에 슬며시 화가 치밀기도 했다.
"이런 제기랄! 얼마나 좋은 곳에서 놀고 있기에 돌아을 생각을 않는
거야?'
걱정과분노로 인해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은
다크가 여행을 떠난후 12일째 되던 날 황혼 무렵이었다.
원래 보편적으로흐르는 심리라는 것이, 나쁜 일은 모르고 그냥 당
하는 편이 속 편하다. '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처럼,혹
은 그 일을 당할 것은 분명히 알지만 그것을 당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억지로 속여 가면서 남들은 다 당해도 절대로 자신은 당하지 않을 것
같이 현실 도피를하는 것이 정신 건강상좋으니까말이다.
그 때문에 아르티어스 어르신도 이 휴가의 끝이 언제일지 알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현실 도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편이 혹시나 내일
이라도 아들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스릴이 있어서 좋기도 했다. 하지
만 그런 스릴이 하루 이틀 계속되면서 스릴보다는 걱정이 점점 커지
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아들의 행적을 알아보기로 마
음을 바꾼 이상,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일부러 알아 보지 않
아서 그렇지, 알려고만 마음을 먹는다면 아주 간단하게 아들의 행적
을 알아 낼 수 있는 요령과 지능,그리고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 결과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제일 먼저 찾
은 인물은 치레아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아들의 심복(?)인 카알 폰 카
슬레이 백작이었다.
"저어,대공 전하께옵서는 폐하로부터 모종의 비밀 임무를 맡으시고
2주일 정도 자리를 비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만‥‥‥‥"
아르티어스가 눈을부라리며 질문을 퍼붓자,다크에게 걸려 팔자에
도 없는 오른팔 노릇을 억지로 하고 있는 불쌍한 카슬레이 백작은 이
제 망할 놈의 상관 덕분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재빨리 자신이 알
고 있는 바를 토해 냈다.
원래 상관에게 충성하는 부하라면 상대를 적당히 따돌리거나 아니
면 대충 거짓말을 하여 둘러 댈 테지만,카슬레이 백작으로서는 다크
에게 그 정도의 의리를 지킬 이유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아르
티어스의 눈동자가 번뜩거리는 것이 카슬레이 백작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종의 비밀 임무?설마,그놈의 임무가 무엇인지 대공의 아비인 나
한테도 발설하기 힘들다는 것이냐?"
아르티어스의 추궁에 카슬레이 백작은 식은땀을흘리며,서랍 속에
들어 있던 편지를 펼쳐 보이면서 다급히 항변했다.
"그게 아니라,전하의 서신에 그렇게만 써 있기에 저도 자세히 알 수
가 없습니다. 저는 말로만 오른팔이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요."
카슬레이 백작이 거품을 토해 내며 한 손으로 흔들어 대는 편지를
힐끗 바라본 아르티어스는 카슬레이 백작의 태도로 보아 더 이상 알
아 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2주일이라 이거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을하다가 아르티어스는 그 2주일이라는
것이 무엇을뜻하는 것인지 생각하며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에구구‥‥‥ 휴가가 이틀밖에 안 남았잖아?"
처음에 카슬레이 백작을 잡아 먹을듯이 추궁하던 것과는 대조적으
로 아르티어스는 그 사실을 괜히 알아 냈다는 후회감에 젖으며 급히
자신의 휴양지(?)로 돌아왔다. 이제 이 꿈같이 달콤한 휴가도 이틀밖
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면 아비를 마소처럼 부려먹는
그잔악무도한아들놈이 '짠' 하고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행해질 밤낮을가리지 않는 중노동에 대비해서 잠
이라도 좀더 자두는 것이 자신의 장수에 보탬이 될 것은 분명한사실
이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방에 다시 꽁 박혀 버린 아르티어스는 5일 동안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들은 돌아오
지 않았다. 처음 이틀까지는 아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마냥 기
쁠 뿐이었다. 아들이 예정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그때부터 하루하
루가 특별 휴가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약속된 날로부터 무려 4일이 경과했을 때,아르티어스 어르
신은 또다시 살기를 가득 품고 카슬레이 백작을 족치러 두 번째 방문
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카슬레이 백작에게서 더 이상의 정보를 알아
낼 수는 없었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이번에는 곧장 수도인 크라
레인 시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쥐어 짜면 아들의 행선지를토해 낼 것
으로추측되는 인물이 몇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라레인 시는과거 제1차 제국 전쟁 때 3루마가감행한유성 공격
에 의해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크로나사 지방을 점령한 크라레스 제
국이 그곳을 다시 수도로 정하고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벌여 다시금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쟁이 끝난 후
겨우 6년이라는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기에,대규모의 황궁과 몇몇 주
요 관청 건물만이 들어서 있을 뿐 인구는 아직 그렇게 많지 못했다.
하지만 크라레인 시는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새로운 수도로 선정되
었기에 폐허의 잔재는 신속히 다 치워졌고 그 위로 넓고 탄탄한 대로
가닦였다.
그리고 새롭게 놓인 도로망 주변 곳곳에 수많은 건물들이 지어지
고 있는 모숩으로 봐서 10여 년 후에는 대제국 크라레스의 수도에 걸
맞은 인구와 경제 규모를 갖춘 거대한 도시로 발전할 것은 분명해 보
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일단 상대가 매우 부유해 보였기에 경비병은 아주 공손하게 물어
왔다. 아르티어스가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이다 보니 그 옷이 매우 고
급스럽고 화려했을 것은 당연했다. 그러므로 웬만큼 부유한 상인들
도 입기 힘든 고급 옷을 입은 인물에 대해 감히 소흘히 대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먼저 불같이 화부
터 냈었던 아르티어스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르티
어스 어르신은 비록 치레아 공국에서는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는 처
지에 있었지만,그래도 신분은 대단히 높지 않던가?아르티어스 어르
신은 대귀족의 아버지답게 점잖게 미소를 지으며 경비병에게 말했
다. 아들의 체면을손상시키는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토지에르에게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찾아왔다고 전해 주게."
상대가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경비병은 자신
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 왔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상대는 크라레스 제국 최고의 레벨에 들어가는 귀족
이었기 때문이다.
"옛,급히 기별을 넣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이어 경비병의 보고를 받은 몇 명의 기사가 튀어나와 아르티어스
를 극진하게 대우하며 토지에르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자신의 신
분이 아닌 아들의 신분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렇듯 응숭한 대접을 받
게 되자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자신의 영광보다도그 아들의 영광을
더욱 가슴 뿌듯하게 여기지 않던가?그것도 자신이 목숨보다도 더 사
랑하는 아들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기사들이 아르티어스에게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공손하게
대한 것은 치레아 대공의 위세가 아니라 과거 황궁에서 난동을 부린
덕분에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이 기사들의 뇌리에 '공포'라는 이름
으로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로부터 쫴 오랜 시일이 흘렀기
에 경비병들 사이에서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은 잊혀진 것이 되어 버
렸지만‥‥‥‥
노망 난 드래곤 비위 맞추기
"이게 문제란 말이야. 도대체가 이 주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어."
복잡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 수백 장이 넘는 도면을 보면서 토지
에르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자 토지에르와 함께 마법진을 바라보고
있던 마법사중의 한 명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 중년의 마법사는 바로
토지에르가 아끼는 수제자 다론이었다.
"스승님,본국에 있는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법진을 알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조건 하나 만들어서 실험을 해 보는 것이 좋
지 않을까요? 전에 청기사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저 녀석을
통째로 복사해서 우선 하나 만들어서 실험을 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습니다. "
수제자라는 다론의 입에서 이 따위 말이 튀어나오자,토지에르는 처
음에는 어이없는 얼굴이었다가곧이언 불같이 화를내기 시작했다.
"뭐라고? 이런 멍청한 녀석 ! 이게 어디 저출력의 시험용 엑스시온인
줄 아느냐?그 따위 소리를 하게 ?'
"예?제 생각이 짧았다면 용서해 주십시오,스승님."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다론을 노려보며 토지에르는 자신의 제자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 상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토지에르로
서는 일단 이 녀석을 제대로 가르쳐 놓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다음부터 다론은 크라레스
의 마법사들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적인 위치에 올라서야 했다.
"이건 추정 출력 2.3 정도를 낼 수 있는 최강 급 엑스시온이야. 이걸
대충 만들어 놓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가는 십중팔구 거대한 폭발로
이어진다. 만약 이 정도 엑스시온이 폭발을 일으키면 실험실 정도만
박살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수도 전체가 쑥대밭이 될 가능성도 있
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하지만 스승님, 이런 식으로아무리 연구를 계속해 봐야 더 이상 진
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료도 거의 없는 지금,다소 무리가 있더
라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제자가 계속 우기자 토지에르는 짜증 어린
어조로 질책했다.
"아직도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느냐?네 마음과뜻을 모르
는 바는 아니지만, 엑스시온의 후면 마법진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면
그건 자살 행위야. 지금으로서는 전면에 드러나 있는 마법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청기사의 엑스시온 연구를 함께 병행하는 수밖
에 없다고 봐야지. 청기사의 엑스시온은 현재 개발된 것 중에서는 최
강일 것이야.
그러니 그것과노획한 엑스시온의 연구를 함께 병행해 나간다면 어
쩌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현재 연구를 진행중인 것이
지. 전에 청기사의 경우 설계도가 있었기에 그걸 토대로 차근차근 실
험용 엑스시온을 만들면서 연구를 해 나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얘
기가 완전히 다르다. 후면 마법진에 대한 데이터가 하나도 없는 상태
에서 무조건 만들고 볼수는 없는 것이지, 너무무리한 과욕을부리다
가는 아무 것도 안 돼. 오히려 피해만가중시킬 뿐이지. 알겠느냐?'
"예."
지금 크라레스 제국은 1.3이라는 강력한 출력을 내는 타이탄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의 군사력을 10년쯤 전에 가
지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주변의 국가들이 그것을 상회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었다.
가상적인 적국이라고 할 수 있는 코린트나 크루마의 경우 출력 1.5
이상 급의 타이탄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수적으로는 크
라레스 쪽의 타이탄 보유량이 조금 더 많았지만,성능 면에서는 상대
국들이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비록 크라레스 제국이 최강의
타이탄인 청기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드래곤 하트를 더
이상구할수 없었기에 지속적인 생산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드래곤을 때려 잡아 그것을 구하는 것에도 문제가 따랐
다 드래곤을 잡기가 매우 힘이 들 뿐더러,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
드래곤인데 그가 자신의 동족인 드래곤을 학살하는 것을 묵인할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에 크라레스는 드래곤 하트 같은 희귀한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새로운 엑스시온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크
라레스의 마법 기술로 봤을 때 새로운 엑스시온을 독자적으로 개발
할수 있는능력은 별로 없었다.
거의 90퍼센트 이상 완성되어 있었던 청기사의 엑스시온 설계도를
가지고도 완벽하게 완성해 내는 데 수십 년이 걸렸을 정도로 다른 나
라에 비해 엑스시온 개발 능력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고 있을 수도 없기 에 토지에르는 전선에서 노
획한 타이탄들의 엑스시온을 복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리를 하
게 되었다.
토지에르는 1차 전쟁이 끝난 후 전선에서 노획한 타이탄 중에서 가
장 강력한 것들을 모아 봤지만, 정작 필요한 엑스시온을 탑재한 타이
탄은노획된 것이 없었다. 코린트가 1.2이하의 출력을 내는 미네르 급
이나 미노바 급을 주력 타이탄으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1.5의 출력을 내는 미노바-P도 있기는 했지만,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은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기에 노획 자체가 불가능
했던 것이다.
1.5정도의 엑스시온만노획되었어도 1.3을 만들던 기술이 있으니
어느 정도 극복할 가능성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1.5는 아예 없었
고, 덩그러니 붉은색 타이탄만 우람한 덩치를자랑하며 여기 이곳 실
험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거대한 붉은 타이탄에서 기사가 탑승하는 의자를 해체한 후 안을
들여다 본 토지에르는 엄청난 엑스시온의 크기와 거기에 그려져 있
는 복잡한 마법진을 보고 절망감을 느꼈었다. 1.5 정도라면 겨우 0.2
정도밖에 안 되는 출력 차이였기에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할 것으로
여겼었는데, 이건 최소한으로 잡아도 2.0은 확실하게 넘는 진품이었
던 것이다
대마법사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몇 가지 마법진들,그 마법진이 무
엇을 뜻하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복사했다가는 장차 무슨 사태를 당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후면에 그려져 있을 마법진은 아예
추측도 하기 힘든 상황이 아닌가?만약 실험 도면을 입수했다면 작은
실험용 엑스시온들을 만들면서 계속되는 실험을 통해 그 지식을 간
접 흡수할 수도 있으련만,완제품만 들어와서는 그게 말이 안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엑스시온이 마법을 가장 잘 전달하는 금속인 크로네에 감싸
져서 완전히 그것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것도 가장 큰문제점 가
운데 하나였다. 타이탄을 제작할 때 엑스시온에 생명을 불어 넣은 후
타이탄에 집어 넣고 크로네를 부어서 완전히 한 덩어리로 만들게 된
다. 그 결과로 타이탄에서 엑스시온을 완벽하게 해체할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다.
크로네를 녹인다면 생명이 없는 엑스시온의 외장을 감싸고 있는
금(Gold)도 함께 녹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금에는 복잡한 마법진
이 그려져 있었다. 그 말은 엑스시온의 위쪽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은
어느 정도 복사를 해 낸다고 하더라도 크로네와 달라붙어 있는 쪽의
마법진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는 도저히 알아 낼 길이 없다는 것과 같
았다.
"젠장,골치 아프군‥‥‥‥
무려 6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고 나서야 고작 몇 겹으로 중복되어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들
의 대부분은 토지에르가 익히 알고 있던 마법진이었다. 그 부분을 분
리시키고 난 남은 마법진들을 하나하나 해체하여 그것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파악해 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작업은 대단히 힘들었
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연구 자체가 완전히 제자리 걸음만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님."
"뭐냐?"
"이럴 것이 아니라 알카사스에서 1.7짜리 엑스시온을하나수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그거라면 어느 정도 연구만 하면 복사도 가능하
지 않을까요?"
제자의 이번 의견은 좨나타당성이 있었기에 토지에르는오랜 시간
고심을 한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알카사스는 1.25 이상의 엑스시온은 수출을 금지하고 있
지 않느냐?"
"하지만 아르곤 제국에는 판매를 했었지 않습니까? 단 한 개뿐이었
지만 말이지요."
"흐음‥‥‥‥ 글쎄다. 아르곤에 팔았으니까 우리에게도 팔아야 한다
고 우길 수는 없지. 아르곤이야그걸 팔았다고 해도 생산할 능력이 없
으니까 상관없겠지만,우리들은 그것을 생산할 능력이 있지 않느냐?
만약 알카사스에서 이쪽에 수출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3루마나 코린
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겠군요, 스승님."
"그것 때문에 내가 이 엑스시온을 잡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야 하
지만 지금의 연구 진척 상황으로 봤을 때 과연 내 생전에 이것을 해독
이나 해 낼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구나."
하지만 한참 궁리를 하던 다론은 교활한 표정으로 토지에르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어 떻겠습니까, 스승님 ?'
"어떻게 말이냐f'
"만약 판매를 하지 않는다면 협박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본국의 군
사력은 알카사스보다 훨씬 우위에 있습니다. 일단 밑져 봐야 본전이
니까 협박을 해 보는 것도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알카사스의 속국인 엔테미어 공국 근처에서 대규모 기동
훈련을 하면서 넌지시 압력을 가해 보라는 것이냐?'
"예,그렇죠,스승님. 상대가 들어 주면 좋고,못 하겠다고 하면 그만
이고 말이죠. 하지만 여러 개도 아니고 1.7파리 엑스시온 한 개만 비
밀리에 팔라고 한다면 못들어 줄부탁도아니지 않습니까?'
"글쎄‥‥‥ 한번 생각을 해 보자꾸나."
토지에르가 제자의 의견을 어느 정도 긍적적으로 검토하고 있을
때 젊은 마법사 한 명이 다가와서 조용하게, 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황궁 경비실로부터 연락이 들어와 있사옵니다,전하."
"그래?무슨 일이지?'
"예,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전하를 뵙기를 청
한다고 하옵니다. 우선 기사단에 연락을 했으니까 진위 여부를 가린
후사실이라면 이곳으로 안내할 것이옵니다. "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라고? 으웅? 그렇다면 그 드래‥‥‥‥ 에구구,
큰일 나기 전에 빨리 가봐야겠군."
제자의 의견을궁리한다고 정신이 없었기에 대충들어 넘기려고 했
던 토지에르는불현듯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 누구를뜻하는지 떠
오르자 허둥지둥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지에르가 재빨리 건물 밖으로 달려나갔을 때, 저 멀리서 붉은 머
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청년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토지에르는 재빨리 자신이 지을수 있는 한 최대
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상대에게 다가가 깍듯이 인사를 보
냈다.
"안녕하셨습니까?아르티어스 님 이렇게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
까?그냥 치레아에서 부르겼으면 제가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갔을 텐
데 말입니다. "
토지에르로서는 파격적일 정도로 아부성이 심한 발언이었다. 아르
티어스를 안내해 온 기사들이 토지에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속으로
키득거리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자신을 향한 토지에르의
태도가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뭐 자네같이 바쁜 사람이 치레아까지 달려을 필요는 없지. 그건 그
렇고내가 여기에 온 것은내 아들 녀석 때문이야."
"예?그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들 녀석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걸 물어 보려고 왔단 말일세."
"아,예.험험‥‥ 이보게,자네들은이제볼일보러가보게."
토지에르가 헛기침을하며 점잖게 말하자 기사들은 즉각 인사를 건
넨 후 자신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 버렸다. 토지에르는 기사들이 멀
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낮은목소리로 말했다.
"대공 전하께선 폐하의 칙명을 받아 미란 국가 연합으로 가셨습니
다. "
토지에르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미란에?거기에는 왜?"
"예,아리아스 왕자 전하의 호위 때문이지요."
"쯧, 왕자 하나를 호위하는 데 왜 내 아들이 가야 하지? 여기는 그렇
게 인재가 없다는 말이냐?'
"저,그게 아니고 아주 비밀을 요하는 일인 데다가 위험성이 높기 때
문에 그렇습니다. 몇 명 되지 않는 기사들을가지고모든 위험을 감수
해야 하거든요. 사실 대공 전하께서도 겨우 세 명의 기사밖에 데려가
지 않으셨구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면서 토지에르를 노려봤
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토지에르의 머리 속에서는 위험 경보가 울려
퍼졌다. 말을조금 잘못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느긴 것이다. 토지에
르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지으며
말했다.
"에에,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기사들을 보냈을 때 얘기지 마스터 급
의 실력을 지니신 전하라면 얘기가 틀리지요. 원래는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오랜만에 휴양이나 하실 겸 가실 예정이었습니다만, 전하
께서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치레아 대공께 부탁을 하신 것입죠.
아마도 지금쯤 대공 전하께옵서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계실 것
입니다. 겨우 날파리 몇 마리쯤 날아든다고 해서 전하의 안전을 귀찮
게라도 할수 있겠습니까?헤헤‥‥‥‥"
그러나 미소를 떤 토지에르의 얼굴을 슬며시 노려보며 아르티어스
가 윽박질렀다.
"흐음,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결코, 저는 아르티어스 님께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가급적이면 진실만을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
니다. 믿어 주십시오."
"흐으음‥‥‥‥
신음을 흘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토지에르
는 속으로 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건너 뛴 적은 많습죠. 모르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는 것이 확실한 아르
티어스를 향해 토지에르는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미란에 가셔서 아드님과 함
께 휴양이나 즐기다가 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치레아 공국의 기
반을 새롭게 다지신다고 힘드셨을 텐데, 이 기회에 푹 쉬시다가 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
"아무렴요, 그러셔야죠. 원래 아드님하고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계
시는 것도 남들이 보기에 좋지 않잖습니까?헤헤헤‥‥‥‥
아르티어스는그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자
신은 가기 싫은데 억지로 밀려서 간다는듯둘러 댔다.
"으음,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가 볼까?"
"예. 부자간에는 꼭 붙어 계시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도좋습지요. 그
림 마법진을준비시키겠습니다. "
"아니 , 그럴 필요는 없고, 좌표만 일러 주게."
아르티어스는 토지에르가 좌표를 말하자마자 곧장 공간을 이동해
서 사라져 버렸다.
토지에르는 아르티어스가 사라지자 얼굴 가득 짓고 있던 미소를
싹 지워 버린 후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놀라을 정도로 빠른 표정 변
화였다.
"제기랄!요즘 안 그래도 일이 꼬이는데 드래곤까지 말썽이라니! 내
가 이 나이에 노망 난 드래곤 비위나 맞추고 있어야 하다니, 나 자신
이 너무 한심한 것 같구먼."
투덜거리고 있던 토지에르는문득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외쳤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작전 회의가 시작될 때가 되었는데,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군."
황태자비의 생신 축하 관계로 이번 달에 있어야 할 전체 회의는 생
략되었다. 대신 황제를 포함한 최고 측근들만의 소규모 회의가 계획
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지에르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비행 마법
까지 써서 회의 장소로 날아갔지만, 이미 그곳에는모두 다 모여서 그
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루빈스키 대공이 탐탁하지 않다는 눈초리로 노려보는
가운데 식은땀을 흘리며 그곳에 모여 있는 인물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자신에게 할당되어 있는 자리를 찾아 재빨리 앉았다. 토지에르가
앉은 원형 탁자에는 겨우 다섯 개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앉게 되어 있는 다섯 명의 인물들은 모두 다 크라레스 제국을
이끌어 나가는 최고의 권력자들이었다.
토지에르가 자리에 앉자 비대하게 생긴 인물이 입을 열었다. 바로
그가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 후작으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계급이 낮았다. 원래는 정보를 관장하는 안티노스 후
작이 토지에르보다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3국 전쟁을 승리
로 이끈 공훈을 인정받아 토지에르가 공작으로 승급해 버리자 서로
의 위치가 뒤바픽었던 것이다.
안티노스 후작은 우선 좌중을 쭉 둘러본 후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
했다.
"이번 달에는 황태자비 전하의 생신 축하 무도회가 열리고 있어 회
의가 없을 계획이었지만 긴급 정보가 입수된 관계로 이렇게 회의를
주선하게 되었습니다. 치레아 공작 전하께서는 칙명에 의해 미란 국
가 연합에 가 계신 관계로 회의에 불참하셨습니다. "
그런 후 안티노스 후작은 뒤를 돌아보며 대기하고 있는 노 마법사
에게 지시했다.
"준비해 둔 영상을 비춰 보도록,!"
그러자 노 마법사는 원탁 위에 놓여 있던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넓
은 판에 다가가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마법진 위로 붉은색 타이탄
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코린트가 자랑하는 신형 타이탄인 적기
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자세히 보면 조금 달랐다. 두툼한 장갑을 가
지고 있는 데다가크고 단단해 보이는사각형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마법진을 발동시킨 노 마법사는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나가 버렸
다. 안티노스후작은 마법사가나간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료는 어제 첩보망에 걸린 것입니다. 코린트의 근위대 전용 기
동 연습장에서 간신히 첩자들이 포착한 것이지요."
"자네의 그 말은 이것이 코란 근위대의 신형 근위 타이탄이라는 말
인가?"
탁자 위에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붉은 타이탄을 바라보며 루빈
스키 대공이 말하자안티노스후작은고개를끄덕이며 수긍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대공 전하, 전체적인 외형으로 추리해 봤을 때
적기사의 신형 모델인 것이 화실하옵니다. "
루빈스키 대공은 영상을노려보며 내뱉듯 말했다.
"놀라운 일이군."
"대공 전하,사실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적기사가 일
단 개발된 이상그것이 실전 배치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토지에르의 말에 루빈스키는 토지에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
했다.
"그렇다면 경은 이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이오?'
"예, 전하. 본국에서도 카프록시아를 원형으로 하여 다섯 가지 모델
이 추가로 생산되었습니다. 엑스시온을 새로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
이지,타이탄의 외형을바꾸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것이 벌써부터 실전 배치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노획한 적기사를 두고 추론해 봤을 때 적기사 2기를 생산할
자원으로 혹기사 3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작업인데‥‥‥신형이 개발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본격적
으로 흑기사를 적기사로 대체할 만큼 막대한 액수의 자금이 확보되
었다는 것이겠죠. 그건 그렇고,안티노스 경."
토지에르의 물음에 안티노스는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며 답했다.
"예, 공작 전하."
"정보국에서는 코린트가 저 신형 적기사를 몇 기나 실전에 배치했다
고보는가요?"
토지에르 공작의 물음에 안티노스 후작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30기 정도로추측됩니다. 그보다 많을수도,혹은 적을수도
있습니다만 30기 정도가 정확한추측일 것입니다. "
안티노스후작의 말에 루빈스키 공작이 놀라서 말했다.
"30기 씩이나?그렇다면 그런 추측이 나오게 된 배경은 원가?정확한
추리인가?"
"예,사실상 타이탄의 숫자는 그 나라에서 발표하지 않는 한 정확한
숫자를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물며 코린트의 경우 적기사
의 신 로델 생산자체를 숨기고 있었을 정도니까 두말할 여지가 없습
니다. 그렇기에 그 생산 대수를 추측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
다. 하지만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참고로 한 결과 어느 정도 숫자를 추
측하게 된 것이지요."
"발렌시아드 기사단이?발렌시아드 기사단과 적기사가 무슨 연관성
이 있지?"
"예, 물론 생산된 적기사가 발렌시아드 기사단에 배치되는 것은 아
닙니다. 하지만 적기사가 근위대에 배치된다면, 여태까지 근위대에
있었던 흑기사는 다른 곳으로 돌려지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 때문
에 저는 근위대보다는 발렌시아드 기사단 쪽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고,다행히 그 변화를 잡아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
안티노스 후작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발렌시아드 기사단은 서서히 증강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20명의 새
로운 기사들이 합류했습니다. 물론 오너가 아닌 정찰조가 보강되었
을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발렌시아드 기사단으로 보내진 기
사 20명은 모두 다 일류들입니다. 그렇기에 발렌시아드 기사단의 타
이탄 총수가 10기에서 30기로 증강되었다고 예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30기로 중강되었느냐 하는 것이 중
요합니다. 3국 전쟁 후 코린트는 약화된 근위 기사단을 보강하기 위
해 혹기사를 추가 생산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정확한 흑기사의 추가
생산량은 추측이 불가능하지만, 근위 기사단에 재편성된 인원은 30
명 가량이었습니다. 그 말은 혹기사가 30기 정도로 급속히 증강되었
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30기로 증강되었으니 아마
도 근위 기사단의 혹기사들이 모두 다 그쪽으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흑기사가 빠져 나가고 난 근위
기사단에는그만큼의 적기사들이 그 공백을 채웠을 겁니다. "
안티노스후작의 보고가 상당히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있는 것이 화
실하자,모두들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전쟁에서 이미 겪어 봤지
만 적기사의 파워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적기사 2기 정도가 합치면 청기사 1기를 상대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나마 지난번 전쟁에서 적기사 2기가 손쉽게 박살이 난 것도,
그들을 상대한 사람이 치레아 대공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근위대 대원들이었다면 치레아 대공처럼 그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코린트가 지금처럼 엄청난 속도로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해서 근위
대를 적기사로 완전히 채우고, 흑기사를 대량 생산 한다면 현재 37국
간의 군사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가 된다면 코린
트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또 패배에 가까운 치욕을 선물했던 크루마
와 크라레스가 첫 번째 분풀이 대상이 되어 줘야 할 것은분명했다.
토지에르는 이제 이 보고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
자창백한 어조로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폐하,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정보이옵니다. 만약 적기사가 진짜로
그렇게 많은 수가 생산 배치되었다면,또 코린트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조만간 3국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사옵니다. "
토지에르의 말에 루빈스키 또한 찬성했다.
"폐하, 토지에르 경의 말이 맞사옵니다. 현재의 3국 체제는 코린트
의 군사력보다 크루마와 본국의 군사력의 합계가 더 많기에 유지되
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본국과 크루마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코린트의 힘이 우위에 서는 그날,3국 체제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
분명하옵니다. 폐하,단안을 내리셔야 할 때이옵니다. 시일이 지나면
어쩌면 너무늦어 버릴지도모르옵니다. "
이번에는 안티노스 후작이 말을 이었다.
"폐하,하지만 아직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사옵니다. 우선 제가 보고
드린 그 정보가 정확한지부터 확실히 검증을 해야만 하옵니다. 그런
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손을 써도 늦지는 않을 것이
옵니다. "
세 명의 중신들의 의견을모두를어 본후 황제는 결정을 내렸다.
"좀더 확실한 정보를 최대한빨리 입수하도록 해 보게나."
"옛, 폐하."
황제는 시선을 안티노스 후작에게서 토지에르 공작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케프라 공작?'
"옛,폐하."
"새로운 엑스시온 개발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예,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거의 진척이 없사옵니다. "
고개를푹숙이며 대답하는토지에르를 향해 황제는짜증스럽게 말
했다.
"7년이라는 시간을 줬는데, 아직도 진척이 없다고? 짐이 그대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고하지는 않았네. 노획한 적기사2기까지 참고
하라고 보내 줬지 않던가?"
"폐하, 본국에 축적되어 있는 엑스시온 제작 기술을 훨씬 초월하는
적기사의 엑스시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사옵니다. 엑스시온의
위 부분에 드러나 있는 마법진은 엑스시온에 새겨진 수많은 마법진
들중에서 겨우20퍼센트정도‥‥‥ 위 부분에드러나있는20퍼센트
만으로 나머지 50퍼센트를 짐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옵니다. "
"그렇다면 어쩌자는 것인가?코린트는 모든 타이탄을 1.5 이상의 출
력으로 상숭시켰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에다가 적기사까지 30기가
생산되었다면,본국과의 전력 차이는 더욱 벌어지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3국 간의 군사적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 본국이 멸망하는 날
이 될 것이라는 것을모르는가?"
"그래서 한가지 대안을 세운 것이 있사옵니다,폐하."
"말해 보라."
"예,알카사스에서 그것을 구입하는 것은 어떠하올는지요?'
"알카사스에서?안티노스 경, 알카사스에서 1.5 이상의 출력을 내는
엑스시온을 판매할까?"
황제의 말에 안티노스 후작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신중하게 답변
했다.
"폐하, 알카사스에서 엑스시온을 판매하고는 있사오나,그런 고출력
엑스시온은 판매를 금하고 있사옵니다. "
"폐하, 물론 판매를 금하고 있다는 것은 소신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알카사스에서 1.7짜리 엑스시온을 아르곤 제국에 판매한 전
례가 있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많이 구입할 필요도 없
고 단 한 개만 비밀리에 구입하면 되옵니다. 갖은수단을 다동원한다
면 한 개 정도야 어떻게 구입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
"안티노스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폐하. 단 한 개만 구입한다면 가능성도 있을 것이옵니다. 본국
의 군사력이 코린트에는 못 미치지만 알카사스보다는 월등하게 우위
를 점하고 있사옵니다. 침략하겠다고 협박을 한다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갈지도 모르겠사오나‥‥‥‥만약 그것이 외부에 발설된다면 코린
트가수단 방법을가리지 않고 저지해 올 것이 분명하옵니다. "
"그럴지도모르지 루빈스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알카사스에 웬만한 협박은 아예 통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알카사스는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들의 뒤에는 코린트
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사옵니다. 협박보다는 회유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물론 알카사스 국왕이나 의회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엑스시온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고위 마법사들을 상대로 공작을
벌인다면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
"경의 의견이 옳은 것 같군. 안티노스 경."
"옛,폐하."
"첩보원들을보내서 알카사스의 마법사들을 회유해 보라."
"옛,폐하."
이번에는루빈스키 대공이 황제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폐하,본국의 모든 타이탄을 카프록시아 급으로 대체하는 데 6년이
라는 시간이 걸렸사옵니다. 그런데 1.5급의 엑스시온을 생산하는 방
법을 터득해서 지금부터 생산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코린트를 따라
잡으려면 또다시 6년을 허비해야만 하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코린트가가만히 있을 틱이 없사옵니다
그들은 지난 번 전쟁에서 타이탄을고급으로등급 향상시키는 것에
게을리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
이옵니다. 코린트는 본국보다 타이탄 제작 기술에서 월등하게 우위
를 점하고 있사옵니다. 그들을 타이탄의 성능에서 이겨 보겠다는 것
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사료되옵니다. "
"그렇다면 경에게는다른 방법이라도 있는가?"
"예,폐하. 동맹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옵니다. 과거 코린트가 어이없
이 무너졌던 것도 동맹의 힘을 너무 하찮게 본 것이 원인이라 사료되
옵니다. 코린트 동맹군의 타이탄 200여 기가 아주 간단하게 전멸 당
하지 않았나이까?
그 때문에 본국에서는 카프록시아의 신 모델인 테리아를 동맹국에
수출하고 있사옵니다. 동맹국이 강대해질수록 본국이 전시에 동원할
수 있는 고급 타이탄의 숫자는 중대된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
고 더불어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점차적으로 해체시켜 나가야 할 것
이옵니다. 그렇게 한다면 코린트 자체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능히 군
사적 균형을 이룰수 있을 것이옵니다. "
"그렇다면 경의 말은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치자는 말인가? 그렇게
한다면 코린트가 가만히 있을까?"
"물론 본국이 직접 침공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지
만 타국을 이용한다면 상관이 없을 것이옵니다. 예를 들어서 코린트
의 동맹국인 토리아 왕국을 치는 데 트루비아를 이용한다면 코린트
가 상관할 리가 없을 것이옵니다. 예로부터 코린트는 약소국들 간의
다툼에는 별로 참견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옵니다. "
"트루비아를? 하지만 트루비아의 군사력은 형편없지 않은가?본국
에서 전후에 그들을 독립시켜 주고,그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할
때까지 2개 사단의 병력까지 지원해 줬었지 않는가? 이제 간신히 안
정을유지한국가에 어떻게 타국을 침공할 만한 여력이 있겠는가?'
의아해 하는 황제를 향해 루빈스키 대공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
어 보였다.
"아마도 테리아 4기 정도를 더 보충해 준다면 충분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테리아만 10기가 되옵니다. 거기에 안토로스 급도 2기가
남아 있으니까 토리아를 정복한 후, 새로운 영토의 방어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
테리아는 카프록시아의 수출용 모델이었다. 크라레스는 자국의 타
이탄 증강 작업이 완료된 후 동맹국에도 신형 타이탄을 수출하여 동
맹국들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제작된 것이 카프록시
아7인 테리아였다. 테리아의 외형은 국적 식별이 어렵도록 안토로
스 급 타이탄과 유사하게 만들어졌기에 카프록시아 급들이 가지고
있는 원형의 방패가 아닌 모서리가 각이 진 사각형의 방패를 채택하
고 있었다.
크라레스는 테리아를 자신들의 동맹국이 된 8개 국에 총 16기를 수
출한 상태였고,그 중에서 트루비아 왕국에 6기를 준 상태였다. 미란
국가 연합에는 아직 수출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과거 미란이 크라레
스에 군사 원조를해 준 점과둘째 왕자의 결혼등두나라의 사이가 매
우 친밀해지고 있었기에 조만간수출협약이 체결될 것은분명했다.
"그것 참 좋은 의견이로다. 그렇다면 루빈스키 공은 코린트의 동맹
국들을맡으라"
"옛,폐하."
"그리고 안티노스 후작은 알카사스에서 고성능 엑스시온을 수입할
수 있는지 접촉해 보라."
"옛,폐하."
치레아 대공을 감시하라
"여기야,자 긴장을 풀고 들어가게. 자네한테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니
까 말이야,"
제스터는 상대의 미소 띤 얼굴을 불안한 표정으로 한 번 더 바라본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대단히 호화로우면서도 넓은 방,과거 크라레
스 왕국의 수도였던 크로돈에 있는 왕궁에 비하면 엄청나게 화려했
다. 하지만 제스터는 이런 화려함에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그가 여태
껏 근무하고 있었던 치레아의 대공이 거처하는 궁전도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던 만큼그에 못지 않게 화려했기 때문이다.
방 안에는 화려한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
이 누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포도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다가 제
스터가 들어오는 것을 잔잔한 눈빛으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제
스터가 앉아야 할지 그대로 서 있어야 할지 망설이며 어색한 몸짓을
보이자 포도주 잔을 탁자에 내려 놓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에 앉게나."
황태자비 생신 무도회는 하룻저녁에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낮에는 잠도 보충해야 했고, 또 체력도 비축해 둬야 했다.
제스터는 자신에게 할당된 방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던 도중 난데
없이 칼을 들이미는 괴한에게 끽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끌려왔던 것
이다.
제스터는 일단 상대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희망이 보일 가능성도 있었
다. 그렇기에 제스터는 상대가 앉아 있는 탁자의 반대편에 서서 그의
허리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상대는 무장을 하
고 있었다.
제스터는 일단 상대가 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낸 후,포도주
잔을 쥐고 있는 상대의 손을 슬쩍 바라봤다. 손바닥 부분에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열심히 검술 공부를 한 손이
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제스터는 부하도 없이 자신과 일 대 일로 앉아 있으면서
도 흔들림 없이 자신감 넘치는 눈을 유지하고 있는 상대의 수련 정도
가 상당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을 이쪽으로 납치해
온 인물도 감히 반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였던 점을 생각한다면,
그런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저 인물의 정체가 한편으로는 매우 궁
금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네. 나는 자네를 해치기 위해서 이곳으
로초청한 것이 아니야. 참,내 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겠지?나는
엘리안폰그레지에트라고 한다네."
상대의 말에 제스터의 고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숙여졌다. 그가
여태껏 받아온교육의 성과였다.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황태자 전하. 소신은 제스터 크로스란이
라하옵니다. "
"아아,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치레아 대공의
심복이라지?"
"심복은 아니옵니다,전하. 그냥 시종일 뿐이옵니다. "
제스터의 답변에 황태자는웃음을터뜨리며 호쾌하게 말했다.
"허허,아직 어린 나이인데 벌써부터 겸손의 미덕을 알고 있구먼. 자
네도한잔들겠나?"
"영광이옵니다, 전하."
황태자는 손수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이렇게 자네를 부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해 주게나. 내가자네를 부른 것
은한가지 물어 볼 것이 있기 때문이야."
"무엇이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의 황가(로툰)에 대한 충성심은 어떤
가?"
황태자의 말에 제스터는 망설일 것도 없이 즉시 답했다.
"절대적이옵니다, 전하. 명예로운 기사를 꿈꾸는 저에게 황가에 대
한충성심은 저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이 변함이 없사옵니다. "
"그렇게 말해 주다니 내 마음이 흡족하구먼. 그렇다면 내 한가지 물
어 보겠네, 자네가모시고 있는 대공에 대한 충성심과 황가에 대한 충
성심이 서로 어긋난다면 어느 쪽을 우선으로 하겠는가?'
이 순간,제스터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이 질문을 하는
상대는 황실의 황태자,그렇다면 그 대답은 당연히 상대의 구미에 맞
추는 것이 중요했다. 그에게는 로체스터 공작으로부터 부여받은 임
무가 최우선이었다. 그 임무를 이행하려면 먼저 살아 있어야만 했다.
"당연히 황가이옵니다. 기사에게 있어 충성심은 최고의 덕목이며 선
택의 여지는 없다고배웠고,또그렇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
모범 답안같은 대답에 황태자는 얼굴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대 같은 젊은이들이 있는 한 황실과 크라레스는 영원할 것이야.
내 그대에게 황태자로서 특별히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네. 들어 주겠
나?"
제스터는 황태자의 말이 단순한 '부탁' 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부탁을 거절한다면 어쩌면 행방 불명으로 처리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태자가 그를 비밀리에 이곳으
로 납치해 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다바쳐서라도 명령을따르겠나이다. "
황태자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으로보아 제스터의 말은
상대를 매우 기쁘게 해 준 것 같았다.
"치레아 대공을 감시해 주게. 그리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모두 나에
게 보고하게나."
황태자의 부탁은 제스터를 놀라게 했다. 이 순간 제스터의 머리 속
에는 온갖 가능성들이 줄을 이어 떠오르고 있었다. 황태자가 대공의
감시를 명한다는 것은 대공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아는 한
치레아 대공은 뛰어난무인이었고또 현명한 통치자였다.
만약 그가 코린트의 국민이 아닌 크라레스의 국민이었다면 그녀를
우상과 같이 숭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황실에서 믿지 못한
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했기에 갖은 생각들이 다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얼굴 표정에 드러난 것을 보고 황태자는 씁쓰름한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러는가?"
"솔직히 말씀 드린다면‥‥‥ 너무나 의외의 명령이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물론 명령이시라면 수행하겠사옵니다. "
제스터의 말에 황태자의 표정은환하게 밝아졌다. 원래가 기사들이
라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아주 불합리한
명령이 아니라면 명령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
는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제스터 같은 아직 세파에 찌들지 않은
젊은수련 기사들을자신의 첩자로서 이용하려고 계획한 것이었다.
"고맙네. 그대의 작은 노고가 황실의 안위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
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 준다면 3년 이내로 기사로 책
봉될 수 있도록내가 힘써 보겠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
"아아, 그런 말은 하지 말게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를 위해 힘
써 주었다면 그에 따른보상은 해 줘야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보고는 어떻게 올리면 되겠사옵니까?'
"아,상세한부분은 데이더스 백작에게 지시를 받으면 될 거야."
"예,전하."
"내가 자네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있었군. 데이더스의 보고
로는 애인과 함께 왔다고 하던데,그녀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
면 안 되겠지?"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제스터는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을 납치해 온 기사,즉 데이
더스 백작에게서 보고를하는 방법 외에도 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있었
다. 그러나 제스터로는 아쉽게도 이번 일은 치레아 공작의 신뢰도와
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제스터가 가장 추잡하다고
생각하는 일,즉 황태자의 권력 강화에 관계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태자는 무술 수련을 위해 오랜 시간 크루마에 있었고,또 부인도
크루마에서 얻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황태자의 지지 세력은 매우 미
미한 상태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 정세 덕분에 황태자가 돌아
오지 못할지도 모르기에 이미 두 명의 예비 후보가 책정되었고,교육
도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명의 경쟁자들은 여태
껏 크라레스에 있었던 강점을 살려 저마다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조
금씩 키워 나가고 있는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태자의 입장에서 가장 걸리는 인물들이 바로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 다크 폰 치레아 대공,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 바로 이 세 명이 크라레스 최고의 권력
자들이었다. 당연히 이들이 지지하는 인물이 다음의 황제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는 그 세 중신들의 행보에 관심을
곤두세우게 된 것이었다.
제스터가 나간 후 한참 지나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 왔다.
"들어오게."
"예."
소리를 죽여 조심해서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황태자의 심복인
데이더스였다. 그는 제스터를바래다 준다음즉시 돌아온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는 않았나?"
"예,전하. 조심해서 처리했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사옵니다. "
"좋아, 수고했네."
"감사하옵니다, 전하."
"오늘 저녁쯤 손님이 올 거야. 그들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위험
하니 자네가 그들을 맡아 주겠나?"
"예,전하 "
"그들이 누군지는 나도 잘 몰라. 그것 때문에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
했지. 무크 시에 가면 드래이크라는 여관이 있을 거야. 내일 아침 여
덟 시에 그곳에 가서 포도주와 맥주를 동시에 주문하고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말을 걸 거야. '크라레스의 여름은 정말 덥군요. 그것 때문
에 아침부터 맥주를 드시는 모양이지요?그런데 왜 포도주를 함쩨 드
시는 겁니까? 서로 짝이 맞지 않을 텐데.'하고 상대가 말하면 자네는
'포도주를 마시고 맥주로 입가심을 하면 더위를 덜 탄다고 해서요.'
하고 답하면 돼. 그러면 바로 자기 소개를 할 걸세. 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이름은 워렌이야. 알겠나?"
데이더스는 황태자의 말에서 손님들이 아르곤을 경유하여 입국한
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크 시는동쪽의 아르곤으로 뻗어 있는
넓은 도로가 시작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황태자의 말을 머리
속에 잘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답했다.
"예,전하."
"자네는 그를 데려다가자네 집에 숨겨 놓으면 돼. 이 일은 철저하게
비밀이 지켜져야 해, 잘 해 낼 수 있겠나?"
"예,전하. 최선을다하겠습니다. "
"좋아. 참, 워렌 혼자일 가능성은 없고 아마 동행이 있을 테니 그들
을모두다 태우려면 큰마차를가져가야 할 걸세. 알겠나?"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처남이 보내 오는사람들이니까 실례가 되지 않토록주의하게."
처남이라는 말이 나오자 데이더스는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
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의 처남은 미티 베르키아 백작으로
서 베르키아 후작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그 베르키아 가문은 3루마
에서 알아주는 명문 귀족이었다.
황태자의 처남이 된 미티 베르키아 백작은 황태자가 크루마에 인질
로 잡혀 있을 당시 엘프리안 아카데미에서 사귄 아직 나이 새파란 젊
은이였다. 그렇기에 무술 실력이 그렇게 띨어난 것도 아니었고, 때문
에 관직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높은 직위를 차지하기도 힘들
었다.
하지만 그는 크라레스 제국 황태자의 처남이라는,정치적으로봤을
때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도와 준다고 보
내 오는 사람은 황태자의 처남이 구한 사람이 아닌,미네르바가 파견
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크루마에서도 자신
들과 친한 엘리안 황태자가 황제로 등극한다면 대단한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레스와 크루마 간에 이상한 공기가 감도는 지금, 아무
리 처남이 돕는 것이라고 해도 황태자가 크루마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만약 그것이 발각된다면 최악의 경우
폐위 당할 위험마저도 안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데이
더스는 긴장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옛,전하."
멍청한 드래곤과 한심한 아들
코린트 제국의 새로운 수도 케락스.
코린트 제2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부유했던 상업 도시에 웅장한
황궁이 들어서고 수도 방어를 위한 보병들과 기병, 그리고 기사단들
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그규모가 더욱 비대해지고 있었다.
"3라레스에 대한 최신 정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공작 전하."
로체스터 공작이 총사령관의 자리를 움켜쥔 후,정보부를통괄하게
된 베르딘 후작은 아주 깡마른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삭막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전에 그로체스 공작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보부 때문
에 상당히 고생을 했던 로체스터 공작은 그로체스 공작이 물러난 후
정보부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를 썼고,그 결실로 맺어진 것
이 바로 이 베르딘 후작이었다. 로체스터 옹작은 베르딘의 그 날카로
운 눈을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새로운 것이라도 있는가?"
그러자 베르딘은 즉각 대답했다.
"예,크라레인 시 외곽에 설치되어 있는 군사통제 구역에 대한 집중
적인 조사를 시행해 본 결과 그곳이 스바스(SWAS) 근위 기사단의 훈
련장임이 밝혀졌사옵니다. 아마도 대단히 넓은 면적으로 추리해 보
건대 타이탄 기동 연습장이 아닌가사료되옵니다. "
"그거야 당연하겠지. 그렇게 넓다면 근위 기사단만이 아니라 중앙
기사단의 몇 개 전대가 함께 기동 훈련을 해도충분한 면적이야. 그런
데 왜 그렇게 넓은 곳을근위 기사단혼자만사용하고 있느냐하는 것
이지."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그는고개를숙이며 답했다.
"송구스럽사오나 아직 그것까지는 알아 내지 못했사옵니다. 적의 대
비 태세가 워낙 삼엄하기에 내부에 첩자를 몇 번 침투시켜 보았지만
모두들 실패했사옵니다. "
"그게 수상하다는 말이야. 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은 청기사(Blue
kngh1t). 출력 3.0에 높이 6미터 정도,추정 전투 중량 160톤 내외, 이
상상하기도 힘든 괴물에 대한 데이터는 지난 번 전쟁에서 웬만한 것
은 다 밝혀졌었는데 도대체 윌 더 숨기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안 그
래? 레티안?'
레티안이라는 이 아름다운 중년의 여 마법사는 2년 전에 로체스터
공작의 부관이자 상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엄청난 암기력과
뛰어난 판단력은 로체스터 공작에게 대단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레
티안은 로체스터 공작의 질문에 즉각 대답했다.
"아직 청기사의 숫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사옵니다. 혹
시 그것을숨기려고그 난리를 떠는 것일까요?"
"글쎄, 청기사의 숫자는 대략 3기에서 14기 정도겠지. 두 명의 대공
들이 1기씩 가지고 있을 거고, 명색이 근위 타이탄인데 근위 기사단
단장이 1기는 가지고 있을 것 아닌가? 스바스 근위대가 열두 명의 오
너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는 상태니까 최대로 잡
아 봐야 14기겠지.
그런데 겨우 그 숫자를 숨기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 보안이 너
무 과도하다 이 말이야. 본국의 최신형 적기사ll의 경우에도 그 정도
로 보안을 신경 쓰지는 않고 있지 않나? 어느 나라가 근위 타이탄의
훈련장까지 통제하면서 보안을 유지하느냐 이 말일세. 사실 타이탄
이라는 것은 조종술만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더 이상 타이탄에 탑승
하고 훈련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일종의 거대화된 갑옷 이상의 의
미가 없다고 봐야지. 그래서 그런 훈련 모습따위를통제하고 있는 그
놈들이 더욱수상하게 생각되고 있는 거라네."
"전하의 말씀이 옳으시옵니다. "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하는 레티안에게 미소를보낸 후로체스
터 공작은 장교에게로 시선을돌렸다.
"참,그 외에는 없나?"
"물론 더 있사옵니다. 크라레스의 왕자가 미란에 파견된 것 같사옵
니다.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아마도 정략 결흔을 통해 양국 간의 우
의를 더욱다지기 위해서가 아닌가사료되옵니다. "
"뭐? 놀라운 소식이군. 그 사실을 안다면 크루마에서 가만히 있지 않
을 텐데‥‥‥‥
로체스터 공작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용할까 맹렬하게 머리를 회전
시켰다. 분명히 이번 일로 인해서 크라레스와 미란,그리고 크루마는
미묘한 갈등 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크루마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저회 쪽에
서도 수많은 단편적인 정보들을종합해서 내린 결론이니까요."
"그래,왕자의 호위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기사 세 명에 시녀가 한 명 정도인 것으로 보고받았사옵니다. 현재
조사중인데 모두들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지 않은 관계로 자세한 자
료를 얻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사옵니다. "
"크라레스의 기사들은 왜 전쟁의 신전에 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
군. 그 녀석들은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지?"
"그러게 말이옵니다,전하."
"미란과 크라레스가 혈맹을 맺는다고 하면 본국에 문제가 될 것이
있을까?"
공작의 물음에 레티안은잠시 생각을 정리한후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본국에는 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옵니다. 대신 크루마에는
상당한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레티안의 의견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공작은 베르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그렇다면 크루마에다가 넌지시 이 사실을 알려 주게나. 미란
내에서 크라레스와 3루마가 한판 붙는다면 아주 재미있게 될지도
모르지. 아마도 왕자의 호위들이니까 어쩌면 근위 기사들이 투입되
었을 거야. 이 기회에 스바스 근위대의 실력이 어떤지 알아 볼 수도
있지 않겠나? 그리고 크루마에 조금의 빛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겠
지 ."
"예,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스테노 네르갈은 이제 두 번째로 마법진 앞에 서서 3라레스에서
오는 귀빈을 마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사 단장은 이미 크라레스에
서 오는 인물들에 대한 비밀을 대충이나마 눈치 채고 있는 스테노에
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있었다. 전에 왕자가 을 때도 그렇게 단단한 다
짐을 받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도착하는 인물은 도대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마중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테노는 이번에 올 인물이 누군지,또 그 수행원들
은 누가 될지 매우궁금해 하며 기다리는중이었다.
이윽고 마법진이 뿌옇게 빛나는 순간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숙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스테노는잠시 멍한상태에 빠
졌다. 남장을 한 여성이 호위 무사를 한 명도 거느리지 않고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해서
멋진 환영의 인사말을 건넸다.
"미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스테노는 레이디에 대한 인사법이 그러하듯 다가가서 그녀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녀가 손을 내밀면 손등에 키스하려고 하
는 것이다.
"다크는 어디 있지?"
순간스테노는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아니 그는 남자였다.
목소리가 굵직한‥‥‥‥
"예? 다크라니요? 아‥‥‥‥ 먼저 크라레스에서 도착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신 토양이군요. 그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
시오."
스테노는그 미모의 남자를 한참 맞선이 진행중인 대저택으로 안내
했다. 그곳에는 왕자와 그 호위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다크라
는 인물이 그곳에 있을가능성이 가장높았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스테노의 안내를 받아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팔시온은 재빨리 일어서서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
다. 예전에야 덜떨어진 아르티어스가 오건 말건 별 신경도 쓰지 않았
을 팔시온이었지만, 다크의 실종 사건 때 아르티어스의 참모습을 본
후에도그럴 만한 배짱은 없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아르티어스 님."
"흐음‥‥‥‥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약간의 노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세 명의 죄인
을 쭉 훌어봤다. 아르티어스의 눈길을 받은 팔시온과 그 일행들은 이
번 여행 자체가 아르티어스를 따돌린 행동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기에 표정을 태연하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중이기는 했지만 속으로
는 엄청나게 켕기고 있었다.
"네 녀석들이 감히 나를 빼고 여행을 떠나?"
아르티어스가 눈을 부라리고 말하자 팔시온이 급히 변명을 시작했
다. 하지만그 변명의 대부분은자신들의 잘못은 아예 없고모든 죄는
다크에게 있다는 팔밀이성 발언이얼다.
"그건 절대로, 엄청난, 말도 안 되는 오해십니다요, 아르티어스 님.
저희들은 아르티어스 님과 함께 가자고 전하께 말씀 드렸지만 전하
께서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전하의 그 고집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
니까?그 분의 뜻을 저희들이 어떻게 꺾을 수 있겠습니까?그런 일로
저희를 닦달하신다면 정말이지 억울합니다요."
팔시온이 꾸미는 게 뭔지를 눈치 챈 미디아도 재빨리 끼여 들었다.
"팔시온의 말이 맞습니다, 아르티어스 님. 전하께서 그냥 가자고 하
겼다니까요. 저희들에게는 죄가 없다구요."
일행들은 그때부터 이구동성으로 모든 죄를 다크에게 뒤집어씌우
기에 급급했다. 물론 이 일로 인해 다크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간다면
모르지만, 아르티 어스도 다크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한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기에 아르티어스의 로든 분노는 다크에게로 덮어씌우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 네 명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스테노는 정신이 어지럽다는 것
을느꼈다. 원래가 기사도라는 것은 충성을 최고의 목표로 한다. 그런
데 여태껏 매우 사내답다고 여겨 왔던 이 치레아 기사단의 기사들이
모든 것을 상관에게,그것도 전하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저쪽에서
숙녀에게 더듬거리며 말을 건네고 있는 덜떨어진 왕자에게 다 뒤집
어씌우는 것을보고 매우큰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얘는 어디 있냐?"
"전하께서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떠넘기시고 저쪽에서 낮잠을 주무
시고 계십니다."
팔시온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돌리자금발을축늘어뜨린 소녀
가 옆에 과일과 술병을 두고 잔디밭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그 모습을 보고 불현듯 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
신은 그녀를 그렇게 걱정해서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쏜살같이 달
려왔건만, 정작 그 당사자는 토지에르의 말대로 저렇듯 평화로운 표
정으로 낮잠에 빠져 있는 것을보자속이 뒤집혔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얄미운 낮짝을 한 대 때려 주려고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그 기세가 너무 맹렬했던 탓인지 그
가 채 주먹으로 꽁 쥐어박기도 전에 다크의 눈이 살짝 떠져 버렸다.
다크의 눈이 떠지는 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헛바람을 삼키며 앞으
로 뻗어 나가던 자신의 손을급히 멈췄다.
"어라? 여기에는 웬일이에요?그리고 아빠 지금 뭘 하는 거예요?"
"에? 엑! 뭐 하기는, 잠자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조금 쓰다듬
어 주려고‥‥‥‥"
"요즘은주먹 쥐고쓰다듬어 줘요?"
"에에‥‥‥‥ 처음부터 손을 펴서 머리까지 보내는 것보다 주먹을 쥔
편이 공기 저항을 덜 받지 않니? 조금이라도 힘을 절약하는 삶의 지혜
때문이지, 허허허!"
말도 안 되는 변명과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슬쩍
의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다크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로 했다 자신에게도 죄가 있는 만큼 괜히 그런 사소한 일을 따지고
들어가봐야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아
르티어스의 자신에 대한 공격을 원천 봉쇄할 무슨 방법이 없는지 열
심히 머리를굴리기 시작했다.
"아빠까지 이리로 와 버리면 어떻게 해요?제가 없으면 아빠가 공
국을 다스려야 할 거 아니에요?아빠만 믿고 황제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 리로 왔는데‥‥‥‥"
슬쩍 넘겨 버리는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질책하려고 여
기까지 쫓아온 것도 잊어 버리고는,자신이 아들의 믿음을 저버린 것
같은 양심의 가책을느끼며 황급히 얼버무렸다.
"네가보고 싶어서 그만‥‥‥‥그리고 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공국은 어 떻게 하고 오신 거 예요?"
다크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슬쩍 그녀의 '오른팔' 에게 팔밀이를
했다.
"내가 없어도,카슬레이 녀석 혼자서 잘 할 텐데 뭘."
"혼자서 잘 하기는 뭘 잘 해요? 그 녀석은 부하라구요. 치레아 공국
이 저 혼자만의 나라인가요? 아빠의 나라기도 하다구요. 왜 그렇게
'주인 의식' 이 없어요? 제가 없는 동안에는 아빠가 이끌어 나가야 할
거 아니에요?"
"미안하구나. 그럼 나는 돌아갈까?'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하는 아르티어스를 보고 다크도 조금은 양심
이라는 것이 있어 약간은 어리광스런 말투로 말했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좀 쉬시다가 가시죠「'
"헤헤헤,그럴까?'
아들의 쉬고 가라는 그 말이 그렇게도 좋고 고마운지, 여기에 왜 왔
는지 그것조차도 망각하고 히죽거리는 아르티어스를 보며 팔시온과
그동료들은 황당한 표정으로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한방 먹일 기
세로 달려가더니만‥‥‥
한편 이들의 말을 옆에서 들으면서 스테노의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있었다. 분명히 이들은 '전하' 라는 인물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었고,소녀의 말에 따르면 '치레아'를 자기 대신에 이 붉은 머리
의 미남이 다스려야 한다고하지 않던가?그렇다면 저 소녀가?
스테노는 슬쩍 미카엘을 꾹 찌르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혹시,저 분께서 치레아 대공 전하십니까?"
스테노는 상대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며 머리 속이 온통 하
얗게 탈색되는 것을느꼈다. 그도그릴 것이 자신이 여태껏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치레아 대공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코린
트가 자랑하던 최고의 기사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패배시킨 이 시대
최강의 고수,그리고 20기의 고성능 타이탄으로 구성된 개인 기사단
까지 가지고 있다면 웬만한 국·가의 국왕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쥐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인물이 저런 새파란소녀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외감도 며칠 가지는 못했다. 왕자의 호위는
됫전이고 크라레스에서 온 절대로 아버지같이 보이지 않는 인물과
히히덕거린다고 거의 모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소녀를 봤을 때 스
테노의 눈에는서서히 불신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저들은 뭘 하는 놈들인고
"빙고! 저 녀석이 틀림없어?"
망원경을 통해 상대를 차근차근 관찰하던 스펜 안트리아는 이윽고
확신을 가진 듯 외쳤다.
"정말이야?"
아더 존슨의 물음에 스펜은 자신의 품 속에 소중히 가지고 온 초상
화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래,바로 저 녀석이야. 여기 있는 이 초상화에 그려진 그 놈이 확
실해 ."
"좋았어. 이제 목표물은 찾았고,호위의 규모는?'
아더의 물음에 스펜은 다시금 망원경으로 살펴보며 말했다.
"가만있자‥‥‥ 옳지! 저기 나무 밑 그늘에 모두 모여 있군. 하나,둘,
셋,넷‥‥‥ 모두 네 명이야."
"모두 네 명밖에 안 된다고?뭔가 이상하지 않아?왕자의 호위인 데
다가, 정략 결흔의 중요성을 따져 본다면 저건 너무 적어. 만약 이 사
실이 외부에 새어 나간다면 본국에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으려고 ,
들 거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을 텐데,겨우 네 명이
라‥‥‥ 이봐,기므에. 저 녀석들의 신분을조사해 봐."
아더의 명령올들은마법사가스펜에게 말했다.
"예. 망원경을 좀 주십시오."
"여기 있네. 호위들은바로 저 나무 밑에 있어."
"예."
기므에는 망원경을 건네 받은 후 호위 기사들의 생김새를 열심히
기억했다. 그런 후본국에 그들의 모습을 전송했다. 이제 조금만 기다
리면 본국의 마법사들이 그들의 신분이나 실력 등을 조사해 그 결과
를 전송해 줄 것이다.
잠시 후 수정 구슬에 기사 한 명의 얼굴이 나타나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름은 스테노 네르갈. 라이오네 기사단 소속 기사. 8년 전 그래듀
에이트 자격 취득. 제국 전쟁 후 라이오네 기사 임명. 전체적인 데이
터에 따르면 본국의 수준으로 봤을 때 간신히 1류 정도에 편입될 수
있는 실력인 것 같습니다. "
그런 후 수정 구슬에는 두 번째 기사의 영상이 떠야 함에도 곧장 마
법사의 모습으로 바픽 었다.
"방금 말씀 드린 스테노 외에 다른 사람은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크라레스의 기사들 중에서 구 유령 기사단 소속의 기
사들은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쟁
이 끝난 후에토 그들은 여전히 등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감안
한다면 저들은 아마도 근위 기사급에 가까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구 유령 기사단 소속의 기사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크라레스
유령 기사단 소속 기사들의 실력은 이미 6년 전에 입증되었으니까 말
입니다. "
수정 구슬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더는 스펜
에게 말했다.
"흐음, 근위 기사급 세 명에 라이오네 한 명이라. 그야 당연하겠지.
상대는 크라레스의 왕자니까 근위 기사들이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크
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놈들의 타이탄은 카프록시아인가? 아니면
그 괴물 같은 청기사?"
청기사라는 말이 나오자스펜은 신중하게 생각한 후 말했다
"청기사라면 중원을 좀더 요청해야 해. 안티고네 다섯 대 가지고 덤
비기에는좀무리가 있지 않을까?"
"좋아,안전하게 나가자구. 기므에,중원을 요청해. 안티고네 5기 정
도를 더 불러들인다면 어느 정도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건 모르지 우리는 그때 병원에 있었으니까 청기사가 어떤 타이
탄인지 모르잖아? 기므에, 청기사 3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지원
을 요청한다고 해. 그렇게 하면 그에 따른 전력 평가는 본국에서 해
주겠지,"
"알겠습니다. "
기므에가 또다시 본국에 통신을 시도하고 있을 때, 아더는 다시금
상대편 기사들을 망원경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로 보기 시작하자 그 당당한 덩치라든지 말쑥한 외모 등등
상대가 매우강인하고 실력 있는 기사들로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들이 그렇게 뛰어난 기사들이라 이 말이지?초록 도마뱀 작
전에서 뛴 이후 다시금 만나보는 좋은 적수들이구먼‥‥‥‥ 그런데,으
응?저 미인들은또누구지?우와,정말 예쁘게 생겼는데?"
"뭐야?나도 한번 보자."
스펜의 채근에도 아더는 망원경을 넘기지 않았다. 망원경에 비치는
그 모습들이 정말 대단한 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미인들이군. 저 녀석들 여자 친구들쯤 되나?그런데 저 금
발‥‥‥‥상당히 낮이 익지 않아?'
"뭐? 이리 줘 봐."
스펜은 망원경을 받아 들고 찬찬히 살펴본 다음 고개를 끄덕거 렸다.
"가만있자‥‥‥ 그러네. 상당히 낮이 익어. 저 짱딸막한 검이나‥‥‥
맞아!초록 도마뱀 작전 때 만났었던 그 마법사소녀 ,7'
스펜의 말에 아더가 이제서야 기억 난다는듯주절거렸다.
"그래,바로그녀야. 그런데,죽은줄 알았었는데‥‥‥‥
"그런데 이상하네. 그 작전은 크라레스와는 무관했었는데, 어떻게
저 소녀가 크라레스의 인물들과 어울리고 있지?아니면 미란과 관계
가 있는 건가?"
"글쎄‥‥‥‥"
"하기야 뭐,저 소녀가 한 명 더 끼여 있다고 해도 바필 것은 없을 테
니7가‥‥‥‥"
"그래도 보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지,뭐. 이봐,기므에."
"예?'
"통신이 개통되었으면 저기 있는 소녀하고 그 일행도 함께 보고해.
크라레스 쪽인지 미란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근위대하고 함께
있는 것을보면 아마도 어느 쪽의 근위대 소속 마법사들일 테니 좨 실
력이 있다고 봐야 하겠지."
"알겠습니다. "
하지만 기므에가 보고를 올린 후 얼마 안 있어서 온 답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하라는 지시 입니다. "
상대방 마법사의 말에 기가 막힌 아더는 기므에를 옆으로 밀치고
수정 구슬에 나타난 마법사에게 직접 따지고들었다.
"뭐라고?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하라고?"
아더의 물음에 수정 구슬 속에 비춰지고 있는 노 마법사는 간단하
게 답했다.
"예."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봐. 자네가뭔가 잘못 전달받은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
마법사가 수정 구슬에서 모습을 감추고 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자
이번에는 화려한 복장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더는 상대가 누
군지 즉시 알아보고는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셨습니까? 바르데 각하."
"그래, 타국까지 파견되어 작전하느라 수고가 많았네. 전달은 이미
받았겠지만 내가 다시 한 번 더 명령하지. 작전을 중지하고 복귀하
라."
"하지만 적의 호위 규모는 매우 적습니다. 본국 기사단을 몇 시간 내
상대가 매우강인하고실력 있는 기사들로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들이 그렇게 뛰어난 기사들이라 이 말이지?초록 도마뱀 작
전에서 뛴 이후 다시금 만나 보는좋은 적수들이구먼‥‥‥‥ 그런데,으
응?저 미인들은또누구지?우와,정말 예쁘게 생겼는데?"
"뭐야? 나도 한번 보자."
스펜의 채근에도 아더는 망원경을 넘기지 않았다 망원경에 비치는
그 모습들이 정말 대단한 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미인들이군. 저 녀석들 여자 친구들쯤 되나?그런데 저 금
발‥‥‥‥상당히 낮이 익지 않아?"
"뭐? 이리 줘 봐,"
스펜은 망원경을 받아 들고 찬찬히 살펴본 다음 고개를 끄덕거 렸다.
"가만있자‥‥‥ 그러네. 상당히 낮이 익어. 저 짱딸막한 검이나‥‥‥
맞아!초록 도마뱀 작전 때 만났었던 그 마법사소녀 ?'
스펜의 말에 아더가 이제서야 기억 난다는듯주절거렸다.
"그래,바로그녀야, 그런데,죽은줄 알았었는데‥‥‥‥"
"그런데 이상하네. 그 작전은 크라레스와는 무관했었는데, 어떻게
저 소녀가 크라레스의 인물들과 어울리고 있지?아니면 미란과 관계
가 있는 건가?"
"글쎄‥‥‥‥"
"하기야 뭐,저 소녀가 한 명 더 끼여 있다고 해도 바필 것은 없을 테
니까‥‥‥"
"그래도 보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지,뭐. 이봐,기므에."
"예?'
"통신이 개통되었으면 저기 있는 소녀하고 그 일행도 함께 보고해.
크라레스 쪽인지 미란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근위대하고 함께
있는 것을보면 아마도 어느 쪽의 근위대 소속 마법사들일 테니 쫴 실
력이 있다고 봐야 하겠지."
"알겠습니다. "
하지만 기므에가 보고를 올린 후 얼마 안 있어서 온 답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하라는 지시 입니다. "
상대방 마법사의 말에 기가 막힌 아더는 기므에를 옆으로 밀치고
수정 구슬에 나타난 마법사에게 직접 따지고 들었다.
"뭐라고?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하라고?'
아더의 물음에 수정 구슬 속에 비춰지고 있는 노 마법사는 간단하
게 답했다.
"예."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봐. 자네가 뭔가 잘못 전달받은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
마법사가 수정 구슬에서 모습을 감추고 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자
이번에는 화려한 복장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더는 상대가 누
군지 즉시 알아보고는 인사를올렸다.
"안녕하셨습니까?바르데 각하."
"그래, 타국까지 파견되어 작전하느라 수고가 많았네. 전달은 이미
받았겠지만 내가 다시 한 번 더 명령하지. 작전을 중지하고 복귀하
라."
"하지만 적의 호위 규모는 매우 적습니다. 본국 기사단을 몇 시간 내
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증원을 보내 주시
"면‥‥‥‥
"자네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군 "
"예?'
"크라레스는 신홍 제국이기는 하지만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
고 있다. 그런 나라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미란과의 정략
결혼에 겨우호위 기사 몇 명만을보낼 것으로 생각했나?"
"하지만 정말 몇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안티고네 10기만 있어도 금
방 해치운다음 철수할수 있을 겁니다. "
"10기가 아니라 40기 모두 다 보낸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 "
"예?"
"자네의 보고대로라면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근위 기사단이
아니라 치레아 기사단이다. 그것도 치레아 대공 자신이 직접 인솔하
고 있는‥‥‥‥
"치레아 대공이라면‥‥‥‥"
"그래,바로 그 크라레스 최고의 무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
를 도와주는 드래곤까지 함께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이 나을
수가 없어. 잔말 말고 빨리 철수해라."
이제 더 이상수정 구슬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더와 스
펜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물론 크라레스에 있는 엄
청난 검객에 대해서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지겹도록 그 소문을 들었
었다. 그런데 그소문의 당사자가바로 저기에 있다는 것이다.
'망원경 다시 한 번 줘 봐."
하지만 아더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스펜이 먼저 망원경으로
그쪽을 관찰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가 치레아 대공이지?맞아, 바로 저기 있는 덩치 좋은 여 기사인
가?치레아 대공은 여자라고 들었으니까 말이야. 정말 대단한 근육질
이군."
"나도 좀 보자."
아더는스펜에게서 망원경을 뺏어 든 후 아래쪽을 살피며 감탄사를
뱉었다.
"그래,정말 한가닥 하게 생겼군 그래. 저 우락부락한 근육질 좀 봐.
엄청나게 수련을 한 여자인 모양인데?그런데 드래곤은 어디 있는 거
지?"
"아마 사람으로 트랜스포메이션 하고 있는 모양이지, 에‥‥‥ 저 중
에서 드래곤이 변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저쪽에 있는 키 큰 빨강 머
리 미녀밖에 없잖아.사람이라고하기에는 너무 예쁘니까말이야."
"앞으로는 저 두 녀석을 잘 기억해 둬야겠군. 자, 철수하자. 여기 오
랫동안 있어 봐야좋을 것 없으니까말이야."
바르데 후작은 아더에게 작전 중지를 지시한후 급히 미네르바에게
로 향했다. 미네르바가총사령관이었기에 그녀에게 이번에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한 후 다시금 지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보고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
"무슨 일인가?"
"예,치레아 대공이 드래곤과 합께 미란에 나타났사옵니다. "
"미란에?그렇다면 왕자의 호위로 말인가?'
"예, 그것을 알아 내는 즉시 작전을 중지시켰사옵니다. "
미네르바는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치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
야 했다. 미란과 크라레스의 밀착이 강화될수록 크루마에는 불리했
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고 했는데,막을 가능성이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를 애꿎은 부하에게 터뜨려 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될 뿐‥‥‥‥ 그래서 미네르바는 초인적
인 인내심으로 우선 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자,잘 했군. 그래,옳은 선택이었어. 그건 그렇고, 이렇게 된다면 크
라레스와 미란의 관계가 더욱 밀착될 텐데‥‥‥‥ 이제 어떻게 하는 것
이 좋을까?"
"일단은 뒤로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을듯하옵니다. "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녀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기에, 무심결에
그녀의 목소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지켜본다고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전하,크라레스가 계속 힘을 키워 오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코린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옵니다. 또 본국의 경우 코린트라는
든든한 방파제가 있사옵니다. 만약 크라레스 황제가 욕심을 부린다
고 하더라도 우선은 코린트와 충돌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
다. "
"그러니까 경의 말은크라레스가 먼저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리자
는 것인가?"
"예, 전하. 만약 코린트와 크라레스가 정면 충돌을 벌인다면 그때를
이용해서 미란을 박살 내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아무리 크라레스
가 힘이 강하다고 해도 코린트와 맞붙게 된다면 미란으로 돌릴 여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일단 가루가 되어 버린 후라면 크
라레스도 비빌 언덕이 없으니 미란 방면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
"하지만 록 코린트와 크라레스가 충돌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시간을 주게 된다면 오히려 미란파 크라레스의 관계만 더욱 단단해
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옵니다. 지금크라레스사단들이 움직이고 있사옵
니다. "
"어떻게 말인가?"
"2개 사단급 병력이 크로나사 북서쪽으로 이동중이옵니다. 얼핏 본
다면 코린트의 스웨인 지방에 대한 대비 태세를 더욱 강화하는 듯 보
이겠지만,토리아 왕국이나 트루비아 왕국으로 그 병력을 움직일 수
도 있다고봐야할 것이옵니다.
6년 전 크라레스는 트루비아가 해방된 후 안정을 찾을 때까지 1개
사단의 병력을 빌려 줬던 예가 있었사옵니다. 그만큼 트루비아와 크
라레스는 친밀하기에 그들이 트루비아 왕국을 수비하기 위한 목적으
로 그 병력을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것이 토리아 왕
국을 병합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면 코린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
"그러니까 자네 말은 그 병력이 어디로 갈 것인지가 확실해진 후에
작전을 세워 보자 이 말이로군."
"옛,전하."
"자네 의견을 참고하도록하겠네. 이만가보게나."
"옛."
정보관인 바르데 후작이 나가고나자 미네르바는 지도를 향해 시선
을돌렸다
"왜 서북쪽으로 2개 사단을 이동시킨 것일까?크라레스의 서북쪽에
는 이미 3개 사단이 주둔중인데,추가로 2개 사단이나 더 투입하는 이
유가 뭐지?"
크라레스의 2개 사단이 움직이고 있는 것, 이것은 통상적으로 벌어
지는 사단의 위치 변경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바르데의 말대로 트루
비아나 토리아 쪽으로 이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3
국 전쟁이 끝난 후 패전국이 되어 버린 코린트를 이상하게도 열심히
지원하고 있는 마도 왕국 알카사스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카사스에 직접적인 위협을 주려면,코린트와 알카사스의
동맹국인 토리아 왕국을 치는 것보다 엔테미어 공국 쪽으로 병력을
돌리는 것이 더 쵸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엔테미어 공국은 마도 왕국
알카사스가 대제국 코린트와 국경선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독립시킨
완충 지대였다. 그리고 엔테미어 공국을 다스리고 있는 미카엘 엔테
미어 대공은 코린트와 알카사스 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역할을 훌릉
하게 해 냈었다.
미카엘 엔테미어 대공은상당히 뛰어난 외교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
다. 크라레스가크로나사 평원을 집어 삼켰을 때 제일 먼저 축하사절
을 보낸 인물이 그였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는 크라레스와 매우 친하
게 지내려고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고,그 덕분인지 크라레스 제국은
엔테미어 공국과의 국경선에 단 1개의 사단도투입하지 않고 있었다.
"흐음, 크라레스가 알카사스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엔테미어 공국
쪽으로 병력을 돌릴 가능성도 있겠어. 그렇게 되면 코린트와는 아무
런 관계가 없잖아!그리고 놈들이 행동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자니,
빌어먹을! 서서히 크라레스가 본국의 목을 조르고 있는데 가만히 참
고만 있으라는 것인가!"
미네르바가 미란과크라레스의 밀착을 저지하지 못한 것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미란은 크루마의 영토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국
가. 유사시에 군대의 이동을 해야만 할 때 미란이 크루마군대의 자국
영토 이동을 거절한다면,매우 심각한사태에 처하게 될 수 있었다.
미란이 길을 막는다면 크루마의 군대는 마법진을 통해 이동하든지,
아니면 오실롯 왕국과 아르곤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
실롯 왕국이나 아르곤은 둘 다 중립국이었기에 타국 군대의 이동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마법진밖에 없는데,그것을 이용해서 대량의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것은 매우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크라레스는
미란이라는 동맹국을 만듦으로 인해 3루마의 목줄기를 꽉꽉 죌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미네르바는 이리저리 궁리해 봐도 좋은 방법이 없자, 옆에 있던 물
잔을 잡고는 힘껏 바닥에 패대기쳐 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잔
이 깨져 버린 후 씩씩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미네르바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사태를 타개할 방법을 의논할 만한 상대가 필요했
던 것이다.
"여봐라."
"옛,전하."
"지오그네한테 급히 오라고 일러라, 그리고 시녀보고 방을 청소하라
일러라."
"옛,전하."
대답이 들려 온후곧이어 시녀가 들어와서는 미네르바의 집무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는 시녀가 청소하고 있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보며 이 궁리 저 궁리 하며 지오그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
윽고 밖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들려 왔다.
"마리나 지오그네 후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사옵니다. 공작 전하."
경비병의 말에 미네르바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들라고 해라."
"옛 ?'
미네르바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오그네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
했다. 미네르바는 미란과 크라레스의 관계가 밀착되는 것에 대해 엄
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에
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크라레스가본국이 싫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 미란과 밀착하기 시작
했어. 그 둘이 결혼을 통해 연합을 공고히 하면 더욱 손 대기가 껄끄
러워질 거야. 그래서 말인데‥‥‥ 점점 안하무인으로 콧대가 높아지
고 있는 크라레스의 힘을 조금은 감소시켜 둘 필요성이 있겠어. 그렇
지 않으면 크라레스의 세력은 점점 더 커질 것이고,미란을 통해 본국
에 직접적인 압력을가해 올 것이 당연해."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 궁금한 듯 물었다.
"예 ? 하지만 어 떻게 ‥‥‥‥"
"워렌에게 연락해라."
워렌이라는 말에 지오그네는고개를끄덕이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뭐라고 하면 되겠사옵니까?"
"토지에르를 암살하라, 그는 크라레스의 기등이야. 그가 없어진다
면 크라레스의 힘은 엄청나게 감소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전에도 몇
번 시도를 해 봤지만,그에 대한 경호가 워낙 치밀한 데다가 그 자신
이 뛰어난마법사다보니 틈을 찾을수 없었지.
하지만 엘리안 황태자가 협조해 준다면 가능성이 있어. 토지에르만
사라져 준다면 미란 정도와는 동맹이 아니라, 서로 통합된다고 해도
무서을 것이 없다고 봐야겠지. 아마도 토지에르가 죽는다면 그의 뒤
를 잇기 위해 마법사들끼리의 권력 쟁탈전이 벌어질 게 분명해. 제1
마법사의 자리는 각국 궁전 마법사들의 꿈이니까 말이야. 또,그렇게
해서 뒤를 잇는 마법사가 잇다고 하더라도 여태까지 모은 정보에 의
하면 토지에르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없으니 한동안은 크라레스가 잠
잠해질 거야. 어떤가?내 생각이?"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주좋은 계책이시옵니다,전하."
"그래?그렇다면 워렌에게 실수 없이 처리하라 일러라."
"옛,전하."
난폭한 습격자
엘리안 황태자는 지금 데이더스의 저택에 와 있었다. 크루마에서
도착한 손님이 그와 만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엘리안 황태자는 자신
을 따르는 기사 몇 명만을 대동하고 조용히 데이더스의 저택으로 갔
다. 그런 후 기사들에게는 데이더스와 비밀스럽게 의논할 것이 있으
니 저택 밖을 경비하라고 이르고 저택 안으로는 혼자만 들어갔다. 데
이더스는 황태자를 자신의 지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황
태자와 만나기를 원하는 인물이 짙은 녹색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채
음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워렌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질문을 들은 엘리안 황태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황위를 계승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
람이 누구냐 이건가?"
"예,전하."
"글쎄‥‥‥‥ 그것을 묻는 저의가 뭔가?"
"현재 크라레스는 세 명의 공작들이 이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
닐 것이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등에 엎을 수 있다면 전하께서 황제
로 등극하시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크루마에 오랜 시간 와 계셨
기에 전하의 지지 기반은 매우 미약한 상태이옵니다. 미네르바 전하
쩨서도 이 점 때문에 심히 우려하고 계시옵니다. 이런 때는 전하를 밀
어 줄 강력한 존재가 필수적이옵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없다면 걸
림돌들을 차례차례 없애 나가야 하지요. 현재 전하를 밀어 줄 인물이
세 명의 공작들중에 있사옵니까?"
엘리안 황태자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흐음. 경의 말에 일리가 있구먼. 아마도 그들 중에서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은 루빈스키 아저씨뿐일 거야. 루빈스키 아저씨는 내가 크루
마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지. 하지만
아저씨 혼자서만 나를 도와 준다고 될 일이 아니지. 토지에르 영감은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상당히 싫어하거든. 그리고 치레아 경의
경우는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으니 얼굴도 못 봤지만,들
리는 얘기를 종합해 본 결과 그녀는 아예 황위 계승권 자체에 관심이
없는듯보이더군."
엘리안의 말에 워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를 궁리하는 듯하더
니 이윽고 결심한듯 말했다.
"그렇다면 토지에르 영감만 없어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그
렇지 않사옵니까? 한 사람은 중립이고 한 사람은 전하를 밀고 있사옵
니다. 그러니 토지에르 영감만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옵
니다. "
"하지만그를 어떻게 제거한단 말인가?나도 많이 생각해 봤지만,그
에게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뒤집어씌워 물러나게 만들 수는 없어. 그
에 대한 아버님의 신뢰는 절대적이야. 서로를 이간질한다는 것은 불
가능해."
"흐흐흐,전하. 제가 언제 이간질하자고 했사옵니까?"
워렌은 음산하게 웃으며 물었다. 엘리안이 조용히 앉아 있자 그는
힘이 깃들인 음성으로 됫말을 이었다.
"제거하자고 했습지요.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옵니다. "
"과연 그게 가능할까?그에게 엄청난 호위들이 붙어 있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자신도 6사이클을 마스터한 마법사라구 나에게 혐의가 오
지 않도록 없애 버릴 수 있었다면 내가 벌써 했겠지."
"흐흐흐, 전하. 전하와 제가 힘을 합친다면 그것도 결코 불가능한 것
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조금만 도와 주신다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
니지요."
"어떻게 도와 주면 되겠는가?"
"토지에르를 한적한 곳으로유인해 주시옵소서. 대신 전하의 이름이
나오면 안 되고,또 호위의 규모가 커서도 아니 되옵니다. 그가 절대
로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하려면 그것이 필수 조건이옵니다. 그것만
해 주신다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사옵니다. "
"으음‥‥‥ 힘든주문이로군.시간을좀주게나,좋은방법이 없을지
데이더스와 의논해 보찬네."
"옛,전하."
"휴우‥‥‥‥"
토지에르는짜중섞인 한숨을 내쉰 후투덜거렸다.
'바빠 죽겠는데 왜 오라는 것이지?"
아침에 루빈스키 대공의 밑에 있던 수련 기사가 달려와서, 대공이
그와 상의할 중요한 사안이 있으니 근위대의 타이탄 기동 연습장으
로 급히 오시라고 하더라는 연락이 왔다고 전했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근위대 훈련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만 있으면 기
동 연습장으로 달려갔었다. 그러다가 적기사의 신 모델이 완성되었
다는 정보가 들어온 후부터는 아예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렇기에 토지에르는 루빈스키 시종의 말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
들이고는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토지에르의 마차 주위에는 네 명의 경호 기병이 호위하고 있었고,
토지에르의 마차 안에는 그래듀에이트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물론 이
것은 공작이라는 그의 신분에 따른 통상적인 경호였다. 그렇기에 경
호병들도 경무장이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 또한 달랑 검만을 허
리에 차고 있는 정도였다.
"젠장,기동 연습장에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둬야 하겠군.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무리가 있더라도 이동 마법진으로 가는 것인데 잘못
했어. 헤드필드 경,도착하려면 아직도 멀었나?'
토지에르의 짜중 섞인 물음에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중년의 기사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40분 후면 도착할 것이옵너다, 전하."
크라레스근위대의 기동 연습장은보안상 워낙 외진 곳에 건설했기
에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토지에르가 투
덜거리는 가운데 마차는 어느덧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마차가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군 "
"산길을 달려가는 것이니까 어쨀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고 잘 포장
하여 훈련장이 어디 있는지 광고할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헤드필드의 말에 토지에르는 빠른 시일 내에 꼭 이동 마법진을 설
치하고야 말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기사들이야 숙련된 승마 실력
이 있을 테니 운동을 겸해서 달려오겠지만 마법사들에게 이 길은 너
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스바시에 전하께서 나를 보자고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수 없단 말이야."
"청기사 때문이 아닐까요."
헤드필드의 조심스런 추측에 토지에르도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
했다.
"글쎄‥‥‥ 나도 그것 외에는 생각 나는 이유가 없으니,조금 걱정이
되는군. 만약 청기사 때문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었으면 좋을 텐데 말
이야."
이렇듯 한참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헤드필드가 검을 뽑아
들며 검을 휘둘렀다. 좁은 마차 안에서 휘두른 검이었기에 마차의 상
부 구조물이 검에 찢겨 나갔지만, 헤드필드는 일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토지에르를 향해 날아오던 상대의 검을 막아 냈던
것이다. 그는 검을 막아 내자마자마차문을 박살내면서 튀어나갔다.
문을 열 그 짧은 시간도 아쉬웠던 것이다. 상대는자신이 가까스로 거
리를 알아 낼 수 있었을 정도로 대단한 놈들이었다. 그러니 이런 좁은
곳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짙은 녹색의 로브로 몸 전체를 감싼 정체 불명의 적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공격이 막히자 뒤로 재빨
리 물러섰던 그들은 두 번째 공격을 위해 다시금 도7했다. 상대는 두
명,헤드필드는 마나를 끌어 모으며 그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슉!"
"우윽!"
대기를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검음이 울려 퍼지는가운데,헤드필드
는 앞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내면서 검을
휘둘렀다. 상대의 숫자가 많았기에 그는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거의
본능적으로 적의 수를줄이는 데 중점을 뒀던 것이다.
혼심을 다한 그의 공격은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금속질로 된 가면을 쓰고 있는 정체 불명의 적이 사람이 아닌 괴물이
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길게 찢어진 짙은 녹색의 로브 자락 사이로
인간의 피부라고 생각되지 않는두터운가죽이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죽 갑옷일 가능성도 있었지만,가공해 놓은 가죽 갑
옷과는 전혀 색다른 질감이 엿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터운 가죽
은 깊지 않게 가로로 갈라져 있었고, 가죽 바로 밑에서 붉은 피가 조
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진짜 가죽갑옷이라면 피가 밖
으로 흘러나오지 않고 피부를 타고 밑으로 흘러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 내는 데 헤드필드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렀다.
앞의 상대와 검을 주고받는 동안, 뒤쪽에서 치고 들어온 녀석에게 등
에 깊숙한 검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는 공격을주고받은 그짧은 순간
에 상대가 어쩌면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미 치명적일 정도로 깊은 검
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상대가 시도한 두 번째 공격에 의해
목이 몸통에서 분리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헤드필드의 눈동자는 이
미 머리가몸통에서 분리되었음에도불구하고,아직도자신이 이렇
게 허무하게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강한불신감을 담고 있
었다.
헤드필드가 쓰러졌을 때쯤에야 호위병들이 검을 뽑아 들고 공격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진 격투였다. 하지만 호
위병들은 변변한 공격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모두들 피를 뿌리며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짙은 녹색의 괴한들이 감행한 공격이 끝나자 풀숲에서 또 다른 괴
한이 한 명 더 뛰어나왔다. 그도 처음 공격해 들어온 인물들과똑같은
복장이었다. 그는 짙은 녹색의 로브를 펄럭이며 걸어오더니 마차 안
을 확인했다. 하지만 마차 안에는 핏자국이 있기는 했으나 정작 목표
물의 시체는 없었다.
"제기랄, 놓쳤구나."
넷으로 이루어진 공격조의 마차에 대한 공격은근소한 시간차를 두
고 양쪽에서 감행되었다. 첫 번째 공격을 막아 낸 호위 기사가밖으로
뛰쳐나왔을 때,그때 이미 그가 뛰어나오는 반대편에서도 검이 마차
를 찢으며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6사이클을 마스터한 고위급 마법사라고 해도 주문
을 외을 시간적 여유도 없는 그런 갑작스런 공격에는 어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상대는그짧은 시간을 이용해 도망쳐 버렸다. 그것
은 상대가 주문을 통해서 마법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법 도구
를 이용해 공간 이동을 한 것이 틀림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그의 시선에 특이한 것이 잡혔
다. 바로 자신이 데리고 왔던 부하들 중에서 한 명이 피를 흘리고 있
는 것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그 피를 흘리고 있는 부하에게 다
가가서 팔을 난폭하게 잡아챘다. 과연 그 부하의 팔은 손목 부분에서
잘려 나가 있었고,거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그 상처는 빠
르게 아물어 들어 가고 있는중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는 시선을 돌려 반대편에서 공격을 감행했던 또
다른부하를바라봤다. 역시 그 부하의 손에도 이상이 있었다. 왼손에
붙어 있는 무기의 절반이 잘려 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그것까지 확인
한 그는 고개를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대로 공격이 성공하기는 했군. 그래‥‥‥ 손목이 날아간 것으
로보아 아주 깊숙한 검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어. 아마도 죽기 직전에
도망친 모양인데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쫓아가지. 젠장! 되는 일이 없
구먼."
습격자들의 우두머리가 목표물의 시체 확인을 못 한 것을 원통해
하고 있을 때,그 '목표물'은 크라레스의 황궁 한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는 연구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싸구려 마법 도구를 이용한 제법 먼
거리의 이동이었기에 마나의 손실이 크긴 했지만,그래도 목숨이 붙
어 있는 채로목적지에 도착할수는 있었던 것이다.
"전하,어떻게 된 일이시옵니까?"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채 모습을 드러낸 토지에르를 보고마법사들
은 경악했다. 괴상하게 생긴 검이 웬 고깃덩어리가 달라붙은 채로 복
부를 레뚫고 있었고,또 다른 것은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 있었다. 하
지만 그것은 그렇게 깊게는 들어가지 않았기에 다행히 심장이 있는
곳까지는 미치지 못해 토지에르가 즉사하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
다. 거기에다가 검이 꼽혀 있는 채로 이동되어 왔기에 출혈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토지에르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이유였다.
마법사들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토지에르를 살리기 위해 부산
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작이 암습을 당할 정도라면?
크라레스의 황제는 토지에르가 치명상을 당한 것을 보고받고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맹렬한분노를토해 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조사해 봤느냐?흉수는 어떤 놈인가? 필히 밝혀
내어 복수를 해야 할 것이야!"
분노에 미쳐 길길이 뛰는 황제 덕분에 중신들은 한동안 숨을 죽여
야만 했다. 이렇듯 이성을 잃고 소리를 치는 황제는 처음 봤던 것이
다. 바로 이때 그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
루빈스키는서둘러서 들어온후 황제에게 예를올렸다
"그래, 생각보다 늦었구먼."
"예, 폐하. 범행 현장이 제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현
장을 둘러보고 오느라고 늦었사옵니다. "
"그래 ,어떻던가? 단서라도 찾았나?"
"약간은 알아 낸 것이 있사옵니다. 발자국들을 따져 봤을 때 습격자
들은 다섯 명,그 중 네 명이 습격에 가담했고 한 사람은 그냥 지휘만
한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놈들의 보폭을 따져 봤을 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발자국을 살펴봐도 뭔가 이상한 점이 있기에‥‥‥그
러니까 파여 있는 발자국의 깊이를 따져 봤을 때 몸무게만 약 70킬로
전후인 것 같은데,한 명을 제외하고 네 명의 발자국 특성이 거의 동
일인이라고 생각될 만큼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나머지 네
명은 움직이는 습성이나 공격 시의 발놀림까지 똑같을 정도로 고도
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로 사료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호위 무사들의 사인은 검 같은 예리한 것
에 베인 것이었는데 검상을 유심히 판찰해 본 결과 헤드필드 경의 목
숨을 앗아 갔을 정도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의 검술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 낮은 검상이라는 것이지요. 검술이고 뭐
고 없이 단순히 속도와 힘만으로 벤 것이었사옵니다. 그런 자들이 어
떻게 헤드필드의 목숨을 앗아 갔는지 이상하옵니다. "
검술에 대한 공작의 높은 안목에 만족스러운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경의 검술에 대한 안목은 짐도 인정하는바이니,그 원인은딴 데 있
다고 생각해야 하겠지 "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 대공이 급히 물었다.
"폐하께서는뭔가 알고 계신 것이 있사옵니까?'
"짐도 처음에 다론 경이 가져온 것을 보고 확실히는 잘 몰랐었는데,
자네의 말을들으니 이해가 가는구먼."
여기까지 말한 황제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한쪽에 서 있던 다론을
향해 말했다.
"다론 경,경이 가져왔던 것을다시 이리 가져와보라."
"옛,폐하."
다론이 천에 둘러싸인 물건을 가져와 황제의 앞에 펴 놓았다. 그것
은 토지에르의 몸에 박혀 있던 흉기들로 다론이 마법사들을 지휘하
여 뽑아 낸 것이었다.
"바로 이거야, 여기 이 낫처럼 생긴 것의 끝 부분에 달려 있는 이 뭉
툭한 살 덩어리‥‥‥ 다론 경도 말했었지만, 이건 도저히 사람이 쥐고
사용했던 무기로는 보이지 않지?"
루빈스키 대공도 그 천에 둘러싸인 물건을 자세히 바라본 후 황제
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아무래도 말로만 듣던 키메라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키메라는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고들었습니다만‥‥‥‥"
그 말에 다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전하의 말씀이 옳으시옵니다. 키메라는 마법으로 재구성된 강력한
전투 생명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그것 때문에 알카사스의 경우 병
사들의 일부를 키메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키메라가 강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이지,
마법사나 기사보다 강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이것을 폐
하께 보여 드리며,그 점이 이상하다고 보고 드렸었사옵니다.
키메라들만으로 토지에르 전하와 경호 무사인 혜드필드 경 , 그리고
경비병들을 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요. 하지만 전하의 말씀대
로 엄청난 속도와 힘을 낼 수 있는 키메라라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
다론의 말을듣고 한참 궁리하던 루빈스키는 황제를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알카사스가 이 짓을 꾸몄다는 것이옵니까? 키메라를 병
사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은 알카사스뿐이옵
니다. "
잠시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한 황제는 천천히 말했다.
"글쎄‥‥‥ 경의 말이 옳긴 하지만, 알카사스는 본국과 아무런 원한
도 없어. 그리고 이해 관계도 없지. 혹시나놈들이 본국에서 테리아를
수출하는 것 때문에 자국 타이탄의 수출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
했다면 모르겠지만 본국에서 수출하는 테리아의 양은 많지가 않고,
또 동맹국에 한해서 수출하기에 녀석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을
것이야,"
"그렇다면 크루마나 코린트 둘 중 하나라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고 봐야 하겠지."
"명확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속단하기는 이르겠지만 아
마도 코린트일 가능성이 클 것이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본
국의 지휘 체계에 타격을 주는 한 가지 방편으로 채택했을 테니 말이
옵니다. 본국 최대의 적은 아무래도 코린트가 아니겠사옵니까?그런
데 황궁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던 토지에르가 왜 그 외진 타이
탄훈련장 근처까지 온 것이옵니까?'
"글쎄‥‥‥ 다론의 보고로는자네가 불렀다고 하던데?"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다론을 향해 따지고 들
었다.
"예?다론 경,다시 한 번 말해 보게."
"예,전하. 전하를 수행하던 수련 기사가 오늘 아침에 달려와서 전하
께서 비밀히 상의할 것이 있으니 타이탄 훈련장까지 와 달라고 전했
었사옵니다. 그 때문에 토지에르 전하께서는 소수의 경호병만 대동
하고 그곳으로 가신 것이지요."
"나는 그를 부른 적이 없었는데?그 수련 기사가 누군가?"
루빈스키 대공의 서슬 시퍼런 물음에 다론은 그 망할 수련 기사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다행히 겨우 생각이 났기에 다론은 대공
에게 그 녀석의 이름을보고할수 있었다.
"예 , 로날드‥‥‥‥로날드 거트니안이었사옵니다. "
다론의 보고에 루빈스키 공작은 자신을 따라왔던 기사들 중의 한
명에게 신경질적인 어조로 외쳤다.
"자네가 가서 로날드를 잡아와라,"
"옛,전하."
하지만 로날드는 행방이 묘연했고,다음 날 점심때쯤 죽은 지 왜 오
래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로써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 습격 사건
의 범인에 대한조사는완전히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중대한 사건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갈 루빈스키가 아니었
다. 루빈스키는 스바시에에서 자신이 아끼는 부하를 불러들였다.
"불러 계셨사옵니까? 대공 전하."
40대 중반쯤으로 강인하게 보이는 사내를 믿음직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루빈스키는 반갑게 맞이했다.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
은 과거 크라레스에 콜렌 기사단이라는 단 하나의 기사단이 외부에
드러나 있던 약소국이었던 시절, 콜렌 기사단을 지휘했을 정도로 이
름 높은 용장이었다.
그때 그는 코린트가 부여하는 어 려운 임무들을, 콜렌 기사단이라는
약소한 전력만 가지고 처리해 나갔을 정도로 뛰어난 책략가이기도
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콜렌 기사단은 코린트의 횡포 아래 여기
저기 전쟁터에 끌려가서는 벌써 소모되고말았을 것이다.
"오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그래 스바시에는 어떻게 해 놓고 왔
나?"
"예, 스바시에는 카렌에게 맡겼사옵니다. 그녀가 잘 처리할 것이옵
니다. "
카렌 폰 헤이워드라면 스바시에 기사단의 수석 궁정 마법사였다.
그런 만큼 충분히 효율적으로 스바시에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 분명
하기에 루빈스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현명한 인선이로군. 자네를급히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이야. 혹시 이렇게 생긴 것을 본 적이 있
나「'
쥬리앙은 루빈스키가 내민 괴상하게 생긴 물건을 자세히 바라봤다.
하지만 칼처럼 생긴 그것이 뭔지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모르겠사옵니다. 칼 같기도 한데‥‥‥ 왜 손잡이가 붙어 있지 않고
그렇게 큰 말린 고깃덩어리가붙어 있는 것이옵니까?"
"허허허, 그게 아니라네. 이게 조금 시간이 지나서 겉이 말라 버린
것이지 처음부터 말린 고깃덩이가 붙어 있던 것은 아니지. 피가 뚝뚝
떨어지던 신선한 살덩이가 붙어 있었지. 마법사들의 예상으로는 키
메라의 손일 거라고하더군."
"칼과 같은 손을 달고 있는 키메라‥‥‥‥키메라라면 전에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온갖 동물들을 합성시킨 마법 생물이라고 말이옵니다.
그러니 이런 모양을 만들지 못하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런데 왜 그것
을 보여 주시는 것이옵니까?"
"왜냐하면 이것이 토지에르 경을 해친 놈의 신체 일부분이니까그렇
지, 자네는 단서가 거의 없기는 하지만 범인을 추격해 줘야겠어. 알카
사스가 키메라 연구의 종주국이니까 거기서부터 조사해 나오면 뭔가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해 주겠나?"
"옛."
"고맙네. 경에게 스바시에 기사단의 오너 네 명을 주겠다. 자네 마음
에 드는 녀석들로 알아서 뽐아 가도록 해. 그리고 마법사 두 명과 그
래듀에이트도 몇 명 데려가는 것이 좋겠지. 자네는 근들을 데리고 철
저하게 조사해서 뭔가 단서가 잡히면 즉시 보고하도록! 폐하의 윤허
는 이미 떨어져 있으니 즉시 출발하게,!"
"옛,전하."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이 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본 후 루빈스
키 대공은 안티노스 후작을 불러들였다. 뚱뚱한 체구를 지닌 안티노
스는 루빈스키 앞에 도착하자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우아하게 예
를올렸다.
"불러 계겼사옵니까?전하."
루빈스키 대공은 그에게 좀더 가잠게 다가오라고 살짝 손짓을 한
후 안티노스 후작이 가까이 다가오자 속삭이듯 말했다.
"쥬리앙 경이 토지에르 경의 시해자를 찾기 위해 알카사스부터 뒤져
들어갈 것이라는 보고를 들었나?"
"옛, 전하, 그건 이미 어제 폐하의 윤허가 떨어진 사항이 아니옵니
까?"
"그렇지. 나는 일부러 그걸 공식적으로 처리했네. 또 쥬리앙의 보고
도 공식적인 통로를통해 나에게 보고되겠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안티노스 후작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루빈스키 대공은그에게 좀더 자세히 말했다.
"본국의 공작이 시해를 당했어. 물론 키메라들의 공격에 의해 일어
난 사건인 만큼, 타국이 관여했다고 봐야 하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까? 분명히 내통자가 있을 거야. 토지에르 공작은 몇 겹으로 보
호되고 있었는데,그가 당했을 때는 매우 취약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
었지. 내통자가 없고서야 불가능해, 자네는 철저하게 내통자를 색출
해 내게, 이번에는 그 대상이 토지에르였지만,다음에는 폐하가 될지
도 모른다는사실을 명심하고,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야."
루빈스키 대공의 말에 안티노스도 이번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얼
마나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할 수 있었다.
"옛,전하."
"내가 자네를 고른 것은 그 때문이야. 쥬리앙이 밖에서 휘저으며 눈
길을 끌고 있는 동안에,자네는 비밀리에 놈들을 압박해 들어가서 일
망타진하게나. 물론 거의 단서가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만,자네라면
훌릉하게 처리할 것으로 믿네."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전하."
암소 네 마리를 보내 주시오
"에‥‥‥‥, 그러니까 경의 말은 토리아 왕국을 침공해 달라는 것인가
요?"
이제 갓 스무 살이 될 듯 말 듯 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왕을 잔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뚱보가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어린 왕은 애써 생각하는 척하다가 자신의 뒤쪽을 슬며시 바라봤
다. 그곳에는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가듬직하게 서 있었다. 젊은
왕은그 기사를향해 뭔가도움을 청하는듯한눈길을보냈다. 그러자
그 눈길을 이해했는지 그 기사는 앞으로 슬쩍 나서면서 뚱보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생각할 시간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쪽에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좀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와리스
후작각하."
와리스는 상대의 망설임이 당연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비대한 얼굴에 일부러 실망감을 잔뜩드러내며 투덜거렸다.
"아니,시드미안 공. 저는 공이나 전하께서 이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
지해 주실 줄 믿고 왔었소이다. 그 때문에 폐하께는 전하께서 이쪽에
서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곧장 토리아로 진격하실 것이라고 장담을
드렸었소. 과거 트루비아가 어려을 때 오직 본국만이 그대들을 도와
주지 않았었소?"
"하지만 본국의 군사력으로는‥‥‥"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시드미안의 말을가로막았다. 그는루빈스키
대공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대공에
게서 자신이 이번에 맡은 임무가 얼마나 국가의 안위에 절대적인 보
탬이 될 것인지를 상세하게 설명을 들었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
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간에 트루비아를 꼬셔서 토리아를
박살내야만 했던 것이다.
토지에르가 습격 당한 후, 크라레스 황제는 계획을 앞당겨 토리아
침공 작전을 시작할 것을 루빈스키 대공에게 명했다. 그만큼 그 사건
은 황제에게 엄청난 분노와 초조함을 안겨 됐던 것이다. 그리고 크라
레스 황제는 토지에르를 습격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잡지 못한 범인,즉 코린트를 향해 이것을 통해 간접적인 복수를 하려
고 결심했던 것이다.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대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거만한 어조로,
혈맹의 부탁을무시하는 상대의 태도에 분노를느낀 듯 말했다.
"폐하께서 전하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이 아니지 않소이까? 지
금 트루비아는 본국에서 지원해 준 카프록시아 급 타이탄 테리아를 6
기나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안토로스 급도 2기나 남아 있
지 않소? 합쳐서 타이탄 전력만 8기에다가 6개 사단의 병력을 보유하
고 있지 않소이까? 그에 비한다면 토리아 왕국은 12개 사단의 병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기사단은 형편없지 않소이까?타이탄이 21기
라고하지만그 대부분이 정규출력도 내지 못하는고철들이오."
여기까지 말한 와리스 후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슬쩍 젊은 국왕
의 안색을 훔쳐본 후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가 상대에 대한 질책이라
면, 이제부터는 전쟁을 선택했을 때의 장미 빛 가득한 미래를 달콤하
게 말해 줘야만하니까말이다.
"물론 전하께서 전쟁을 결심하신다면 본국에서는 테리아 4기를 추
가로 드릴 것이오. 합계 12기의 타이탄이라면 충분하지 않겠소?그리
고 타이탄 전투가 자신이 없다면 이쪽에서 1류 기사 몇 명을 타이탄
과 함께 추가로 빌려 줄 수도 있소. 순식간에 토리아 왕국의 타이탄들
을 파괴하고 그 여세를 몰아 보병들을 박살 낸다면 아주 손실게 숭리
를 얻을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그것이 뭐가 어렵다는 것이오?'
하지만 시드미안은 와리스 후작에게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신중하
게 말했다.
"토리아를 치는 것이 쉽다는 것은 이쪽에도 이견이 없습너다, 와리
스 후작 각하. 하지만 토리아 왕국의 배후에는 코린트 제국이 있습니
다. 그쪽에서 간섭하기 시작한다면 도저히 그 됫감당을 할 수가 없습
니다. "
당연히 와리스 후작은 트루비아에서 우려하는 것이 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사태까지 발전해 나간다면 최악의 경우 트
루비아를 도와 주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
만 그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뒷감당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만약 코린트가 간섭한
다면 이쪽에서도 당당하게 기사단을 파견하여 도와 주겠소. 귀국은
본국의 혈맹이 아닌가요?귀국이 어려을 때 도와준다는 것은 누가 봐
도 명분이 서지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미 트루비아 접경 부근
에 1개 사단의 병력을 대기시켜 놨고, 비밀리에 수도에서 중앙 기사
단 제7전대를 빼내서 트루비아 접경 부근에 포진시켜 뒀소이다.
제7전대가 지닌 타이탄 30기라면 만약 코린트가 간섭해 온다고 하
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을 것이오. 그런 후 코린트가
투입하는 타이탄의 수량에 따라 기사단을 추가적으로 증파해 드리겠
소. 폐하께서는 귀국에 결코무리한주문을하는 것이 아니오."
트루비아의 근위 기사단 단장인 그라드 시드미안후작을 향해 여기
까지 설명을한후,와리스후작은다시 시선을젊은 왕에게로돌렸다.
"전하,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치는 데 본국에서 직접 나선다면 자칫
전면 전쟁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트루비아에서
코린트 동맹을 해체시키는 것을 조금만 도와 달라는 것이지요. 과거
트루비아가 어려을 때 본국에서 성심껏 도와 드린 것을 기억해 주시
옵소서."
이렇게까지 말하자 젊은 왕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는 아직 젊었기
에 어려을 때 도와 줬던 크라레스에 대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순수
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경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네. 폐하께는 짐이 승낙했다
고 전해 주게나."
"그렇다면 언제 행동을 시작하실 것이온지?'
"이쪽에도 전쟁을 준비할 여유가 필요하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야."
"알겠사옵니다, 전하, 폐하께서도 전하의 전폭적인 지지를 크게 기
뻐하실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께 약속 드린 테리아 4기는 3일 안에
보내 드리겠사옵니다. "
일단 협상이 아닌 협박에 성공한 와리스 후작은 느긋한 표정으로
궁을 나섰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해 낸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한 명과 마법사 한 명이 그에게 급히 다가
왔다. 원칙상 사절이라고 하면 이들 외에 두 명 정도의 수련 기사가
댄동하지만, 이것은 워낙 기밀을 요하는 방문이었기에 매우 단출하
게 왔던 것이다.
"협상이 성공하신 모양이군요. 축하드립니다,각하."
와리스 후작의 표정을 보고 짐작을 한 기사가 먼저 축하 인사를 을
렸다. 그들은 와리스 후작을 수행하고 경호하라는 명령만을 받았을
뿐,그 외의 협상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
만 그들은 와리스 후작이 처음 이리로 올 때는 매우 초조한 표정이었
는데 이제 약간은 미소를 떤 느긋한표정인 것을 보고 짐작을 했던 것
이다.
"고맙구먼. 그건 그렇고,가로 경,"
와리스후작의 말에 노마법사가즉시 대답했다.
"예, 후작 각하."
"본국에 지금 통신을 보내게나."
"뭐라고 보고를 올릴까요?"
"트루비아의 국왕이 일주일 후에 사용하기 위해서 암소네 마리를
보내 달라고 했다고 전하게나."
"예? 암소라뇨?"
"자네는 그렇게만 전하게 "
"옛,각하,"
노 마법사는 그게 암호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급히 마법진을 그리
기 시작했다. 노 마법사가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며 와
리스후작은 뒤에 서 있는 기사에게로 시선을돌리며 말했다.
"르베이 경."
"옛,각하."
"자네 시간을좀 내줄 수 있겠나?"
"예?'
"기왕 나온 김에 엔테미어 공국과 크루마에도 잠간 들릴까 하는데
상관없겠느냐 이 말일세."
"예,특별히 곧장 돌아가야 할 정도로 바쁜 일은 없습니다,각하. 편
하실 대로하십시오."
"고맙군. 그렇다면 통신이 끝난 후 먼저 엔테미어 공국으로 가세
나."
"옛,각하."
괴물 키메라의 정체
"웁‥‥‥‥웁‥‥‥‥"
허공에 손을 휘젓는 늙은이를 향해,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복면
을 한 사내가 으르렁거 렸다.
"가만히 있어! 죽여 버리기 전에‥‥‥‥"
그 노인은 지금 자신이 처한 사태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곳은
그 이름도 유명한 마도 왕국 알카사스의 도시들중의 한곳에 있는 그
의 저택이었다.
알카사스의 치안은 대단히 견고해서 한밤중에 이렇듯 괴한이 침입
해 오는 사고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저택은 견인 족
노예가스무마리나 경비를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견인 족들이 경비를서면서 개처럼 끌고다니는 네 발 짐
승은 거대한 투견이 아니라 자신이 손수 제작한 난폭하기 그지없는
키메라였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저택의 외곽에는 불의의 침입자에 대처하기 위
해 알람 마법진까지 쳐져 있었는데,상대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이 안
으로들어왔던 것이다.
복면을 쓴사내가늙은이를 틀어쥐고 있는 사이,또 다른 복떤의 사
내가 재빨리 품 속에서 쇠사슬을 하나 꺼내어 그 늙은이의 목에 걸었
다. 늙은이는 발버등을 쳤지만 상대의 우악한 힘을 당해 낼 수는 없
었다
"좀, 잘 잡고 있으라구."
"젠장,늙은이 힘이 보통이 아니군."
"목걸이를 채됐으면 빨리 입을 봉해.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각하께
서 밑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구 "
"알았어."
그들은 허우적거리며 발버등을 치는 노인의 입을 틀어막은 후, 팔
다리를 묶어서 큼직한 포대 자루에 집어넣었다. 복면을 쓴 사내는 노
인 한 명쯤의 무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가볍게 포대 자루를 등에
짊어진 후 창밖으로몸을 날렸다.
포대 자루를 짊어진 그들이 땅에 착지하자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그 포대 자루를향해 시선을슬쩍 던졌다.
"잡았나?'
"옛,각하."
"퇴각!"
각하라고 불린 인물의 지시에 따라 세 명의 인물들은 재빨리 이동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려가는 정원에는 토막 난 시체들이 즐비하
게 널려 있었다
"우선 초대하는 방법이 예의에 조금 어긋났던 점을 사과합니다. 하
지만 이 방법 외에는 그대와 대화를 나눌 길이 없었기에 취한 조치였
기에 이해해 주기를바랍니다. "
복면을 쓴사내가 정중하게 말을 하자 늙은이는 꽁꽁 묶여 있는자
신의 손과 발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정중한 척하지 말고 이것부터 좀 풀어 주는 것이
어떻소? 손발이 저려서 참을수가 없군‥‥‥‥
복면을 쓴 사내가 눈짓을 하자, 역시 그 옆에서 복면을 쓰고 있던
사내가 재빨리 노인에게 다가와서 손발을묶었던 줄을 풀어 줬다. 그
복면인은 노인의 손발에서 풀려 나온 줄을 집어 든 다음 정중한 어조
로말했다.
"그대의 마법을 봉인하기 위해 마법 도구를 사용했지만, 그걸 사용
한 덕분에 이쪽에서도 당신에게 마법을 걸 수 없게 된 것이 문제였소.
안 그랬으면 편안히 잠자는 사이에 이리로 오겼을 텐데 말이오. 그렇
다고 한 대 때려서 기절시키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저질스런 방법을사용했소.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노 마법사는 탐탁치 않은 듯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쇠사슬을 이리
저리 당겨 봤지만 마나를 구동시킬 수 없는 상태에서는 그저 야윈 모
습의 노인일 뿐,그 이상도 이하도아니었다
"젠장. 아주 잘 만든 물건이군."
"그럴 겁니다. 아주특별히 제작한 것이니까요."
"이렇게 나를 납치한다고해서 네 녀석들 일에 협조할 것 같으냐?'
"아마 협조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명이 위태로우
실 테니까요."
"훗, 이제 다 늙어 생에 미련은 없다. 키메라는 대단히 위험한 생명
체야. 그런 위험한 것의 제조법을 알려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좋을 대로해."
"크라드마 경,제가 원하는 것은 키메라의 제조법 따위가 아닙니다.
이게 혹시 뭔지 아시겠습니까??
노마법사는 약간은호기심 어린 표정으로복면한사내가주섬주섬
풀고 있는 보따리를 쳐다봤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낫같이 보였
다. 하지만 보통의 낫과 틀린 점이 있다면 그 손잡이 부분이 매우 특
이하다는 점 이었다.
"키메라‥‥‥ 인가?'
"예,저회 나라의 대단히 높은 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낸 놈입니다.
겨우 네 마리의 키메라만으로 그 분을 경호하던 그래듀에이트 한 명
과 경호병들을 해치우고 말입니다. "
순간노 마법사의 눈이 뭔가궁리를 하는 듯 살짝 가늘어졌다.
"키메라의 크기는?"
"인간 정도의 크기입니다. 대략 2미터 정도‥‥‥‥ 두 다리와 두 팔을
가진 인간형입니다. 그런데 양팔에는 이런 것이 붙어 있었지요."
상대의 설명을 제대로 들어 보지도 않고 크라드마는 고개부터 가로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그래듀에이트와 대등하게 대결을 펼칠 수 있을 정
도로강인한 키메라는 아직도만들어 낼 수 없었어 왜 그런지 아나?'
"글쎄요‥‥‥‥"
"그래듀에이트는 근력에 마나의 힘이 보태져서 움직이지. 그 때문에
그래듀에이트는 상상하기도 힘든 속도와 힘을 낼 수 있는 것이고. 그
런데 보통의 생명체는근력만으로움직이는 거야.
키메라가 아무리 마법의 생명체라고 하지만, 일단 그 뿌리가 되는
동물이 존재해야만 해. 트롤의 몸뚱이에 그래듀에이트의 다리를 붙
인다고 해서 그 다리 부분이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을까? 나는 그것
을 실험해 봤다네. 전쟁터에서 사망한 기사의 시체를 이용한 실험이
었지.
하지만 그 다리는 인간의 다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정도의 힘밖
에 내지 못했어. 다리만 잘라서 붙인다고 마나가 함께 구동하지는 않
았던 것이지. 또,기사의 몸통에 트롤의 팔다리를붙인다고 해서 마나
가 함께 움직이지는 않네. 키메라는 것은 그저 마법 생물일 뿐. 살아
있는사람에 그런 것을붙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
키메라라는 것은 죽은 것을 마법으로 합성시켜 되살리는 것이야.
그 때문에 기사가 생전에 익혔던 모든 기술이 키메라에게 그대로 계
승되지는 않는다네."
"그렇다면 살아 있는 것에 다른 생명체의 몸을 접합시킬 수는 없을
까요?"
"그것을 시도해 보지 않은 마법사가 어디 있겠는가?키메라를 연구
하는사람이라면 누구나그런 시도를 한 번쯤은 해 봤겠지. 내 선배는
뭔가 실수를 했을 것이고,나는 그것을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아집을
가지고 실험을 해 보는 거야. 하지만 모두들 실패하지. 나도 노예나
몬스터들을 엄청나게 죽여 놓고 나서야 그 연구에서 손을 뗐으니까
말이야."
"흐음‥‥ 그렇다면더더욱이해할수가없군요.겨우네마리가모
여서 본국의 그래듀에이트를 해치운 것은 사실인데, 크라드마 경께
서는그것이 불가능하다고우기시니 말입니다. "
"우기는 것이 아니야.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노 마법사는 신중하게 궁리하고 있는 상대를 힐끗 바라본 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원하는 것은 뭔가?저 해괴한 키메라의 제조법인가,아니면
그걸 만든 사람인가?그것도 아니라면‥‥‥‥"
"이제 대충 짐작을 하셨을 텐데요? 저것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를 알
고 싶습니다. 그래야 저 따위 것을 만들라고 의롸한 나라가 어디인지
도 알수 있을테니까요."
"으음‥‥‥‥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보는 것은 어떻겠나?저것을 가지고
내가 연구를 해 볼 수 있게 시간을 좀 주게. 저런 특이한 것이라면 아
주 특별한 재료가 사용되었을 거야. 그 재료를 알아 낸다면 많은 도움
이 되지 않을까?'
"글쎄요. 고작그런 것으로도움이 될까요?'
"충분할 걸세. 널리 분포하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실험 재료로 다 써
먹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세. 오크,고블린,트롤,오거 등등‥‥‥‥ 하
지만 저것은 아주특별한 속도와 근력을 지닌 존재야. 그 재료가 되는
몬스터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안 그랬다면 내가 전에
벌써 만들어 냈을 테니까말이야. 안그런가?'
노마법사가 보자기 위에 펼쳐져 있는 키메라의 일부를 가리키며 말
했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상대도 그럴 듯하다고 느꼈는지 고개
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시간을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며칠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
수줍을 많이 타는 왕자
각국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가운데 크라레스의 왕자가구애 작
전을 벌이고 있는 가므에서도 여태까지 공을 들인 만큼 약간의 결실
이 맺어지고 있었다.
"어? 어? 오늘은제법 오랫동안 얘기를하는데? 이상하지 않아?"
"그렇군. 저 아가씨가 처음에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건성으
로 대답할 때는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건 모르지, 아주 예의 바른 아가씨인 것 같은데, 예의상 가만히
앉아 있는지도 몰라."
이렇듯구구하게 의논이 오가는 가운데 드디어 첫날의 데이트는 무
사히 끝이 났다. 아리아스로는 기록적으로 오랜 시간 행해진 여성과
의 데이트였다. 아리아스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내일도 만나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사실 기대 따위는 하지 않고 예의상 물어 본
것이었는데,그녀의 대답은 놀랍게도 '예스(Yes)' 였다.
다음 날에도 만나 주겠다는 상대방의 약속 때문에 아리아스는 그날
밤,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어도 잠은
오지 않고 다소곳이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가냘픈 모습이 자꾸 떠
올랐다.
그녀의 생각에 잠긴 듯한 옆모습. 그녀는 시종일관 고개를 살짝 돌
린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 만나 주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녀도 그런 아리송한 표
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이 좋은 방향으로만흘러가자그녀의 그런 수수께끼 같
은 모습도 미란의 명문이라고 볼 수 있는 지벨리아 가문의 엄한 가정
교육 때문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건성으로 대충 대답
하던 것들까지도 자신과의 의견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방향으
로 대화를하기 위한 노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리아스의 호위들이 그들의 만남이 몇 번째 데이트에서 깨질 것인
지 내기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상대방의 표
정이나 분위기로 봤을 때는 도저히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은데도,어쨌
든그들의 만남은 일주일째 계속되었다.
이때쯤에서 아리아스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도 어느 정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
고,그도 상대가 별로 싫지는 않았다. 물론 그 정도의 감정만으로 결
혼을 청하기에는 약간무리가 있는 것도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것에 대해 의논할 만한 상대도, 시간도 없
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가장 의지하는사람들은모두 다 머나먼 곳
에 있었고, 제일 가깜게 있는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은 왠지 모를 차가
움 때문에 그런 의논을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고 미란의 의
장은 그가 빨리 배우자를 선택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가해 오고 있었
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결혼은 사실 정략 결혼이어서 상
대자가 마음에 들건 그렇지 않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두 나라
가 결혼이라는 자그마한 사슬로 연결되는 것만이 중요했다.
운명의 그날,아리아스로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기에 그녀
에게 청혼을 했다.
"저 ‥‥나,나하고 겨 결흔해 주시겠소?"
말조차 더듬거리는 멋없고 형편없는 청혼이었지만,그녀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려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아리아스는 머리가 텅 빈
듯한 충격을 받으며 더 이상 할 말을 잊은 채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퍼부었다.
뜻하지 않는 상대의 대답에 아리아스는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짜고 친 포커처럼 결론이 이렇게 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
리안은 원래 사랑하던 남자가 따로 있었지만 그 남자와의 결혼은 불
가능했기에 취해진 결론이었다.
그 남자는 그녀의 소꿉 친구로 그녀 집안 하인의 아들이었다. 그들
은 몰래 사랑을 키워 왔었는데,결국은 그게 발각되었고 그 때문에 마
리안의 아버지 크라크 지벨리아 백작은 이 결혼을 강경하게 밀어붙
였던 것이다.
그녀의 사랑하던 남자 친구는 이미 지벨리아 백작의 저택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이 결혼을 하지 않는
다면 남자 친구를 죽여 버 리겠다는 최후 통첩을 받고 있었다.
지벨리아 백작의 입장에서는 비천한 신분의 녀석에게 딸을 줄바에
야 스와질렌 가문의 병약한 아들에게 주는 것이 백 배 낫다고 생각했
을 것은 당연했다. 스와질렌 가문이 요 근래에 워낙 병약하기에 오랜
세월 시골에서 요양하게 했던 막내 아들의 신랑감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귀족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확 퍼져 있었다. 흠이 있는
딸을 스와질렌 후작 가문에 시집 보내는 것이 좀 꺼림칙하기는 했지
만,상대방이 워낙 병약해서 세상구경을 못 했다고 하니 대충 넘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 계획을 실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벨리아 백작이 그의 딸의 결혼 상대가 스와질렌 가
문의 병약한 자식이 아닌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왕자라는사실을 먼저 알았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카드였다.
엔테미어 공국은 모국인 알카사스에 비교한다면 매우 아름
다운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알카사스는 저 먼 서쪽의 사막 지
대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가였다. 외진 변방이었기에 소수의 마법
사들이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동쪽 대륙의 주도
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은 대아르곤 제국이었었다. 그리고 크루마,코
린트, 크라레스 제국들이 연합해서 아르곤 제국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대제국들이라 불리고 있었던 네 나라들은 저마다 푸른 젖줄이 흐르
는 비옥한 평원들을 끼고 있었고,그 평원들에서 생산되는 산물들이
곧그들의 막강한 힘의 원천이었다.
그에 비해 알카사스는 변방의 사막 지대에서 탄생한 국가였던 만큼
신이 선물한 자연의 혜택을 입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에
게 적대적인 자연을 마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일단 마법진을 이용하여 자연을 제어하는 데 성공하자,
그 인근의 부족 국가들은 더 이상 알카사스의 적이 될 수 없었다. 알
카사스는 마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 방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강대한 군사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작은 왕국들을 복속하며 동진을 거듭하던 아르곤 제국은 크
라레스라는 강력한 벽 앞에서 진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몇
번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여태껏 알카사스가 상대해 왔던
변방의 자그마한 왕국들의 군사력과 4대 강국에 들어가는 크라레스
의 군사력은 엄청난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엔테미어 공국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평야에서 벌어진 대규
모 전투에서 무참한 패배를 당한 알카사스는 더 이상 싸워 봐야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크라레스 제국에 휴전을제안했다.
크라레스 제국도 배후에 아르곤 제국이라는 막강한 적을두고 군사
력을서쪽 전선에 오랜 시간돌리는 것이 별로좋지 못할 것이라는 판
단에 그 조약은서로간에 공평하게 아주 빨리 체결되었다.
그러다가 아르곤 제국이 갑자기 내전 상태로빠지면서 곧이어 일어
난 크라래스 제국의 몰락은 알카사스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흑기사라는 신형 타이탄의 막강한 성능도
놀라웠었지만, 상대국의 수도만을 박살 내면서 조기에 전쟁을 종결
시키는그 전광석화 같은 전술에 엄청난충격을 받았었던 것이다
그 뒤로 알카사스는 코린트의 그 전격전에 대비하여 수많
은 탐지 마법진과 방어 마법진을 건설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미 크라
레스 제국을 집어삼키면서 급성장한 코린트에 추파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상호간의 완충 지대라고할수 있는 엔테미어 공국이었다.
엔테미어 공국의 첫 번째 영주는고 크라이더 엔테미어 대공이
었다. 그가 엔테미어 공국의 대공으로 즉위한 것에는 그의 뛰어난 외
교적 센스가 한몫을 했다. 알카사스는 코린트와의 전쟁에 도움이 되
는 '동맹 위성 국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비무장 지대의 성격을
떤 '무력 완충 지채' 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튼 고 크라이더 엔테미
어 대공은 그의 모국인 알카사스의 바람대로 그 역할을 훌릉하게 완
수해 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아들인 미카엘 엔테미어 대공이 시험대
에 올라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와리스 후작각하."
"무슨 말씀을‥‥‥ 이렇게 불쑥 찾아 뵈서 죄송할 따름이옵니다, 대
공 전하."
만약에 제1차 제국 전쟁 전에 와리스 백작이 이렇듯 무례한 방식으
로 그에게 찾아왔었다면 미카엘 대공의 얼굴도 구경하지 못한 채 쫓
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외교관이라는 직업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실력자냐 하는 것보다는 뒤 배경이 얼마나 대단하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다.
상대는 거대한 군사력을 보유한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외교 담당
관, 이렇듯찾아오기 10분 전에 통신 마법을통해 가겠다고 '일방적
인 통보' 만 하고서는,마법진을 이용해 나타나서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만나자고 해도 상대로서는 만사를 제쳐 놓고 만나 줘야만 하는
것이다.
"뭐 우리 사이에 그것이 그렇게 큰 흠이겠습니까?그건 그렇고 오늘
은 어쩐 일이신가요?"
"허허허,대공 전하께서는 제가 꼭 무슨 부탁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이거 섭섭하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자 들어와서 차라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기
로 하죠. 때마침 꽃이 활짝 피어서 테라스에서 보는 경치가 정말 좋지
요. "
"그럴까요?"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본론으로 빨리 넘어가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끌었다. 원래 외교를 담당하는 너구리들이 흔히들 써먹는 방법이었
기에 미카엘 대공은 마음을 푸근하게 가지고 대충 대답하면서 상대
가 언제쯤 본론으로 넘어갈까 기다리고 있었다. 외교라는 것이 조급
한 마음을 가지고 임하면 실패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래 전부터 이
런 습관이 몸에 익어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뚱뚱한 너구리 쪽에서 뭔가를 꾸미기 위해 왔다면
일단은 대화의 실마리는 그쪽에서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
에 있었다.
"타이탄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병기가아닙니까,전하?"
뭐 때문에 그런 말을 꺼내는지 의도를 생각하면서 미카엘은 찜찜하
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죠."
"저는 기사가 아니기에 타이탄을 타 보지 못했지만,그걸 타 보면 정
말 기분이 좋을 것 같더군요. 전하께서는 한 번이라도 타 보셨습니
까?"
미카엘 대공도 외교관으로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지 결코 기사는 아
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전용의 타이탄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
었다. 미카엘 대공이 기사가 아니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
고 있는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미카엘 대공은 이 늙은 너구리가 왜 자
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나 생각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아직 타보지 못했습니다. 제 밑에 기사단이라도 있다면 한
번 타 봤을 텐데, 원래가 본국에는 타이탄은커녕 기사단도 없지 않습
니까? 본국은 알카사스의 속국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타이탄을구경해 보신 일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본국에는 콘도르(Condor) 기사단의 분대가 주둔하고
있지요. 그 덕분에 노리에 급이나 가이아 급 타이탄은 몇 번 봤습니
다. "
가이아 급 타이탄은 현재 알카사스의 4개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이었다. 노리에 급은 가이아 급으로 대체되면서 모두 다 타국
에 수출되었기에 지금은 알카사스 영토 내에서는볼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그 두 가지 타이탄밖에 보지 못하셨습니까?'
"예 "
"믿어지지 않는군요. 저는 전하께서 저보다 훨씬 더 많은 타이탄들
을 구경해 보신 줄 알았습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사열식을 할 때 타이
탄을 동원하여 위엄을과시하기도하지 않습니까?"
"아 예, 그런 식이라면 몇 가지 더 되는군요. 미란의 타이탄은 정말
아름다웠었지요."
"예,하지만 강력한 힘은 느껴지지 않더군요. 원래가 타이탄이란 것
이 힘의 상징 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외형을 그렇게 예술품처럼 만드는 것은 웃기는 노룻이지요. 역시,
힘이 느껴지는 외형은 코린트의 타이탄 이상 가는 것은 없지요. 당당
한 5각형의 방패, 기다란 뿔‥‥‥ 특히 적기사의 경우는 붉은색 페인
트를 칠해서 그런지 더욱 무시무시하게 보이더군요. 적기사를 보셨
습니까? 전하."
"아니오. 소문만 들었을 뿐,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
"예,적기사는 정말 대단하지요. 특히 이번에 실전 배치된 신형 적기
사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보이더군요. 커다란 방패와 거대한 검‥‥‥‥
정말이지 위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
"신형 적기사라구요?"
와리스 후작은 상대의 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라레스도 간신히 알아 낸 정보인 만큼 알카사스에
서 그것을 알 가능성은 없다는 판단에 여기 와서 일부러 떠들어 본 것
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미카엘 대공의 모습을 보니 아직 알카사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음이 확실했다. 와리스 후작은 넌지시 시침을 떼
고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 모르고 계겼습니까? 이번에 30기씩이나 생산되어 혹기
사를 밀어내고 정식 근위 타이탄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역시 코린트
는 정말 대단한 국가지요. 전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토록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다니 말입니다. "
네 시간 동안이나 와리스후작은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 대다가 돌
아갔다. 국경 문제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소리가 다 오고갔기에 미카
엘 대공은 상대가 왜 여기까지 와서 노닥거리다가 갔는지 쉽게 의도
를 눈치 채지는 못했다. 그만큼 와리스 후작이 적기사에 대해 떠들어
댄 것이 매우교묘한타이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이 흘러가다가 보니 그런 말을 하게 된 형국이었
기에 미카엘은 와리스 후작이 일부러 정보를 흘리려고 여기까지 왔
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미카엘 대공은 와리스 후작이 마법진에
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배웅한 후 통신실로 달려갔다. 원로원에 급히
보고할 특급 정보가 생긴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키메라
미네르바는 소환된 몇몇 인물들을 쭉 둘러봤다. 제1근위대 대장,제
2근위대 대장, 지발틴 기사단 단장, 제네리아 기사단 단장, 엘프란 기
사단단장,그리고정보부장,마법사 연합 의장과그의 수행원 다섯 명
이 그들이었다. 긴 사각형의 탁자의 끝에 앉아 있는 미네르바를 중심
으로오른쪽에는 기사들이,왼쪽에는마법사들이 쭉 앉아 있었다.
미네르바는자신의 왼편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그린레이크를 곱지
못한 시선으로 힐끗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경들을 소환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 몇 가지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블리스 경,브리핑을 시작하게."
"옛, 공작 전하."
자리에서 일어선 이블리스는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에게 눈짓을 했
다. 그러자 그 마법사는 마법진이 그려진 얇은 판 두 개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올려왔다. 그런 후 마법진을 발동시키자 그 위로 두 대의
거대한 붉은타이탄들이 모습을드러냈다.
"이번에 들어온 최신 정보에 따르면 코린트는 새로운 모델의 적기사
를 근위 타이탄으로 채택하여 30여 기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것이 그 새로운 모델입니다. 옆에 있는 구형의 적기사와 대비하여 보
신다면 간단하게 그 차이점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구형의 모델이
일 대 일의 격투를 상정하여 제작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신형은 집단
전 전용으로 추측됩니다. "
크라레스 쪽에서 노획한 적기사를 연구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기
에 크루마 쪽에서 적기사를 보는 관점은 약간 차이가 있었다. 크라레
스에서 적기사를 '다목적 타이탄' 으로 보는 데 비하여 크루마에서는
'일 대 일 격투용 타이탄' 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크루마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적기사에 사용된 여러 가지 최신 기술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력은 거의 안티고네 급으로 추측되며 외형상 전체적인 무게나 장
갑의 두께 등도 안티고네를 그대로 복사했다고 보시는 것이 옳을 것
입니다. 이것이 30기나 제작되어 흑기사를 대체했다는 증거가 몇 곳
에서 잡혔습니다. 그리고 크라레스에서 이쪽으로 보내 준 정보도 우
리 쪽에서 추측하는 것과같았기에,더욱 현실성이 있습니다. "
"크라레스에서 보내 줬다니,무슨말인가?'
지발틴 기사단 단장인 알프레드 쟉센 후작의 물음에 이블리스는 재
빨리 대답했다.
"예, 크라레스에서 와리스 후작을 파견하여 자신들이 수집한 최신
정보를 이쪽에 알려 줬습니다. 아마도 코린트의 군사력 팽창에 대해
크라레스도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대답을끝낸 이블리스는 이제 다시금 시선을 쟉센 후작에게서 돌려
미네르바를 향하며 말했다.
"근위대에 있던 흑기사 30기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으로 보내진 것으
로 추측됩니다. 그 외의 타이탄 총수는 전번 회의 때 발표한 수와 거
의 차이가 없습니다. 코린트의 전력은 헬 프로네 1기, 적기사 5기, 신
형 적기사 30기, 흑기사 30기, 백기사 1기, 미노바-P 10기, 미노바-P2
210여 기 정도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합계 287기 정도로서 본국의 전
력과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 온 것으로 사료됩니다. "
이 보고는 현실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크루마에서는 코린트의
키에리 발렌시아드가 전사했기에 그의 헬 프로네를 로체스터 공작이
물려받았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형인 미노바-P2의 생산 수량을 약간 작게 추측하고 있었
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크루마의 기사들이 코린트의 기사들
보다 실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코린트의 군사력은
크루마의 군사력을 월등하게 앞서가고 있다고봐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크라레스의 군사력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
이블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마법사는 다시 탁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여러 개의 판들을 올려 놓고는 마법진들을 발동시켰
다. 이윽고 마법진 위에는 각종모양의 타이탄들이 모습을드러냈다.
"가장 앞에 있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 크라레스가 자랑하는 근위
타이탄 청기사입니다. 추정 전투 중량 160톤 정도로서 3.0의 출력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
지만 5기 내외만 생산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 외의 모든 타이탄은 카프록시아 혹은 그의 변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출력 1.3의 엑스시온을 사용하고 있으며 총 보유량은 252
기 정도로서 카프로니아 A형과 B형 각 1기,테세우스 120기 내외,트
라노 130기 내외입니다. 그 외에 스바시에 공국의 카프록시아 20기,
치레아 공국의 드라쿤 20기가 따로 존재합니다.
현재 추정하기로는 크라레스의 총 타이탄 수량은 297기로서 3국 중
에서 가장 많은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첨기사를 제외하면 카프록시아의 변형인 것
을 감안한다면 크라레스는 1.3을 초과하는 출력을 지닌 엑스시온을
생산할능력이 없다고봐야 할 것입니다.
현재 정보국에서는 크라레스가 던전 같은 곳에서 청기사의 엑스시
온을 습득한 것이 가장 현실성 있는 추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크라레스가 더 이상 청기사를 제작하지 않고 있는 것을 설명
할 방법이 없으니까말입니다. "
여기까지 말한 이블리스는 주위를 한 번 쭉 둘러본 후 다시 말을 시
작했다.
"3라레스의 타이탄 보유량은 297기라고 하지만 주 전력이 카프록
시아 급이기에 3국중에서 가장 뒤처지는 타이탄 전력을 보유하고 있
습니다.
하지만 크라레스가 본국이나 코린트와 어깨를 겨를 수 있는 군사
강국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청기사들과 우수한 기사들의 덕
분입니다. 겨우 다섯 기의 청기사지만 그 소유주들의 실력은 이미 지
난 번 전쟁에서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휘하에 있는 기사들의 실력 또한 거의 코린트의 기
사들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균형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코린트가 적기사를 30여 기나 더 생산했고,또 그것을추가
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최소한 5년 이내에 힘의 균형은 무
너지리라는 것이 정보부의 분석입니다. "
"내가 경들을 소집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오. 코린트는 힘을 키우고
나면 크라레스나 본국,둘 중 한 곳을 침략할 가능성이 크오. 그렇기
에 코린트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3국 간의 적당한 균형을 잡
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이제부터 그 방법에 대해 각자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 주기 바라오."
회의는 장시간 계속되었다. 하지만 내려진 결론은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군사력을 더 키운다든지, 타이탄을 더 생산한다든
지‥‥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이탄 한 대 만
드는 데 들어가는 돈은 천문학적 인 액수였다.
과거 국가의 존망이 걸렸을 때는 생산하지 않으면 국가가 망하는
판국이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쪽으로 국가의 모든 힘을 투입했었
지만, 지금은 외관상으로 봤을 때도 안정기였기에 그렇게 몰아붙일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그린레이크가 중심이 된 마법사 무리들이 안정적인 3국 체
제라는 이유를 들며 더 이상 기사단을 증강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도 진다. 그린레이크 등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코린트를
크루마 혼자만 상대한다면 모르겠지만, 크라레스라는 든든한(?) 동맹
이 있는 한 크게 염려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겨우 적기사 몇
기 정도 만든 것 가지고 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그
들의 주장이었다.
회의가 아무런 성파 없이 설전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미네르바는 서
둘러서 회의를 끝냈다. 그런 후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몇몇 부하들만
을 모아서 따로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라면 그래도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일이 꼬이는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전하."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지금으로서는 그래도 그린레이크 경의 의견대로 크라레스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사옵니까?"
"끄응‥‥‥그게 예전의 크라레스라면 믿을수 있겠지만,토지에르의
생사가 불분명한 지금으로선 썩 신뢰가 안 간단 말이지. 젠장! 괜히
토지에르를 건드렸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신이 너무서둘렀다며 미네르바가후회가 담긴 한탄을터뜨리자,
부하는 상관을 위로하듯 말했다.
"이미 쏟아진 물이옵니다.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을 테너 다른 방법
을강구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이러면 어떻겠사옵니까?"
"뭐 좋은 의견이라도 있는가?"
"예,전에 썼던 방법을 다시 한 번 더 사용해 보는 것이옵니다. "
"전에 썼던 방법이라고? 무슨 방법 말이냐?'
"두 번째의 그로체스 옹작을 만드는 일이옵니다. "
부하의 말에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묘하게 불타 올랐다. 그로체스
공작 덕분에 상당한 이득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전에 키에
리가 그랬듯이 두 번째의 그로체스 공작을 키워 로체스터라는 거목
을 뽑아 낼 수만 있다면 아무리 상대가 적기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겁날 것이 없지 않을까?
"그래? 그것 괜찮은데? 이블리스!"
"옛,전하."
"전에 조사해 둔 놈들이 있다고 했지?그것을 좀 가져와 보게."
"옛!"
노 마법사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들을 보며, 슬
그머니 짜증이 솟아 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범인의 색출이라는
과제와 연구의 진전이라는 서로 간의 잇속이 맞아 떨어졌기에 둘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한 덩어리로 뭉칠 수 있었다. 그런 후 저 사내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노마법사의 저택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는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자신이 죽인 견
인 족 열 마리와 키메라 열 마리의 값을 즉시 지불했을 뿐 아니라,노
마법사의 연구에 보태라고 거금을 내놨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그 부하들은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에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해 오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저들의 신분이 보통
은 아닐 것이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렇듯 몸에 밴 예절
은하루아침에 갖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 머문 지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 시커먼 포대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다니‥‥‥‥ 그것이 이쪽
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시위처럼 느껴져서 문득 그것이 생각 날 '때
마나짜증이 났던 것이다.
"소문은 들었지만 키메라에도 종류가 참 많군요."
이번에 새로들어온 저택의 괴수들을 바라보며 복면의 사내는흥미
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들이 해치운 놈들을 대신할
키메라들이 도착했던 것이다. 전에 저택에 있던, 커다란 개처럼 생겼
지만 무시무시한 이빨과 섬뜩해 보이는 발톱이 달려 있는 키메라가
아니라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이상한 괴물 같은 키메라들
이 스무 마리나 들어왔던 것이다. 키메라들은 노 마법사의 지시를 들
은 후 저택의 으슥한 곳에 몸을 숨겨 버렸지만, 그들이 와서 몸을 숨
기기 전까지의 과정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복면의 사
내가 말을 건 것이다.
"키메라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지. 어떤 것은 타이탄만한 것도 있으
니까 말이야. 그것은 오거를 재료로 변형시킨 것이지만 소기한 목적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지. 타이탄을 상대할 수 있도록 계획해서 만들
어진 것이었지만, 실패작이었단 말이야. 변방에 출몰하는 몬스터나
상대할 수 있을까‥‥‥ 타이탄을 상대한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하셨군요."
"그럼. 그건 그렇고 몇 가지 자료가 넘어온 것이 있는데 한번 보겠
나?"
"그러지요."
노 마법사는 자신의 서재로 상대를 안내했다 노 마법사의 연구실
은 그의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그곳에는 여
러 명의 마법사들이 함께 연구하고 있는 매우 큰 규모의 연구실이었
다. 그 때문에 그는 이번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끼여 든 이 손님들을 자
신의 집에 조용히 머물도록 배려해 준 다음,그 자신은 연구소와 집을
들락거리면서 그 연구 결과를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이거야.전체적인근육조직,뼈대의흔적 ‥‥모든것을종합
해 봤을 때 이것은 아무래도트롤의 변형이란 말이지."
"이렇게 칼처럼 생긴 손을 가지고 있는 트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아,그 칼 부분은 아주 딱딱하기는 하지만 생체에서 만들어지는 조
직이야. 자네도 들어 봤겠지? 와이번이라는 놈을 말이야. 와이번을
개량해서 그 뼈대를 생성하는 세포 조직을 이용한 거야. 하지만 전체
적인 뼈대의 형상은 와이번이 아니라 직립 보행을 하는 동물에 가깜
게 설계되어 있지. 그것들중에서도가장가까운 것은트롤이야."
"흐음‥‥‥ 크라드마 경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믿어야 하겠지요."
"생각 잘 했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이 엄청난 근육
조직을움직이려면 아주특별한 피가 필요해. 생명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피는 강력한 힘을 내는 근육 세포의 구석구석에까지 영양
과 산소를 공급해 주지. 그리고 파괴된 조직을 재생해 주고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지금까지는 트롤의 피가 키메라의 가장 각광받는 생명의 원천이었
어. 그 엄청난 재생력과 약동하는 생명력은그 어느 것과도 견줄 만한
것이 없었지. 자네,포션이라는 것이 뭔 줄 알겠지?'
"그야 성직자들의 축복을 받은 생명수 아닙니까?"
당연한 듯이 말하는 복면의 사내를 보고 크라드마는 피식 미소 지
으며 말했다.
"꼭 그렇다고만 할 수 없지. 맹물로 된 가짜 포션도 있지만, 일부 포
션의 경우트롤의 피를가공처리한 것도 있다네. 어떤 신전에서는포
션의 효력이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서 그것을 조금 섞어서 판매하기
도 하지. 그만큼 엄청난 재생력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트롤의
피 야."
"으음, 그렇군요."
"트롤의 피는 그렇게도 강력하지만, 뛰어난 키메라를 만드는 데는
역부족이지. 상식 이상의 근력을 지닌 키메라를 만들려고 하면 그 힘
을 버티지 못하고 근육과 뼈대가 분리되어 터져 나가거나 아니면 산
소가 모자라서 괴사하는 경우도 생긴다네.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는 점이 이것이지."
크라드마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상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금 말을 이었다
"여기 이 자료를 보면,뼈대에 붙은 치밀한 근육 조직을 통해 엄청나
게 강한 힘을 내는 키메라라는 것을 알 수 있어. 하지만 그 조직을 지
탱하는 피가 뭔지는 도저히 알수가 없더군. 뭔가 획기적인 것이 쓰였
을 텐데 말이야. 그게 뭔지를모르겠어‥‥‥‥ 말라죽은 핏덩이만을 가
지고 알아내는 데는한계가 있으니까말이야."
"그렇다면 도저히 알수 없는 것입니까?'
"이것 하나는 확실하지. 알카사스에서 제작된 키메라는 절대로 아니
야, 만약 그런 엄청난 생명의 원동력이 발견되었다면 벌써 보고가 을
라갔을 테고,그것을나도 알았겠지. 내가 있는 연구소는 군대에 납품
되는 키메라를 연구하는 곳이야. 당연히 뛰어난 키메라를 생산하는
기법이 발견되면 지체없이 우리 연구소로보고서가올라오지."
"그렇다면 딴 나라에 가서 알아 봐야겠군요.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
니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점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
만‥‥‥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 떠날 텐가?"
"예,더 이상 이곳에 있어 봐야소득도 없을 테니까요."
잠시 궁리를 하던 크라드마는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어조
로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세."
"예?'
"나는 키메라를 연구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엄청난 것이 개발된 것
이 확실하다면,자네만따라다니면 뭔가 얻어들을 수 있겠지. 안 그런
가?뛰어난 기사들과 마법사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정말 얻기 힘든
기회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네. 데려가줄 거지?"
한참 궁리하던 복면의 사내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면서 허락했다.
어쨌든그 마법사에게 신세를 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빨리 준비하시죠."
"고맙네, 그런데 다음 목적지는 어딘가?"
방금 전까지는 자신들의 신상 정보가 누출될 것을 우려하여 알려
주지 않았었지만, 함께 행동한다면 행선지를 알려 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에 복면의 사내는무뚝뚝한 어조로짧게 대답했다.
"코린트."
정령지를 다스리는 고도의 계략
"전하,보고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
"뭔가?"
"예, 오늘 새벽에 트루비아가 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는 보고가 들
어왔사옵니다. "
베르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트루비아는 토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강
력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으음, 트루비아? 가만있자‥‥‥ 트루비아라면 본국에 흡수되었다가
6년 전의 전쟁에서 크라레스의 도움으로 독립한 그 작은 왕국 말인
가?"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레티
안에게 물었고, 그녀는 언제나 그러하듯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전하. 바로 그 왕국이옵니다. "
"으음, 거기가 맞다면 토리아 왕국을 침공할 여력 따위는 없을 텐
데‥‥‥"
침착한 어조로 말하는 로체스터 공작에게 베르딘은 확신에 차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벌써 트루비아가 움직인 원인을 알고 있었던 것
이다.
"저도 그 점을 수상하게 여기고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6년
전 전쟁에서 크라레스 편에 서서 전투를 벌였고,그 덕분에 노획물에
대해서 일정량을 할당받은 모양이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크라레스
에서 동맹국에만 판매하고 있는 테리아라는 고성능 타이탄을 몇 대
구입한 것 같다는보고가 입수되어 있사옵니다. "
"추정 수량은?"
"정보에 의하면 5기에서 8기 사이로 추측되옵니다. "
"8기라‥‥ 겨우그 정도타이탄 만을가지고침공할수 있을정도
로 토리아 왕국이 만만한 국가가 아닐 텐데?'
"예전에는 그랬지요. 하지만 6년 전에 본국을 도와 준다고 기사단을
파견했다가 10기의 타이탄을 상실한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옵니다.
그리고 테리아라는 타이탄에 대해서 조사해 본 결과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을 알아 냈사옵니다. "
"뭔데 그러나?"
"예, 첩자들의 보고로는 거의 카프록시아 급에 맞먹는 파워를 지니
고 있다고 하옵니다. "
베르딘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프록시
아 급이라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근위 타이탄으로 사용하고 있는 타
이탄과 동일한 성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트루비아가 수입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사실이었다.
"카프록시아 급이라고? 카프록시아 급이 8기 정도라면 우습게 여길
전력이 절대로 아니지. 그래‥‥‥ 그 정도라면 힘이 허약해진 토리아
왕국을 침공할 만도 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베르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사옵니까? 일단은 철십자 기사단에 출동 대기
명령을 내려 두었사옵니다만‥‥‥‥"
아무리 베르딘이 정보부를 통괄하고 있다고 하지만,기사단을출동
시킬 정도의 권력은 지니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각 기사단
에 출동 대기를 명령할 정도의 권한은 있었다.
기사단이 출동을 하려면 그 인원이나 장비를 챙겨야 했고,또 그들
이 움직이게 될 마법진도 준비해야 했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로 했
다. 그렇기에 베르딘은 기사단이 투입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판단되면 출동 대기 명령을 내린 후 총사령관에게 보고
한다.
그러면 총사령관이 기사단의 출동을 명령했을 때 그 기사단은 벌써
출동준비 완료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고,조금이라도 빠른 시간 안에
그곳에 투입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십자 기사단은 제1차 제국 전쟁 후 대대적인 개편이 가해졌다.
코린트는 구형 타이탄을 모두 다 없애 버리고 그것들로 신형 타이탄
을 만들었기에 철십자 기사단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었지만,금십자
와 은십자 기사단이 정원을 채우게 되자 다시금 편성되어 새로 생산
되는 타이닫을 지급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 보유 타이탄
은 브기였고 한 대씩 아주 천천히 늘어나고 있는중이었다.
하지만보유 전력이 타이탄 38기라고하지만 철십자 기사단이 지닌
전력은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차이를나타내고 있었다. 그 모
든 타이탄은 현재 코린트의 신형 주력 타이탄인 미노바-P2형이었기
때문이다.
1.5의 출력을 지니는 이 강력한 타이탄 르기를 토리아 전선에 투입
한다면 곧장 결판이 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토리아의 동맹국이 코린트인 것처럼, 트루비아
는 크라레스라는 동맹국을 등에 엎고 있는 것이다.
"글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동맹국이니까 도와 주는 것이
좋겠지만, 이게 상황이 아주 미묘해. 트루비아는 크라레스의 동맹국
이란 말이지, 본국에서 기사단을 투입한다면 크라레스도 군대를 투
입할 수 있는 기회를가지게 될 것은자명한 사실이지. 잘못하면 토리
아 전선에서 크라레스의 정규 기사단과 일전을 벌여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토리아는 포기하는 것이옵니까?"
베르딘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오랜 시간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
에 잠겼다. 기사단을투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의 생각은 오래
도록 계속되었다. 그만큼 토리아 전선에 기사단을 투입하는 것은 국
제적으로 미묘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결심을 내린 로체스
터 공작은 시선을부하에게로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자네는 그쪽 전쟁터에 첩자를 몇 명 파견
해서 혹시나 그 전쟁의 배후에 3라레스가 관여하고 있는지 철저히
조사해라. 만약 그 녀석들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라면 그 즉시 병
력을 파병하여 응징해야 해. 그러나 이것이 만약 트루비아의 독자적
인 움직임이라면 그냥 두자구. 괜히 크라레스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을 것 잗으니까 말이지."
"예, 명령대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로 첩자들이 트루비아를 철저히 조사했지만
크라레스가그 일에 관여했다는그 어떤 중거도 잡을수 없었다. 타이
탄이 동원된 전투가 벌어진 결과 트루비아가 코린트의 예상보다 2기
많은 12기의 타이탄을 동원한 것이 밝혀졌지만, 거기에 탑승하고 있
던 기사는 트루비아 인이었고 또 타이탄 또한 완벽한 트루비아 정규
군 소속이었기 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코린트는 토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을 단순한 국지전
정도로만 판단하고 철십자 기사단에 대한 동원 준비령을 해제해 버
리게 되었다.
트루비아는 엄청난 속도로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여 일주일 만에 토
리아 왕국의 수도를 점령했고,토리아 왕국은 트루비아 왕국 토리아
령으로서 흡수되고 말았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재빨리 전쟁이 종결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트루비아 왕국이 코린트 제국의 침입을 받았을 때 살아 남은 방법이
상당한도움이 되었는데,이것은 매우 재미있는사실이었다.
트루비아 왕국은 전 영토가 코린트에 함락되었다고 하더라도 국왕
이 살아 있다면 국가가 절대로 멸망하는 것이 아님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얻은 체험을 이번 전쟁에서 십분 활용하여 상대국의 국
왕과 그의 가족들을 잡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토리아 기사단을 전멸시킨 후 거의 쉬지도 않고 그 여세를 몰아 수
도를 포위했고,포위 작전과 동시에 수도 함락 작전도 함께 수행되었
다. 기사단이 전멸 당한 훈였기에 토리아 왕국은 타이탄을 앞세운 트
루비아 군대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거의 순식간에 수도가 함락되
었으며 왕족과 귀족들 거의 대부분이 생포되는운명에 처했다.
왕이나 왕족을 처형했다고하더라도국왕의 먼 친척뻘 되는사람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고는 반정부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도 허다했
기에 침공군 사령관인 그라드 시드미안 후작은 아주 빨리 움직였다.
그는 최대한 빨리 수도 외곽을 포위했고, 또 국경을 봉쇄했다. 그런
후 철저하게 수색하여 모든 귀족들을 남김없이 잡아들였다. 그리고
여태껏 모든 점령 국가들이 그랬듯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몽땅 다
처형해 버렸다.
"우리가 너무나도 많은 죄를 짓고 있는 것 같구려."
시드미안의 충고를 받아들여 비밀리에 점령지를 방문한 젊은 국왕
은 처형장에 쌓여 있는 어린 아이들의 시체를 보며 한 줄기 이슬을 뿜
어 내듯 말했다.
"전하, 최대한 빨리 점령지를 안정시키려면 이 방법 외에는 없었사
옵니다. 하지만 이 피값은 전하가 아닌 제가 모두 짊어지겠사옵니다.
전하께옵서는 일주일 후에 이곳에 방문하시어 점령지를 피로서 장악
하고 있던 저를 총독 직에서 파면하시고 다른 인물을 세우시옵소서.
그런 후 선정을 베푼다면 그 전의 억압은 시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것이옵니다. "
"그렇게 된다면 경의 명성에 누가 될 텐데‥‥‥‥
"소신의 하찮은 명성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사옵니다. 하지만
전하의 위치는 절대로 흔들리면 아니 되십니다. 그 점을 명심해 주시
옵소서."
"알겠소. 하지만그대에게만 너무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구려."
"오로지 소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젊은 왕은 눈물을 머금고 이 우직한 무사의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후 젊은 왕은 외형적으로 봤을 때 시드미안을 '숙청'
했다.
그의 죄목은 필요 이상으로 점령지를 탄압했다는 것이었다. 점령지
의 주민들은 이 잔인무도한 기사를 숙청한 후 인자하면서도 노련한
인물로 총독을 교체한 젊은 왕을 칭송했다.
원체 지독한 탄압을 받았다가 그것이 풀리면서 살기 좋은 방향으로
풀리자 주민들의 불평은 급속도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와 함께 젊은
왕은 현명한 군주로서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각인되게 된다. 한 충성
스런 무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역시 트루비아를 잘 선택한 것 같군 순식간에 토리아를 점령해 나
가는 것을 보니 과연 토지에르 경의 말대로 대단한 저력을 지닌 국가
로다. 그가 짐의 곁에서 떠난 후에야 그의 소중함을 한층 깊이 깨닫게
되는구먼."
황제의 한탄에 루빈스키 대공이 재빨리 끼여 들었다.
"폐하,그런 말씀은 너무 이르옵니다. 토지에르 경이 죽은 것도 아니
고‥‥ 며칠 간 위험하기는 했지만, 이제 생사의 고비는 넘겼다고 하
지 않사옵니까? 이제 조만간에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폐하의 앞에 나
타날 것이옵니다. "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전에 찾아갔을 때, 너무나 안색이 창백하
고 초췌하여 그를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겼던 것은 사실
이라네, 그대와 토지에르는 짐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야. 그대도 이
번 일을 밑거름 삼아 매사에 조심하게나. 토지에르 경도 소중하지만,
그대를 잃는다면 짐은 도저히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없을 것이
야."
"소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어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짐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네. 감사할 필요까지는 없지."
"폐하, 그건 그렇고 트루비아에서는 대사를 파견하여 노획한 타이탄
15기를 테리아로 바꾸고 싶어하옵니다. 몇 대나 주는 것이 존겠사옵
니까?"
잠시 궁리를 하던 황제는 루빈스키에게 물었다. 원래가 황제의 상
담역은 토지에르였지만, 그가 없는 지금 루빈스키에게 모든 문제를
상의하고 있는 것이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황제의 물음에 루빈스키는 자신이 부하들과 장시간 상의해서 준비
한 대답을 말했다. 토지에르가 돌아을 때까지 자신이 황제의 상담역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아마도 7기 정도만 주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10기 정도는 주
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누가 봐도 본국에서 트루비아를 지원해 주
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옵니다. 이쪽에서도 약간의 이익을 남기
면서 판매하는듯한 인상을 줘야 할 것이옵니다. "
"그것이 좋겠군. 경의 판단대로하게나."
"예,폐하."
"2단계 작전은 언제 시작할 예정인가?"
"예, 일단트루비아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난후 탄벤스 공국
쪽으로 진격시킬 예정이옵니다. 탄벤스 공국이 무너지고 나면 그
다음은 리비아나 왕국의 차례가 되겠지요. 그리고 미란 국가 연합에
서도 테리아를 수입하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1차 분으로 10기를 원
하고 있는데,그쪽에 납품할 것도 생산하라고 지시해 뒀사옵니다. "
"미란도 장차 쓸모가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수출해 주게나. 토지에
르 경이 자리를 비웠으니, 타이탄 생산에도 차질이 클 거야, 자네가
그쪽에도 신경을 좀 써 주게나,"
"예,폐하."
"그건 그렇고 트루비아에서만 전쟁을 벌인다면 코린트가 의심할 가
능성도 있지 않을까?"
"예,그것 때문에 다른 왕국들과도 의논을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하
지만 너무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이, 그것도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상
대로 벌어진다면 코린트가 눈치를 채겠지요. 그 때문에 조심에 조심
을 거듭하고 있사옵니다. "
"알겠네. 그 일도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나. 근위대의 교육도 중요
하기는 하지만, 경은 최선을 다하여 코린트가 힘을 키우지 못하게 막
아야 할 것이야."
"옛,폐하."
아주 재미있는 정보
"이 녀석 인가?"
"옛. 이 자가 연구소의 책임자라고하더군요."
복면을 쓰고 있는 이 괴이한 사내들은 마법진 위로 나타난 깡마른
괴팍하게 생긴 노인을자세히 노려보며 대화를 나누는중이었다.
"그래?수고했다. 뒤처리는 잘 했겠지?'
상관의 말에 복면을 뒤집어쓴 부하는 아주 자신 있다는 듯 대답했
다. 연구소에서 일하던 수련 마법사한 놈을 납치해서 모든 것을 실토
할 때까지 철저하게 고문을가했고,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 후에는완
벽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시체가 발견되려면 며칠 걸릴지도 모르지
만,그때까지는 '실종'으로처리될 것이다
사실 하위 직에 있던 수련 마법사 한 명이 없어졌다고 해서 큰 문제
로 삼는 것은 아니었기에 놈들도 대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또는 일이 힘들다고 도망치는 하급 마
법사들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예,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
"좋아. 행동은 오늘 밤에 하기로 하지. 마법사라는 것들은 마법 도구
를 이용해서 순실간에 도망칠 수 있으니 그게 문제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들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마법사가슬쩍 끼여 들었다.
"이보시오,오늘 저녁에 행동을 시작할 거요?"
"예,납치해서 이곳으로 데려을 테니 기다리십시오."
노 마법사는오늘 밤에 또 한 명의 마법사가 여기에 들어오게 될 것
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들과 함께 행동해 보니 마법사둘을 제외하
고 여덟 명 전원이 그래듀에이트들이었다.
이 정도 패거리가 함께 돌아다니기도 매우 힘든 노릇이었지만, 또
그런 만큼 그들이 지닌 능력은 엄청났다. 철저하게 대비를 하지 않는
한 이들의 행동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자신의 집에 있던 키메라들과 견인 족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듯이,
오늘 납치되어 올 마법사의 집에 있던 경비들도 뭐가 되었건 죽은 목
숨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은 다섯 시간쯤 후에 퍼덕거리는 자루 하나를 등에 짊어
지고 다시 나타났다. 코린트의 경우 키메라 연구는 알카사스와 달리
그렇게 활발하게 진척되어 있지 못했다. 키메라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아니었고, 일부 마법사들의 흥미에 의해 연구되는 수
준이었기에 경비도 취약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는 아주 간단
하게 납치되어 와서 이 자리에 끌려왔다.
"이런 나쁜 녀석들!네 녀석들의 정체가 뭐냐?"
재갈이 풀리자마자 냅다욕설부터 퍼붓는 늙은이를 향해 복면을 쓴
한사내가 험악한 눈초리,를 빛내며 으르렁거렸다
"이봐,죽기 싫으면 닥치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해."
그것을 보고 복면을 쓴 또 다른 사내가 나무랐다. 그러자 처음에 으
르렁거리던 복면을 쓴사내는 조용히 물러났다.
"이봐,말 버룻이 그게 뭔가? 이보십시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그
대를 납치해 왔지만, 몇 가지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만 해 주신다면
조용히 보내 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크라드마 경."
크라드마 경은 한밤중에 납치되어 와서 머리 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있는 그 마법사에게 다가가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키메라요. 나도 그 때문에 납치되어 왔
었소. 하지만 저기 있는 대장이 하는 말은 사실이니까 제대로 살아서
풀려나고 싶다면 협조하시는 게 좋을 거요. 아아,그런 눈초리로 바라
보지 마시오. 나도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오. 혹시 이런 데이터를
낼 수 있는 키메라의 제조법에 관해 들은 적이 있소?'
크라드마가 내미는 종이에는 빽빽하게 수치가 적혀 있었다. 바로
그것은 키메라의 데이터가 아니라 그래듀에이트 급 기사의 데이터를
조금 고친 것이었다.
그래듀에이트를 해치우는 데,그와 비슷한 체격 조건이라면 아마도
그 데이터 또한 비슷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물
론 기사의 경우 검술이라는 것과 마나라는 부가적인 요소가 들어가
기에 그 정도의 속도를 근력만으로 내기 위해서 데이터의 수치는 좀
더 높여져 있었다.
"나를 놀리는 거요?"
"설마‥‥‥ 왜 사람을 납치까지 해 와서 농을 건단 말이오. 이건 확실
한 데이터요."
"이 엄청난 근력, 폐활량‥‥‥ 이런 것을 키메라 따위로 만들 수 있다
는 말이오? 만들 수 있다면 내 눈 앞에 한번 가져와 보시오. 그럼 내가
믿어 줄 테니."
"그대는 이런 키메라가 있다는 소문도들어 본 적이 없소?"
"없소."
"이상하군. 본국을 제외하고는 코린트가 마법에 있어서는 최고를 달
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대는 알카사스 인이오? 그런데 어떻게 알카사스에서 이 따위 짓
을 한단 말이오?알카사스는 키메라를 실전에 배치했을 정도로 엄청
난 기술이 쌓여 있지 않소? 본국은타이탄 제작에 있어서는 최고를 달
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키메라에 있어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오. 그
것도 모른단 말이오?"
이때 복면을쓴사내가 그들의 대화에 끼여 들었다.
"죄송하지만,그대의 말을 못 믿는 것은 아니나 코린트가 키메라 제
작에 있어서 그렇게 불모지라는 것은 믿기 힘듭니다 "
"이런 제기랄! 못 믿겠다면 그만둬. 본국의 윗분들은 타이탄만으로
도 세계를 제패했었는데, 겨우 키메라 따위의 연구에 돈을 쏟아 부을
필요를느꼈을 것 같아? 또6년 전에는 엄청난 전쟁이 있었고,그 때문
에 기사단이 절단 났었는데 키메라 연구에 돌릴 여력이 어디에 있었
겠어? 에잉!말이 되는소리를 해야지,원‥‥‥‥
"그래도 당신의 말을 그대로 믿긴 힘드니 조금 강도 높은 조사를 해
야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봐,!"
그러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복면을 쓴 인물 둘이 접근해 왔다.
그들은 다른 복면인들과는 달리 가느다란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들은 마법사의 몸에서 모든 장신구를모두다 찾아 내어 제거했다. 그
것들이 마법 도구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취하는 조치였다.
그런 다음 한 사람이 중얼중얼 뭔가 주문을 외우는 사이 또 한 사람
은 납치해 온 마법사의 목에 걸어 놓았던 마나가 모이지 못하게 막는
마법 도구를 없앨 준비를 했다.
그런 후 동료가 마법을 시행하는 그 순간 마법 도구를 없애 버렸다.
동료가 시행한 주문은 매료의 주문으로서 적을 동료처럼 느끼
게 만들어 모든 것을 털어놓게 만드는 아주 지독한 정신계 마법이었
다. 그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그 마법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낱낱이
실토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정신계 마법은 부작용이 크기에 아무리 적이라도 잘 사
용하지 않는다. 그 부작용은 약간의 두통 정도로 끝나는 사람도 있었
지만 최악의 경우 정신 이상에 걸리는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 무자비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아무도 막지 않
았다. 부작용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 마법사는 타국의 인물이었고,또
그는 포로였기 때문이다.
"전하, 재미 있는 정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베르딘에게 로체스터 공작은 궁금증이
밴 어조로 물었다.
"무엇인가?"
"예,토리아를 정복한 후 피로써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드미안 후
작이 숙청되었다는 보고이옵니다. 하기야 그의 철권 통치는 너무 심
하다고 들었으너까요."
베르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베르딘에게 여태껏 보고받은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시드미안은 숙
청될 정도로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토리아 왕국에 입성한 후 귀족이라면 어린애까지 다 처형한
것이 좀 심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로체스터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줄수 있는 행위였다.
시드미안은 전쟁 후 무력을 듬뿍 동원하여 치안을 확실하게 유지했
는데, 이때 애매하게 도매 급으로 얽혀서 처형을 당한 시민들도 왜 있
었다. 그야말로 숨소리 하나 제대로 못 내도록 철저하게 때려잡으려
고 들었기에 파생된 결과였다.
그러면서 전후 불안정한 시기를 틈타 물가를 올리려고 들거나, 상
품을 쟁여 놓고 팔지 않는다거나 하는 상인들을 철저하게 잡아 내어
족쳤기 에 물가는 왜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전쟁 덕분에 거리에 넘쳐 나는 유랑자들을 몽땅 다 잡아들
여서 파괴된 요새나 도로등을 수리하게 했다.
그들을 매우 저렴한 인건비로 부려먹기는 했지만, 일단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을 정도로 품삯을 지급했기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
는 것 외에도 치안 유지라든지 상업이나 공업이 다시 활기를 떨 수 있
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물론 그 부차적인 것은 몇 달 정도가 지나야 효력이 발휘되기 시작
하겠지만, 로체스터 공작의 경험으로 봤을 때 시드미안의 점령지 관
리는 매우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별로 재미있는 정보라고는 볼 수 없군 그는 상당히 뛰어난 기사였
었는데‥‥‥ 적이라고 해도 뛰어난 기사가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
이지. 설마 공개 처형 당한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를 처형했다면 트
루비아 국왕은 정말 형편없는 녀석이야."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베르딘은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옵니다. 트루비아 촤고의 기사인데 처형할 수는 없었겠지요.
불시에 방문한 국왕이 점령지의 탄압 실상을 본 후 그에게 공작의 작
위를 내릴 계획을 취소했고,곧바로 본국 소환 명령과 함께 1만 골드
의 벌금형에 처했다고 하옵니다. "
"벌금형이라고? 그렇다면 그 외의 직위는보존된 것이군."
"예,전하."
베르딘이 자신의 말을 인정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이제야 베르딘이 처음에 들어오면서 '아주 재미있는 정보'라
고 했던 말의 뜻이 무엇을뜻하는 것인지 눈치 챈 것이다.
"으하하핫! 그래, 그렇게 된 것이군. 자네 말대로 아주 재미있는 정
보야. 초기의 강력한 탄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시민들의
불만을 시드미안에게 뒤집어씌운다 이거로군. 그러면서 그 녀석은
본국으로빠져서 군대의 통솔에만 힘쓸 테고‥‥‥‥
하기야그가 해임되었을 때쯤에는 점령지에서 거의 불만 세력은 뿌
리가 뽑혀 버린 후일 테니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안정을 찾게 되겠지.
상당히 재미있는 작전이야‥‥‥‥
그런데 어떤 녀석이 그런 얄팍한 수를 생각해 낸 것이지?설마, 그
새파란국왕 녀석인가?"
"그것까지는 알아 낼 수 없었사옵니다, 전하."
"좋아. 그 정도로 머리를 쓸 줄 알고,또 힘이 있다면 토리아를 넘볼
자격이 있다고 봐야 하겠지."
신의 축복인지 악마의 장난인지
마리안은 몇몇 친척들만이 초대된 결흔식을 조촐하게 올렸다. 비록
미란 국가 연합의 가므 의장이 예상 외로 하객 명단에 올라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신분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간소한 결혼식이라는 사
실을 부인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도,또 그 뒤에 아버
지의 강요에 못 이긴 결혼식도 축복받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홀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녀의 남편인 아리아스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은 결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결혼 전에 아리아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을
위해 성장기를 모두 시골에서 보냈다고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신혼 여행이 끝난 후 병약한 남편을 따라 시골에
내려가서 고적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순박한 농
노들에 의해 경작되는 자그마한 시골 농장,작기는 하지만 귀족의 품
위를 살린 예쁜 집, 그 집의 정원에 꽃을 가꾸고 하인들을 거느리고
하다 보면 곧이어 아이들이 생길 것이고,그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차
츰 세월이 흘러가리라‥‥‥‥ 그리고 그녀의 사랑도 잊혀져 가리
라‥‥ 이것이그녀가세운미래에대한설계였다.
하지만 만리안도 그녀의 아버지도 신혼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
을 뒤늦게 통보받고 약간 당황했었다. 신혼 여행 대신 그녀의 친정 집
에서 3일 정도 묶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받고, 그녀의 아버지인
크라크 지벨리아 백작은 사위가 딸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게 되면 서
로 만나기도 힘들 테니 이쪽의 사정을 봐 준 것이라고 매우 고마워했
었다.
13일 동안 지벨리아 백작은 결혼 지참금 외에도 혼수품과 함께 딸
에게 딸려 보낼 여자 노예를 다섯 명 정도 선발해 뒀다. 그리고 시부
모가 될 스와질렌 후작 부처에게 보내는 흔수품도 최고급으로
장만해 두었다. 그렇게 해서 사위가 딸과 함께 떠나는 날,그 혼수품
과노예들을 실은세 대의 마차가 정원에 대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라? 이건 다 뭡니까?'
사위의 경호원들 중에서 대단한 덩치를 하고 있는 무사가 물어 왔
기에 지벨리아 백작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상대가 스와질렌 후
작 가문의 사병이라고 하지만, 일단 사위를 호위하는 정도의 인
물이니 그렇게 높은 신분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하대를 하고
있었다.
"딸 아이의 혼수품이네. 왜,너무 약소한 것 같은가?"
스와질렌 가문이라면 그래도 미란에서는 알아주는 명문이었기에
그는 그 사실이 조금 켕기고 있었다. 사위의 건강이 별로 안 좋은 데
다가 막내아들이니까 유산도 사위에게는 돌아갈 몫이 별로 없을 테
고,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 봐도 말이 스와질렌 가문이지 그렇게 대단
한사위를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벨리아 백작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잔머
리를 굴려 가며 장만해 둔 혼수였기에 약간은 부족한 느낌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대답은완전히 그의 예상 밖이었다.
"저쪽에 아르티어스 님께서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계십니다.
말이나 마차는 필요 없으니까 마법진이 완성된 후에 짐만 따로 그곳
에 옳겨 주십시오."
마법진이라는 말에 백작은 의아함을느꼈다. 스와질렌 후작이 거처
하는 저택까지는 그런 거창한 방법을 동원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가
까웠기 때문이다.
"마법진이라고? 스와질렌 저택까지는 채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데
무슨 마법진을‥‥‥?"
백작의 의문에 그 경호병은흠칫하며 둘러댔다.
"그 두 시간도 아까우니까 그렇지요. 후작 나으리께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며느리를 만나보고 싶어하시거든요."
"그런가? 알겠네. 내 그렇게 지시하겠네,"
그리고 공간 이동 후에야 마리안은 자신의 결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거대한 황궁 한편에 마련된 마법진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경비병들과 노예들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
화려한복장을 한사람들이 일제히 인사를 건넸고,그 뒤로 엄청난 수
의 군인들이 도열하고 서서는 일제히 예를 올렸다. 그녀는 그것을 보
고 남편의 신분이 자신이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마중 나온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황궁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거대하고 웅장한 궁
전을 롤 수 있었고,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귀족의 여식이었
기에 왕궁에서 거행되는 무도회에는자주 참석했었다.
그렇기에 가므 의장이 거처하는 왕궁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인파들의 뒤로 보이는 화려한 궁전은 절대로
가므의 왕궁은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마리안은 얼이
빠진 채 남편의 손에 이끌려 황궁으로 걸어가며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없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아찔한 것이 진짜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것
은 그녀의 옆에서 팔장을 끼어 주고 있는 그녀의 남편의 덕이었다. 비
쩍 마른 샌님 스타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이 나약한 남편
은자그마한 정신적 힘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그녀는 남편에게 이끌려 붉은 양탄자 위를 정신없이
걸어가서 거대한 흘로 안내되었다. 그 거대한 흘에는 높은 단상이 한
쪽구석에 자리잡고 있었고,그 위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의자
가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30대 후반, 많이 봐도 4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
지 않는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묵직해 보이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앉아 있었다. 좌우에서 쑤군거리는 나이 많은 사내들의 속삭임을 통
해 그녀는 그가 '황제' 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안개가 긴 듯 희뿌예진 그녀의 머리 속으로 황제라는 단어를 자신
의 이름 뒤에 붙일 수 있는 군주는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
다. 코린트,크루마,크라레스,타이렌 등 정말 엄청난 국력을 지닌 나
라들만이 감히 황제라는 칭호를쓸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물거리는 시선으로 올려다 보니,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
대한 홀의 한쪽에 마련된 높직한 단상에 그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그
의자의 좌우에는 거대한 덩치의 타이탄 두 대가서 있었다.
생김새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남자의 오른쪽에 서 있는 타이탄은
한 손에는 원형의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검을 가지고 당당하게 서
있고, 왼편에 서 있는 것은 검집에 넣어 둔 검을 왼손에 들고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언제라도 달려들 것 같은용맹함을나타낸다면,
왼쪽의 것은 필요할 때만 검을 뽑겠다는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듯
보였다. 과연 모든 위엄과 현명함을 두루 갖춘 일국의 황제 다운 자태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저런 황제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온 것을 보면 자신의 남편
은 정말 대단한 신분임이 확실했다. 아마도 엄청난 귀족의 자제일 수
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실의 가까운 친척인지도 몰랐다.
그런 엄청난 신분의 남자를 오점이 있는 육체와 정신을 지닌 자신
이 남편으로 감히 맞이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밝혀진다면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도,어머니도,그리고 자신의 옛 애인도 모두 다 죽음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는 식은땀까지 흘려 대며 남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이 미덥지 못하고 가녀리게 생긴 남편 외에는 의지할 곳
이 없을 거라는 생각밖에 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불안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그녀의 남
편은 그녀를 슬쩍 이끌어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는 인물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던 것이다.
"아버 님 ‥‥‥."
그녀의 귀에는 아버님이라는 말 외의 다른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아버님이라는 그 말에 그녀의 섬세한 정신은 더 이상 압박을 버터 내
지 못하고 끊어졌던 것이다.
황자의 부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여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신
의 축복인지 모르겠지만,그녀에게는 악마의 장난과 다를 바가 없었
다. 자신의 비밀이 발각되는 날에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형제 자매들도,사랑했던 연인도,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일가 친척들까지도‥‥‥‥
"어떻게 된 일인가?"
첫 인사를 드리기 위해 들어왔던 며느리가 갑자기 쓰러지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좌우에 늘어선 중신들이 당황해서 웅성거
리는 가운데 황제는 근엄하게 앉아 있다가 황좌에서 허등지등 단상
아래로 내려와서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노 마법사에게 물었
다. 노 마법사는 이 리저 리 살펴본 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예, 몸에 다른 이상은 없으신 것 같사옵니다. 아마도 뭔가 다른 이
유로 혼절하신 것 같사옵니다. "
"이런 변이 있나. 갑자기 며늘아이가흔절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황제는 여기까지 말한 후 한참 동안 궁리를 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
었다.
"그렇군!너는 며늘아이에게 네 신분에 대해서 말해 줬느냐?"
황제의 물음에 아리아스는 머뭇거리다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
다.
"저‥‥‥ 죄송하옵니다,아버님. 아찍 말하지 못했사옵니다. "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한 황제는 혀를차면서 말했다.
"쯧쯧쯧‥‥‥‥ 뭐, 지나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이 아이를 방으로
옮겨서 간호해 줘라."
"옛,폐하."
시녀들이 기절한 며느리를 엎고 나가는 됫모습을 바라보며 황제는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둘째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별종으
로 놀더니만 마누랏감마저도 별종을 구한 것 같아 울화가 치밀어 오
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남편이 황자라는 것을 안다면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여자
들은 환호할 것이다. 기뻐했으면 기뻐했지,저렇듯 기절할 이유가 없
는 것이다.
물론 기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절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극소수의 여
자가자신의 며느리가 되었느냐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황제는 짜증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에잉. 며늘아이가 저렇게 되었으니 오늘 환영식은 취소하기로 하
지. 모두들 물러가라."
"옛,폐하."
모두들웅성거리면서 흘의 문을나서는 가운데 황제는 뒤돌아 서서
걸어가기 시작하는 한 소녀를불러 세웠다.
"치레아 경!"
"예?"
소녀가 뒤로 돌아서자 황제는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무사히 일을 잘 끝내서 다행이야. 사흘 후에 황자의 결혼식이 거행
될 텐데 와줄수 있겠나?"
이미 미란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는 했지만,그렇다고 왕자가 미란에
서 비밀리에 결흔식을 올렸다는 말만으로 중신들을 설득하기는 어려
웠다.
그 결혼식은 마리안의 부모를 위한 결혼식이었을 뿐, 정식으로 황
실의 예법에 따른 결혼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아리아
스황자내외는 신하들을모두모아놓고 거창한 결혼식을다시 한 번
더 치를 예정이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 오랜 시간 나가 있었던 관계로 일이 상당히 많
이 밀려 있을 것입니다. "
이것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사실상 치레아에서 마법진으로 오면 되
니까 몇 시간 정도만 시간을 할애하면 될 것인데도 이렇게 거절하는
것은 다크가 원래 이런 일에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
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할 수밖
에 없었다.
"그래?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머쓱한 표정으로 말하는 황제를 뒤로하고 문을 나서 려던 다크는 다
시 뒤로돌아서며 황제에게 물었다
"혹시 토지에르 경에게 무슨 일을 시키셨습니까?"
"응?그‥‥‥‥ 그건 왜 묻나?"
갑작스런 다크의 물음에 황제는 당황했다. 다크가 여기에 잡혀 있
는 가장 큰 이유는 토지에르 때문이었다. 토지에르에게 뭔가 일이 생
겼다는 것을 알면, 다크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을
잘 알기에 황제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일단 시간을 끌기 위한 물음
을 더듬거리며 던졌다
"토지에르가 모두다 모이는자리에 없었던 적은오늘이 처음이니까
요. 이리로 오기 전에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찾아갔더니 자리에 없다고
하던데요?"
황제는 다크가 토지에르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는데도 그의 행방
을 제대로 알아 내지 못했다는 것을 신께 감사 드렸다. 하지만 일단
감사는 나중이고 이 어려운 곤경으로부터 빨리 벗어나는 것이 중요
했다. 황제는 자신인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머리를 회전시키며
뭔가 둘러댈 말을 지어 냈다. 하지만 그렇게 급조하려니 말이 더듬거
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그 그 그건 내가 시킨 일이 있어서 아주 멀리 갔다네. 그러니까,
그‥‥‥토지에르 경은 아주중요하면서도 비밀스런 일 때문에 아주 멀
리,멀리‥‥‥그래,거기!알카사스에 가 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가
거기에 가 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코린트나 크루마에서 자객을
보낼 수도 있어. 그러니 자네도그냥 모른 척해 주게. 알겠나?"
황제의 태도에 다크는 조금 수상쩍은 눈길을 보냈지만, 일단은 수
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토지에르가 공무 수행 차 알카사스에 갔다는
데 뭐라고 반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전하."
"젠장! 끝내는 크루마까지 왔군‥‥‥‥"
투덜거리는 복면을 쓴 사내를 향해 노 마법사는 슬그머니 물어 봤
다 여태껏 왜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정체를 밝힐 만도 하건만,상
대는끝내 자신 앞에서 복면을 벗지 않고 있었다.
"이보시오,그럼 그대들은크라레스 인들이오?"
"아닙니다. "
"그럼 어느 나라 사람들이오?"
"그건 아실 필요 없습니다. "
"만약 크루마도 아니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요?"
노마법사의 의도를 눈치 채고 우두머리는 일부러 확정적으로 말했
다. 사실 그들의 모국이 크라레스니 크라레스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
지만 이런 식으로 그가 말한 이유는 크루마가 범인일 가능성이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강대국인 크라레스를 뒤져야겠지요."
"그러고도 없다면?"
"건너뛰었을지도 모르니 다시 알카사스부터 시작해서 한 바퀴 돈후
에 타이렌 제국으로 넘어가야 겠지요."
"그냥 타이렌 제국으로 가지 않고 왜 한 바퀴 돈다는 말이오?'
"타이렌 제국은 본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까, 암살을 시도할 리
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고 건너뛰었을
확률이 높다고 봐야겠지요."
여기까지 말한후우두머리는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은 나가서 정보를 좀 얻어 와라. 크루마의 키메라 생산을 위
한 연구소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아보란 말이다. "
"옛."
우두머리는 밖으로 달려나가는 부하들의 됫모습을 보며,크루마도
아니라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노마법사부터 정신 마법을 사용해서 그
밑바닥까지 훑어 내겠다는 결심을굳히고 있었다. 영감쟁이가 알고 있
으면서 능청을 떨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드니까 말이다.
밝혀지는 황태자의 배후
"폐하."
황제는 정원에서 산책하고 있다가자신을 향해 서둘러 걸어오고 있
는루빈스키 대공을보고반가이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그래,무슨 일이오?"
"예, 폐하. 긴히 아될 보고가 있사옵니다. 좌우를 물리쳐 주시옵소
서."
황제는 루빈스키의 말에 자신의 뒤에 서 있던 기Al들을 뒤돌아 보
며 짤막하게 외쳤다.
"잠시 물러가라."
"옛."
루빈스키는 기사들이 확실한 거리까지 물러간 후에 황제에게 가까
이 다가가서 속삭였다.
"아그리오스 후작의 보고에 따르면 아무래도 범인이 크루마인 것 같
사옵니다."
"으으음, 크루마라고?"
"예,폐하, 그러니 이제 단안을 내리셔야만 하옵니다. 크루마가 적이
라고 생각한다면 그 내통자는 엘리안 황태자 전하이실 가능성이 크
옵니다. 토지에르 경이 이미 말씀을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촹태자 전하께옵서는 세뇌를 당하신 것 같다고 말씀이옵니다. 코린
트에 인질로 갔던 가짜 황태자도 황태자 전하와 거의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토지에르 경이 그를 데려
다가 철저하게 조사해 보고 내린 결론이 아니옵니까? 이제 단안을 내
리셔야 할 때이옵니다. "
"루빈스키 경."
"옛,전하."
"그것을 잠시만 좀 미 뤄 줄 수 있겠는가?"
"예?"
"지금 국가에 중대한 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혐의만으로 그
녀석을 내치고 싶지 않군. 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아이는 생은 그것
으로끝장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짐은 조금이라도 더 그 아이가 살
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군."
루빈스키 대공은 황제가 살짝 꺼내 보인 아버지로서의 소박한 정
때문에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정에 이끌릴 수는 없
는 노릇이 아닌가?
"폐하, 그래도 이것은 국가의 중대사이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적
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사옵니다.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나? 그 아이는놔두고 일단 주위의 잔가지만 먼
저 치게. 그리고 그 아이는 잠시만 더 놔둬 주게. 일단 시작되면 그 아
이는 다시는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걸세. 잠시만이라도
더 그 아이에게 햇볕을보게 하고 싶다네. 그래도 안 되겠는가?"
"칙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
황제는 멀어져 가는 루빈스키의 됫모습을보며 자신의 눈시울이 뜨
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엘리안이 어
렸을 때는 코린트에 대한 복수에 광분하여 그 아이에게 조그마한 정
도 베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장성한 후에는 타국에 인질로 주기까지 했다. 그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이었고,그 때문에 자신의 아들은 만신창이가 된 정신
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황제인 자신의 잘못이었
는데,그 잘못의 대가를 또다시 엘리안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나도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근위 기사 여섯 명을 소집했다. 우선 여섯 명만 소
집한 것은 남은 여섯 명은 황제를호위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근
위대 대장인 론가르트에게 주의 사항을 일러 준 후 황태자의 최고 측
근이라고할수 있는 데이더스 백작부터 잡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백작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황궁에 있을 것이옵니다."
"메트렐 경, 이것은 칙명이다."
"옛."
"경은 데이더스를 잡아다가 감금해 놔라. 내가 올 때까지 그 놈은 살
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지도, 마지시도 못하게 해라. 알겠는
가?"
"옛."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옛 !"
아그리오스 후작의 예상대로라면 토지에르 암살의 배후는 크루마
일 것이다. 그렇다면 크루마에 세뇌 당했고,또 크루마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황태자가 그들의 끄나풀일 가능성은 매우 커지는 것이다. 만
약 공작의 예상대로 황태자가 범인이라면 크루마에서 보내 온 키메
라들은 황태자의 최고 측근인 데이더스 백작의 집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물론 공작의 예상은 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고,조만간에 황태자는 폐위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른팔인 데이더스도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감히
이런 초강수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흘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근위 기사 네 명은 집
주위를 포위하고 있다가 만약 도망치는 놈이 있다면 잡으라는 지시
를내리고 말이다.
"놈들은 어디에 있나?"
손가락의 뼈다귀를 몇 개 분질러 놓자 집사는 고통과 공포에 질려
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횡설수설 다 토해 냈다. 일단 놈들
이 지하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낸 공작은 집사를 앞세우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옛날에 던전 발굴하러 다니던 때가 생각 나는군‥‥‥‥"
군데군데 밝혀져 있는 작은 등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던전
을 뒤지던 때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을 생각하며 집사의 뒤를 따
라 내려가자 어느덧 제일 밑에까지 내려왔다.
똑똑
"들어와라."
집사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
고조심스레 문을 열자 역겨운 피 냄새가 확 퍼져 나왔다
"우그적 우그적‥‥‥ 쩝쩝‥‥‥ 와작‥‥‥ 우직‥‥‥‥"
공작이 집사의 등 뒤로 실내를 들여다 봤을 때,한쪽 구석에는 사람
들이 손을 쓰지 않고 머리를 커다란 통 속에 밀어 넣고는 꼭 개처럼
뭔가를 씹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이 약간 몸을 이동하여 시선을 넓히자 탁자 위에 앉아
서 뭔가를 들여다 보며 포도주 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
어왔다. 그사내는 집사가 아직도 조용히 서 있자 짜증난다는 듯 외쳤
다.
"이봐,무슨 일이야? 들어왔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다가 그 사내는 집사 뒤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뒤늦게 발견
했다. 사내는손가락을 딱소리가나게 튕겼다. 그러자 정신없이 뭔가
를 씹어 먹고 있던 무리들이 재빨리 고개를 뒤로돌려 왔다.
됫모습을 봤을 때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그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하실 안에 환하게 비춰지고 있는 등잔불 아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몬스터들처럼 두털고도 끈적거리는 듯한 피부,그리고 등그러면서
도 광기에 가득 찬 눈,도마뱀 같이 뚫려 있는 콧구멍들,송곳니가 끔
찍하게 솟아올라 있는 악귀와 같은 입에는 방금 전까지 식사를 하던
중이라서 그런지 군데군데 피가묻어 있었다.
"과연,그렇게 된 것이었군."
집사를 밀치면서 앞으로 나오는 루빈스키를 상대방은 금세 알아봤
다. 크라레스의 두 명뿐인 대공들 중의 한 명이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
다.
"루,루빈스키 대공? 젠장 발각된 것인가?죽여랏!"
명령이 떨어지는 그 순간,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네 마리의 키
메라는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며 루빈스키를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루빈스키의 검도 엄청난 속도로 뽑히며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루빈스키의 검이 횐 궤적을 그리는 순간 뭔가가 부딪치는 듯한 금
속성 소리가울려 퍼지며 붉은 피가 확 터져 나갔다. 그리고 토막토막
잘려 버린 키메라의 몸통들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루
빈스키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그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는 사
라지고 없었다.
"젠장,마법 도구를 가지고 있었나?"
루빈스키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괴물의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
했다. 엄청난속도와폭발적인 도약력,단순히 괴물이라고 여기기에는
뭔가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인간이 창조해 낸 생명체가그 정도파
워를 지니고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루빈스키 였다.
"감히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다니‥‥‥‥ 그 놈들은 언젠가 신의
저주를받게 될 거야."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루빈스키는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키
메라의 토막 난 검 조각이었다. 처음에 그것을 다론에게서 넘겨받아
왔을 때는 검이 손에 붙어 있는 괴상한 생명체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이제 갓 잘려 나간 놈의 검을 봤을 때 자신의 판단이 약간은 틀렸었다
는 것을 알수 있었다.
잘려 나간 검에는 붉은 피가 약간씩이지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키
메라의 검은 소의 뿔처럼 죽은 조직이 아니라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저쪽에 토막 나 있는 키메라의 손을 봤을 때 더욱 명확해졌
다. 겨추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는데도 토지에르를 습격하는 데 동원
되었다가 검의 한쪽이 날아가 버린 그 놈의 검 끝은 조금씩 자라 나오
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검 자체가 살아 있는 조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청난 재생력이군. 이건 다론에게 말해 줄 만한 값어치가 있겠
어 ."
크라레스의 둘째 황자의 결혼은주변 국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인 코린트나 크루마, 미란의 경우 이미 결혼 사
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외의 주변
국들은 크라레스와 미란의 결합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왜
냐하면 미란이 크라레스와 결합함으로 인해 크라레스는 크루마에 군
사와 경제적으로 미묘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기 때문
이었다.
크라레스의 둘째 황자가 결흔하는 그 해는 크라레스 국내외로 수많
은 사건과 사고들이 벌어진 매우 분주한 해였다. 세계의 곳곳에서는
수많은 국지전들이 벌어졌고, 복수는 복수를 낳으면서 더욱 가열되
었다.
그 대부분의 전쟁들이 국지전이었는데,대부분의 경우가타국에 대
한 보복보다는 경제적 이권이나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것들
이었다. 그렇기에 그 양상은 서로 상대 영토의 한 귀퉁이를 뺏고, 뺏
기는 가벼운 분쟁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 국가가 멸망할 정도
의 대규모 전쟁도 여섯 번이나 벌어졌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그
멸망 당한 국가들이 모두 다 코헌트의 동맹국들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코린트는 이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
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멸망한 동맹국·들이 6년 전에 있었던 3국 전쟁
에서 코린트를 지원했다가 상당한 전력 손실을 당한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멸망하는 국가가 하나 둘 늘어나면서 코린트는 뭔가 이상하
다는 것을 눈치 채고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로 밝혀진 것은 침공국
들이 모두다 크라레스의 동맹국들이라는사실이었다.
그것을 코린트가 뒤늦게 눈치 챈 것도 모두 크라레스가 3국 전쟁 시
절부터 매우 비밀리에 이 계획을 진행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크라레스와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3
라레스가 그야말로 한입에 꿀꺼덕 삼키기 쉬을 정도로 만만한 국가
였다면, 코린트는 진작에 군사적 웅징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레스는 하루아침에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국
가가 절대 아니었고,또 크라레스와 푸닥거리를 하고 있을 때 크루마
가 개입해 온다면 문제는 더욱 난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을 역으로 해석하면 크라레스도 코린트와 전쟁을 벌여 봐야 크루마
가 개입해 온다면 재미가 적을 게 뻔하니,군사적 행동을 취할 가능성
은 거의 없다고 해석할수 있었다
이렇듯 3국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기에,전쟁이 발발할 가
능성은 거의 없는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상황을 크라
레스가 더욱 장기화시키기 위해서 코린트가 힘을 키우는 것을 방해
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코린트의 지도부가 확실하게 느긴 것은
크라레스의 둘째 황자가 결혼식을 올린 그해 8월 중순쯤이었다.
"한 시간 전,트루비아의 군대가 탄벤스 공국(췄료)의 국경선을 넘었
다는 보고가 들어왔사옵니다. 변방의 동맹국인 쿠레오 왕국을 로사
나 왕국이 침공, 점령한 것을 비롯하여 올해 들어 행해진 일곱 번째
전쟁이옵니다. 전하,이제 결단을내려 주시옵소서!"
로체스터 공작은 한참 동안이나 창 밖을 바라보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쟁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다는 것이 확실한가?"
로체스터 공작의 물음에 베르딘은 확신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처음 한두 번은 분명치 않았사오나 이제 확연히 드러났사옵니다.
올해 행해진 일곱 번 전쟁의 주역으로 활동한 타이탄은 테리아였사
옵니다. 테리아는 외관은 투박하지만 고성능 타이탄으로서 그 정도
타이탄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몇 나라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출할 만한 국가는 알카사스 정도라고 봐야 할 것이
옵니다. 하지만 알카사스는 고성능 타이탄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점
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것은 동맹국들의 전력 강화를 위해 비밀리에
판매되고 있는 한정 수출품이라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
베르딘은 잠시 로체스터 공작을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정보부에서는 몇 달 동안 조사해 본 결과 그 국가들이 크라레스의
비밀 동맹국들이라는 것을 밝혀 냈사옵니다. 그러니 테리아를 자국
에서 수출한 타이탄이 절대로 아니라고 크라레스가 아무리 발뺌을
한다고 해도,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이 분명하옵니다. 아마도 그 나
쁜 녀석들은 테리아를 수출하면서, 그 조건으로 타국에 대한 침공을
종용한 것일 테지요."
상당히 많은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체스터 공작
은 애써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단안을 내려 병
력을 파병한다고 해도 곧장 크라레스와 전쟁 상태로 갈 가능성은 없
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크라레스와는 충돌을 피
하기 힘들 것이고,양국의 사이는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 크루마의 위치는 매우 상승될 것이다. 그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엄청난차이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적기사의 배치를 완료했을 정도였기에, 다크가 있는 크
라레스에 월등한 우위를 점유하게 될 때까지는 될 수 있다면 충돌을
피하고 싶은 것이 로체스터의 마음이었다. 지금 조금 힘들더라도 참
으면서 힘을 더 키운다면 최후의 승자는 코린트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글쎄‥‥ 꼭그렇게볼수도없지않은가?최신형타이탄들을확보
한 김에 옆에 있는 약소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일 수도 있다
네."
로체스터 공작의 애매한 태도에 베르딘의 옆에 서 있던 당당한 체
구의 무장이 답답한 듯 외쳤다. 그는 금십자 기사단의 단장인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이었다.
"전하, 무엇을 망설이고 계시옵니까? 이번에 트루비아의 침공으로
모든 것이 확실해졌사옵니다. 트루비아는 두 달 전에 토리아 왕국을
침공, 점령했사옵니다. 트루비아의 군사력으로 봤을 때, 겨우 두 달
내에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하옵너다. 그것도 방어
의 개념이 아닌, 선제 기습 공격이었지 않사옵니까? 이것은 더 이상
물중을 확보할 여지도 없사옵니다. 결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
알파레인 후작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로체스터 공작은 망설이
고 있었다. 그는 될 수 있다면 파병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교적 통로로압력을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그의 말은 알파레인 후작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그게 효과가 없다는 것이 벌써 입증되지 않았사옵니까? 크라레스
가 본국이 적기사를 대량 생산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여기저기에
떠벌리고 다닌 덕분에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본국의 힘이 강성해지
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사옵니다.
또 크라레스 같은 철면피들은 그런 외교적 압력 따위를 아무리 가
해도 눈도 깜짝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최근에 입수한 정보
에 의하면 라이지엔 공작이 전하를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옵
니다.
사방에서 본국의 동맹국들이 점령을 당하고 있는데도 됫짐을 지고
있는 무능한 사령관이니 교체해야 한다떤서 말이지요. 더 이상 시간
을 끄는 것은 전하께도 위험하옵니다."
라이지엔 공작은 그로체스 공작이 실각된 후에 그자리를차지하고
앉은 인물이었다. 그 역시 그로체스 공작처럼 황제와는 먼 친척이었
다. 하지만 아직 그는 혈기만을 앞세우는 젊은이일 뿐,그로체스 공작
만큼 실력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로체스터 공작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인데, 요 근래에 와서 제법 황실에서의 입김
을 키우면서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위험 인물이었다. 황제도 로체
스터 공작 혼자만의 독주를 견제하여 일부러 그를 키워 주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기에 로체스터 공작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
들고 있었던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한숨을 내쉰 후 한탄조로 말했다. 이제 그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이쯤에서 크라레스에 본때를 보
여 주는 것도 좋겠지. 이쪽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것을 놈들에게 살짝
알려 준 후 외교적 협상을 시도해 보게나. 한 번 쓴맛을 보고 나면 이
쪽의 말을 좀 들을지도 모르지."
"호되게 맛을 보여 준 후에 외교 사절을 보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옵니다."
알파레인 후작의 의견에 공작은고개를가로 저었다.
"아닐세. 호되게 맛을 보여 줘 봐야 남는 것은 없어. 적당히 그 녀석
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서로가 자존심이 안 상하는 정도에서 물러서
는 것이 좋을 거야."
이윽고로체스터 공작은 베르딘에게로 시선을돌렸다.
"기사단은 준비시켰나?"
"옛,전하. 철십자 기사단에 동원 대기령을 내려 뒀사옵니다만,그들
을 모두 다보낼까요? 신속한 작전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전
부다 투입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사료되옵니다만‥‥‥‥"
잠시 생각하던 로체스터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왕에 투입할
것이라면 전번 전쟁을 교훈 삼아 넉넉하게 투입하는 편이 좋다고 결
심했기 때문이다. 전번 전쟁 때는 쓸데없이 자존심 세운다고 단계적
으로 넣었다가 결국은각개 격파 당해서 쌍코피 터지지 않았던가?
"좋아,모두들 마법진에 집합시키도록! 폐하의 윤허는 내가 직접 받
아 내겠다. "
"옛,전하."
"가가린 후작!"
쭉늘어서 있는 기사들 중에서 제일 뒤쪽에 서 있던 가가린이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서며 힘차게 답했다. 그가 철십자 기사단의 단장이라
고하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것은 겨우 34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지위는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보다도 떨어지는 것
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일 뒤에 서 있는 것이다. 만약 나중에 철십자
기사단이 50기 이상으로 증편된다면 그보다 더 높은 인물이 기사단
단장으로 임명되고 그는 부단장으로 밀려날 것이 확실했다.
"옛, 공작 전하."
"경은 이번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아니라 적이 후퇴
할 만한 명분을마련해 주는 것이 최선의 목표라는 것을 명심해라."
"옛,전하."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필요 없이 전략적인 우세 정도만을 점
하고 있으면 그때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서 그들을 후퇴시킬 것이다.
그 동안 경은 놈들의 진격로를 막고,더 이상 전쟁이 확대되지 않도록
막기만하면 되는 것이야. 알겠는가?"
"옛."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충돌
"폐하,급보이옵니다. "
한 마법사가 달려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통신실에 배속되
어 있던 마법사인데,급한 전갈을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코린트가‥‥‥‥ 코린트가 개입했사옵니다. "
황제는 이 뜻하지 않은소식에 놀라 엉거주춤 일어서며 외쳤다.
"뭣이? 그게 정확한 정보냐?'
"예,지금 트루비아 왕실로부터 긴급 전문이 들어왔사옵니다. 적 타
이탄은 50여 기,문장으로 봤을 때 철십자 기사단 소속의 타이탄으로
추정 된다 하옵니다. "
마법사의 보고를 듣고 있던 황제는 자신이 지금 체통에 어긋나는
행위를하고 있다는 것을깨닫고는슬며시 자리에 앉으며 외쳤다.
"루빈스키!루빈스키 대공을불러 와라?"
황제의 부름을 받은 루빈스키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루빈스키는 제국 안에 퍼져 있던 친크루마 세력을 완전히 소탕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일 처리는 매우 신속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잔인한 것이었기에 죄 없는 피해자도 많이 나타났다. 황태자
를 자주 만났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중신도 있었을 정도니까 말
이다.
하지만 사건의 발단이자 그들의 최고 괴수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
는 나쁜 친구들을 사귀지 말라는 황제의 훈시 정도만 듣고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를 지하 감옥에 집어넣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황제가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때부터 황태자의 주위에는 그를 감시하는 눈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루빈스키는 황태자가 지하 감옥에 가기 전까지 도망치지
못하게 황궁에 잡아 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황태자가도망친다거나또 다른 외부의 세력을 포섭해 들어오
면 매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게 된다. 지금은완전히 힘을 상실했지
만,그래도 엘리안은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부하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대규모 소탕전이 벌어진 후
루빈스키는 타이탄 연습장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만큼 부하들
을 훈련시키고,또 청기사가 제대로 된 위력을 내게 만드는 것이 중요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제의 명에 따라 그를 데려오기 위해 마법사들이 재빨리
움직였고,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움직였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황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게,루빈스키 경. 그래,보고는들었는가?"
"예,폐하. 대충 보고는 들었사옵니다. "
"경의 의견은 어떻소? 구원군을 보내야 할까,아니면 충돌을 피해야
할까?"
"폐하,놈들이 50여 기나 되는 신형 타이탄을 투입했다는 것은 트루
비아 전선에 대한 구원병의 차원을 넘어,아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
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트루비아
를 충동질한 본국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
지요."
"그야,그렇겠지. 그렇지 않다면 지금 트루비아가 가지고 있는 타이
탄총수가 20기를 넘지 못하는데,50기나 밀어 넣었을 리가 없겠지."
"폐하,소신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구원병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파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고 의견을 말했으면 됐지, 하지만은
또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신의 판단이옵고, 폐하께서는 한 가지 더 생
각하셔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물론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강력한 코
린트와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트루비아는본국의 동맹국이옵니다. 그것도본국의 부탁을
받아 타국을 침공한 맹방이옵니다. 그런 그들을 이번에 외면한다면
다음에는 본국의 부탁을 들어 줄 동맹국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
"그렇군. 경의 의견은 잘 알았네. 최후의 선택은 짐이 내리라는 것인
가?"
"예, 하명을 하시옵소서 !"
"으음, 어쩔 수 없구먼. 만약 구원군을 파병하지 않는다면 동맹국들
은 등을 돌릴 것이 분명하겠지?파병하는 것으로 하세. 하지만 코린
트와 정면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격퇴하는 수준으로 공격을 끝내는
것이 좋겠지. 알겠나?"
"옛,폐하."
황제의 집무실에서 물러난 루빈스키 대공은 즉시 두 명의 기사를
호출했다. 그들은 중앙 기사단 7전대와 8전대를 책임 지고 있는 쟈므
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이었다.
제7,8전대는 전방에 포진중인 다른 전대들과 달리 수도에 주둔하
는 예비 부대의 성격이 강했지만,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이들
이 우선적으로 투입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루빈스키의 호출에 급
히 달려와서는 예를 올렸다.
"명을 받고 달려왔사옵니다, 전하."
"오, 어서들 오게나. 자네들은 지금 탄벤스 공국으로 가야겠
다. 부대원들을 소집하고,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이동 마법진으로 집
합하도록,"
"옛,전하."
"피터슨."
공작의 호명에 피터슨폰 라테민 백작이 즉각답했다.
"옛."
"자네는 다 거느리고 갈 필요 없이 30기만 가져가도록. 나머지 8기
는 수도에 두고 가라,"
제8전대의 경우 아직 편성중인 부대였기에 다른 부대들보다 수가
조금 더 많았다. 만약8전대의 수가 정수인 30기를 훨씬초과하여 40기
를 넘어 버리면그초과분 10기로 제9전대가 편성되게 되는 것이다.
"옛!"
"자네들도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트루비아가 탄벤스를 침공
하는 데 갑자기 코린트가 개입해 왔다. 적의 전투력은 확실하지 않지
만 타이탄 50여 기 정도니까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작
전은 트루비아를 돕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코린트의 기사단과 정면
충돌할 필요 없이, 될 수 있으면 체면만 세워 주고 돌아오면 된다. 알
겠나?"
"옛,전하."
그로부터 20달 후 그들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탄벤스 공국으로 날아
가, 탄벤스 공국의 군대와 대치중인 트루비아 군대와 합류했다.
"전세는 어떻습니까?"
자므란의 물음에 시드미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세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코린트의 타이탄을 발견
하자마자,전 군에 후퇴 명령을 내린 후 여기까지 도망쳤으니까 말입
니다. 지금 제각기 후퇴하여 이곳에 도착하고 있는 부대들을 재편성
중입니다. "
"그렇다면 적의 위치는 파악하고 계십니까?"
"그거야 당연하지요."
시드미안은 그들을 지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적은 세 방향에서 진격중입니다. 중앙의 주력 부대,그리고 주력 부
대에서 40킬로 정도 떨어져서 좌우에서 이동중인 좌익과 우익 부대
입니다.
정보에 의하면 코린트의 기사단은 주력 부대와 함께 이동중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적들의 이동 속도는 아주
느리기 때문에 오늘이나 내일 오후쯤 되어야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
다. "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하는 것이 전투의 정석인데, 왜 저들
의 진격 속도가그렇게 느린 것입씨까?"
"글쎄요. 그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덕분에 별 피해 없이 후
퇴하는 데 성공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요. 놈들의 움직이는 속
도로 미루어 봤을 때, 내일 오후에 여기에 도착하여, 진형을 짜고 준
비를 갖춘다면 아마도 모래쯤 되어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
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휴식이나좀 취해 두십시오."
"알겠습니다, 시드미안 경."
오랜 휴가를 끝낸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들인지 원수인지, 요즘 들어서는 분간이 잘 가지 않지만,
하여튼 그 망나니의 마수에 걸려서 호된 경험을 치르는중이었다
"수고했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잘 되어 가는 거야."
"감사합니다, 아르티어스님"
"그래, 파이프 라인 공사는 언제 끝낼 수 있겠나?"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중인 현장을 설계 도면과 비교하면서 바라보
던 아르티어스는 한쪽에서 길이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아주 길면서
도두터워 보이는파이프를 땅에 묻고 있는 것을보며 말했다.
"예,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더 주셔야 하겠습니다. 수도 전체에 거미
줄같이 파이프들을 깔자니까 시간이 예상보다 더 많이 들어가고 있
기 때문입니다. "
"뭐, 일주일이면 그렇게 늦는 것도 아니야. 고생 좀 했겠구먼."
"천만에요. 할 일을 했을뿐입니다. "
아르티어스는 공사 현장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상태
대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아마도 반년 이내로 공사를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완료는 될 수 있다면 자신과 아들이
처음 만난 그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장기인 마법을 이용해서 아들과 자신의 나라
를 발전시킬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치레아 곳곳에
는 이동용 영구 마법진들이 설치되고 있었고,수도 주위에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과 함께 상하수도 망까지 마련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올 겨울부터는 따뜻한 물을하루 종일 수도 내의 각 가정
에 공급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도에 사는 시민들은
난방비가 필요 없게 될 테고,그때부터 수도세의 명목으로 세금을 조
금 더 걷는다면 일석이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르티어스는 이곳 치레아 공국이 아들의 영토가 되었을 때부터 세
심한 주의를 기울여 아들의 영토를 돌보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마도 10년 이내에 마도 왕국 알카사스에 버금갈 정도로 마법에 의
한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진 나라로 거듭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뭔가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거의 반 영구적일 정도로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고,또그것이
사용되는 것에 대해 모든 시민들이 찬사를 늘어놓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활에 보탬까지 된다면 더 이상 말할 나
위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때문에 재정이 허락하는 한 여러 가지를 틈틈이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기념할 뭔가를 말이다.
"아빠! 여기서 뭐 해요?"
"헤헤헤, 보면 모르겠냐? 너와 나의 소중한 기념품들을 만들고 있
지."
희희낙락하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다크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말했다.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왕래하는 중앙로에 거대한 분수대를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요. 여름에 물이 뿜어져 올라가면 아주 시원하게
보일테니까‥‥ 그런데 거기에 만들어 놓은거대한동상은또뭐예
요?"
"뭐긴 뭐겠니?너와나의 동상이지. 흐헤헤‥‥‥‥"
"그딴 거 만든다고 계속 돈을 낭비하실 거예요?가스톤과 카알이 매
일 나한테 와서 투덜거린단 말이에요. 국경에 요새를 건설해야 하는
데 돈이 없다면서 ‥‥‥‥"
"헤헤헤,뭐 그 따위 걸 가지고 그러냐?걱정하지 마라, 만약 적이 쳐
들어오면 내가 내쫓으면 되지.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는 좀더 우아하
면서도 실용적인 것들을 많이 만드는 편이 좋아?"
"글쎄요‥‥‥‥"
"아,평상시에는그런데 신경토 안 썼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러냐?"
"그래도 밑에서 투덜거리니까신경이 쓰여서 그러지요."
"그 따위 것은 이 아비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끄라구. 몇 년
만 더 지나면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 줄 테니 아무
걱정도하지 말란 말이야 "
"글쎄요‥‥‥‥ 저는그게 더 걱정이 되는데‥‥‥‥"
들개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탄벤스 공국은 동쪽으로는 드보레크 산맥을 끼고 있는 그렇
게 크지 않은 국가였다. 드보레크 산맥이 끝나는 부분에 위치한 토리
아 왕국이 알카사스와 코린트, 크라레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에 비한다면 탄벤스는 그렇게 상업이 잘 발달한 국가는
아니었다.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고 있는 탄벤스 공국은 공왕이 다스리
는 국가다. 공왕이라는 것은 전제 왕권이 발달하기 전의 과
도기적인 국가에서 나타나는 왕이다. 전제 왕권의 왕위가 아들이나
혹은 딸에게 세습되는 데 반하여,공왕의 경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
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경우 세 개의 가문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가문에서 돌아가면서 왕이 배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공
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보고 공국이
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인 선출에 의해 탄생되는 왕이 다
스리는 공화국과는찬전히 다른 개념의 국가인 것이다.
탄벤스 공국은 공왕이 다스리는 만큼 전제 왕정보다는 왕권이 떨어
지고 귀족들의 권한이 강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주어지지 않
고, 기득권 층인 귀족들이 그 권세를 장악함으로 인해 대단히 보수적
인 성격이 짙은 국가가 되었다.
귀족들의 경우 될 수 있다면 변화를 싫어했기에,타국에 대한 침략
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재수 없게도과거 약소국으
로 깔봤었던 트루비아의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트루비아 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국경 수비
군이 트루비아 침공군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뒤로 후퇴하여 일단 전
력을 정비해야 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한곳에 집결을 완료한 후에야 탄
벤스 군은 트루비아 군과 감히 싸을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
단 전력이 정비된 후 탄벤스 군은 트루비아 군의 힘을 알아 보기 위해
간단한 탐색전을 펼쳤었다.
그런데 막상 전투를 해 본 결과 상대방의 군사력이 보통이 넘는다
는 것을 알아 내고는 재빨리 자신들의 맹방인 코린트에 구원병을 요
청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벤스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철십자 기사 단
장 가가린 후작이다. 그는 철십자 기사단을 거느리고 전선에 도착한
후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에게 트루비아 군을 전멸시켜 크라레
스를 자극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고,서서히 트루비아 군을 압
박하여 그냥 국경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령을 했었기에 그가 거느린
철십자 기사단도 상당히 수동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그 덕분
에 트루비아 군대는 코린트의 강대한 기사단 앞에서 거의 피해도 입
지 않고 후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흐음‥‥‥‥아직도 후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가?"
"옛, 각하. 트루비아 군의 진형으로 봤을 때 일전을 벌일 각오인 것
같습니다."
부단장으로부터 모고를들은가가린 후작은잠시 뭔가를궁리했다.
놈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일전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도대체
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속임수가 아닐까? 일전을 하는 듯이 보이면서 실지로 주력 부
대는 뒤로 빠지는 것 말이야. 놈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쪽에서 서
둘러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뭔가 감춰진 내막이 있다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놈들에게 이쪽에서 전투를 벌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
는 것은 어 떨까?"
"각하, 만약 그것을 공왕이 안다면 우리들의 저의를 의심할지도 모
릅니다."
'맞아,그걸 생각못 했군.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일단 위력 제압부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껏 밀어붙여 버리면
놈들은 그냥 도망칠 겁니다. 그걸 추격 섬멸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지
않을까요?"
실질적인 정면 전쟁에서 오는 피해보다 패배하여 도주하는 적을 추
격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가까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 였다.
철십자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타이탄까지 보여 주며 은근히
압력을 가했는데토 불구하고 녀석들은 국경을 넘어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꼭 일전을 겨루겠다는 의지를보이고 있었다.
꼭 말로 해서 안 듣는 상대라면 일단 이쪽의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가린 후작에게 떠올랐다. 적을 전멸시
키지만 않는다면, 혹은 전멸시킨다고 하더라도 토리아까지 침공해
들어가면서 전쟁을 확대시키지만 않는다면 크라레스는 묵인해 줄 것
이다.
"좋아,부하들에게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해라,"
"옛,각하."
"천천히 이동하는속셈을모르겠단 말이야.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 혹시 이쪽에서 그냥순순히 물러나주기를원하는것은
아닐까?"
"순순히 물러나주기를 원한다면 저쪽에서 전령이 빨리 물러나지
않는다면 전멸시켜 버리겠다 ' 하는 포고문을 가지고 달려왔겠지."
"그럼 뭐지?혹시 함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딱히 함정을 만들
만한 것은 없으니까 우리들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듀런더러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가서 퇴로를 확보
하라고 지시를하는 게 좋겠군."
"그게 안전하겠지."
트루비아 군과 크라레스 군이 적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당황하고
있는 사이,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천천히 이동해 와서는 트루비
아 군과 2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양국
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욕설
을 퍼부으며 저마다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상대의 됫수가 뭔지를 궁
리했고, 또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며 날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양군은 서서히 이동하여 상대방과의 거리를4킬로 정
도로줄인 후 진형을짜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을 지원하기 위해 파
견된 코린트 군으로서는 타이탄을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그것들을
모두 다 밖으로 꺼내어 배치했다. 코린트 쪽으로서야 자신들의-강력
한 타이탄을 상대가 보고, 알아서 도망쳐 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왜 그래?"
"저거 서른네 대 맞지?"
쟈므란 백작의 물음에, 라테민 백작은 상대방 진형에서 코린트의
타이탄을 찾아서 헤아리기 시작했다. 코린트의 미노바-P2의 경우 탄
벤스 공국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보다 훨씬 덩치가 컸기에 판별하
기는 쉬웠다.
"맞아,서른네 대야."
"그럼 열여섯 대가 어딘가로 갔다고 보는 게 옳겠군. 안 되겠어. 자
네가 아흡 대를 더 가지고 뒤로 가. 자네가 뒤에서 놈들의 퇴로를 막
아 준다면 든든할 것 같아."
"내가 뒤에서 꽁지 빠지게 막아 주는 동안에 너 혼자 영웅이 되겠다
는 거냐?"
"히히,그럴지도 모르지. 싫다면 내가 뒤로갈까?"
"아니 , 내가 뒤로 가지."
"고마워.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연락해."
쟈므란 백작의 말에 라테민 백작은 빙긋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잘해 봐라."
라테민 백작은 서둘러서 자신이 지휘하던 8전대에서 아홉 명을 추
린 다음 마법진을 이용해서 부하들이 포진하고 있는 후방으로 가 버
렸다. 그렇게 하여 쟈므란 백작은 8전대의 남은 열 명까지 합한 40기
의 타이탄을 투입해 코린트와의 정면 대결을준비하기 시작했다.
쟈므란 백작은 20기의 타이탄을 퇴로 확보를 위해 30킬로 후방에
배치시킨 후,면밀하게 적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34대 40이라면 그
런 대로 팽팽한 싸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가 코린트의 경우 탄벤스 공국이 보유한 19기의 타이탄을
믿을수 없는 데 반해서,크라레스의 경우 트루비아가가지고 있는 14
기의 타이탄을 믿을 수 있었다. 근위대 소속의 3기가 트루비아의 수
도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시드미안이 거느리고 있는 14기 중에서 12
기가 카프록시아 급이었기 때문이다.
양국 군대의 전투 진형이 완전히 갖춰지고 나자,관례에 따라 탄벤
스 공국의 전령이 백기를 들고 트루비아 군 진형으로 달려왔다. 전령
은 시드미안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서는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는 거
만한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본국의 영명하신 라미네르 공왕 전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
어, 너희 침략의 무리들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물러간
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노라! 너희 침략의 무리들
은 목숨이 아까운줄 알면 이곳 탄벤스 영토에서 조용히 물러가라. 그
렇지 않다면 너희들의 시체를 들개와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전령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들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 수작이 빤
히 보였던 것이다.
"헛소리를 하고 있군, 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춘 후에 물러가라니,말
이 되나? 만약 어제 밤 정도에 사신을 보내 왔다면 몰라도‥‥‥‥ 후퇴
하면 뒤통수를 치겠다는 말이겠지 "
쟈므란 백작의 말에 시드미안 공작이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면 탄벤스 지휘관들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일 겁니다.
탄벤스를 침공하면서 모든 전투에서 이와 똑같은 보고문을 들었으니 ,
까 말입니다. 아마도 탄벤스에서는 지휘관들에게 포고문에 대한 공
식 책자라도 나눠주는 모양이지요. 어떻게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지,
원‥‥‥‥"
시드미안은 툴툴거리면서 자신의 부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그
부하는 말을 달려 나가 전령의 백기를 낚아채 그것을 높이 들어올린
다음 꺾어 버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전쟁이나하자는표시였다.
"적들이 깃발을 꺾었습니다 "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은 자신도 눈으로 적
의 기사가 깃발을낚아챈 후 깃대를 꺾어 버리는 것을봤으면서도 짐짓
못본 척하고 있다가,부하가 보고를 올리자 허세를 부리면서 외쳤다.
"이런 천인공노할 녀석들, 이쪽에서 자비를 베푸는데도 그것을 못
알아듣다니. 여봐라!저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맛을보여 줘라,"
공왕의 옆에 서 있던 노 장군이 외쳤다.
"기사단 돌격하라!'
코린트의 기사단은 트루비아의 기사단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알
기에 탄벤스 공국의 타이탄이 돌격해 들어갈 때,그들을 따라서 돌진
하기 시작했다. 코린트 쪽의 입장에서는 적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 준
후 놈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그냥 놔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
에서도 타이탄을 꺼내 놓기 시작하자 철십자 기사 단장 가가린 후작
은 경악했다. 삼두의 드래곤 문장을 달고 있는 크라레스의 타이탄들
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가가린 후작은 매우
당황했디. 그들은 탄벤스 공국 군대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지원 나와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면 승부로 나온 것을 보면 진짜로 한판 해 볼 작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후퇴할 충분한 시간의 여유를 뒀음에도 아직까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은,코린트 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으로 볼수밖에 없었다.
"젠장! 사정 봐주지 마라, 돌격,!"
가가린 후작은 상대방과 격전을 벌이면서도 매우 당황했다. 상대방
타이탄은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 소속의 7전대와 8전대가 분명했다.
적 타이탄에 그려져 있는 전대 문장을 무시하고 생각한다
고 해도 트라노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5전대부터 8전대까지였다. 그
리고 저 문장들은 7전대와 8전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가가린 후작의 머리 속은 급속도로 회전했다. 크라레스 기사단의 1
개 전대는 타이탄 30기였다. 그런데 저 앞에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은
40여 기, 그렇다면 최소한 20기 이상이 이곳에 모습을보이지 않은 것
이다.
적들은 분명 이쪽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이상,상황을 예측한 충분한 대비가 있을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포위 공격인가?'
가가린 후작은 후방에서 적의 타이탄이 나타날 가능성을 따져 보기
시작했다. 불안하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겨우 34기
밖에 안 되는 철십자 기사단을둘로나눈다는 것은자살 행위였다. 그
렇다면 방법은 하나. 정면의 적을 박살 낸 다음 도주하는 적을 뒤쫓지
않고,180도 반전하여 탄벤스 군을 학살하는 크라레스의 별동대를 무
찌르는 것뿐이었다.
'젠장!더럽게걸렸군‥‥‥'
이제 가가린 후작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눈
앞의 적이라도 박살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뒤로 포위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 폐하로부터 지휘권을 하사받은
이 철십자 기사단이 오늘 전멸 당할 가능성까지 있었던 것이다.
"돌격!황제 폐하께 영광을!"
하지만 이어서 벌어진 대규모 타이탄 전투는 놀랍게도 코린트 기사
단의 압승이었다. 트루비아 연합군 쪽의 주력 부대인 크라레스 기사
단은 대충 하고 끝내려고든 것에 반해서,위기를느긴 코린트의 기사
단은 대충 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고 총력전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고철이 되어 나뒹구는 가운데 가가린 후작은
패퇴하는 크라레스 기사단을 추격하지 않고, 곧장 반전하여 공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적의 별동 부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지 못했
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만약 가가린 후작이 뒤의 적을 생각하지 않고, 패퇴하는 크
라레스 기사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감행했다면 어떻게 되었
을까? 그랬다면 가가린 후작은 크라레스 군의 퇴로를 지키고 있었던
라테민 백작의 별동대와 패주하던 쟈므란 백작의 양쪽 부대에
게 협공을 당해서 되레 전멸 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렇듯 전쟁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를 차지하는 것은 전략도, 전술도 아니고 운
이었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가장 뛰어난 장수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운이 들어가는 것이다
크라레스 파견군이 대패했다는 보고는 재빨리 각국에 보고되
었다 루빈스키 폰스바시에 대공은 그 급보를 받자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마시고 있던 포도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와 황제가 2개 전대를 트루비아에 파견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트
루비아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었을 뿐,승리나 패배,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적당한 수준에서 트루비아와 탄벤스 공국의 체면을 살려 주면서 은
근슬쩍 '후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견군을 보내 놨
더니 그가 가장 원하지 않던 행위,즉 '정면 대결' 을 펼쳐서는 결국은
패배를 자초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라고? 추가적인 파병이 필요하다고?"
"예, 폐하. 원래는 적당한 수준에서 후퇴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사옵니다. 본국이 대패한 이상, 동맹국들이 본국의 능
력을 의심하며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옵니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
사옵니다.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 흔들리는 본국의 위상을 바로 세
워야 하옵니다. 그렇게 큰 승리는 필요 없지만, 어느 정도 '우세한 상
황' 으로 전세를 몰고 가야 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
루빈스키 대공의 말을다들은 황제는 고개를주억거리며 말했다.
"경의 말이 옳구려, 그렇다면 얼마나파병을 하는 것이 좋을까?하지
만꼭 파병을 더 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수 있을까?'
"승리를 거두도록 해야지요. 아르곤 국경에 주둔중인 제1전대를 투
입하겠사옵니다. 제1전대장인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지난 번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던 만큼 충분히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루빈스키 대공의 먼 친척이었다. 루빈
스키는 크로아후작이 젊었을 때 검술을 가르쳐 준 적도 있었기에,그
의 차분한 성품이라든지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실력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6년 전 3국 전쟁에서 크로아 후작은 미란에 파견되었던 살
라만더 기사단 부단장의 직분을 훌릉하게 완수해 냈고,또 그에 뒤이
어 벌어진 코린트와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무공을 세웠었다. 그 덕분
에 지금은 후작으로 작위가 한 단계 상승한 상태 였다.
크라레스의 군 지휘부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분류하고 있는 코
린트와 '잠재적인 위험 지역'으로분류하고 있는 아르곤의 국경에 중
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들로구성된 전대들을배치해 두고 있었다.
코린트는 그렇다고 해도 왜 여태껏 크로노스 교가 통치를 시작한
이래로 타국을 침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르곤이 '잠재적인 위
험 지역 으로 잡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아르곤의 군사력이 대단히
강력하고,또 그 국력 또한 대단하기에 그렇게 설정된 것이 아닐까 하
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6년 전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크로아 후작이 지휘하는 제1전대와 역시 뛰어난 무훈을 통해 을
라온 린넨 후작이 지휘하는 제2전대. 이들은 만약 큰 사건이 벌어지
게 되면 '안전한 아르곤 국경' 을 부담 없이 이탈하여 그곳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군적인 성격이 짙었다.
물론 이렇게 아르곤을 위험 지역으로 선포해 두면 속사정을 잘 모
르는 적들은 1, 2전대가 아르곤 국경에 꼭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 줄
알고 이쪽의 유동 전력에 대해 오판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1,2전대에는 그 예비군적인 성격 외에도 한가지 중요한 임
무가 더 있었다. 말토리오 산맥 부근의 아르곤과 치레아로 갈수 있는
도로가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에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크라레스 제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적으로 발전할 수 있
는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말토리오를 넘어 진격해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2전대가 주둔하고 있는
말도른 요새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스바시에 공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란군이 말토리오 산맥을곧바로 넘지 않고스바시에 공국
쪽으로 진격한다면 그곳에는 스바시 에 기사단과 제5전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본국에서 증원군을 파병할 동안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 분
명했다.
이렇듯,제1,2전대는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였고 그 목
적에 맞는 위치에 주둔중이었다. 그런 만큼 제1전대를 전장으로 보낸
다면 충분히 막강한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렇게 처리하라."
"옛,폐하."
이렇게 해서 탄벤스 공국을 무대로 거대 강대국 간의 제2차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탄벤스 공국에서 벌어진 제2차 전투는 순전히 크라레
스의 자존심과국제적 지위 하락을 염려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에 비해 코린트의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으로부터 대승의
보고를 접하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전해진다. 이번 전쟁을 대충 끝
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둬 버린 한
심한 부하 때문에 쏟아져 나온 가슴 아픈 한숨이었다.
이렇게 되면 크라레스가 그냥 순순히 물러날 가능성은 더욱 없어
지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추가로 30기의 타이탄을 파병할 수밖에 없
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명령을 어기고 승리를 거둬 버린 멍청한 가가린
후작을 사령관 직에서 박탈하고 대신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알
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이 탄벤스 전선의 사령관으로 즉위하게 된
다.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은 6년 전에 벌어졌던 3국 전쟁에서
전사한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을 배출한,코린트의 유명한 3대
무가들 중의 하나인 크로데인 가문의 기사로서 대단히 실력이 뛰어
났다.
크로데인 후작은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로체스터 공작에게 불려 가
서 한 시간동안이나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그 잔소리의 요지를 간
단하게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적당한 수준에서 놈들에게 승리를 맛보게 해 주게나. 본국의 체면
이 있으니 패배는 절대로 안 돼. 일단 치고 받다가 적당한 순간에 슬
쩍 전략적 후퇴를 하란 말이야. 그래야 이놈의 망할 신경전을 끝낼 수
있다구 알겠나?"
다시 불붙은 제국 전쟁
이제 바야흐로 탄벤스 공국에서의 전쟁은 당사국인 탄벤스 공국과
트루비아 왕국을 됫전으로 두고,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로 흘러가고 있었다.
증원 부대와 함께 도착한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은 쟈므란 백작과 라
테민 백작에게 상황 보고를 들었다. 대패라고는 하지만 타이탄 전투
직후 적들은 패주하는 쟈므란 백작의 기사단에 대해 추격전을 펼치
지 않았기에,타이탄 부대의 직접적인 피해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
었다.
대신 후퇴하는 타이탄 부대를 따라 재빨리 전장을 이탈하지 못한
트루비아의 정규군이 입은 피해가 막심했다.
"시드미안 전하."
"예?"
"귀국 군대는 30킬로 뒤쪽으로 좀 빼 주십시오. 이제부터 벌어지게
될 전쟁은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를 상대로 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병이나 기병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또, 전쟁중
에 그들까지 신경 쓰면서 싸을 수는 없지요. 이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라테민 백작."
"예."
같은 전대장급이라고 해도 그 연륜이나 지위로 봤을 때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특히 아르곤이나 코린트의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는
1,2,3,4전대장들은 6년 전 3국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매우
노련하면서도 우수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에 비해 스바시에나 크로나사 서부, 혹은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5,6,7,8전대는 3국 전쟁 후에 새로 창설되어 배치된 부대들인 만큼
그 지휘관들도 대부분 신출내기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3국 전쟁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독립 부대를 이끈 지
휘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어떻소?'
"예,26기를 잃었습니다, 각하."
"26기라‥‥‥ 어려운 전투가 되겠군."
한참 고심하고 있던 크로아 후작은 시드미안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전하,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어쩌면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보유하고 계신 타이탄 전력만으로 군
대를 보호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아직도 10여 기가 남아 있으니 그런 대로충분할 것입니다. "
"좋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기사단과 함께 트루비아 군을 보호
하는 데 치중하십시오."
크로아 후작은 로련한 인물답게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적들은 천천히 이동해 오면서 이쪽을 압
박해 오고 있었기에 기습 공격을 가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의 주력 부대를 라테민 백작과쟈므란 백작이
각각 지휘하는좌 ·우익 부대가각각서쪽과동쪽을 맡고,크로아후작
이 거느리는주력 부대는 남쪽을 맡는다.
상대는 매우 천천히 이동해 오고 있으니 기습전에 있어서
서로 간의 시간차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크로아 후
작이 북쪽에 대해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적들이 일단 치고 받다가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깨닫게 되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배려였다.
다음 날 오후,새롭게 코린트 파견군의 사령관이 된 알프레드 드 크
로데인 후작은 정찰조로부터 적의 주력 부대가 30킬로 전방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면 전에 트루비아 군이 대패를 했던 전투와 같이 트루비
아 군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가 10킬
로쯤 접근해 들어가서 밤을 지새운 다음,다음 날 아침 무점에 상호간
에 진형을 갖춰 격전을 치르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확실히 서로의 체면이 걸린 싸움이라서 그런지 매우 신사적으로싸
운단 말씀이야. 전번 전쟁에서는 정규전은 거의 없고, 계속 게릴라전
만 펼쳤었는데‥‥‥‥"
"후작각하."
탄벤스 공국의 전령이 급히 말을 달려 오며 크로데인 후작을 찾았
다. 그것을 보고 후작의 경호 기사 한 명이 그쪽으로 달려가 그를 후
작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무슨 일인가?"
"예, 공왕 전하께옵서 이쯤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진격을 하자고 말
씀하셨사옵니다."
크로데인 후작은 태양을 살짝 바라봤다. 이제 겨우 정오가 조금 넘
었을 뿐이다. 오늘 저녁에 야영하기로 정한 목적지까지 겨우 17킬로
남짓 남았으니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행군을 계속 해도 목적지에 도
착하는 데는 별다른 무리가 없을 듯 생각되었다. 또 내일 아침에 있을
전투를 생각한다면 병사들에게 충분한 식사와 휴식이 필요할 것은
분명했다.
"알겠다. 공왕 전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따르겠다고말씀드려라,"
"옛,각하."
탄벤스 군대는 상관의 명령대로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
이나 저녁 식사의 경우 든든한 방어진이 설치되기에 그래도 격식을
갖춘 식사가 장만되어 배급된다. 하지만 이렇듯 점심 때의 휴식을 겸
한 식사는 빵과 고기포,그리고 물만으로 간단하게 넘어가게 되는 것
이다.
적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절호의 순간을 놓칠 리 없는 노련한크
로아 후작의 군대는 그때를 노려 기습 공격을 가했다. 서로간에 진형
을 짜고 횐 깃발을 들고 상대를 설득하거나 엄포를 놓기 위한 전령 따
위를 보내야 하는 정식 전투가 아닌 기습 공격인 만큼,크라레스의 64
기나 되는타이탄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당황해서 우왕좌
왕하고 있는 적진을 향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
했다.
"젠장!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 적 타이탄을 막아라. 탄벤스 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 줘라,!"
크로데인 후작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기사단뿐이었
다면 재빨리 적이 공격해 오지 않는 북쪽으로 달아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탄벤스 공국의 군대와 함께 이동중이라는사실이었다.
자신들이 먼저 도망치면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맥없이 전멸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공왕이 전사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을 도
와 주기 위해 파견되었던 코린트 기사단과 그 형편없는 기사단을 동
맹국에 파견해 준 코린트의 명성은 땅바닥에 패대기쳐질 것은 분명
한사실이었다.
"공왕 전하를 피신시켜 !"
삼면에서 육박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기병과 보병들이 섞여 우왕좌왕하는 혼란의 극치를 이뤘다.
이 전투에서 크로데인 후작이 지휘하던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는 탄
벤스 공국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지원해 주기 위해 크라레스 군과
본의 아니게 사생결단을 벌였다.
하지만 이런 노럭에도 불구하고코린트 파견군에게 남은 것은 전력
의 반 이상이나 상실한 참패,그리고그 혼란의 극치를 이뤘던 전장의
어느 구석에서 죽어 버렸는지 모르지만 멍청한 공왕의 전사 소식이
었던 것이다.
"대패를 하였다고 하옵니다. "
베르딘 후작 대신에 로체스터 공작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마법사
는 붉게 충혈 되기 시작하는 로체스터 공작의 분노에 타오르는 눈동
자와 마주하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뿌드드득'하는 이빨갈리는 소리와함께 '우지끈'하
며 로체스터 공작이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가 무의식적인 그의 손
아귀 힘에 의해 부서져 나가는 소리까지 함께 들려 오자,마치 자신이
대패를 당하고 보고하는 당사자가 된 듯,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다. 로체스터 공작은 새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드디
어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멍청한 녀석!그냥 싸우는 척하다가 슬쩍 후퇴하는 것도 못 한
단 말이냐?그 녀석의 목을 당장 잘라 버려?"
베르딘은 기사단이 대패했다는 그 보고를 접하면 로체스터가 발광
을 할 것이 분명했기에 슬그머니 부하에게 팔밀이를 했고,보고서를
대신 들고 온 마법사가 예상대로 경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듯화
를내는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그 옆에 서 있던 까미유가 말했다.
"전하, 이렇듯 이성을 잃으시면 될 일도 아니 되옵니다. 고정하시옵
소서 , "
로체스터 공작은 다시 붉게 충혈 된 눈동자를 까미유 쪽으로 돌렸
다. 마법사는 잘모르고 있었지만로체스터 공작의 붉게 충혈 된 눈은
오늘의 분노 때문만이 아니라 격심한 픽로감 때문이었다.
이놈의 전쟁이 벌어진 후에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책 회의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잔 때문이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로체스터 공작의
심기는 이미 폭발 일 보 직전에 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겼으니 로체스터 공작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 버렸던 것
이다.
"내가 고정하게 됐어? 탄벤스 공국을 도와 주라고 보내면서 꼭 승리
하고 돌아오라는 어려운 주문을 한 것도 아니잖아? 상대의 체면을 세
워 주면서 슬쩍 후퇴하는 그것도 못 한다는 말이야? 그러면서 탄텐스
공국의 공왕까지 전사했단 말이다. 이렇게 되면 본국의 체면이 땅바
닥에 떨어지는 것은 둘째치고,아무 것도 모르는그 병신 같은 놈들은
나를 탄핵해 올 것이 분명한데?"
"한 번 실수를 했다고 해서 뛰어난부하를죽일 수는 없사옵니다. 일
단 사령관 직책의 해임과 동시에 본국으로 소환을 하시옵소서, 그런
다음 투옥해 놓고 나서 천천히 처리를 궁리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하옵
니다. "
로체스터 공작은부글부글 끓어오르는화를 최대한 억눌렀다. 까미
유의 말대로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잘못을 가지고 부하를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좋아. 경의 의견대로처리하기로하지."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래,승리한후 적의 동태는 어떤가?"
"그것이 이상하게 그 여세를 이용해서 몰아붙일 생각을 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퇴각했다고하옵니다."
"승리한 후에 국경을 넘어 퇴각했다고? 이런 괘씸한 놈들‥‥‥ 자기
들만 대승을 거두고 후퇴하면 끝인 줄 알아?당장 국경을 넘어 추격하
여 놈들을 박살내 버려?"
"전하,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옵니다. 어제도 밤을
새우셨지 않사옵니까? 조금 쉬신 후에 다시금 의논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붉게 충혈 된 피로한 눈을 들어 까미유를 바라봤
다. 의지가 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탄벤스 공국에서 전쟁이 벌어진 후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내외의 사정도 어려운 데다가 정적들의 모략도 막아야 했
고,또 그들의 모략에 대응할수단까지 짜 내다 보니 무지막지하게 피
로와 짜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고 보냈던 부하가 자
신의 믿음을 완전히 배신한 꼴을 연출했으니 그가 이성을 잃은 것도
당연했다.
"경의 말대로 조금 쉬는 것이 좋겠군 두 시간만 자고 올 테니까 대
웅할 작전을 구상해 보게,"
"옛,전하."
방문을 나서면서 로체스터 공작은 투덜거렸다.
"젠장, 예전에 키에리가 존경스럽군.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
면서 정적들까지 억눌렀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두 시간 후 로체스터 공작이 아직도 충혈 된 눈으로 나타났을 때,
까미유는 결정된 사항을 보고했다.
"일단 기사단을 추가로 파병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지금의 군
사력으로는 도저히 적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옵니다. 아마도 은십
자 기사단에서 타이탄을 30기 정도 빼내어서 보내 준다면 괜찮겠지
요. 그리고 이쯤에서 크라레스와 협상을 통해서 서로 간에 끝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쓸데없이 변방에서 소모전을 펼치고 있을
이유는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
"협상이라‥‥‥‥"
"옛, 녀석들도 이번에 대승을 챙겼으니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
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놈들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
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참, 기사단을 이용해서 무력 시위를 벌이면서
협상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전면 전쟁으
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놈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양보해 올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30기가 아니라 은십자 기사단 전부를 다 집어넣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무력 시위는 규모가 클수록 효과 또한 크지 않겠사
옵니까?"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고개를끄덕여 허락했다.
"좋아,그건 그렇게 처리하기로하지. 그리고 협상은자네가 해 주겠
나? 자네라면 믿을수 있을 것 같군."
"옛,전하."
"고맙네,자네라면 훌릉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의 치하에 까미유는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이제 한 가지 일이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또
다른 일을궁리하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은 들인 공에 비했을 때 정
말 얻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뭔가를 확보해야
만 했다. 탄벤스에서 잃어 버린 타이탄의 보상은 받아 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탄벤스 공국은 이제 주인
없는 나라가 되겠지? 공왕도 전사했고,막대한수의 군대와 뛰어난 장
군들도 많이 죽어 버렸어. 이 기회에 본국이 탄벤스에 더욱 깊은 영향
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향력을 확실하게 행사하시려면 다음 공왕을 우리 쪽 인물로 세우
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전하."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그게 좋겠지. 다음 공왕은누가 될 예정이지?"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살짝 뒤로돌려서 질문을 하자, 레티안은 잠
시 생각을 한후 답했다.
"예. 여태껏 탄벤스 공국에서 공왕이 선출되었던 전례를 따져 본다
면다음차례는 아크레니아가문에서 공왕이 나을 것이옵니다."
"으음‥‥‥‥ 하지만 정식적으로 공왕이 선출된다면 이쪽에서 영향력
을 행사하기가 힘들어. 탄벤스 공국의 경우 공왕이 되기 위해서는 30
세가 넘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지 않던가?그 정도 나이라면 자신의
주관이 벌써 정립되어 있는 나이니까조종하기 힘들지. 어떻게 한
다?'
이리저리 궁리를하던 로체스터는 의자의 손잡이를 탁하고 치면서
말했다.
"참, 이번에 전사한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에게는 혈족이 없나?그
놈을 왕위에 올린다면 명분도 세울수 있고, 이용해 먹기도 편할 텐데
말이야."
두 번째 질문에도 레티안은 즉각 대답을 했다. 정말 엄청난 암기력
이었다.
"예, 있사옵니다.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사온데,그 장자의 나
이는 이제 열세 살 이 된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
"열세 살이라‥‥‥‥ 이용하기에 꼭 좋은 나이로군. 그렇지 않은가,까
이유?"
"그렇사옵니다, 전하."
까미유도 찬성하는 것을 보며, 레티안은 방금 떠오른 계략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전쟁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뛰어난 중신들도 많이 죽은 것으
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탄벤스 공국을 완전히 차지하
는 것은 어 떻겠사옵니까?
이번 전쟁에서 탄벤스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사옵니다 이것을 기회
로 탄벤스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군대를 한 5개 사단쯤 파병하여 완
전히 틀어쥐는 것이옵니다. 그런 다음 꼭두각시 왕을 한 명 세운 후
귀족들을 차례로 숙청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본국의 속국·으로 편입시
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
레티안의 조언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주억 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군 그런 다음 그 어린 왕까지 없애 버린 후 아예 본국의 공국
으로 편입시키면 아주 재미있어질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다른나라들의 비난을사지 않을까?동맹국을 집어삼켰다고 말이지."
"그것은 걱정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전하. 어린 왕을 세우고 충신들
을 차례차례 없애 버린다면, 탄벤스는 머지않아 완전히 무법 지대가
될 것이옵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되도록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가 훗날 일거에 그들
을 쓸어버리면서 전면에 나서는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어린 공왕은
폐위시키고 누구 한 사람에게 권해서 두 번째 꼭두각시 공왕을 만드
는 겁니다.
그런 후 그 공왕을 협박해서 '짐은 흔자서 왕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코린트의 품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노라.'하고 선언하
게 만들면 되옵니다. 그 놈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린다면 그 다음부터
탄벤스는 본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좋겠군,그게 좋겠어. 탄벤스를 본국의 영토로 흡수할 수 있
다면 이번의 실패를 만회하기에 충분하겠지. 입만 살아 있는 놈들도
군소리를하지는못할 거야. 안그런가?'
"그럴 것이옵니다. 전하."
협상을 해 보자는코린트의 제안은크라레스에 의해 즉각 받아들여
졌다. 크라레스 쪽의 입장으로 봤을 때 탄벤스 전선의 마지막을 대승
으로 장식했기에 더 이상아쉬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번 승리를 통해 설사 적이 코린트라고 하더라도 동맹국을
위해서는 검을 뽑아 들고 맞서 싸워 주는 의리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소득을 얻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전투에서 상실했던
타이탄을 보충하기 에 충분할 딴큼의 노획품도 챙겼던 것이다.
코린트에서 까미유드 크로데인 후작이 협상 책임자로나온다는 것
을 통보받고 크라레스에서는 그와 격을 맞추기 위해서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을 그 상대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협상 장소는 코
린트와 크라레스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 선택되었다.
"오랜만에 뵙는구려,크로데인 후작."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6년 만인가요?"
"허헛,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려. 그대를 볼 때마다 그대와 같은
훌릉한 후진들을 거느리고 있는로체스터 공작이 부럽소이다. "
"과찬이십니다. "
이렇듯 양국의 대표는화기애애한분위기로 회의를 시작했다. 사실
상 이번에 양국이 갈등을 려게 된 것이 동맹국에 대한 파병 때문이었
기에 이런 분위기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현안들을
차근차근 의논하며 해결해 나갈 생각이었다.
설혹 양보를 해서 땅덩어리 하나를 상대국에게 떼어 준다고 해도
그건 자국의 영토가 아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정도였
다. 당연히 느긋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그들의 뒤에는 이번 회의가 어떻게 결론 지어질지 지켜보는
동맹국들이 있었다. 회의에서 강한 쪽이 좀더 많은 것을 얻어 낼 것이
고, 약한 쪽이 보다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러므로 이번 회의의 결과에 따라 누가 강자인지,또는 약자인지가 확
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또 얻어 내게 되는 것에 대한 혜택이나 손해는 고스란히 동맹국인
트루비아 왕국이나 탄벤스 공국이 책임 지게 된다. 그 때문에 자국의
동맹국·을 위해 '얼마나노력해 주는국가' 인가가 이 한판의 회담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어차피 양보할 수
없는 한판 대결을 이 좁은 탁자 위에서 벌이게 된 것이다. 뒤에서 지
켜보는 눈들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로체스터 대공과 까미유 후작의
입씨름은 며칠에 걸쳐 매우 지루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까미유와 루빈스키가 팽팽한 평화 협상을 하고 있는 동안
코린트의 군대는 마법진을 통해서 탄벤스 공국에 입성했다. 육로를
통해 발렌시아드 공국을 경유하여 트레보크 산맥을 넘어서 올 수도
있었겠지만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게 된다.
로체스터 공작의 계획은 비어 있는 공왕의 자리에 새로운 공왕이
앉기 전에 코린트의 군대가 탄벤스를 장악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5개 사단,즉 5만 명에 해당히-는 방대한 병력과 은십자 기사단 전부
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은십자 기사단 단장인 투르넨 후작은,6년
전 치촉적인 패배를 당했었던 코린트 남부 전선의 부사령관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휘자로서의 뛰어난 실력과 행동이 인정되어 아직까지
도그 직위를유지하고 있었다.
투르넨 후작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 먼저 가 있던 가가린 후작은 직
접 마중 나가 새로운사령관을 환영했다.
"어서 토십시오,사령관각하!"
"그래,수고했네. 알프레드는 어디에 있나?"
"예,부단장각하께서는 지금사택에 연금되어 계십니다. "
가가린 후작의 보고에 투르넨 후작은 역정을 냈다.
"그런 멍청한 놈에게 부단장이라는 직함을 붙이지 말게!그 놈의 직
위는 박탈되었으니까 말이야."
"옛, 죄송합니다, 각하."
"어떻게 부단장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전에 있었
던 칸테로마도 그랬고, 이번에는 알프레드까지. 젠장!"
화부터 내는 투르넨 후작을 보고 송구한 듯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갈팡질팡하는 가가린 후작에게 투르넨 후작은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자네가부단장이었다면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을 텐데 말이야."
"감사합니다,각하."
"그래도 어잴 수 없지. 지금 은십자 기사단에는 부단장이 없으니 자
네가그 직책을 맡아주겠나?"
"영광입니다,각하."
"고맙구먼. 자네는 마법진을 통해 이동해 오는 병사들이 도착하는
대로즉각 곳곳에 투입하여 우선적으로수도를장악하라."
"옛."
"탄벤스의 수도 방위군 사령관은 어디 있나?"
투르넨 후작은 일단 일을 벌이기 위해서는 탄벤스 공국의 수도 방
위군을 딴 곳으로 따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괜히 양쪽의
무력이 한 장소에 집결해 있다가는자칫 칼부림이 날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칼부림이 일어나게 되면 탄벤스의 동맹국으로서
이곳에 와 있는 코린트의 명성이 실추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방
위군 사령관을 타일러서 수도가 아닌 딴 곳으로 보내 버리려는 계획
이었다.
투르넨 후짜의 말에 가가린 후작은 사령관이 묻는 의도를 알지 못
해서 다소 장황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가린 후작은 아직까지
젊은 야전 군인이었을 뿐, 정치적인 의도나 모략 ·술수 따위를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충성을 다하고 있는 기사도의 나라 코린트가 동맹국을 꿀꺽
집어삼키려고 술수를 부리고 있는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
었던 것이다.
"예, 각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전방으로 보냈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옵서 다거스 후작을 방위군과 함께 전방으로 보내어 본
국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적의 발목을 잡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
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상세히 설명했더니 다거스 후작은 수도
방위군 1개 사단을 이끌고 전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며칠 후 본국
군대의 도착이 완료되면 그들과 위치 교대를하면 될 것입니다. "
가가린 후작의 말에 투르넨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린 후작
이 일 처리를 매끄럽게 해 뒀던 것이다.
"좋아 수도 방위군이 빠져 나간 빈 자리를 본국의 군대가 대신한다.
공왕이 없는 때를 틈타 불순분자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수도를 확실
하게 장악해야 한다. 자,빨리빨리 움직이게나."
"옛,각하."
부하들을 이끌고 분주하게 달려가는 가가린 후작의 됫모습을 보며
투르넨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탄벤스의 수도 방위군까지 빠져 나가
고 없다면 일은 더욱손쉽게 진행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제 탄
벤스의 수도를 장악한 후, 철없는 꼬맹이를 왕위에 올리는 일만 남았
던 것이다. 물론그 전에 반대 세력부터 없애 버려야하겠지만‥‥‥‥
눈물을 흘리는 황제
"폐하, 놀라운 정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는 안티노스 후작이었지만,
어디서부터 얼마나 달려왔는지 다소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런가?"
"예,코린트의 군대가 비밀리에 탄벤스 공국에 집결중이옵니다. "
그 보고를 듣고 황제는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 후작의 의도대로 기
절할 듯이 놀랐다. 코린트의 군대가 평화 회담을하고 있는 와중에 탄
벤스 공국에 집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라레스 쪽이 그러했
듯이 파견했던 기사단을 철수시킨다면 모를까‥‥‥
"뭣이?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은십자 기사단이 모두 다 투입된 데다가, 거의 3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도착했사옵니다. 마법진을 통해 3만에 달하는 군대까지 이동
시킨 것을 보면 분명히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야욕이 있음이 분명하
옵니다. "
하지만 황제는 애써 좋지 않은 생각들을 털어 내며 조심스럽게 긍
정적인 방향으로 말했다. 은십자 기사단이 전부 다 투입된 것에 비해
3개 사단의 병력이란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우 3개 사단인데‥‥‥‥"
"하지만이 아니옵니다. 지금도 계속 마법진을 통해 병력이 이동해
오고 있사옵니다. 코린트가 하루에 1만이 넘는 병력을 지속적으로 탄
벤스 공국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은 전쟁 외에는 답이 있을 수 없사옵
니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하옵니다. "
하루에 1만씩 계속 보내지고 있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병력
이 추가로 투입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가 수비적인
개념의 전쟁을 하는 데는 기사단만으로 충분하지만, 공격을 하려면
점령지를 장악하기 위해서 군대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상
식이었다.
6년 전에 대규모로 벌어졌었던 전쟁에서 병력이 모자라서 엄청난
고전을 면치 못했던 크라레스였다. 그렇기에 기사단과 함께 상대방
의 병력이 대규모로 이동중이라는 것은 뭔가 코린트가 침략적인 전
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으음‥‥‥‥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다론을불러 들여라. 빨리!"
"옛."
황제의 명령을 받고 근위 기사가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다론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그는 연구실에 있다가 끌려왔는
지 여기저기에 뭔가가묻어 있는 지저분한복장을하고 있었다.
"부르셨사옵니까?폐하."
"다론 경,토지에르 경의 치료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 이틀 전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으로 보고를 받았었는데,그 이후 어떻게 되
었나?"
"예, 지금 회복되고 있는 중이옵니다. 이대로 경과가 좋다면 아마도
한 달쯤후에는완치될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
"지금 토지에르 경과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는데, 주선을 좀 해 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스승이 안정을 취해야만 할 때였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
었던 스승이었기에 다론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의견에 반대했다.
"예?하지만 토지에르 경은 안정을 취해야 하는지라, 여기까지 오는
것은무리일 것이옵니다. "
"아,그것은 상관없네. 통신용 마법진을 통해서 몇 가지 의견 교환만
하면 되지, 직접 여기까지 나을 필요는 없는 것이지. 그것도 안 되겠
는가?"
직접 스승이 와야 한다면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지만, 침상에 누
운 채로 마법진을 통해서 대화를 한다면 그렇게 무리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다론은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토지에
르를 찾을 정도라면 보통큰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폐하의 명이시라면‥‥‥"
"빨리 준비해 주게."
"옛,폐하."
잠시 후 다론의 노력에 의해 회의가 개최되었다. 수정 구슬에 모습
을 드러낸 토지에르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그래도 눈빛은
여전히 맑게 살아 있었다. 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는토지에르의 야윈
얼굴을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런 감정을 표현할수는 없었다. 일단 이 장소는 공식적인 회의 석상이
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천장을보며 겨우 참아 냈다. 그런 후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황제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토지에르 경. 그래,몸은좀 어떤가?"
눈물을 참기 위해 천장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을보고 토지에르는
가슴이 터질 것 간았다. 자신이 황제에게 그만큼 커다란 사랑과 신뢰
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도 않은 듯 가장하여 답했다.
"소신의 몸은 괜찮사옵니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려 황송할 따름
이옵니다. "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나. 하루라도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것이 짐을
위하는 것이야. 그건 그렇고 몸이 불편한 경을부른 것은 상의할 일이
있어서네. 그대가 설명을 해 주겠나,안티노스 경?"
안티노스는 병상에 누워 있는 토지에르에게 이번 전쟁의 시작부터
전개 과정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토지에르는트루비아에서 전쟁
이 터지기 전에 병원에 실려 갔기에 좀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
이다. 다론은 병상에 누워 있는스승이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쓰지 않
도록 복잡한 사건은 아예 보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런 과정이 필요했
던 것이다.
"경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코린트는 트루비아를 쓸어버림으로써 본국의 동맹국들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인 것 같사옵니다. 만약‥‥ 만약 본국의 동맹이 무너
진다면 더 이상코린트를 제압할 수는 없다고사료되옵니다. "
토지에르로서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코린트는 엄청난
힘을 지닌 강대국이었고, 또 이번에 적기사까지 대량으로 생산한 저
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도 크라레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크라
레스의 동맹들을 해체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경도그렇게 생각했는가?"
"탄벤스는 머나먼 변방일 뿐이옵니다. 만약 그곳에서 전쟁이 조금
크게 벌어진다고 해도 코린트는 전면전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옵니
다. 코린트에게 본국의 힘을 보여 주소서. 그렇다면 코린트는 양보하
지 않을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때 코린트가 완전히 두 손을 들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
혀야만 하옵니다. "
"흐음‥‥‥ 그렇게 되면 코린트가 물러설까?"
황제의 고심에 찬 물음에 토지에르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가 생각했을 때 코린트가 이쪽의 뒤통수를 치려다가 그게 발각되
어 오히려 자신들이 커다란 타격을 당했다면, 크라레스가 결코 만만
한 국가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고또그렇게 된다면 알아서 꼬
리를내리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예. 그 정도타격을 당했으니 손을 털지 않을수 없을 것이옵니다. "
"은십자 기사단을 상대하려면 타이탄들을 많이 투입해야 할 텐
데‥‥‥‥"
"폐하,스바시에 전하께서는 지금 회담 장소에 가 계시니 어쩔 수 없
고, 치레아 대공을 보내시옵소서. 그녀와 치레아 기사단이라면 다른
곳에서 병력을 빼지 않아도충분할 것이옵니다. "
황제는 잠시 궁리를 했다. 물론 키에리라는 검호를 물리친 치
레아 대공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타이탄 전력에서
너무 심한차이가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간다고 해도 20기는 너무 적은 숫자가 아닐까?적의
규모는 거의 100기에 달하는데‥‥‥‥"
"그러시다면 폐하,탄벤스 전선에서 빼냈던 기사단을 재차 투입하시
면 될 것이옵니다. 국경선에 대기중인 다른 기사단들을 빼낼 수는 없
기 때문이옵니다.
적들이 이쪽을 향해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기습을 펼쳐야만 피해를
줄일 수 있사옵니다. 또 이번 전투가 기습으로승부를하는 것인 만큼
그렇게 많은 병력은 필요 없을 것이오나 기밀 유지가 철저해야만 하
옵니다.
그렇게 하여 너무 큰 타격을 받게 된다면 놈들도 이쪽을 향해 기습
공격을 준비했던 터 였기에 아마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더 이상 딴 생
각을 못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
탄벤스 전선에서 빼낸 것은 1,7,8전대였다. 그들은 이번에 있었던
두 번에 걸친 격렬한 전투 덕분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
만크라레스의 대부분의 기사단들은 국경의 중요 요새들을 기지로
하여 타국의 침략을 억제하고 있었기에 빼낼 수는 없었다.
크라레스 기사단들 중에서 임의로 빼낼 수 있는 기사단은 치레아
기사단과 스바시에 기사단,그리고 1,2,7,8기사단뿐이었던 것이다.
"알겠소, 그렇게 하지."
"감사하옵니다, 폐하."
"다론! 통신을 해제하라."
"옛,폐하."
다론이 재빨리 통신용 마법진을 해체하고 있는동안 황제는 안티노
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티노스 경."
"옛,폐하."
"치레아에 연락을보내라. 그리고소집을 해제했던 기사단들을다시
소집하라. 평화 회담을하면서 뒤로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그 가중
스러운코린트에게 호된 맛을보여 주는 것이다. "
"옛,폐하."
전쟁테에서 보자, 비열한 자식들
"오호,황제의 말대로 저기들 있군."
탄벤스와 트루비아의 국경선 너머에서 은십자 기사단의 깃발이 펄
럭이는 것을 보고 다크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적극적으
로 호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은십자 기사단의 전력이 엄청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
실이었다. 그런데 치레아 기사단이 보유한 타이탄 20기와 1,7,8전대
의 잔여 세력 42기만으로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리한
작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7,8 전대의 경우 두 차례에 걸친 격전
끝에 겨우 34기만 남았었는데,수도에 남아 있던 8기를 보충받았기에
42기로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레아 기사단의 경우 그녀 개인의 기사단으로서 강자에게
타이탄을 준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서 그녀의 친구들에게 배당한 타이
탄도 많았을 뿐더러,루빈스키 대공의 물밑 작전에 의해 그녀에게 할
당된 기사들도 그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각 전대장들과 스바시에 기사단 부단장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
작은 그런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심사가 복잡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바짝 다가서 있는 제스터의 경우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이동되어 온 상태였기에, 어떻게 하면 빨리 코린트에 정
보를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
는 아직까지 이 사실을 코린트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자,쓸데없이 얼굴 표정을 굳힐 필요 없어. 적이 바로 코 앞에 있
는데 그렇게 긴장을 해서 쓰나?자,모두들 모여 보라구. 작전 회의를
해야 할 것 아냐?"
모두들 쭈뺏쭈뺏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을 때, 제스터가 그녀
에게 허등지등 말했다.
"저,전하,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사옵니까?"
"왜?"
"저 그게 말이옵니다,그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다가 그
말이 전하라는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숙녀' 에게 해도 되는 말인
지 망설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스터가 머뭇머뭇 말을 못 하고 있
자짜중이 난다크가 퉁명스레 말했다.
"뭐냐? 빨리 말 안하면 아가리를 찢어 놓을 테다. "
"화 화장실에‥‥‥‥"
제스터가 마지못해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모두들 키득거리는 가운
데 ,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너는 작전하고 상관없으니 가도 좋다. "
"옛,전하."
제스터는 자신의 상전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재빨리 숲
으로 달려갔다. 그는 다크와 오랜 시간 함께했기에 그녀가 마나의 움
직임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달려간 다음 자신의 목걸이를 꺼
내 들었다. 그의 목걸이는 마법사도 아닌 제스터가통신을 할 수 있도
록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제작된 마법 도구였다. 제스터는 그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는고양이 벼룩. 늑대 굴 나오세요."
그가 암호를 정확하게 말하자목걸이에서 아주 작은목소리가흘러
나왔다. 일반적인 통신 마법과는 달리 수정구를 통한 것이 아니기에
상대의 모습을 볼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뭔지를 알리
는 암호가 들어가는 것이다.
"예,여기는 늑대 굴.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고양이는 탄벤스국경선 옆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기습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정확한 정보입니까?"
"지금 나는 고양이와 함께 와 있습니다. 박쥐 하나에 해당되는 정확
한 정보입니다. "
박쥐 하나라면 특급 정보를 말하는 것이 었다.
"그렇다면 언제 ?"
"기습인 만큼 아마도 내일 새벽쯤에 돌진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
니다. "
"귀하의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조심하시기를바랍니다. "
제스터는 필요한 말만 전한 후 재빨리 통신을 끝냈다. 괜히 통신이
길어져 봐야 들킬 확률만 높아지는 것이다. 제스터는 허등지등 자신
이 있던 위치로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아무도 없었다.
"돌격 !"
우렁찬 외침 속에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저마다 창과도끼,철퇴,검
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특히 치레아 기사단의 드라쿤이 뿜
어 내는 황금 빛 때문에 그움직임은 더욱 현란했다.
"이런 젠장! 이게 기습이야?"
"알 게 뭐야?위에서 시키니까우리는그대로 해야지."
팔시온과 미디아는 타이탄 전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이런 식의 농담으로 대신하
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팔시온의 말대로 이건 기습도 뭐도 아니었다. 다크는 작전
회의를하자고 한 후 밤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돌격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부하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그건 일언지하에 묵살
되었다. 그런 후 이렇게 허겁지겁 준비를 갖춰 돌격하고 있는 것이다.
코린트의 은십자 기사단은 평화 협상을 자신들에게 좀더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국경 부근에서 대규모 기동 연습을 준비중이었다. 병
력의 이동과 더불어 기동 연습 준비가 겹치다 보니 크라레스에서는
그것을 상대가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행동으로오판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은십자 기사단이 주둔중인 평원 부근에는 기동 연습 때 사
용될 타이탄의 보조 장비들인 철퇴나 창 등이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
다. 그리고 기동 연습 전에 몸을 풀기 위해 타이탄에 타고서는 서로
간에 대결을 펼치고 있는 타이탄들도 몇 기 보였다. 하지만 지축을 을
리며 백주대로를 달려오는 이 엄청난 크라레스의 타이탄 무리들을
그들이 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적이다!"
일제히 웅성거리며 모두들 타이탄을 끄집어내어 탑승하고 있는 가
운데 가가린 후작은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사령관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카이론의 임시 사령부에 계십니다,각하."
카이론이라면 탄벤스 공국의 수도였다. 투르넨 후작은 새로운 공왕
을 즉위시키는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수도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이곳
탄벤스 주둔군의 총사령관이었기에 모든 것을 그가 총괄해서 지휘해
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재 은십자 기사단에는부단장이 없었기에 투르넨 후작은자신 휘
하에 있는 모든 타이탄 부대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 부사령관인 가가
린 후작에게 맡겼다.
그런 후 가가린 후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 트루비아와의 국경선
에 도착하여 기동 연습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동 연습
당일 날에는 투르넨 후작이 도착하여 직접 기동 연습을 참관(츳르)할
예정이었다.
"사령관 각하에 빨리 연락해라. 크라레스 기사단이 기습 공격을 가
해 왔다고 말이다. "
"옛, 각하,!"
가가린 후작은 통신 마법을 시도하고 있는 마법사에게서 시선을 돌
려 은십자 기사단 작전관을 바라봤다.
"자네는 정찰조를 좀더 폭넓게 배치하게. 특히 후방에 대한 적의 공
격대가 있는지 주의해서 살펴."
"옛 ,!"
"내가 타이탄들의 전투 지휘를 하는 동안 잘 부탁하네."
"옛,각하."
작전관은 사령관이 타이탄을 타고 일선에 나가 버렸을 때, 전체적
인 부대의 지휘를 담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가가린 후작이 자리
를 비운 동안 타이탄 부대가 최대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토록 있는
힘껏 도와야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마법사들을 지휘하여 가가린 후작의 지시대로 여기저기에 흩
어져 있는 정찰조들을 더욱 폭넓게 배치하고, 또 새로운 정찰조 3개
를후방에 투입하여 뒤로부터의 기습에 대비했다.
가가린 후작은 자신의 타이탄을 몰고 일선으로 달려나가 부하들이
전투 대형을 완벽하게 갖추도록 독려했다. 그들이 준비하는 동안에
적들의 타이탄은 이제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가가린 후작은 기습을 위해 달려오는 적들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느꼈다. 이쪽이 93기의 타이탄을 보
유하고 있다면 적은 60여 기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적의 공격군이 지금 눈에 보이는 저 정도의 규모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저것들 외에 우회 공격대가 따로 있다면 위
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밤중도 아니고
해가중천에 떠 있었기에 시야가 확트여 있었다 조금만주의를 한다
면 결코 놈들에게 약점을 잡힐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가가린 후작의 시야에, 앞서 달려들고 있는 적 타이탄들 뒤
에서 먼지를 뚫고 따라오는 타이탄이 언뜻 보였다. 타이탄들이 전속
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기에 엄청난 먼지를 뿜어 내고 있었지만, 일단
가가린 후작이 상대를 보고자 마음 먹은 이상그것은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먼지 사이로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 6미
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에,짙푸른 색을 칠한 크라레스의 최신형 타
이탄이 6년 전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코린트군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는 것을 가가린 후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먼지 뒤로 보이는 상대방의 타이탄이 바로 그 소문의 타이
탄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느끼는 순간, 가가린 후작에게는 이번 전투
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떠올랐다.
정보 부장인 베르딘 후작은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후,자신의
책상 위에 붉은표지의 문서가 놓여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장식
용의 가벼운 여름 외투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 책상으로 왔기 때문
이었다.
붉은표지 사이에 노란색의 줄이 세 개 쳐져 있는문서‥‥‥‥ 이것은
특급을 뜻한다는 표시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베르딘 후작은 서류
부터 집어들고 황급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방금 벗어 놨던 여름 외투를 다시 걸칠 생각도 하지 않
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향하는 목적지는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
실이었다.
"헉헉 ‥‥‥‥"
씨근덕거리며 그가 달려들자 공작의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이 창
을 들어 그를 막았다. 물론 경비병도 자신이 막아 선 상대가 베르딘
후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가
는 예법을 무시하려고 하는 베르딘 후작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젠장! 비 켜라?"
베르딘 후작은 거친 동작으로 경비병을 밀치고 공작의 집무실로 뛰
어들었다. 그리고그와동시에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들도 황급히 그
를 뒤따라 들어와 그를 제압하려고 했다. 어쩌면 상대는 베르딘 후작
으로 변장한 적의 첩자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바로 그때 마법사로부터 새로 도착한 통신문을 건네 받고
는 그것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베르딘이 공작의 눈초리가 사납다는
것을 느긴 순간 공작은 그 통신문을 갈기갈기 찢어서 내팽개치고 있
었다.
"이런 제기랄!"
뭔가 분통을 터뜨릴 만한 대상을 찾고 있던 공작은 자신의 책상 위
에 놓여 있던 꽃병을 집어들고는 처음에는 바닥에 내려꽃으려고 했
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앞에 베르딘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꽃병은
그대로 베르딘의 머리통을 향해 쏜살과 같이 날아갔다.
요란한 음향이 울려 퍼지고 산산조각이 난 도자기 조각과 물,그리
고 꽃들이 허공을 떠돌며 비산하는 가운데 이미 기절해 버린 베르딘
의 몸은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특급 기밀 문
서 또한 땅바닥에 떨어져서 나됩굴었다.
"정보부라는 새끼들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크라레스의 기사단
이 기습을가해 오는 데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뿌드드득하는 이빨 갈리는소리와 함께 으르렁거리는로체스터 공
작의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
루빈스키 대공은까미유의 표정을물끄러미 바라봤다. 회의 도중에
갑자기 뛰어 들어온 마법사가 종이 쪽지를 전하자,그것을 받아 든 까
미유의 손은 루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표정은 한껏 일그러지기 시
작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받아 든 종이 쪽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늘 냉철했던
기사가 저렇듯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코린트에 뭔가
큰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게 뭘까 궁리해 보는 루
빈스키 대공이었다.
황제가 죽었을까?아니면 로체스터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것도 아니면‥‥‥‥
하지만 루빈스키 대공의 상념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까미
유가 갑자기 불타는 듯하면서 분노에 얼룩진 눈동자를 들어 을렸던
것이다.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까미유는 이가 갈리는 듯한 음성으
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귀하가 이렇게도 비열한 인간인 줄 몰랐었소. 어떻게 평화 협
상을 하면서 감히 본국을 기습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젠
장!"
까미유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고, 그와 함께 루빈스키 대공
의 뒤에 도열해 서 있던 기사들도 그에 대웅하여 검을뽑았다. 당연히
까미유를수행해 왔던 기사들 역시 검을뽑아들었다.
이 세 동작은 순차적으로 벌어지기는 했지만, 거의 순간적으로 벌
어진 일련의 동작이었다. 하지만 루빈스키 대공은 상대가 왜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그 꾸밈없는 눈동자를보며 까미유는자신의 분노를 억눌렀
다. 아무래도 루빈스키 대공은 그 비열하기 그지없는 기습 작전에 관
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그의 다음 행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순간 머뭇거리고 있는 상관을 마법사가 급히 막았다. 마법사는 이
제야 겨우 상관을 막아설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만큼서로간에 검
을 뽑아 드는 속도는 빨랐었다.
"후작 각하, 참으셔야 합니다. 일단 전하의 지시대로 수도로 돌아가
셔야 합니다. "
자신을 말리는 마법사를 뒤로 밀치 며 까미유는 조금 앞으로 나와서
는 종이 쪽지를 손바닥에 붙인 채 책상을 힘껏 내리찍었다. 까미유의
손바닥에 가격 당했을 뿐이었는데도 책상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
을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루빈스키 대공을 향해 까미유는 내
뱉듯이 말했다.
"전쟁터 에서 보자, 비 열한 자식들!"
까미유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거칠게 문을 열고는 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흘로 남겨진 루빈스키 대공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
져 있는 종이 쪽지를 집어 올렸다.
한순간 엄청난 힘으로 내려찍어진 까미유의 손바닥과 탁자 사이에
위치했었는데도 종이는 아주 말짱했다. 곧이어 루빈스키 대공의 손
바닥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루빈스키 대공은 떨리는 목소리
로 부하들에게 외쳤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라."
투르넨 공작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후였
다 사방에서 거대한 타이탄들이 검과 방패를 뽑아 들고 힘과 기술을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패배해서 땅바닥에 자빠져 있
는 타이탄들의 대부분은자신의 부하들이었다.
도착한 투르넨 후작의 시선에 제일 먼저 잡힌 것은 자신의 부하들
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있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큰 덩치에 어
울리는 거대한 방패와 검을 들고 자신의 부하들을 그야말로 간단하
게 '때려잡고' 있었던것이다. 그리고그것을보자마자투르넨후작
의 머리 속에는 6년 전 악몽 같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고 있던 그 거대한 타이탄 그때 그 단 한 번
의 전쟁으로 인해 남부 집단군의 타이탄들이 괴멸을 당했었다. 당연
히 자신이 치촉적일 만큼 지독한 패배를 당하게 만든주 원인은 그 지
옥에 떨어져 마땅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그 놈이 있었기에 서로 간에
밀고 밀리던 그 균형은삽시간에 박살나 버렸던 것이다.
"후퇴하라?'
투르넨 후작은 있는 힘껏 마나를 끌어올려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 놈을 상대로곡여기서, 이 전력으로 싸운다는 것은 6년 전의 실패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하는 것과같았다.
투르넨 후작은자신의 타이탄을불러 내어 전장의 한가운데로 달려
나가면서도 계속 후퇴하라는 외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상대
와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이는 상태에서 부하들이 상관의 명령을 이행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을 도망치도록 그냥 놔주지
를 않기 때문이었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
루빈스키 대공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
의 얼굴은 치솟아오르는분노로 인해 상기되어 있었다.
"오오,먼길에 수고했네. 그래 협상은 어떻게 되었나?"
반갑게 맞이하는 자신을 향해 분노에 얼룩진 시선을 보내 오는 루
빈스키를보고 황제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빈스키는 황제
앞으로 다가가서 문제의 종이 쪽지를 그에게 들이밀며 노기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이게 정녕 사실이옵니까?"
루빈스키가 내미는 쪽지에는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탄벤스 공국에
주둔중이던 파견 기사단에 대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는 보고가 적
혀 있었다. 그것을 힐끗 쳐다본후,황제는 시선을루빈스키에게로다
시 돌렸다.
"사실이라네. 코린트가 일거에 트루비아를 쓸어버리기 위해 기사단
과 함께 군대들을 탄벤스에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지‥‥"
루빈스키는 황제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었기에 정말사력을다
해 노화를 억눌렀다. 하지만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습을 가할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만약 적이 기습을 가
해 온후에 되받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집결시킨 병력이 너무
나 강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어. 90기가 넘는 적의 기사
단을 기습이 아니라면 어떻게 막을 건가?
코린트도자신들이 꾸미고 있던 꿍꿍이가 있기에 이쪽만 그렇게 탓
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 놈들도 이번에 본국의 힘이 어떤지를느꼈을
테니, 이쪽에서 선후를 차근차근 따져서 교섭을 청한다면 웅해 올 테
지."
"기습은 성공했사옵니까?"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들었네."
"누가 지휘를 했사옵니까?'
"자네가 없었기에 치레아 대공에게 부탁했다네."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는 골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3를 보냈
다면 모르면 몰라도 상대방은 거의 치명타를 입었을 가능성마저 있
었다. 어느 정도 타격을 당했다면 그래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
지만,전멸을 시켜 놨다면 그 이후의 사태는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오
직 신만이 아시리라.
키에리, 코린트는 자네가 필요하네
로체스터 공작은 깨어난 베르딘으로부터 제스터가 뒤늦게 정보를
줬다는 것과, 상대방의 기습 작전이 매우 갑자기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기랄‥‥‥‥"
베르딘이 건넨 특급 기밀 서류를 보고서야 로체스터 공작은 이번
기습 부대를 인솔한 놈이 '고양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는
치레아 대공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터에게 벼룩처럼 달라붙어 rL
시하고 있는 제스터가 을린 보고니 그건 확실했다.
'그녀가 전면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한다면 승산이 없어. 젠장! 이 일
을 어떻게 하면 좋지?"
로체스터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는오른손 손가락으로 팔걸
이의 윗면을톡톡 둔틀기면서 생각에 깊게 빠져 들었다. 그런 상관의
모습을 보면서 베르딘 등의 부하들은 그의 결정을 조용히 기다렸다.
이제 전개가 어떻게 되느냐는 오직 상관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주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로체스터의 손가락이 팔걸이
를 두들기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윽고 로체
스터는 뭔가 결심을 한듯 외쳤다.
"전 군에 전투 준비령을 내려라. 그리고 모든 기사 단장들은각자자
신의 부대를 점고하고출발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드디어 로체스터 공작이 단안을 내렸기에 그의 방에 모여 있던 기
사들과 장군들은 열기 가득한 표정으로 힘있게 답했다.
"옛,전하."
"자,모두들 빨리빨리 행동해.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누가
먼저 행동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그
리고 제임스,로젠!자네들은나좀보세나 "
모두들각자치 위치로달려가고나자공작의 집무실에는제임스와그
의 형인로젠,그리고로체스터,로체스터의 부관인 레티안이 남았다.
"이제부터 자네들에게 어려운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제임스!"
"옛,전하,"
"경과 까미유만큼 치레아 대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거
야. 그녀가 앞장서서 기사단을 지휘해 공격해 온다면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어. 이번 기습 공격도 그녀가 직접 지휘해서 쳐들어왔다. 아직
전투 결과에 대한 보고가 접수되지는 않았지만, 아예 연락이 불통인
것을 보면 상황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고 해야겠지.
이번 상황을보면 크라레스는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해서 강공을 펼
쳐 올 것임이 틀림없다고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본국은 어쩌면 멸
망의 길을 걷게 될지도모른다. "
처음부터 공작이 크라레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점
을 느낀 루엔이 끼여 들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적기사까지 대량으로
생산한 코린트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그런데, 왜 겨우 크
라레스따위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하, 그것은 너무‥‥‥‥"
하지만로체스터 공작은로젠의 표정에서 그가무슨말을하려는지
눈치 채고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아,로젠!자네는 그녀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
이지만, 이건 사실이야. 도저히 코린트 혼자만의 힘으로 그녀를 이길
방법은 없다. "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힌트를 얻은 제임스가끼여 들었다.
"전하,하오면?"
"동맹국들을 불러 모아야 해, 하지만 지금 본국의 동맹국들은 아무
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도움이 될 만한 국가들을불러 들여야
한다. 그래서 말인데,제임스 경이 알카사스에 가주겠나?"
"예? 알카사스에 말이옵니까?"
"그래,자네는 그녀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러니 그들을 열심
히 설득한다면 어쩌면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을 거야. 알카사스에 가
면 국왕보다도 먼저 원로원부터 설득해라. 예로부터 알카사스의 모
든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원로원이야."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에게 할 말을 다 했는지 시선을 로젠에게로
돌렸다.
"로젠 경."
"옛,전하."
"경은 크루마로 가서 미네르바를 설득해라."
"예?하지만 크루마는 경쟁국이옵니다. 그들이 우리들을 도와 줄 리
가 없지 않사옵니까?'
"경은 치레아 경을 잘 모르지만, 미네르바는 잘 알고 있을 거야. 서
로가 힘을 합쳐서 싸웠으니까그건 당연하겠지. 경은 있는 사실만을
그녀에게 전해라, 크라레스는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해서 강공을 펼
쳐 왔고 그 결과 본국의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은 괴멸 당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세 개 기사단밖에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힘이 남
아 있는 본국과 힘을 합쳐 저 새파란 신흥 강국을 때려잡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코린트가 망한 후 홀로 남아 나중에 멸망할 것인지 그
것만물어 봐. 그러면 나머지는 미네르바가 결정하겠지 "
"예,전하."
"그리고 나는 잠시 다녀을 데가 있으니까,제임스 경은 잠시 남아 있
다가 까미유 경이 돌아오면 그에게 아르곤의 교황을 설득하라고 전
하게. 알겠나?'
"예,전하."
"이만 나가 보게나."
로젠과 제임스가밖으로나간후로체스터는 레티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로체스터의 전속 마법사이자 부관이었고 또 그의 친
구들이 하나둘 없어져 버린 지금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를나눌수 있
는 대화자였다.
"레티안."
"예,전하."
"그곳에 갈수 있도록준비해라."
레티안은 공작의 지시에 약간 창백해진 표정으로 상관을잠시 바라
봤다. 그녀는 로체스터가 한 번씩 다녀오곤 하는 '그곳' 이 어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그녀는그곳에 로체스터가가는 것을 별로 탐
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죄인 들이었
기 때문이다.
레티안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로체스터를 안내한 곳은 코린트 서부
의 변방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마법진을 이
용해 모습을드러낸 곳은그 시골 마을의 가장 외곽에 외로이 서 있는
초라한 농가였다. 농가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우리 속에는 아직 살
이 오르지 않은 새끼 돼지 두 마리가 먹이통에 코를 박고 있었고, 농
가의 옆에 있는 작은 밭에는 옥수수들이 푸른 잎사귀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한 시골 장정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쪼개고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서슴없이 그곳으로 발길을 옳겼다. 시골 장정의 벗어
붙인 구리 빛 상체에는 크고 작은 흥터들이 도끼질을 할 때마다 춤을
추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잠시만 기다리게. 얼마남지 않았어."
시골 장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하던 일을 계속했다. 도끼질 한 번
에 장작은 어김없이 반듯하게 두 토막이 되어 쪼개져 나갔다. 절대로
헛손질을하는 법이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너무나도 규칙적인 몸놀
림이었다. 이윽고 모든 장작을 다 쪼개 버린 그는 천천히 뒤로돌아섰
다. 그는바로7년 전에 모습을감춰 버렸던 키에리 발렌시아드였다.
"죠드는?"
"시장에 물건을사러 갔지, 아침 일찍 갔으니 아마도 두세 시간 후에
는돌아을 거야. 죠드에게 볼일이 있나?"
"아니,자네한테 볼일이 있지."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를잠시 바라본후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힘이 필요해."
공작의 말에 레티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공작이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공작이 키에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전쟁터일 것은분명했다. 그렇
게 되면 키에리는 타이탄을 꺼내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가 가지고
있는 헬 프로네는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는 타이탄이었기에 그가 죽
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모두가 당장에 눈치 채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다.
"껄껄‥‥‥‥ 이제 코린트가 망하든 황제가 죽어 나자빠지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자네도잘 알지 않나?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늙은이를 놀리면 못쓴다네. 들어가지,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게."
"크라레스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것이 한 시간도 지나가지 않았네.
크라레스는 초전부터 그 소녀를 전장에 투입했어. 그녀가 있는 한 도
저히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지 않나?제발 코린트를 위
해 한 번만 더 검을 들어 주지 않겠나?"
"훗, 검을 놓은 지 벌써 6년이 흘렀어. 이제 검술이고 뭐고 다 잊어
버린 지 오래지. 내가 가도 도움이 안 될 거야. 그건 그렇고, 이게 뭔
줄아나?"
키에리는선반 위에서 술병을하나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라페르야. 옛날 우리들이 여행하면서 즐겨 마셨었지. 그때나 지금
이나 맛은 변함이 없더군."
라페르는 코린트 서부와 발렌시아드 공국에서 생산되는 서민들을
위한 싸구려 술이었다. 풍요로운 스웨인 평야에서 재배되는 옥수수
와 밀, 그리고 감자를 이용해서 생산되는 이 술은,강렬한 맛을 지니
고 있었다.
잔에 가득부어 권하는 키에리를 바라보며 로체스터는 언제나 그러
했듯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근심 없는 얼굴을
보았을 때 '어쩌면 이게 더 키에리를 위해 좋지 않을까.'하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 모두가 이룩했던 것이 이제 산산이 부서져 내리려고 하고 있
네. 자네와나,그리고 리사와 그라세리안이 이룩했던 그 모든 것들이
말일세, 리사도, 그라세리안토 자신이 이룩했던 것들이 파괴되는 것
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그들이 이곳에서 살았었던 그 작은 흔적이라
도 지켜야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가아닐까?"
"훗, 자네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하지만 자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냥 여기에 있을 거야."
"타이탄 때문에 그러나? 자네 정도의 인물이라면 헬 프로네보고 1년
만 기다려 달라고 청할 수도 있을 거야. 타이탄을 교체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또 그것이 안 된다면 헬 프로네를 버리게. 내가 그 대신이라고하기
에는 뭣하지만 자네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타이탄을 주겠어. 적기사
급의 엑스시온을 넣었으니 헬 프로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
는 것을 내가 보증하지."
로체스터는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비밀리에 제작
한 초강력 타이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러 적기사와 다른 형
태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코 누구도 코린트의 타이탄이라고
생각할 수 없도록 코린트의 타이탄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들을 제
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단 한 대만이 만들어졌다.
그 타이탄은 지금도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며 발렌시아드 공국의 궁
전 지하실에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키에리는고개를가로 저었다.
'타이탄따위가 걸리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뭔가?"
"나는 여기서 6년을 보내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네. 권력의
덧없음과 허무함도 알게 되었고, 돼지우리 같은 집 안에서 벼룩들과
합께 우글우글 부대끼며 살고 있지만 자그마한 행복과 만족을 느낄
줄 아는 농노들을 보았지.
내 나이가 어느덧 70을 넘은 지가 오래야. 마누라도 오래 전에 죽어
버렸고, 아들들은 그 나름대로 장성해서 자신들만의 이름을 쌓아 을
리고 있지.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있겠나?더 이상 세상사에 눈길을
돌린다는 것은 미 련한 짓이야."
"그래도‥‥‥"
"아닐세. 권력의 정상에 있을 때만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
에 있으면서 깨달았지. 비로소 그라세리안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을 이
해할 수 있겠더군. 그는 그때 벌써 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던 거야.
망할 녀석!나한테도좀가르쳐 주고 떠날 일이지‥‥‥‥"
"설마‥‥ 그라세리안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괴에리를 보며, 로체스터는 뭔가 배신감 같기도
한서운함을느꼈다. 그중요한사실을자신에게는한마디도 말해 주
지 않았다니‥‥‥‥
로체스터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레티안도 진짜 배신감으로굳
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법사인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대
마법사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이었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
가 국가의 중대사를 앞두고 자기 흔자 편하기 위해 은둔을 해 버리다
니‥‥‥‥
"나한테까지 그런 것을 숨기다니 너무하군."
따지고 드는로체스터를 향해 키에리는 어설픈 미소와 함께 변명을
늘어놨다.
"꼭 자네에게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네. 중간에 나도 한 번 그를
찾아갔었어.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지. 그런 일을 한참
분주한 자네에게 알려서 마음을 심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
던 것이지,딴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내가 말하는 것은 자네보고 새롭게 권력을 잡으라는 것은 아닐세.
조용히 이름을 숨기고 나를 도와 달라는 것이야. 그런 후 전쟁이 종료
되면 다시 떠나게나. 아마도 다시는 내가 자네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
을하지 않을 거야. 이번 한 번만나를도와주게."
"쯧,미련이 많은 놈이로군‥‥‥‥ 내가 그렇게 세상사에 미련이 없다
고 말했건만‥‥‥‥"
"황제가 아닌 나를 도와 달라는 것일세. 자네의 오랜 친구에게 그런
작은 것도못들어 주겠나? 넉넉잡고 세 달도 안 걸릴 거야."
한참궁리하던 키에리는 이윽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좋아, 이번 한번 만이야."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의 손을굳게 잡았파.
"고맙네."
진심 어린 친구의 태도에 키에리는 밝은 미소로만 응답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미네르바 전하, 방금 지발틴 기사단 제3전대장인 쟈드 백작으로부
터 통신이 도착했사옵니다. "
"제3전대라면 쟉센 평원 주둔군일 텐데‥‥‥?"
쟉센 평원이라면 6년 전 전쟁에서 크루마가 코린트로부터 빼앗은
영토였다. 현재 쟉센 평원에는 지발틴 기사단 제3전대와 제네리아 기
사단의 제5,6전대가 주둔중이었다. 비록 코린트와 접해 있는 최전방
이었지만 적의 선제 기습 공격을 피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이 배치
되어 있었다.
"예,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래 뭐라고 하던가?"
"코린트로부터 비밀리에 사신이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그는 전하와
의 단독 면담을 원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그래?그 녀석이 나하고 직접 회담할자격이 있던가?그렇지 않다면
외교 담당관을 보내라."
약간은 거만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부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신으로 온 기사는 로젠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옵니다. "
"로젠이라고? 으음‥‥‥‥ 그 녀석이라면 직접 만나야 하겠군. 이리로
불러들여라,"
"옛,전하."
10분 후 로젠은 그의 수행원들과 마법진을 통해 크루마의 수도 엘
프리안에 도착했다. 하긴 수행원이라고 해 봐야 겨우 기사두 명과 병
사두 명뿐이었지만 말이다.
"발렌시아드 대공이 도착했사옵니다. "
"이리로 안내해라."
"옛,전하."
잠시 후 로젠이 그녀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로젠은 미네르바의 경
비병들이 문을 열어 주자 안을 힐끗 바라본 후, 안에 미네르바 흔자
있는 것을 보고는자신의 부하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옛,전하."
로젠은 기운찬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미네르바 공작."
"어서 오세요, 발렌시아드 공작. 자,그쪽으로 앉으세요."
미네르바는로젠이 자리에 앉자 생긋 미소를보내면서 말했다.
"그래,무슨 일로 찾아오셨지요?"
"로체스터 전하의 명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
"그래,무슨 일인가요?"
미네르바는 자신이 상대에 비해 월등히 나이도 많고 또 지위도 높
았지만 존칭을 해 주었다. 그만큼 코린트 발렌시아드 가문의 후계자
라는 지위는 높았던 것이다. 물론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거대한 발렌
시아드 공국의 주인이기에 얻어지는 것이었지만.
"공작께서는 본국과 크라레스 제국 간에 몇 번의 전투가 벌어진 것
을 알고 계십니까?"
"예, 부하들로부터 보고는 들었어요. 뭐, 서로가 큰 피해 없이 휴전
협정을 맺으신다고요?"
"그렇다면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모르시는모양이군
요."
미네르바가 궁금하다는 듯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로젠은 말을
이었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본국의 파견군을 기습했습니다. 은십자 기사
단과 철십자 기사단이 괴멸 당했지요."
이건 미네르바로서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기에 그녀의 어조는금방
차가워졌다. 상대가 지금하고 있는 말이 진실일까?아니면 거짓일
까?
"사실인가요?"
"알아 보시면 알 겁니다. 탄벤스 국경선에 본국의 타이탄들이 고철
이 되마 즐비하게 뻗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크라레스가 치레아 대공을 선두에 세워서 공격을 감행해 올 경우 본
국혼잔서는 상대할 수 없다고 하겼습니다. 그 때문에 저를보내신 거
지요. 이제,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미네르바 공작님의 선택을 기다리
고 계십니다. "
"호호호,무슨선택을하라는 거지요?"
"코린트가 멸망한후 크라레스의 다음 먹이가 될 것인지‥‥‥아니면
지금 힘을 합쳐서 건방진 신흥 대국·을 멸망시킬 것인지‥‥‥‥"
하지만 미네르바는 상대의 얄팍한속셈에 쉽사리 걸려들지 않았다.
3국 체제가 유지되려면 서로 간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밀리는 국가를 뒤에서 도와 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3국 체제는곧깨어지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의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것을 나 혼자서만 단독
으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일단 부하들과 상의도 해야 하고,또 폐하
의 윤허도 받아야만 해요. 그러니 결정을 내리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텐데,어떻게 하겠어요? 기다리겠어요?"
"아닙니다. 돌아가겠습니다. "
로젠은즉시 일어서더니 미네르바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그는
로체스터 공작의 모든 지시를 이행한 상태니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
가 없었다.
이제 선택은 오로지 미네르바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상관의 생각
대로 미네르바가 크라레스를 위험한 강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머지않아 허락의 메시지를 보내 올 것이다. 그러니 그는 구태여 여기
에 남아 있을 필요 없이 발렌시아드 공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기사
단을 점검해야하는 것이다.
로젠이 밖으로 나가는데도 미네르바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가 얼
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잘 알면서도 그녀는 그를 순순히 보내 주는
것이다. 동맹군을 청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로젠.
그러면서도 사실만을 말하면서 절대로 상대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
는 고지식하면서도 강인한 무인의 모습. 그야말로 군침이 흐르는 인
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를 사로잡아 세뇌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거나,
또는 그를 붙잡아 둠으로 인해 코린트에 간접적인 타격을 입힐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가는 로젠의 됫모습을 바라보면서 미
네르바는 6년 전에 전사한 자신의 부하 루엔을 아련히 떠올렸다. 아
마 살아 있었다면 저 녀석보다 훨씬 더 근사한 기사가 되어서 자신에
게 든든한 힘이 되어 줬을 텐데‥‥‥‥ 생각하면 너무나도 잃은 것이 많
았던 전쟁이 었다.
커다란 유리창이 붙어 있고 그 창문의 바깥쪽에는 두 명이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제임스였고,또 한 명은 그를 상대하게 된 알카
사스의 외교 담당관이었다. 유리창 바깥에는 안쪽에 있는 두 사람들
을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의자들이 놓여져 있었고,그 위에는 다섯 명
의 노인들이 앉아서 저마다 한마디씩 해 대고 있었다.
"허허‥‥‥‥우리들을 만나겠다고 청한 것이 저 젊은이인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
"대단한 젊은이로군요."
"그렇지요, 마스터 급의 강자가 사신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는데‥‥‥‥"
"그것도부하네 명만 거느리고 왔다고하지 않습니까?"
노인네들이 웅성웅성 떠들어 대자,그들 중에서 한 노인이 손을 천
천히 들어올리며 제지했다.
"자자,모두들조용히 하게나. 저 젊은이의 말도들어 봐야지."
노인들이 앉아 있는 방과 제임스가 앉아 있는 방은 매우 특이한 방
이었다. 그 두 방의 사이에 놓여 있는유리창은마법을 이용해서 특별
히 제작된 것으로서 제임스가 봤을 때는 그냥 벽으로 보였지만,노인
들이 봤을 때는 유리와도 같이 투명해서 저 반대편을 완전하게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쪽에서 말하는 것은 이쪽에 들리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
은 저쪽에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약간은 위험할 듯한 인물을 다수의
사람들이 관찰하며 심문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 놓은 장소였다.
"그러니까 후작께서는 본국에서 동맹군을 파병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소."
"본국은 귀국과 매우 사이 좋게 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개국
이래 여태껏 중립을 지켜 왔었기에 아마도그건 어려을 것입니다. "
"귀국의 노선은 잘 알고 있소. 타국 간의 전쟁에는 절대적으로 간섭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다르오. 크라레스가과거 본
국과 겨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제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지
만 그것은 과거일 뿐,지금은 한낱 신흥 제국일 뿐이오. 그런 신흥 제
국이 코린트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귀국과 아르곤,크루마와 힘 겨루
기를하고 있소.
과거 본국이 선제 공격을가해 왔던 크라레스를무너뜨리고 대제국
이 되었을 때, 세계의 평화를 위협한 적이 있었소? 본국은 그때부터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했었소, 그렇지 않소?"
제임스는 상대의 대답을 들으려는 듯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크라레스는 잃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끊
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소. 6년 전 대전쟁을 통해 본국으로부터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았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자신
들의 동맹국들을 충동질해서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소. 그 때문
에 지금 멸망한 국가가 다섯 개나 되오. 그 동안 본국은 될 수 있다면
크라레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참고 있었으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소."
외교 담당관이 자신의 얘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제임스는 말을 이었다.
"크라레스가 본국과의 휴전 회담중에 기습 공격을 가해 왔기 때문이
오. 아무리 기습 공격이었다고 하지만,본국의 기사단은 그렇게 만만
하지 않다고 생각했었소. 그렇지만 이번 기습으로 본국의 은십자 기
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이 전멸을 당했소."
"이런‥‥‥‥"
"내 말은 사실이오. 그렇다고 적이 엄청난 수의 타이탄을 동원한 것
도 아니오. 보고에 의하면 겨우 60여 기 남짓밖에 안 되는 수였소. 그
런데도 그들이 거의 100여 기의 본국 타이탄들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다크 폰 치레아 대공이라는 검호가 있기 때문이오. 아마도 이대
로 계속나간다면 본국은곧이어 멸망의 지경에 이를지도모르오."
"그래도설마‥‥‥ 너무 상대를 과대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까?"
상대의 지적에 제임스는단호하게 고개를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니오. 그녀는 아마도 지금 현재 세계 최고의 검객
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소.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를 전
사케 했고,6년 전에는 겨우60여 기의 타이탄으로 200기가 넘는 본국
의 동맹 타이탄부대를 괴멸시켰었소. 이건 절대로 내가 지어 낸 말이
아닌 사실이오."
"그럴 리가‥‥‥‥"
여기까지 말이 나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울려 퍼졌다.
"그대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 그
래,코린트가 그들을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지금 동
맹군을 파병하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지. 그런데,우리가 동맹군을 파
병한다면 그대들은우리에게 무엇을 줄수 있나?"
이제야 숨어 있던 노인들이 미끼를 문 것이다. 제임스는 상대방이
잘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약간 더 크게 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스바시에와 치레아 지방을우리에게 줄수 있겠나?"
제임스는 잠시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 두 지방은 대단한 가치가 있
었다. 알카사스와 아르곤,그리고 저 동쪽의 여러 왕국들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가 바로그 두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깜다는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는 문제였다. 정 주
기 아까우면 그때 가서 한판 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공작 전하께서는 아마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
"좋아,그리고 또 한 가지.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이 청기사라는 초
강력 타이탄이라면서 ?"
"예."
"만약 그것의 설계도가 노획된다면 우리들에게 넘겨 줄 수 있나?물
론 원본을 넘겨 달라는 것은 아니고 복사본을 달라는 것일세."
제임스는 그것 또한 어렵지 않게 허락했다. 뭐 남의 것 가지고 인심
을 쓰는 것인데 그렇게 박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아쉬운 판에, 말로
는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예,그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런데,자네. 그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허가하는 것은 아닌가?"
상대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제임스는 미소를 지어 보이
며 보이지 않는상대에게 자신 있게 답했다.
"국가가 망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설마‥‥‥‥ 크라레스가 그 정도로 어려운 상대 였는가?"
"한번 맞붙어 보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
해골 가면을 쓴 수수께끼의 사나이
아르곤 제국의 저 깊은 밀실에서 주교들의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 참석한 인물은 모두 20여 명. 이들은 모두 현재 아르곤 최고의
권력자들이었다. 물론 아르곤 제국에는 교황이라는 최고 지도자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사실 유명무실했고, 실질적인 권력
은 이 주교들이 쥐고 있었다.
주교들이 교황을 제치고 모든 권력을 쥐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
었다. 처음에 아르곤이 종교 국가가 되었을 때는 성기사의 권력도 엄
청났었다. 원래 성기사는 전쟁이 벌어지면 최전선에 나가서 싸워야
만 하는 존재들인 만큼,내전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과도기를
거쳐온 이상그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이 중앙의 전쟁터에서 패배한 무리들을 뒤쫓아 잔
당들을 소탕한다고 저 변방에서 분주할 무렵,전쟁을 할 줄 모른 탓에
교황과 함께 수도에 남게 된 주교들은 권력이라는 금단의 사과가 가
져다준 단맛에 취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주교들은 전쟁 때는 꼭 필요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냥
없는 듯이 숨어 있는 편이 좋은 성기사들에게 종교의 교리를 들어 고
행파 순종, 그리고 인내를 강요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을 수련이나 하게 만들어 놓고 보니 매우 다루기
도 편할뿐더러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매우 보탬이 된 것은 말할나위
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황이 죽자,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다. 선대 교황의 유
언에 따라 그 다음 교황은 성기사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 선택의 기준이 문제였다.
이때 이미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던 주교들의 집합체인 주교
원은 패기만만한 교황이 선출되어 자신들의 권력이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교황을 실력이 아닌, 얼마나 신앙심
이 깊은지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장 순종적이고, 인내
심 강하고,또 신앙심이 깊은 인물을 선택해 버렸다.
이게 몇 대를 거치다 보니, 교황의 권력은 차츰 축소되었다. 물론
교황의 권력은 아르곤에서는 거의 신에 필적할 정도로 막강했다. 물
론 그 권력을 사용하는 교황은 없었다. 그러니 쓰지 않는 것은 못 쓰
는 것과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호랑이 없는굴에 토끼가
왕이듯 주교원이 아르곤의 최고 권력 기관으로서 막강한 힘을 휘두
르고 있는 것이었다.
"형제들,코린트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동맹군을 청하더군요."
"코린트가 왜 동맹군을 청한다는 것입니까? 코린트의 힘이 엄청나
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데 말입니다. "
"뭔가 함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형제. 사신의 말로는 크라레스가 너무나도 강력
하기에 구원을 청하는 것이라고하더군요."
"그럴 수가‥‥‥ 크라레스는 이제 갓 태어난 듯한 신흥 강국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코린트와 정면으로 겨를 힘이 있다는 말입니까?'
"글쎄 말이오. 오늘코린트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오."
그 말에 모두들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부터 코린트는 탄벤스를, 크라레스는 트루비아를 도우면서
그곳 국경에서 몇 차례 전투를 벌였다는 것쯤은 형제들도 잘 아시고
계실 겁니다.
그러다 두 나라가 얼마 전 평화 협정을 한다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전
투가 확대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크라레스
의 기사단 일부가 탄벤스에 주둔중이던 코린트의 기사단을 기습하여
전멸시켰다고 하더군요."
"기습을 당한 것을 보면 파견되었던 기사단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제가 전해 듣기로는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 전체였습니다,
형제."
상상 외로 규모가큰 대부대가 전멸 당했다는 것을 알고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둘을합치면타이탄이 130기가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크라레스는 신흥 강국으로서 자기들의 분수를 모르고 날뛰고 있습
니다. 코린트와 7루마 간의 전쟁에 편숭하여 국토를 엄청나게 넓히
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치레아를 기지로 하여 알카사스와 아르곤과
중개 무역을 하여 막대한 재화를 긁어모으고 있지요. 거기에다가 치
레아의 대공이라는 작자는 일개 공국의 주인인 주제에 크라레스를
등에 엎고 뻣뺏하게 나오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 기회에 물을흐리
고 있는그 미꾸라지를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치레아를 차지하고 앉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은 처음 총독 자리
에 앉은 후 될 수 있으면 아르곤과 사이 좋게 지내려는 심산이었는지
가급적 충돌을 피했었다.
하지만6년 전 전쟁이 끝난후 치레아 대공으로 임명되고나자간덩
이가 커지기 시작해서 충돌을 회피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아예 시비
를 걸어 오고 있었기에 그 대처 방안에 대해 주교원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과거 치레아 왕국과 스바시에 왕국은동쪽의 아르곤 등의 국가들과
서쪽의 알카사스 등의 국가들의 중개 무역을 행했다. 그렇기에 이 두
국가는 왕성한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옛
날그 시절에는 어느 정도 상식이 통하던 시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운업을 발달시킴으로 인해 싼운송료로 승부를
했을 뿐, 상대국에 부당한 불이익을 줘서 강제적으로 틀어막지는 않
았었다.
하지만 치 레아가 공국으로 탈바꿈한 후, 치 레아 공국은 아르고니아
산맥의 연장선상인 미르시엔 열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는 점을 내세웠
고, 그 점을 이용하여 그 일대 모든 해상 통로들을 영토로 선포했다.
그런 다음타국의 선박들에 대해 거액의 통행세를요구했던 것이다.
통행세를 내기 싫으면 저 멀리 미르시엔 열도를 돌아서 이동하든
지,아니면 통행세를 내고 열도를 통과해야 했는데 그런 식으로는 치
레아나 스바시에 상선들과 운송 단가면에서 그야말로 경쟁 자체가
되지 않게 되었다.
아르곤에서는 이것을 몇 번이나 항의했지만,치레아 대공이란자는
늘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치레아나 스바시에의 상선
들에게 보복 통행세를 물리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르곤의 내륙에서 나오거나 들어
갈 화물들이 운송료가 비싼 해로를 통하지 않고 치레아와 아르곤을
가로막고 있는 말토리오 산맥의 끝자락을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르곤 내륙의 수출품들의 경우 과거에는 아르곤의 항구들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선박을 통해 치레아를 거쳐 서쪽으
로운반되었다. 그리고그 역방향으로 수입품이 배급되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르곤의 동남부의 경우 예전과같은 방
식으로 운송되고 있었지만,북서 내륙 지방의 운송로는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들은 곧장 육로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말토리오
산맥을 넘어 치레아로 보내진다 그런 다음 치레아에서 해로를 이용
해 서쪽으로 수출되는 것이다.
이래저래 치레아의 해운업만 날로 발전해 가는 구도가 되어 가고
있었다. 협박이나 항의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향해 아르곤의 주교원
은 점점 불만이 쌓여 오고 있는중이었다.
그러다가 치레아가 말토리오 산맥을가로지르는 대로에 세 개의 작
은 요새를 건설했고,그것도 모자라서 타이탄 부대를 저지할 수 있는
강력한 요새를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해 볼
테면 한번 해 보자하는 식의 무언의 선전 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형제들! 전능하신 신을 받드는 우리들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좋은 방향으로 끌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치레아는 크로노스 교에 대해 예로부터 나쁜
감정이 없는 국가입니다. 로니에 사제가 그곳에서 중책을 맡고 있지
않던가요? 그를 통해서 잘 타협해 보면‥‥‥‥
하지만그런 평화적인 의견은간단하게 묵살되어 버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지금 치레아에는 다섯 명의 형제들이 활
동하고 있지만,대부분의 경우 빈민 구제 등 대부분 권력과는 무관한
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크로노스교를 인정하는듯하지
만,보이지 않게 탄압을하고 있단 말입니다.
몇 십 년이 더 지나더라도 치레아는 나아질 것이 없을 겁니다. 처음
에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발톱을 숨기고 있더니,지금은 일마다 트집
을 잡고 있어요. 이건 그 자가 그만큼 본국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표결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
"그게 좋겠습니다. 설왕설 래해 봐야 귀중한 시간만 흐를 뿐이오."
모두들그것이 좋겠다고 했기에 곧이어 투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전쟁이었다. 원래가 구 세력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상실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신진 세력이 커
나오기 힘들듯, 신생국도 마찬가지였다. 신생국이 편안하게 성장하
도록 기존의 대국들은 그냥 묵인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눈에 들어
온 가시 마냥 뽑아 내려고 안달이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
니까.
"일단 전쟁은 해야겠지만, 이 기회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어 내야
만 합니다. 치레아를 전리품으로 얻어 내든지,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미르시엔 열도라도 받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국가들에
대해 크로노스 교를 전파할 수 있는 권리도 얻어 내야 합니다. 코린트
는그것을 약속해 줄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린트의 최신형은 곤란하다고 하더라도 두 번
째로 강력한 엑스시온부터는 본국에서 수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
아 내야 할 것입니다. "
그 외에도 많은 토의가 오고갔다. 원래가 대규모로 전쟁이 벌어지
고 나면 각국의 세력 구도가 많이 바픽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
에 아르곤은 이번 전쟁에 적극 관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 판도를
더욱 넓힐 심산이었다.
두터운 해골 모양을 한 특수한 재질의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인물
이 로체스터 공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공작이 자리를 잠시 비
운 지 세 시간 후의 일이었다. 모두들 수상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가
운데 그 남자는 코린트의 용병 기사단 단장으로 임명되
었다.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따르면 지금 현재 그에게 부하가 한 명도 없
었지만,시간이 조금 지나면 대륙 여러 곳에 퍼져 있는유명한용병들
이나 용병 기사들을 모집하여 그의 지휘 하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그
리고 그에 따라 여러 유명한 용병 기사단들에게 그들을 고용하고 싶
다는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발표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쯤에 용병들을 대량으로 모집하는 경우
는 비일비재 했기에 부하들은 공작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크라레스쪽에서 허겁지겁 사신이 와서 협상을다시 시작할
것을 원한다는 부하의 보고가 들려 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상대의 꿍
꿍이를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기에 한동안 궁리를 하다가 일주일
후에 협상을 재개하자고 통보했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저 비열한크라레스를상대로 일주일 후에
협상을 다시 시작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상대가 먼저 이쪽의
코털을 건드린 만큼, 놈들의 속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준비
가 갖춰지는 대로 먼저 기습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그 준비가 갖춰
지는 것은 용병대가 모이는 때가 아닌, 크루마, 알카사스, 아르곤이
방향을 분명히 정했을 때가 될 것이다.
코린트가 이렇듯 이빨을 갈면서 회심의 카운터 펀치를준비하는줄
도 모르고 크라레스의 황궁에서는 조촐한 축하 파티가 열리고 있었
다. 오늘의 승전을 축하하는 황제와 루빈스키 대공 둘만의 작은 파티
였다. 황제는 포도주를 루빈스키의 잔에 가득 채워 주며 말했다.
"그쪽에서 회답이 왔네. 일주일 후,전에 그곳에서 다시 회담을 하자
고하더군."
"그래도 다행이옵니다, 폐하. 상대가 섣불리 행동에 옮기지 않고 회
담에 웅해 준 것은 아주 잘 된 일이라고봐야하겠사옵니다. "
"허허허,그것은 벌써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 토지에르 경의 앞을
바라보는 안목이 옳았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놈들이 섣불리 행동
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습전을 감행하다가 들켜 버렸기 때문일 것이
야. 자신들의 추잡한 행동이 발각된 데다가, 기습 부대마저도 엄청
난 타격을 입었지. 이래저래 그들로서는 화해에 응하는 길밖에 없겠
지."
황제가 미소를 띠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보며, 루빈스키는 자신
이 우려하는 바를 말했다. 상대의 피해가 작다면 모르겠지만,치레아
대공은 너무 일을 크게 벌여 놓았던 것이다. 상대방 기사단을 완전히
박살을 내왔다는 호기스러운 보고를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치레아 대공의 보고로는 은십자 기사단을 거의 전멸시
켰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상대에게 너무 큰 피해를 입힌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옵니다. "
"하하하,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나. 예로부터 강자가 이 세계를 지
배하는 것이지. 이쪽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줬는데 뭐가 걱정
이겠는가? 치레아 대공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 준 것이 고마을 뿐
이지‥‥‥‥ 녀석들이 회담에 응한 이상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
야."
"하지만, 전하. 그때 회담 장소에서 이쪽의 행동을 보고받았던 까미
유 후작의 행동으로 봤을 때,그는 이쪽을 불시에 기습하려다가 되레
기습을 당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사옵니다. 아무래도 너
무 성급한 행동이 아니었나 하는‥‥‥‥"
"허허허,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놈들이 병사들까지 대량으로 이동
시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습을 계획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런 기밀 사항의 경우 될 수 있으면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나?회담장에 나가는 까미유 후작에게 그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황제는 포도주를 쭉 들이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자네는 생각을좀해 봐
야 할 것이야. 협상 때 이쪽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할지,또 놈들
이 어떤 조건을 제시해 올지 그런 것도 예상을 해 둬야 하지 않겠나?
아마도 농들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둔 것도 다 그 때문이겠
지,"
"옛,전하."
루빈스키 대공의 피
코린트의 크라레스 국경 부근. 그곳에는 지금 거의 100여 명의 사람
들이 웅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 화려한 복장을 걸
친 인물들이었고,상당수는 화려한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이렇듯 엄청나게 화려한복장을하고 있는 기사단은 코린트 내에서
도 두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만큼 쉽사리 그들의 신분을 파악하는 것
은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바로코란근위 기사단이 진을 치고 있는 것
이다.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천막의 위에는 코란 근위 기사단을 뜻하는
붉은 드래곤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천막 안에
는 코린트 전군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로체스터 공작과 제임
스 후작,까미유 후작,그리고 해골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혐오스
러운용병 대장이 얇은 로브까지 뒤집어쓰고서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수군대다가 통신실로 사
용되고 있는 옆 천막에서 걸어 나오는 레티안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
었다.
"모든 기사단의 배치는 끝났다고 하던가?"
"예,전하."
레티안의 대답에 로체스터 공작은 뒤에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시
선을 돌려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미소를 지었다. 지금 크라레스를 향
해 공격 준비를 갖추고 있는 기사단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알카사스 국왕 휘하의 레드 이글 기사단, 아르곤의 정예인 타리아
와 네리아 성당 기사단, 코란 근위 기사단, 그리고 코린트의 금십자
기사단이었다.
본국에 있는 모든 기사단이 전장에 투입되는 관계로수도에는 발렌
시아드 기사단이 이동해 와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습에 의해
괴멸되다시피 한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의 잔여 병력들은
모두다금십자 기사단에 편입되어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다시금 레티안쪽으로 시선을돌렸다.
"아직도 3루마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나?"
"예, 미네르바는 아무래도 포기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렇듯 망
설이는 것으로 보아 우리 쪽에 가담한다고 하더라도 믿기 어려을 것
이옵니다. "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크라레스의 동태는 어떻던가?"
"예, 10분 전에 루빈스키 대공이 회담 장소에 도착했사옵니다. 그는
네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 도착한 후,회담 장소를 점검하고부근에 배
치되어 있는 호위 부대들을 점검했사옵니다. 그런 후 그들과 함께 회
담 장소로 들어갔다고 보고받았사옵니다. "
로체스터 공작은고개를살짝끄덕였다. 모든 것이 예정된 대로였다.
"베르딘으로부터 새로 연락 온 것은 없었나?"
"예, 고양이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하옵니다. "
"좋았어. 그녀만 개입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지. 정찰조로부터 크
라레스호위 부대 증강에 대한 정보는들어온 것이 없던가?"
"예,전방에 3개 연대(3,000명)가 주둔하고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
사옵니다. 그리고 20킬로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마로덴 요새도 잠잠
하옵니다. 그들의 움직으로 보아 놈들은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듯하
옵니다.
하지만 회담 장소 부근에는 기사들이 몇 명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의 기사단이 존재하는 듯하옵니다. 하지만 오너들이 몇 명이나 투
입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사옵니다. 적들의 기사들이 깔려 있는 관
계로 먼 거리에서 관찰만 하고 있기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기 때문
이옵니다. "
"뭐, 신경 쓸 것은 없다. 많아 봐야 1개 전대 정도겠지. 기사단에 전
투준비를 명하라."
"예,전하."
"적의 구원 부대가 도착할 가능성도 있으니 전 기사단을 한꺼번에
투입한다. 루빈스키 공작이 탈출할 우려도 있으니 후방에 열 명을 투
입하라고 일러라."
"예,전하."
이제 로체스터 공작은 시선을 까미유 쪽으로 돌렸다. 까미유는 기
대에 넘치는 표정으로 공작의 시선을 맞받았다.
"까미유!"
"옛,전하."
"그대만 믿겠다. "
"옛, 전하. 목숨을 걸고 해 내겠사옵니다. "
"도착한 즉시 인사를 하는 척하고 공격을 시작하라. 그것을 신호로
우리도 공격해 들어가겠다 "
"옛,전하."
까미유는 공작의 지시가 떨어지자 마차를 타고 급히 회담 장소로
향했다 로체스터 공작이 거느린 것과 같은 네 명의 기사만을 거느리
고 말이다. 물론 그 기사들의 등급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까미유 휘하의 제2근위대 대원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차가 출발한 후 로체스터 공작과 함께 근위대는 이동을 시작했
다. 코란 근위대가 가지고 있는 삼십 명의 오너들 중에서 열 명은 몇
명의 기사들을 거느리고 후방으로 적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마법진
을 이용하여 이동했다.
남은 스무 명은 남은 기사들을 거느리고 로체스터 공작을 뒤따랐
다. 까미유가 행동을 개시하기 전까지 그들은 최대한 적에게 가까운
돌격 위치에 도착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마차가 오고 있사옵니다, 전하."
"그래?그 외에 이상은 없는가?"
"옛,모든 것이 이상이 없사옵니다. 전방 정찰대의 보고로는 그의 마
차를 호위하고 있는 것은 네 명의 기사뿐이라고 하옵니다. 모두들 호 .
화로운 정복을 입고,간편하게 검만을 착용한 상태라고 하옵니다. "
코린트는 이번 기습 작전에서 군대를 아예 사용하지 않고 기사단만
을 살짝 움직였기에 크라레스의 정보망에서 교묘하게 벗어날 수 있
었다. 기사단의 경우군대와 달리 그 엄청난 전투력에 비해 수가 적었
기 에 포착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 알겠다. 도착하면 이곳으로 정중히 모시도록!"
"옛,전하."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고 마차 소리가 들려
오자 루빈스키 대공은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마차와 그것을 호위하
는 기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에 따라 100여 명의 호위병들
이 일렬로 정렬하여 귀빈들을 맞을 준비를 했고, 기사들은 루빈스키
대공의 뒤에 정렬했다.
루빈스키 대공은 호위 기병은 한 명도 없이,호화로운 근위대 복장
의 기사들 네 명이 마차를 호위해 오는 것을보고 약간의 의아함을 느
끼기는 했지만,그것은 곧 잊혀졌다. 왜냐하면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까미유 후작이 당당하게 내려을 때, 그 안을 힐끗 보니 안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경호 기병들이 밖에 둘러싸고 기사들은 마
차 안에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협상을 하러 올 때는 실무자인 문관이나 마법사가 동행하게 되는데
왜 마차 안에 그들이 한 명도 없는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전에 까미유
후작은 루빈스키 대공의 앞에 섰다. 그런 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것을 보고 루빈스키 대공도 고개를 숙이는 순간 상대의 검이 거의
투명하다시피 한 궤적을 그리며 순식간에 날아왔다. 과연 마스
터라고불릴 만한 검술이었다.
"헛!".
루빈스키 대공은 자신의 검을 완전히 뽐을 여유도 없었다. 그나마
노련하게 검을 잡고는 뽑아 올리며 간신히 적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
만그것으로끝이 아니었다. 까미유 단독으로그를 공격해 온 것이 아
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데려온 네 명의 기사들 또한 제2근위대란 이름에 어울리는 무
서운 검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공격을 가함과 동시에
둘은 좌우에서 루빈스키를 공격해 들어갔고, 남은 둘은 상대방 기사
들을 제압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루빈스키는 까미유의 공격을 막는 것도 힘든 판에 양쪽에서 둘이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예 전의를 상실했다.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는 노룻이었다. 그는 상대와 대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
다는 것을깨닫고순간 공간 이동주문을 외웠다. 그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것은 토지에르의 목숨을 건진 것과 칼은 이동용 마법 도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동이라는 단 두 마디 주문을 외을 시간에 상대방의 검은
그의 몸통을 좌우에서 훌고 지나갔다. 검이 쉽쓸고 지나간 후 곧이어
희뿌연 빛 무리가 대공의 주위를 감쌌고,그 순간 그의 몸은사라지고
없었다.
적이 사라지고 나자 루빈스키를 공격했던 기사 두 명은 이제 홑어
져서 4대 2로 싸우고 있는 접전장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그제야 정
신을 차린 루빈스키의 경호병들이 그 난장판 안으로 달려들었지만,
사상자의 수를 늘릴 뿐이었다. 도저히 상대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적은
막강했던 것이다.
사방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접전을 벌이는 동안 까미유는 루빈스키
대공이 빛 무리와 함께 사라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겨우 두 발자
국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후 그는 고개
를 숙여 물기에 젖은 흙을 매만졌다. 피에 젖은 축축한 흙이었다. 순
간적인 칼부림으로 인한 것치고는 매우 많은 피‥‥‥‥ 그것을 확인한
까미유의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기습 공격으로 크라레스 군은 거의 묵사발이 나 버렸다.
북쪽에서 기습을 가해 온 금십자 기사단에게 제3전대가 요새와 함께
박살 났다. 그리고 협상을 위해 나갔던 루빈스키 대공은 치명상을 입
은 채 돌아왔고,그를 호위하던 부대는 전멸 당했다. 그리고 루빈스키
의 호위를 위해 파견되었던 제4전대 또한 적의 근위 기사단에게 치명
타를 당한 채 후퇴 했다.
서쪽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르곤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인해
치레아의 감시역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제1, 2전대는 위장용으로
선포해 놓았던 목적, 즉 아르곤의 침입을 저지한다고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적의 타이탄 수는 2개 기사단 60기. 만약 이쪽도 2개 전대 60기였다
면 어느 정도 대결을 펼칠 수 있었겠지만,초기에 코린트와 접전을 벌
인다고 제1전대가 많이 소모된 상태였기에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제1,2전대가 치레아 대공의 기습을 저지하기 위해 건설했던 요
새에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판가름이 났을 것이다.
동쪽으로는 알카사스의 레드 이글 기사단이 엔테미어 공국을 경유
해서 침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국경 수비군을 돌파한 후 토리아 왕국
멸망후 엔테미어 공국과의 국경선으로 이동 배치되어 있던 제6전대
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중이었다.
하지만 레드 이글이 50기의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반해서 제6
전대는30기뿐이었기에 이 전투 역시 매우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양이가 움직였다고 하옵니다
"루빈스키 경은 어떻게 되었는가,?"
황제의 물음에 다론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려운 고비는 넘겼사오나,출혈이 너무 심했기에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
"천인공노할 코린트 녀석들‥‥‥ 협상을 하자고 해 놓고
기습을 가해 오다니."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윽고 황제는 울분을 가라앉히며 외쳤다. 토지에르가 당했을 때와
는 달리 지금은자신의 가장 아끼는 부하가 치명상을 입고 누워 있음
에도 불구하고 아예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크라레스는 멸망까지 생각해야 할 정도로 최악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황제에게는 회망이란 단어가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치레아 대공이라는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었
기 때문이다.
"에잇,망할자식들!치레아 대공을불러 들여라."
"이미 대공 전하에는 기별을드렸사옵니다. 머지않아 도착하실 것이
옵니다. "
분노를 참지 못해 씨근거리고 있는 황제를 향해 안티노스후작이 채
근했다. 지금은 1분 1초가 아까운 때였다. 적은 정면 공격을감행해 오
고 있었고, 방어선은 깨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크라
레스에게 있어서는풍전등화의 위기가찾아온 것이다.
"전하, 적들은 지금 세 곳에서 물 밀듯이 진격해 들어오고 있사옵니
다.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지금 남은 기사단은 얼마나 되는가?"
"옛, 스바시에 기사단, 치레아 기사단, 그리고 치레아에 주둔중인 5
전대 이옵니다. "
"이럴 수가 있는가?단하루 만에 본국 전력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다
니‥‥‥‥"
황제가 머리를 감싸쥐고 고뇌에 빠져 있을 때 경비병의 커다란 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겼습니다. "
"어서 오시오,치레아 경."
"별로 안녕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폐하."
다크의 인사에 황제는 메마른 웃음을 기운 없이 토해 내며 중얼거
렸다.
"허허허 ‥‥ 뭐 그렇지. 알카사스와 아르곤이 코린트와 손을 잡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짐의 실책이야. 경이 짐을좀 도와주
겠나?"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안티노스 경,치레아 경에게 설명을부탁하네."
"옛, 폐하. 전하, 지금 적들은 세 곳에서 맹렬하게 진격중이옵니다.
북쪽의 코린트 군은 제3,4전대를 간단히 박살 내고 수도를 향해 맹
진격해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서쪽의 알카사스 군은 제6전대가 막고
있지만 아마그렇게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그리고 동쪽은 제1,2전대가 사력을 다해 아르곤 군을 저지하고 있
지만 지금 현재는 세 곳 전선들 중에서 가장 안정된 방어막을 유지하
고 있사옵니다. "
"흐음‥‥‥ 그렇다면 내가 제일 먼저 갈곳은북쪽이군."
"예, 전하. 코린트 군만 막아 내시면 될 것이옵니다. 이미 스바시에
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기사단들을 불러 들였사옵니다. 그들을 지휘
하신다떤‥‥‥"
"아니, 치레아 기사단만 거느리고 가겠다. 남은 기사단들은 경이 알
아서 다른 전투에 투입하도록!"
"예?금십자 기사단이나 코란 근위 기사단은 무시하지 못할 적들이
옵니다. 아무래도 치레아 기사단만 거느리시고는‥‥‥‥"
"아아,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그럼 폐하, 저는 지금 전선으로 가 보겠사옵니다. "
"수고해 주게나."
황제는 뒤돌아 서서 당당히 걸어 나가는 다크의 가녀린 어깨가 그
날따라 웬일인지 아주듬직해 보였다. 그녀의 됫모습을보고 약간 기
운을 차린 황제는 안티노스를 향해 말했다.
"동맹국들에게 사신을보내라, 구원병을보내 달라고 말이야,"
"폐하,소신이 이미 보냈사옵니다. "
"오오,그래. 잘 했군. 원군이 도착하고 난 후에 놈들에게 맛을 보여
줘야겠어. 그때쯤이면 치레아 대공에 의해 전세도 어느 정도 안정된
후겠지."
"고양이가 움직 였다고 하옵니다. "
레티안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경악했다. 자신이 가장 우려하고
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치레아 대공은 상대하기 버거을 정도로 강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에 있는 드래곤 때문에 정면 승부를 벌여 없애 버리기도 난처한 그
야말로 최악의 우환 덩어리였던 것이다.
"뭣이 ?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
"금십자 기사단이 있는 곳이옵니다. "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에게 지금 있는 그 지역에서 마법진을 이
용하여 최대한 빨리 이탈하라고 지시하라!"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이 통신실로 달려나간후 이제야 약간의 여
유가 생긴 탓인지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이동이 최악의
변수였다.
하지만 그걸 잘 뒤집으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
각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상대하기에 문제가 있는 적은 무조건 회
피한다.
그녀 외의 딴 녀석들흐 철저히 해치운다. 크라레스 제국이 그녀 혼
자만의 제국이 아닌 만큼 딴 놈들을 다 해치우면 크라레스는 자연히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로체스터 공작은 큰소리로 레티안을불렀
다. 통신실은 로체스터가 있는 천막의 바로 옆에 있는 천막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레티안은곧장 달려왔다.
"금십자 기사단에게 전해라. 근거리 공간 이동에 성공했으면, 장거
리 이동 준비를 해서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스바시에 공국의 수도를
기습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근위대에 출동 준비를 명해라. 또 마법사
들에게 크라레인 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장거리 이동용 마법진을 준
비하라고 일러라, 빨리!"
"예,전하 "
레티안이 공작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보
며,해골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는용병 대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도를 기습할 건가?"
"당연하지. 벼룩은 고양이가 곧이어 금십자 기사단으로 공간 이동
할 것이라고보고를 했어. 그렇다면 수도는 곧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될
테고,놈들의 근위대나 딴 것들이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해
치을 수 있을 거야. 그녀만 없다면 크라레스의 기사단 따위는, 하루
아침 해장 거리도 안 되지."
"그럴 만한 시간 여유가 있을까?그녀가 돌아온다면?"
"그때는 곧장 도망쳐야 하겠지만‥‥‥‥ 그렇지만 시간 여유는 충분할
거야. 고양이는 금십자 기사단이 쟈드 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곧이어 받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녀는또다시 쟈드 시를 향해 장거
리 이동을 해야 해. 그리고 그때를 이용해서 우리는 크라레인 시를 박
살내는 거야. 후퇴할수 있는모든준비를다갖춰 놓고 말이야."
서둘러서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도착했을 때 다7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은 텅 빈 벌판과 수풀,그리고 반쯤 박살 나서 불타 오르고 있는
작은 요새 하나뿐이었다.
. "여기 어디에 적의 기사단이 있다는 거지?"
공작의 물음에 마법사는 당황해서 외쳤다. 불현듯 자신이 이동할
좌표를 잘못 알고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 보겠사옵니다,전하."
"좋아, 자네는 수도에 연락해 봐, 그리고 팔시온, 너는 미카엘과 함
께 요새에 가서 적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
"알았어!"
어이없게도 목표물을 찾지 못해서 허등대고 있는 다크를 위해, 팔
시온은 미카엘과 함께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 이곳으로을 때 말은 아
예 가져오지 않았기에 그들은 전속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팔
시온이 미디아와 함께 떠난 직후 마법사가 외쳤다.
"수도에 확인해 본 결과 여기가 맞다고 하옵니다. "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팔시온이 뭔가 정보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다크는 주위를 빙 둘러본 후 자신이 걸터앉기에 적당해 보이는 돌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서는 앉았다. 그녀가
거느리고 온 대원은 마법사 둘과 기사 20명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최
소의 인원만을 이끌고 이곳으로 급히 달려왔던 것이다.
여분의 인원들이나 보급품들을 모두 다 수도에 남겨 두고 왔기에
식사한 끼 해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도 빨리 이곳으로 왔는데
도 상대가 없다는 것이 못내 석연찮았다. 저 요새의 상태를 보면 놈들
은 얼마 전까지 저 요새를 신나게 박살내고 있었던 듯한데‥‥‥‥
다크가초조하게 팔시온과 미카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로체스터 공작과 그의 패거리들은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인 크라레인
시에서 10킬로도 안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로체스터 공작은 위급할 때 재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이동용 마법
진부터 갖춰 놓은 후 금십자 기사단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초조하
게 기다렸다. 이쪽의 공격은 금십자 기사단이 공격을 시작한 후 조금
있다가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로체스터의 공격대가 수도를 박살 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다크는 이리 저리 딴 생각들을 하면서 팔시온 일행을 기
다리고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하고 요새를 공격중인 금십자 기사단 가
까이에 타이탄이 없이 공간 이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다크의 공격대
는 타이탄을 꺼낼 시간을 벌기 위해서 요새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
에 도착했었다. 그 때문에 팔시온 일행이 돌아오는 시간도 상당히 많
이 걸렸다.
"대공 전하!"
마법사가 얼굴이 노랗게 질려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금십자 기사단이 쟈드 시에 나타났사옵니다. 지금 쟈드 시를 쑥대
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옵니다. "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리로 갔었군. 스바시에로갈준비를 해라."
놈들의 이동 시간과 이쪽의 이동 시간이 교묘하게 일치했었던 모양
이라고 투덜거리며 다크는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타이밍이 절묘했다.
다크는 찜찜한 속마음을 감추며 우연일 거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그
렇지 않다면 자신의 가까운 곳에 있는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옛 !"
스바시에는 아주 먼 거리에 있었기에 마법진의 규모는 거대해질 수
밖에 없었고,그만큼 그리는 데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20명
이상이 움직이는 마법진이니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마법진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다크는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마법사에게 손짓을 하
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미카엘과 팔시온과 합류하여 수도로 가
라."
"옛."
머지않아 마법진은완성되었고,마법사는 기나긴 주문을 외워 댔다.
그들은 크라레스 제국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요새에서 시작해서 거
의 남쪽 끄트머리 곳까지 초장거리 이동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마
법사의 주문은 엄청나게 길었다.
초조하게 마법사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마법사는 주문을 멈
추고땀을 닦으면서 외쳤다.
"완성되었습니다. 모두들 마법진에 올라가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곧장 쟈드 시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데군데 폐허가 되어 있는 쟈드 시였다. 방금 전과 같이
적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금십자 기사단은 로체스터 공작의 지
시로 벌써 후퇴해 버렸던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적을놓치는 것이 두
번이나 연속되자 다크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놈들의
이런 행동은 자신을 고려해서 만들어 놓은 작전이라는 것이 확실하
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약아빠진 놈. 나하고싸우는 것이 그렇게도 겁이 난단 말인가?"
투덜거리는다크를향해 이번에는 새파랗게 질린 마법사가 외쳤다.
그는 이번에도 적을 만나지 못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수도에 연락
을 했었는데,그때 의외의 보고를들었던 것이다.
"전하! 놈들이 수도를 침공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
"금십자 놈들이냐?"
"아니옵니다. 코란 근위대이옵니다. 지금 수도에 있는 모든 기사단
들이 투입되어 적들과교전을 벌이고 있다고하옵니다. "
"나를아주가지고노는군‥‥‥‥‥"
놈들에게 농락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을
라 툴툴거리던 다크는 갑자기 손바닥을 탁 치면서 외쳤다. 복수할 멋
진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다.
"코린트의 수도로 공간 이동 할 수 있나?"
놈들의 근위 기사단과 금십자 기사단이 없으니 수도는 텅 비어 있
든지,아니면 발렌시아드 기사단 흔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놈들처럼
한바탕 휘저어 놓은 후 적의 근위대가 도착하기 전에 내빼면 될 것이
라는 생각이 떠올라 외친 것이었지만,마법사는 죄송한 듯 고개를 수
그리며 사정했다.
"예? 저 전하,코린트의 수도는 너무 머옵니다. 제 능력으로는 하루
에 세 번이나 장거리 이동을 한다는 것은 힘드옵니다. 만약 조금이라
도 실수가 있다면 폐하의 생명을 보장해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젠장!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언젠가는 이 빛을 이자까지 붙여서 갚
아주겠다. "
다크는 어쩔 수 없이 부하들을 인솔하여 수도로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크의 예상대로 수도는 처참한 몰골로 다크를 기다리고 있
었다. 군데군데 무너진 성곽과 궁전‥‥‥‥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들
이 그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온갖 난리를 쳐 댔으니 그건 당연한 결
과였다.
다크는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나온 기사들의 인사를 대강대
강 받은 후 천천히 걸어갔다. 황궁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
웠던 것은 적에게 완전히 농락 당한 채 복수라고는 해 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적이 자신을 이토록 철저하게 농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주변에 놈들의 첩자가 있었을 것이 분명
했다
자신과 자신의 기사단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
었다. 하지만 무려 세 곳이나 되는 곳에 달려갔는데도 불구하고 놈들
의 그림자도 못 봤다는 것은 그녀의 행동을 놈들이 손바닥 들여다 보
듯환하게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다시 동료를 의심해야 하는 처지에 서게 된 다크. 여태껏 살아오
면서 상대의 비열한 수법에 고생을 많이 했었고,또 치가 떨리는 배신
도 당했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더욱무거웠다.
뿌드드드득!
그녀는 황궁으로 걸어가면서 자신을 배신한 그 놈을 찾기만 하면
그야말로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며 자신에게 맹세하고 또 맹
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