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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전
제 3부 인생의 여정
제11장 성장, 책임, 그리고 운명
영적 성장
성장은 자연 법칙이다. 이 세상에 한꺼번에 완성되는 것은 없으며, 시작부터 완성까지 성장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몸과 같이 영혼 역시 ‘단계별’ 과정을 거쳐 성장하게 되어 있다. 성장 단계는 다양하다. 곡식에서 싹이 나오거나, 사계절이 변하거나, 새 학년으로 진급하는 것 모두가 성장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완성 단계인 ‘성장함’ 에 도달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동참하고, 하늘 왕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영적 완성은 어떤 경지일까? 그것은 몸과 마음의 통일을 말한다. 즉,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해왔던 몸과 투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이다.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입은 것이며, 영속적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체를 이룬 상태이다.
종교 경전
오, 사람들이여! 실로 너희는 주님을 향해 노력하나니, 고통으로 노력하나니, 너희는 그 분을 만나리라. 실로 너희는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옮겨 가리라.
꾸란 84.6.19 (이슬람)
곧은 길은 걸으며 수행하는 고행자에게는,
죄악을 멸함으로써 먼저 지혜가 일어나고,
으뜸가는 통찰력이 곧바로 따라오며,
그 자유로운 통찰로 진리 속에 거하며,
마침내 생의 속박을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움에 흔들림이 없다.
이티붓타카 53 (불교)
영혼과 그 영혼을 갖추어 주신 이와 그 영혼에게 사악함과 경외감을 알게 하신 이에 걸어 맹세하오니, 영혼을 정결하게 한 자 번성하며 영혼을 더럽힌 자 파멸하리라.
꾸란 91.7-10 (이슬람)
한 걸음 한 걸음 수행을 닦아 점차로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이루리.
수행은 마치 땅을 골라 주춧돌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으니,
관용과 자기통어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주춧돌이라.
대방광불화엄경 10 (불교)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4.26-29 (기독교)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이시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해 강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자애로우니라. 복음서에 그들의 비유가 있나니. 한 알의 씨앗이 돋아나 튼튼하게 자라고 더욱 굵고 단단하여 줄기로 일어나니, 씨앗을 뿌린 자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과 같도다.
꾸란 48.29 (이슬람)
우리 각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선물의 분량에 따라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섬기는 일을 하게 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그를 아는 일에 일치하게 하여 성숙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분량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어린아이가 아니므로 인간의 간교한 꾐수나 속임수로 꾸민 교활한 교훈들의 온갖 풍조에 흔들려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점에서 자라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지체가 각각 그 분량에 따라 활동하는 대로 마디마디 공급을 받아 단단히 결합되고 서로 어울려 몸이 자라 사랑 안에서 몸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7-16 (기독교)
함직한 것(可欲스러운 것)을 ‘선(善)’이라 하고, 선을 자신이 소유하는 것을 ‘신(信)’이라 하고, 충실한 것을 ‘미(美)’라고 하고, 충실하여 빛남이 있는 것을 ‘대(大)’라 하고, 크면서 저절로 화(化)하는 것을 ‘성(聖)’이라 하고, 성스러워서 알 수 없는 것을 ‘신(神)’에 이른다.
맹자 VII. B.25 (유교)
말씀 선집
인간시조는 언제 타락되었던가? 그들은 성장기간 즉 미완성기에서 타락했던 것이다. 인간이 만일 완성 된 후에 타락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선의 완성체가 되어 가지고 타락하였다면, 선 자체도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것이요, 따라서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도 역시 불완전한 분이시라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말씀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죽을 수도 있었고, 혹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아직 미완성기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물 세계가 6일이라는 기간을 지나서 완성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도 역시 그러한 원리를 떠나서 창조되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성장기간의 어느 단계에서 타락되었던가? 그것은 장성기의 완성급에서 타락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시조의 타락을 전후한 제반사정과 복귀섭리역사의 경위가 실증하는 바로서, 본서의 전 후편을 두루 연구하는데서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원리강론, 창조원리 5.2.1)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흙으로 빚어 지을 때 처음부터 장성한 사람으로 지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 아기로 지은 것입니다. 갓 낳은 아기를 품어 키우는 어머니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쳐서 인간을 지었다는 말입니다. 인간 또한 ‘3단계의 질서를 통한 존재의 형성’ 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아기가 있었으며, 다음에 장성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도리입니다. 그런 다음에 완성기가 있습니다.
처음에 무형의 하나님은 무형의 세계로부터 유형의 과정으로 나올 수 있는, 아기의 존재를 품고 키웠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 자라고 성숙해서 결혼할 수 있는 자리까지, 부모가 될 수 있는 자리까지 어떻게 나가느냐? 하나님은 자신이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와 같은 오랜 과정을 거쳐 온 그 사실을 인간을 통하여 다시 보고자 합니다. 그 역사적인 무형의 과정을 실체로 보기 위한 존재가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부자일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종적이고, 하나는 횡적이니 종횡일신의 이론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225.198-199, 1992.01.20)
하나님도 자라 왔다는 것입니다. 아기로부터 형제 단계를 거쳐서 결혼 단계에 가서 아기를 품고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아내라고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실체로 자란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결혼하게 되면 여러분이 자랄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보느냐? 자기 아들딸을 통해서 다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가 자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느껴서 횡적인 세계, 확정된 세계를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아기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횡적인 세계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랑의 판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297.151-153, 1998.11.19)
하나의 생명이 투입되어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여름절기를 지내면서 그 뿌리와 줄기와 가지 전체에서 생명의 요소를 흡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생명력을 지니고 제2의 생을 출발할 수 있는 하나의 결실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몸은 죽더라도 그 마음 가운데 새로운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 부풀어 오르고 결실의 열매가 남느냐 하는 문제를 스스로 살필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가고 폭풍우가 아무리 거세게 치더라도 내적인 생명력은 그 환경의 침범을 받지 않고 꾸준히 발전의 노정을 가야만 봄을 맞이하여 다시 뿌려질 수 있는 제2의 생명의 모체인 씨가 될 것임을 압니다.
(32.37, 1970.06.14)
씨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의 도리의 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나면서도 사랑받고, 자라면서도 사랑을 목표로 해서 바라고, 살면서도 사랑을 중심삼고 살며, 가면서도 사랑에 돌아가기 위해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138.99, 1986.01.19)
박사과정에서는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다 부정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부 다 긍정, 소화해서 박사가 되는 것입니다.
(111.129, 1981.02.08)
하나님의 사랑을 교육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아버지가 아는 모든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아버지가 아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말하면 성숙할 때까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됩니다.
(51:172-173, 1971.11.21)
하나님의 더 깊은 관심은 인간의 내적 성품과 사랑의 인격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사랑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참사랑을 닮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힘을 내적이며 비물질적 힘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힘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체휼한다는 것은 사람이 부모 되신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279.206, 1996.08.20)
하나님의 자식 된 인간의 책임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효자, 충신, 성인, 성자의 가정의 도리를 다하는 참사랑의 화신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심정의 내정을 알아내어 아담 해와의 타락 이래 수천수만 년을 고통 속에 살아오신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화신경, 평화메시지 1.16, 2005.09.12)
인생의 계절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소년기, 청년기, 성년기, 그리고 노년기 등이 그것이다. 소년기는 배움의 때이다. 무엇에든 쉽게 영향 받고 배움에 활짝 열려 있는 때이다. 청년기는 자기 훈련이 필요한 탐구의 때이다. 20대는 가정과 직업을 위해 기반을 닦는 때이다. 중년기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때이다. 그리고 노년기에 접어든다. 이때는 인생의 결실이 드러나는 때이다. 어떤 이는 영적 훈련과 도덕적 삶을 통해 얻어진 지혜가 드러나는 반면, 다른 이는 낭비된 인생의 나약함만 드러난다. 이때가 가까워지면 이미 인생을 돌이키기에는 늦다. 인간의 일생에 관한 더 많은 말씀은 제19장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 아동기와 청소년기
종교 경전
모든 아이들은 순수함과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지닌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리라.
부카리 하디스 (이슬람)
예수께서 아기들을 가까이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누
가복음 18.16-17 (기독교)
대인이란 그 갓난아이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맹자 IV. B.12 (유교)
물고기는 신선할 때 사리를 틀어야 한다.
누페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엘리샤 벤 아부야가 말했다; 젊어서 배우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그것은 새 종이에 쓴 잉크와 같다. 늙어서 배우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은 지워진 종이 위에 쓴 것과 같다.
미슈나, 아보스 4.25 (유대교)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다시금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고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어린 아기이므로 옳은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5.12-14 (기독교)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어서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4 (기독교)
너는 우주의 네 모퉁이로 달려갈 것이다.
땅이 큰물과 만나는 곳까지,
하늘이 땅과 만나는 곳까지,
겨울의 고향까지,
비의 고향까지,
비의 본향까지,
달려가라 이곳에! 달려라!
굳세어라!
너는 민족의 어머니이니까.
아파치족의 성년식 노래
(미주 원주민 종교)
말씀 선집
아버님! 저희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아버지 앞에 떼쓰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를 흠모하는 갈급함이 있사옵니다. 그 어린 아이는 천진난만합니다. 키우면 키울수록, 고이고이 품고 가꾸면 가꿀수록 부모의 표준을 따라 자라납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거듭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천태만상의 사정을 품고 온 이들이 그 사정을 다 털어놓으면 아버지께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다 털어놓고 굶주린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흠모하는 것과 같이,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20:11, 1968.03.31)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대번에 그것이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맨 밑창에 작은 것이 커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체의 우주와 관계를 못 맺었습니다. 이 남자가 성장하여 15세, 16세, 17세가 되어 여기 올라오게 되면, 플러스·마이너스 우주가 다 내 것입니다. 시적이 되면서 전부 뜨는 것입니다. 사춘기가 그렇습니다. 집을 나가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어디 바다에도 돌아다니고, 자기 상대가 어디있나 눈을 뜨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130.155, 1984.01.08)
이렇게 청년기에는 여러분이 향기를 발산하게 됩니다. 그 향기는 널리 퍼져 갑니다. 벌 나비들이 그 향기에 이끌려 날아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젊은이, 젊은 남녀들이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들은 최고의 챔피언, 최고의 학생,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합니다.
(52.262, 1972. 01.02)
오늘날 틴에이지들이··· 눈이 뒤집어져 가지고 아무데나 붙으려고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사회에 파탄을 가져오고 자기 자체에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또, 사춘기는 변하는 때이기 때문에 누가 한마디만 해도 ‘에이!“ 해 가지고···. 전부 그렇다는 겁니다. 막 변할 때이기 때문에 상대를 지녀 가지고 정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막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를 따라 상황을 바라보면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것을 전부 정리해야 됩니다. 복잡다단한 걸 모두 정리해야 됩니다. 선악 가운데 악은 뭐냐? 파괴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런 보호 작용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118.197, 1982.06.01)
2. 성숙과 노년기
종교 경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독립했고,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남의 말을 순순히 들었고,
일흔 살에 마음 내키는 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논어 2-4 (유교)
후생(後生)이 두려울 만하니 앞으로 오는 자들이 나의 지금보다 못할 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40세, 50세가 되어도 알려지지 않으면 그 또한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논어 9.22 (유교)
머리카락이 희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젊다 할지라도 만일 학식이 있는 자라면 신들은 그를 어른으로 인정한다.
마누법전 2.156 (힌두교)
그대는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주의하고 소홀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늙으면 이미 어쩔 도리가 없다.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4.1 (자이나교)
배움이 적은 사람은 황소처럼 늙어간다.
육신의 살은 찌지만 그의 지혜는 늘어나지 않는다.
법구경 152 (불교)
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기 전, 비가 온 다음에 다시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그를 기억하여라.
그날이 오면 두 팔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수문장 같이 되고, 두 다리는 허리가 굽은 군인같이 되고, 이는 맷돌 가는 여인처럼 빠지고, 눈은 일손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는 여인들같이 흐려지리라. 거리 쪽으로 난 문이 닫히듯 귀는 먹어 방아소리 멀러져 가고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모든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리라.
그래서 언덕으로 오르는 일이 두려워지고 길에 나서는 일조차 겁이 나리라. 머리는 파뿌리가 되고 양기가 떨어져 보약도 소용없이 되리라. 그러다가 영원한 집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애곡하리라.
사슬이 끊어지면 금 그릇이 떨어져 부서진다. 두레박 끈이 끊어지면 물동이가 깨진다. 그렇게 되면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전도서 12.1-7 (기독교)
그대의 뺨에 백발이 내리고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골을 만들며
육신이 뼈로 된 골조가 되기 전에,
이빨이 잇몸에서 빠지고
등이 땅으로 굽으며
그대가 다른 이들의 무거운 짐이 되기 전에,
한 손에 지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나기 전에,
세월이 그대 육신의 아름다움을 좀먹고
그대가 죽음의 고통을 느끼기 전에,
우리의 주 꾸달라 상가마를 예경하라!
바사반나, 바차나 161 (힌두교)
말씀 선집
인간에게서 제일 중요한 때가 언제냐 소년시대가 아닙니다. 청년시대를 넘어서 장년시대로 가는, 즉 20살을 넘어서 40살에 이르는 그 사이가 제일 중요한 시기입니다. 사람은 20살부터 30살에 이르기까지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는 터를 닦고, 거기에 자기가 은거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또 앞으로 뚜렷한 목적을 중심삼고 갈 수 있는 환경적인 기반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30살이 넘어서 40살을 향하게 될 때 무의미한 인간, 평범한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22.314, 1969.05.11)
사람의 일생을 두고 볼 때, 활동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때가 언제냐? 20대에서 40대, 혹은 50대까지입니다. 이 20, 30년 기간이 전성기입니다. 그러나 40살이 넘게 되면 그 기준에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은 뜻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3.186, 1970.08.12)
지금 저의 삶이 아무리 귀하다 해도 청춘시기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가 장년이 되면 짐을 짊어지게 되고, 이 시기에 싸워서 지탱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그 결실된 후손이 비참하게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년시대를 힘차게 지내고 노년시대를 거쳐서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새로운 여름 절기를 볼 수 있는 후손을 자기 품안에 가진 가정이어야만, 그 후에 다가오는 겨울절기를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이 세계의 역사를 통해 상징적인 현상인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아버지의 뜻 앞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31.139, 1970.05.03)
선의 계발
선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악이 지배하고, 우리 몸 마음을 오염시키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옳은 일을 행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성품을 계발하는 것이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과 같다고 보았다. 오랫동안 지속적인 노력으로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선한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 수년간 길러진 선한 습관은 선한 성격 형성으로 이어진다. 인간의영혼은 좋은 작물을 얻기 위해 씨 뿌리고 경작하고 매일매일 잡초를 제거해야 하는 들판과 같다.
선을 추구하는 대신에, 작은 잘못이라고 취급해 자기의 과오를 하나씩 묵과하고 지나가다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쁜 습관들이 서서히 몸에 배게 된다.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낳는다. 문선명 선생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 악은 타락 인간 안에서 번식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선하게 살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 아주 작은 과오가 우리를 몰락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1. 실천적 생애를 통한 선의 개발
종교 경전
악한 일 멀리하고 선한 일 두루 증장하여 청정한 마음을 닦으라. 이것이 부처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법구경 183 (불교)
더욱 더함(益): 군자가 볼 때 선함을 보면 옮겨가고 허물이 있으면 고친다.
역경 42 (유교)
항상 토라와 자선에 힘써라. 심지어 다른 저의가 있을 때조차도, 선행의 습관이 쌓여 결국 동기까지 선하게 될 것이다.
탈무드, 페사힘 50b (유대교)
지혜로운 사람은 차례차례 조금씩 자기의 때를 없앤다. 금 세공장이가 은의 때를 벗기듯이.
법구경 239 (불교)
꿋꿋한 인내와 다함없는 열망으로 참아 견뎌내며 자기를 닦는 지혜로운 이는 큰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는 섬이 된다.
법구경 25 (불교)
토라를 연구하면 정확한 사람이 된다. 다음은 열정을 갖게 되며, 열정을 넘어 청결함으로, 청결을 넘어 자제력으로, 자제력을 넘어 순결함으로, 순결함을 넘어 고귀함으로, 고귀함을 넘어 온순함으로, 온순함을 넘어 죄를 경계하는 사람이 되며, 다음은 숭고함으로, 숭고함을 넘어 거룩한 영혼으로, 거룩한 영혼 이후에는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
탈무드, 아보다 자라 20b (유대교)
청정한 제자들이 육신 안에 거하면서 바라보는, 눈부시게 빛나며 순수한 이 아트만은 진실, 고행, 바른 지식, 금욕의 끊임없는 실천에 의해 얻어진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3.1.5 (힌두교)
여러분은 열심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도록 하시오.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풍족해진다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쓸모없는 자나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5-8 (기독교)
들어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 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별로 없는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났지만 흙이 깊지 않아 해가 뜨자 싹은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자라 그 기운을 막아버리니 열매를 맺지 못했다. 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씨들은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삼십 배도 되고, 육십 배도 되고, 백배도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느냐? 씨를 뿌리는 사람은 곧 말씀을 뿌리는 사람이다. 길가에 뿌려진 씨라는 것은 말씀을 뿌리는 사람이다. 길가에 뿌려진 씨라는 것은 말씀이 뿌려지기는 하나 그들이 그 말씀을 듣자마자 사탄이 와서 그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라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긴 하나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후에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라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세상살이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와서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라는 것은 계속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더러는 삼십 배, 더러는 육십 배, 더러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마가복음 4.3-20 (기독교)
말씀 선집
선과 악은 미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하루하루 시간에서 결정된다. (뜻길, p.36)
마음, 생각 가지고는 선악이 결정 안 됩니다. 행동을 해야 선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행동 안 하는 열정 가지고는 죄로서 규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엇을 하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결정을 못 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행동적 결과로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생각만 가지고 다 안다고 해야 그 세계와 나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359,166, 2001.11.07)
여러분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그냥 봐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보는 연습을 하고, 훈련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한 번 들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음악에 대해 깊고 세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적 과정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말하는 것이 남보다 드러나고 특출하기 위해서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훈련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 쓰는 것,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명상이니 기도니 하는 것도 그것을 위한 하나의 수양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67.178, 1973.06.10)
이름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많이 닦고 만지고 수많은 연습을 했기 때문에 그 바이올린 통의 음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알고 하기 때문에 화음이 될 수 있는 음의 구조가, 그 자체의 세포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소리가 신비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기도는 뭐냐? 정성들이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안테나를 꽂고 있어야 됩니다.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41: 179, 1992.12.24)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선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느냐? 먼저 양심을 통하여 본체의 선을 닮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여 하나님의 본체의 선과 말씀의 가치를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피조만물을 지으시던 선의 이상인 기쁨을 찾으실 것이요, 선의 목적을 지향해온 인간들도 하나님의 선의 가치를 느끼는 선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타락으로 전부 좌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2.320, 1957.07.21)
영인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양성)와 육신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음성)의 두 요소가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서 성장한다.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으로부터 생력요소를 받는 반면에 그가 육신에게 돌려보내는 요소도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생령요소라고 한다. 인간이 신령에 접함으로써 무한한 기쁨과 새로운 힘을 얻어서 고질(痼疾)이 물러가는 등 그 육신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은 그 육신이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성장한다. 그러므로 영인체와 육신과의 관계는 마치 열매와 나무와의 관계와 같다. 생심(生心)의 요구대로 육심(肉心)이 호응하여 생심이 지향하는 목적을 따라 육신이 움직이게 되면 육신은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아 선화(善化)되고 그에 따라 육신은 좋은 생력요소를 영인체에 다시 돌려줄 수 있게 되어 영인체는 선을 위한 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심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리로 생심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해야만 생령요소와 생력요소가 서로 선의 목적을 위한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그런데 생령요소와 생력요소는 각각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에 있어서도 그의 본심이 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그 생령요소가 항상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그 요소도 육신의 선화를 위한 것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따라서 생령요소와의 사이에 있어 올바른 수수작용을 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창조원리 6.3.2)
몸 마음이 하나 안 돼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교만하지 마십시오. 겸손 하라는 것입니다.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전부 몸뚱이를 치는 것입니다. 3년 이상 희생 봉사하라, 금식하라 하는데, 그거 인간이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245.58, 1993.02.28)
2. 선은 더 나은 선을 인도하지만, 선을 무시하면 악으로 빠짐
종교 경전
선한 일은 서둘러 행하고 악한 일에서는 마음을 삼가라.
선한 일 행함에 나태하면
그는 이미 악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법구경 116 (불교)
작은 가르침이라도 행하려 노력해라. 죄로부터 도망가라.
교훈은 또 다른 교훈을 낳고,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
교훈의 보답은 또 하나의 교훈이며, 범죄의 보상은 또 하나의 죄이다.
미슈나, 아보스 4.2 (유대교)
내게 업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말하며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물방울이 비록 작아도
점차 큰 물병을 채우나니,
어리석은 이도 이와 같아
작은 악이 쌓여 그를 죄로 채운다.
내게는 과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말하며
선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물방울이 비록 작아도
점차 큰 물병을 채우나니
지혜로운 이도 이와 같아
작은 선이 쌓여 그를 복으로 채운다.
법구경 121-22 (불교)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복음 13.12 (기독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요한복음 8.34 (기독교)
검은 염소는 어두워지기 전에 일찍 붙잡아야 한다.
이갈라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맹자가 고자에게 말했다. “산중에 있는 오솔길도 사람들이 줄곧 밟고 다니면 큰 도로가 되지만, 한동안 내버려두면 다시 띠풀에 막히고 만다. 지금 그대의 마음도 띠풀로 막히고 말았으니라.
맹자 VII. B. 21 (유교)
또 하늘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그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나아와서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5.14-30 (기독교)
선이 쌓이지 않으면 이름을 이룰 수 없고, 악이 쌓이지 않으면 몸을 망치게까지 이를 수 없으니, 소인은 조그마한 선을 무익하다 하여 행하지 않고 조그마한 악을 무방하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이 쌓여서 숨길 수 없게 되고 죄가 커져 해소할 수 없게 되니, 역(易)에 이르기를 “차꼬를 목에 채우고 귀를 자른다. 흉하다” 하였다.
역경, 계사전, 2.5.7-8 (유교)
말씀 선집
몸은 마음의 명령에 순종 굴복해야만 우리 개체는 선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마음의 명령에 반역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의 죽인 것과 같은 입장을 반복하기 때문에 개체는 악하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1.2)
습관적으로 어정어정 왔다 갔다 하고 주일날도 왔다 갔다 하는, 진전도 없이 그저 그냥 정지 상태에서 따라 나온 사람들은 뜻을 위해서 무엇을 의욕적으로 실천한 경력이 없기 때문에, 남이 좋다 나쁘다 해도 좋은지 나쁜지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이러한 자리에 있구나’ 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89.231-232, 1976.12.01)
사람은 본래 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선한 세계를 세우고 악한 세계를 제거하기 위하여 언제나 달려가고 있지만, 그 반면 내 자신 속에서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을 향하여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잘 느끼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강하게 들고 나오면 나올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악한 마음이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선한 마음은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가더라도 그 목적하는 바를 확실히 알 수 없고, 목적하는 그 세계를 향하여 가는 데 있어서도 선의 마음을 자극시킬 수 있는 과정이라든가 인연을 발견하기 어려운 반면에, 악한 것은 그 과정에 꽉 차 있고, 그 과정을 거쳐 끝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바라볼 때 참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고독한 생활, 슬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물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6.51-52, 1970.11.15)
결단
도덕적 삶은 목적 있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삶이다. 자연적으로 선하게 되는 사람은 없다. 목적 없이 삶을 따라 흘러가는 사람은 악한 세류 속에 빠져 익사하기 쉽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되는데, 더 선한 길과 더 악한 길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의 책임이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삶과 죽음, 좁은 문과 넓은 문, 두 주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우리의 결단력이라고 한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은 중간적 존재여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선과 악의 힘에 의해서 어느 방향으로도 끌려갈 수 있다고 하신다. 이것은 양심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과, 자기 중심의 욕망을 추구하라고 자극하는 사탄 사이의 갈등이요 싸움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지켜나가는 것은 각 개인의 책임이다.
종교 경전
선과 즐거움 둘 모두가 사람에게 주어진다. 고요한 영혼의 사람은 그 둘을 잘 검토하고 분별한다. 참으로 그는 즐거움보다 선을 좋아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탐욕에서 즐거움을 선택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1.2.2 (힌두교)
인간은 항상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서 있다.
처세훈 18 (피엘교단)
진실로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세간의 유익에 이르는 길이요, 하나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부처의 제자인 비구는 이를 깨달아 세간의 찬사에 즐거워하지 말라. 다만 무집착을 닦으라.
법구경 75 (불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제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 (기독교)
하나님께서 비유하신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여러 주인에 속한 사람과 한 주인에게만 속한 사람이 있을 때, 이 둘을 비교하면 같을 수 있겠느냐?
꾸란 39.29 (이슬람)
보라, 오늘 내[모세]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어 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불복하여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저주를 받겠느냐?
신명기 11.26-28 (기독교)
어느 쪽이 지고의 선인지 두 귀로 들으라.
사람마다 스스로 선택해야 할 두 편을 명철한 마음으로 보라.
큰 시험이 우리의 관심 속에 수행되도록 미리 경계하라.
처음에 그 쌍둥이 영들이 그들의 본성을 나타냈으니,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선과 악이 그들의 본성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그 두 본성 중에서 바른 선택을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두 본성 중에서 바른 선택을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베스타, 야스나 30.2-3 (조로아스터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게 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그 길이 좁아 그길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마태복음 7.13-14 (기독교)
말하라(오, 무함마드). 설사 많은 악이 그대를 놀라게 해도 악과 선은 같지 않노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 오, 현명한 자들아! 그러면 너희가 번성하리라.
꾸란 5.100 (이슬람)
하나님가 그에게 두 눈을 만들어 주지 않았느냐.
혀와 두 입술도 하나님는 두 갈래의 길로 인도해 주었느니라.
그러나 그는 험한 길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노라.
험한 길이 무엇인지 네게 알려주랴?
그것은 노예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며
또는 굶주림에 허덕일 때 음식을 주는 일과 같으니라.
가까운 친척의 고아 또는 엎드려 있는 가난한 자
그리고 믿으면서 서로 인내를 권하고 서로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꾸란 90.8-17 (이슬람)
사소한 쾌락을 버림으로써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지혜로운 자는 보다 큰 기쁨을 위해
사소한 쾌락을 기꺼이 버려야 한다.
법구경 290 (불교)
하늘나라는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다시 산다. 또한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마태복음 13.44-46 (기독교)
말씀 선집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는 세계에 우리가 있습니다. 마음과 몸을 갈라놓고 선과 악이 서로 끌어당기는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악은 악대로 끌어당기고 선은 선대로 끌어당깁니다. 이처럼 대립된 환경 가운데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 경계선을 어느 쪽으로 넘느냐에 따라서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경계선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36.55, 1970.11.15)
나는 선악의 분기점입니다.
(109.268, 1980.11.02)
원래 인간 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서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었다면 그들은 하나님만을 대하고 사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서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사탄도 대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타락 직후 아직 원죄만이 있었을 뿐 다른 어떠한 선행이나 악행도 하지 않았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의 후손들도 역시 이와 같은 중간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타락사회에 있어서 예수는 믿지 않았어도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면 그는 이렇듯 중간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사탄이 그를 지옥으로 끌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예수를 믿지 않은 한 하나님도 그를 낙원으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인은 영계에 가서도 낙원도 지옥도 아닌 중간 영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있는 타락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탄으로부터 분립하시는가? 사탄은 원래 혈통적인 인연을 가지고서 타락한 인간을 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무조건 그를 하늘 편으로 복귀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사탄도 역시 인간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타락인간 자신에게 다시 그가 침범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한 이러한 인간을 무조건 취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그 자신이 선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하나님 편으로, 악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사탄 편으로 분립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후편 서론 1.1)
몸이 하자는 대로 하면 지옥과 통하는 것이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면 천국과 통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분기선이 나입니다.
(214.283, 1991.02.03)
영적인 밥을 먹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배고플 때 육적인 밥과 영적인 밥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맛있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살아남고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영적인 밥맛이 육적인 밥맛보다도 더 좋아야 하고, 영적인 힘을 중심삼고 사는 맛이 육적인 힘을 갖고 사는 맛보다도 더 맛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131.211, 1984.05.04)
과거지사를 전부 돌아볼 때 지금에 있어서는 이것이 추억의 한 말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때에 있어서는 참 심각했습니다. 자기 생애의 미래를 걸어놓고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담판하는 시기였습니다. 이것이 인간만의 결정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인간들의 생각을 넘어 결정적 노정을 취할 수 있는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11.135, 1990.12.30)
내가 왜 이런 놀음을 했느냐?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세상 사람으로서 당당히 오늘날 어느 사회에 가든지 똑똑한 사람으로서, 장(長)으로서 넉넉히 한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이런 자리까지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머리가 있고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내가 가만히 생각하면, 내 일생 동안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그것이 누구 때문이냐? 하나님, 하나님을 알고부터입니다. 또 지금까지 고생했다 이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고, 이런 것이 전부 레버런 문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희망이 없고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청춘시대에 그 귀한 것을 안 가졌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무자비하게 한 번 잘라 버린 이후에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레버런 문이 되었습니다.
(93.67, 1977.05.01)
선과 악
선과 악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선악을 결정할 수 있는 어떤 행동에 대한 정답이나 그 자체에 내재하거나 숨겨진 보편적 지참이 존재할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선과 악은 내적, 외적으로 구별된다. 문선명 선생의 말씀을 보면 어떤 때는 동기를 통해 선악을 구분하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선행은 양심에 따라 행하는 행위인 반면, 악행은 몸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선악을 마음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구별하라고 하신다. 하지만 내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헤아릴 수 없을 때, 명백하게 드러나는 지향점이 없을 때는 선과 악을 정확히 구별하기가 어렵다. 일이 다 끝나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문선명 선생은 때로는 내 행위가 결실을 맺어 선악이 명백해지는 그 순간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고 하신다.
이렇듯 문 선생님은 선악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언제나 강조하시는 객관적인 한 가지 기준이 있다. 선은 이타적이며 남을 위하는 것이고 악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1. 선은 이타적인 것이며, 악은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것
종교 경전
아르주나여, 사심 없는 모든 행위는 영원 무한한 신성에서 생겨났다. 신은 모든 봉사 행위에 함께한다. 모든 삶은 이 법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오, 아르주나여, 자신을 위해 감각을 쾌락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하며 이 법칙을 어기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바가바드기타 3.16 (힌두교)
사람들 중에 자신의 영혼을 그릇되게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중간 과정을 따르는 자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최고의 선행은 알라와 함께 하는 자, 그것이 최고의 은총이다.
꾸란 35.32 (이슬람)
누구든지 온갖 수단으로 다만 윤회하는 존재의 행복을 즐거워하는 자, 그는 비천한 사람으로 알아라. 누구든지 본심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마다하고 자신의 해탈을 위해 세속적 쾌락을 돌아보는자, 그는 다만 범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라. 누구든지 자신의 고통으로 남의 고통을 없애려 하는 자, 그는 실로 수승한 사람으로 알아라.
보디파타프라디파 (불교)
인간에게는 네 가지 성품이 있다.
“내 것은 내 것이며, 네 것은 네 것이다”라고 하는 자는 평균의 사람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소돔인의 성품이라고 한다.
“내 것은 네 것이며, 네 것은 내 것이다”라고 하는 자는 규율을 모르는 사람이다.
“내 것도 네 것이며, 네 것도 네 것이다”라고 하는 자는 성인이다.
“네 것도 내 것이며, 내 것도 내 것이다”라고 하는 자는 사악한 사람이다.
미슈나, 아보스 5.13 (유대교)
라훌라야, 만일 네가 몸으로 짓는 행위를 원한다면 그것을 다음처럼 숙고하라. “내가 몸으로 짓고자 하는 행위는 나를 해롭게 할 수도 있고 남을 해롭게 할 수도 있으며, 나와 남을 모두 해롭게 할 수도 있으니, 이와 같은 행위는 서투르고 의롭지 못하여 그것을 행함도 고뇌이며 그 결과도 또한 고뇌일 뿐이다.” 만일 이와 같이 여긴다면, 라훌라야, 그 행위는 결단코 삼가야 하느니라.
맛지마 니카야 1.415 (불교)
만일 내가 자신을 위해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힌다면, 나는 지옥에서 고통 받아야 하리라. 그러나 만일 다른 이들을 위해 나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장엄한 모든 것을 얻게 되리라.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나는 추하고 어리석은, 불쾌한 세계에 있는 나를 보게 되리라.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옮겨진다면, 즐거운 세계에서 영광을 얻으리라.
만일 내가 자기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쓴다면, 나는 예속을 경험하게 되리라. 그러나 만일 다른 이들을 위해 나를 쓴다면, 나는 다만 숭고함을 경험하게 되리라.
샨티데바, 보살행의 도 8.126-128 (불교)
창조자를 공동 기원으로 하는 신들과 악마들은 서로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악마들이 잔뜩 뽐내며 말했다.
“어디에 공물을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들의 입에 공물을 넣었다.
신들은 나아가서 각기 자신의 벗의 입에 공물을 넣었다.
그러자 창조주는 그들에게 몰두했다.
샤타파타 브라흐마나 5.1.1.1-2 (힌두교)
말씀 선집
악과 선의 방향은 어떻게 틀리느냐? 선은 언제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적 입장에 서는 것이며, 악은 자기를 중심삼고 주체적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무엇이냐? 나를 희생시켜서 전체 목적 앞에 플러스되게 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러면 악은 무엇이냐? 전체를 나에게 끌어 당기게 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16.137, 1966.01.02)
그러면 이제 인간들에 있어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그 기준이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알았으니 그 관계가 일치돼 가지고 악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확실하게 근본부터 가려 놓아야 됩니다. 악이 뭐냐? 악의 정의가 뭡니까? 사탄이 참소할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악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죄가 뭐냐? 사탄이 참소해 가지고 거기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내용을 지니게 되면 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죄의 뿌리를 다 알아야 됩니다.
악의 출발은 사탄 자신도 그렇고, 해와 자신도 ‘내가 주체가 돼 보자. 내가 중심이 되자’ 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주체를 위하여 있어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있어라. 나를 위해서 있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원칙은 대상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대상을 부정하고 ‘나를 위해 있어라’ 이렇게 된 겁니다. 이걸 근본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악의 기원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악한 사람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하라. 전부 나한테 와서 굴복해라’ 이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때려 부숴야 되고 예수님도 이것을 때려 부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하지 말라. 자기 이익을 구하지 말라. 남을 위해서 희생하라. 봉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전부 반대입니다.
(69.85.1973.10.20)
여러분들이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를 무엇으로 판정하느냐? 개인주의적인 존재냐 공적인 존재냐에 오늘날 인륜 도덕의 기준을 세운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요, 악한 사람은 남을 착취하는 사람이다 이겁니다. 교육의 표준을 그렇게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102.234, 1979.01.01)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계적인 생각 밑에서 생각을 하고, 세계적인 생각을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의 자리에서 세계고 무엇이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세계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중심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겁니다.
한 사람은 역사적인 세계의 성인들을 생각하고, 그 나라의 애국자를 생각하고, 현세에 사는 유명한 사람을 존경하고 그 길을 따라가려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성인건 무슨 애국자건 이 시대의 지도자건 신경 안 쓰고 ‘나’ 중심삼고 움직여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것을 좋아합니까? 상대를 중심한 삶이 필요합니까, 자기중심적인 삶이 필요합니까? 어떤 게 여러분들의 실제입니까? ‘상대를 중심한 것입니다.’ 대답은 맞았는데 생각은 틀립니다. ‘생각도 맞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중심적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중심삼고 나서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게 실제이고 사실입니다.
(117.214-215, 1982.03.07)
세계 인류를 세 종류로 분류해 본다면 선의 기준을 표준하고 볼 때 반대되는 사람, 선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내 것으로 하지 못하는 완충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선을 내 책임으로 이루려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데 뜻 앞에는 마지막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뜻길, p.191)
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는 받은 것을 잘라먹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고, 받은 것에 대해 플러스시켜 베푸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자신보다도 낮아지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315.210, 2000.02.02)
미국이 말하기를, ‘아! 세계는 난 모른다. 우리나라만 위하면 된다’ 이러면 세계 공법에 걸립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세계 사람들한테 상당히 추앙을 받아 왔지만 요즘에는 전부 다 ‘미국 사람’ 하게 되면 고개를 젓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날 카터 대통령 하게 되면 카터 대통령이 진짜 미국이 원하는 대통령 하게 되면 카터 대통령이 진짜 미국이 원하는 대통령이냐, 혹은 미국이 원치 않는 대통령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카터 대통령이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미국을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또 자기 선거를 위해서 행동하느냐, 장래의 미국을 위해서 행동하느냐,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전부 다 악한 것과 선한 것이 갈라집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카터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하면 그건 미국 내에서만 대통령이 되지만,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 세계가 공인하고 세계를 이익될 수 있게 하게 되면 세계 앞에 영향 준 대통령으로서 세계가 추앙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면 세계의 제재를 받는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겐 반드시 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걸리는 장본인이 뭐냐? 그 근본체가 뭐냐? 자기 중심,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를 위주한 데에서 다 걸립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법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 이렇게 자신 한다면 어떻게 해야 걸리지 않느냐? ‘나를 위해 살겠다.’ 이런 사람은 가는 데마다 걸립니다. ‘나는 보다 큰 세계를 위해 살겠다.’ 이렇게 할 때는 모든 법에서 해방됩니다. 모든 법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93.302, 1977.06.12)
2. 선악은 마음의 의도에 따라 결정된다
종교 경전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데,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복음 15.19-20(기독교)
어찌 행위 그 자체에 선악의 분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선한 의지로 행하여지는 행위를 선행이라 이름할 뿐이다.··· 영혼을 청정하게 하는 행위나 그로 말미암아 영혼이 청정하게 하는 행위나 그로 말미암아 영혼이 청정하게 되는 행위를 미덕이라 하니, 언제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주느니라. 그러나 영혼이 선을 멀리 피해 달아나게 하는 행위는 악행이니, 그것은 다만 마음의 불안을 도모할 뿐이니라.
푸자파다, 사르바르타싯디 6.3 (자이나교)
손에 상처가 없다면
독을 손으로 만질 수 있으리라.
상처가 없으면 독이 그를 해칠 수 없는 것처럼
그릇되게 행하지 않으면 악도 그를 해칠 수 없다.
법구경 124 (불교)
말씀 선집
본래 선과 악은 한 점에서 출발되었는데, 그 한 점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26.282, 1969.11.10)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자기를 분별해 보면 양심은 선한 입장에 있고, 육신은 악한 입장에 있습니다.
(227.46, 1992.02.10)
마음의 방향과 방법에 따라 선이 생겨나기도 하고 악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바탕이 어떤 방향과 방법으로 나가느냐에 따라서 선과 악이 갈라지게 됩니다.
(37.116, 1970.12.23)
전부 옳다는데, 그 중에 누가 선한 편이고 누가 악한 편이냐? 경계선이 있습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 이상의 것을 중심삼고 위를 위해서 보다 위하겠다는 사람은 선편의 자리에 서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 보다 낮은 것을 따라가겠다는 사람은 악 편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나라를 위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선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선은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나로부터 출발할 수 없습니다. 선이라는 것은 반드시 상대를 위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데서부터 선이 출발된다고 보지 않은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사람’ 하게 되면 자기를 중심삼고 출발하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살려하고, 남을 위하여 노력하며, 남을 위하여 활동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생활하는 가운데서나 죽음에 임하는 자리에서 ‘저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라고 보편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선은 자리를 위해서 출발하는 자리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출발 하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악은 무엇이냐?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있어라. 모든 것의 출발은 나를 위해서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가 악한 자리입니다. 선과 악이 어떻게 분기선을 두고 엇갈리느냐 하면, 남을 위하고자 하는 데는 선이 머무는 것이요, 나를 위주로 하는 데는 악이 머문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두고 보면 그 마음은 언제나 선한 마음으로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해라, 남에게 자애심(自愛心)을 가져라. 남을 위해 희생하라. 남을 위해서 살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이 가는 길입니다.
(65.13-14, 1972.11.13)
3. 선악은 개인의 생활방식에서 드러남
종교 경전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거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언제나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매지 않으면 그 나무는 찍혀 불에 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마태복음 7.16-20 (기독교)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선행을 명하셨고 친척에게 베풀어 줄 것을 명하시고 음란과 추행과 악행을 금지하셨노라. 너희에 대한 훈계이니 주의해야 할 것이니라.
꾸란 16.90 (이슬람)
육적인 인간이 하는 일은 명백합니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기 맺기와 싸움과 시기와 분노와 당파심과 분열과 분파의 질투와 술주정과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과 또 그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했지만 이제 또 경고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너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인데, 이런 것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3 (기독교)
하나님의 사도가 이와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게 하는 가장 보편적인 행위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좋은 성품이니라. 그러면 지옥에 들게 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두 개의 헛된 것이니 입과 은밀한 부분이니라.”
티르미디 및 이븐 마자흐 하디스(이슬람)
“백성들로서 죄를 짓고, 훔치고 약탈하고 소란을 피우고 또 살인을 하고 재화를 탈취하고, 기를 쓰고 악행을 저지르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너는 벌주고 처형하여 혼을 내주어야 한다.”
또 왕은 말했다. “봉아! 큰 죄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이며, 형제 간 우애가 없는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지 않아 크게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으므로, 아버지도 아들을 자애할 수가 없고 도리어 아들을 미워할 것이다. 아우로서 하늘의 도리를 지키고 행하지 않아 그의 형을 존경하지 않으므로, 형도 동생을 애달프게 생각하지 않고 동생을 우애롭게 사랑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직접 우리 위정자에게 죄를 진 것이 아닐지라도, 하늘이 내려준 백성이 지킬 인륜의 질서를 크게 흩트리는 것이 된다.”
서경 5.9 (유교)
말씀 선집
선은 무엇이냐?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를 위하려는 자리에서는 선한 종자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이익을 보겠다는 패들 가운데는 선한 종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남의 빚을 져 줄 수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41.91, 1971.02.12)
선과 악은 생각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결정됩니다. 천국과 지옥이 여러분의 관념 세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40.294-295, 1971.02.07)
악은 강제로 하는 것입니다. 순리가 아니라 역리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압이요, 공포요, 공갈이요, 협박이요, 생명을 위협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60.61, 1972.08.06)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언젠가는 끝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일은 역사가 길기 때문에 결말이 늦게 나타나지만 나쁜 일일수록 결말이 빨리 나타납니다. 선한 것은 영원과 보조를 맞추지만, 악한 것은 순간과 보조를 맞춥니다. 망하는 행위는 순간에 도취하지만, 흥하는 행위는 영원에 도취합니다. 영원에 취할 수 있는 행위 터전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18.64-65, 1967.05.21)
선악을 어떻게 결정하느냐? 선은 보다 공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요, 악은 사적인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충신이나 열녀도 전부 다 이 기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살면 살수록 더욱더 선해지는 것입니다. 악은 개인을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선은 큰 것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을 위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남자면 남자로서 결혼을 해서 가정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찾은 다음에 그 동네에서 칭찬받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개인이 가정을 찾은 다음에 종족을 찾아야 하고, 민족을 찾아야 하고, 국가를 찾아야 하고, 세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31.236, 1970.06.04)
2. 책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배려
종교 경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기 2.15-17 (기독교)
랍비 아키바는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이기에 사랑받는 존재이다. 그러나 특별한 사랑으로 이 사실을 알게 하셨다. 창세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창 9:6)”
미슈나, 아보스 3.18 (유대교)
하늘 향한 두려움 외에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탈무드, 베라코트 33b (유대교)
사탄···저가 내 앞에 와서 이르기를, ‘보소서, 내가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는 당신의 아들이 되겠사오며, 내가 모든 인류를 구속하여 한 사람도 잃지 아니하리니, 반드시 내가 이를 행하리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예를 내게 주소서’ 하였더라. 그러나 보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 곧 태초부터 나의 사랑하는 자요 선택된 자가 내게 말하되,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지라.
이에 사탄이 모반하여 나,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미 부여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멸하려 하였고, 나의 권능을 자기에게 줄 것을 구하였으므로··· 저는 나의 독생자의 권능으로써 던지움을 받게 하였더라.
이에 저가 사탄이 되었나니, 참으로 악마요 모든 거짓의 아비라. 인간을 미혹케 하며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많은 자를 자기의 뜻대로 포로가 되게 하였느니라.
값진 진주, 모세서 4.1-4.365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말씀 선집
인간의 완성을 바라는 하나님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인간과 일체 될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시조에게 계명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인간 시조에게 계명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성장기간을 지나가는 미완성단계에 있었음을 아시고 하나님이 자녀인 인간에게 가장 귀한 참사랑을 상속해 주시려는 조건이 계명이었습니다.
(277.197, 1996.04.16)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성을 닮게 하심으로써 피조세계의 주인으로 세우시어 가장 사랑하시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책임분담을 세우셨다.
(원리강론, 예정론 4)
통일교회 교인들은 책임분담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 보다 가치있는 내용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이 책임분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면 우리에게는 한(恨)이라는 말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에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면 인간과 천사세계, 전 피조세계는 기쁨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63.320, 1972.10.22)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생 가운데 책임분담을 세우셨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그 전지전능한 창조성까지 부여하고, 또 영원불변한 사랑의 주체이시니 그 사랑의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책임분담을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요, 전체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와 같은 것이기에 이것을 안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임분담이 문제가 되어서 타락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20.210, 1968.06.09)
창조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음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주관하시듯이 인간도 만물세계를 주관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기 위하여는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을 수행하면서 성장하여 완성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러한 성장기간을 우리는 간접주관권, 혹은 원리결과주관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권내에 있을 때에는, 그들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직접적으로 주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완성된 후에야 그들을 직접 주관하시게 되어 있다.
(원리강론, 타락론 6.1)
3. 책임지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생활환경을 소화함
종교 경전
심지어 감로수가 독에서 나올 수 있고, 우아한 말이 심지어 적에게서도 나올 수 있으며, 불순한 것으로부터 금이 나올 수도 있다.
마누법전 2.239 (힌두교)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속담이 너희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주 여호와가 말한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너희 이스라엘에게 이런 속담을 말하지 못하게 하리라.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달렸다. 아들의 목숨도 아비의 목숨처럼 나에게 달렸다. 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
너희는 “그 아들이 아비의 죄를 쓰고 벌을 받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고들 한다. 그 아들은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그대로 바로 살았는데 왜 죽겠느냐?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 나는 너희 하나하나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에스겔 18.1-30 (유대교)
어떤 은둔자들과 바라문들이 설하기를, 즐겁거나 슬프거나 또는 즐겁지도 슬퍼지도 않은 이 모든 일들이 지난 행위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내가 그들에게 말한다. “그렇다면, 지난 행위의 결과로 사람들이 살인자가 되고, 도적이 되고, 부정한 자가 되고,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되고, 허튼소리 지껄이는 자가 되고, 시기 질투하는 자가 되고, 심술궂은 자가 되고, 사된 행위의 근본적인 원인을 다만 지난 행위에서 구하는 자들에게는 행위 할 욕망도 없고, 애써 노력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행하지 않아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이기 때문에 행해야 할 필연성이나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금해야 할 필연성도 없으며, 그대들은 다만 스스로 제어할 수도 제어할 필요도 없는 요소들에 몸을 내맡기며 살아갈 뿐인 까닭에, 은둔하여 수행을 닦는 자라는 말이 그대들에게 합당하지 않다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또한 설하기를, 즐겁거나 슬프거나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은 이 모든 일들이 지고한 신의 창조(예정)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내가 그들에게 말한다. “그렇다면, 신의 예정으로 인해 사람들이 살인자가 되고, 도적이 되고, 부정한 자가 되고,··· 자신의 행위의 근본적인 원인을 다만 신의 예정에 돌리는 자들에게는 행위 할 욕망도 없고, 애써 노력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이것은 행하고 저것을 금해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행해야 할 필연성이나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금해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는 것이며, 그대들은 다만 스스로 제어할 수도 제어할 필요성도 없는 요소들에 몸을 내맡기며 살아가는 것일 뿐인 까닭에 ‘은둔하여 수행을 닦는 자’라는 말이 그대들에게 합당하지 않다 해야 한다.”
앙굿타라 니카야 I. 173-174 (불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활쏘기는 군자의 도와 닮은 점이 있다. 정곡을 못 맞추면 돌이켜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중용 14 (유교)
사람은 생래적으로 원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는 나쁜 결과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당신은 사람들을 도우려고 힘쓰고 사람들은 당신을 도우려고 힘쓴다. 당신과 그들은 원인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쁜 일이 일어날 때, 당신도 그들도 원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당신은 결과가 되고자 원한다. 그때 당신은 나쁜 결과를 발견한다. 당신은 결과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때 당신은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비난한다.
프리클리어를 위한 지침서 (사이언톨로지)
말씀 선집
문제는 누구냐 하면 나입니다.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세상에 대하여 불평을 합니다. ‘망할 세상 됐어’ 라는 말은 ‘나는 망하지 않을 사람인데 나 이외의 세상만 망할 때가 됐다’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나쁜 것은 전부 다 세상에 갖다 걸어 놓고 불평하고, 좋은 것은 다 자기에게 걸어 놓고 좋아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이 잘못된 것을 불평하기 전에 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140.25, 1986.02.01)
아버지고 할아버지고 전부 내 대열에 서고, 천의에 의한 조상의 명부를 대신해 가지고 생사지권을 쥐고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실수의 모든 흠을 없애고 새로운 천지에 다리를 놓을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십만 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나라와 수억만 사람의 희생의 대가를 치른 기반 위에 여러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원소 하나하나가 부활하여 복합적인 구성체와 같은 존재로 태어난 것이 바로 책임을 잘못하면 여러분들의 조상까지 함께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4.77-78, 1983.01.23)
여러분들이 실패자가 되게 될 때는 전부다 후퇴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지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가지고 승리자가 될 때는 여러분의 후손들도 우리 조상이 갔으니 나도 가야 되겠다고 하는 영광의 길이 닦여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98.213, 1978.08.01)
복귀섭리역사가 오랜 기간을 두고 종적으로 요구하여 나오고 있는 탕감조건들을 나 자신을 중심하고 횡적으로 찾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나’는 복귀섭리역사가 바라는 결실체로서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위하여 부름 받았던 선지선열들이 이루지 못한 시대적인 사명들을 이제 나를 중심하고 일대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수한 개체가 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지선열들을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과 그들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근본 뜻, 그리고 그들에게 맡겨졌던 섭리적인 사명들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상세히 알아야 한다.
(원리강론, 후편서론 3)
4. 공적 책임은 개인적 책임에서 시작됨
종교 경전
옛날 명덕을 천하에 밝히려던 이는 먼저 그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이는 먼저 그 집을 바로잡았고, 그 집을 바로잡으려는 이는 먼저 그 몸을 닦았고, 그 몸을 잘 닦으려는 이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했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이는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했다.··· 천자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근본이 흐트러지고 끝이 잘 다스려지는 법이 없느니라.
대학 (유교)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 받을 일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않으며, 난폭하지 않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않으며,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아주 공손히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3.2-5 (기독교)
말씀 선집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모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요,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요,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주관을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랑의 실체인 개체를 주체적인 입장에 세워 놓지 않고는 가정도 불가능한 것이요, 나라도 불가능한 것이요, 국가도 세계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완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완전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2.97-98, 1969.01.26)
여러분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길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보다 그 반대의 자리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그 승리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광의 세계는 저절로 올 것입니다. 어떤 지역을 책임지면 책임진 곳에 있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은 내 것이다, 내가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책임지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예정
예정론에서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재산과 도덕성을 가지는 이유, 태어난 환경과 종교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 모든 차이의 원인을 하나님에게로 돌리고 있다.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실 수 있고, 전지하셔서 미래를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해 놓았다고 설명한다. 누군가 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그리로 이끄셨기 때문이요, 신앙의 영웅이 되는 사람 역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렇게 절대예정론에서는 한 인간의 영원한 숙명이 구원을 받을지 지옥에 갈지 출생 이전에 모두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살아갈 수명과 사망 날짜가 모두 이미 하나님의 장부에 적혀 있다고 한다.
운명의 손을 믿는 사람은 인생의 사건들을 우연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명백한 기회의 만남도 오래 전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모든 인간의 계획과 설계는 열매를 맺기 마련이므로 거기에 하늘의 뜻이 있다면, 무슬림들이 말하는 ‘인샬라’ 신의 뜻과 설계는 열매를 맺기 마련이므로 거기에 하늘의 뜻이 있다면, 무슬림들이 말하는 ‘인샬라’ (신의 뜻이라면)처럼,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모든 사건들을 지켜보고 운명의 흐름에 나를 맞추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절대예정론과 관련해 오랫동안 이어진 대답은 자유를 얻으려 끊임없이 애쓴다는 맥락에서 인간의 무지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영원을 두고 전체를 아시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 인생의 결과를 아신다. 하지만 그것을 알 길이 없는 우리 인간은 여전히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예정론에 대한 권위 있는 몇 가지 교리가 있는데, 여기서는 인간의 자유가 예측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당신의 뜻에 따라 축복도 고난도 주실 수 있으며, 우리에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제한된 자유를 주신 분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절대예정론을 거부하시는 문선명 선생은 상대예정론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구원을 예언하셨지만 그 운명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인간 책임분담이 필요하다고 하신다.
1. 하나님의 절대 예정
종교 경전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출애급기 33.19 (기독교)
실로 이것이 하나의 교훈이거늘, 원하는 자는 누구나 주님께로 가는 길을 택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뜻 없이는 이를 이룰 수 없도다. 실로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지혜로운 분이시도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지혜로운 분이시도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는 자를 그분의 은총 속에 들게 하시사 사악한 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징벌을 준비하셨느니라.
꾸란 76.29-31 (이슬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계획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함께 일하셔서 모든 것을 선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을 그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미리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들을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28-30 (기독교)
주는 행위자, 모두가 그로부터 있나니,
사람의 꾀함이 무슨 소용인가?
주가 뜻한 바, 그렇게 되리라.
전능하신 주, 막을 자가 없어라.
행하여지는 모든 것은 목적 없는 그의 유희
먼 곳에 또한 지척에 있는 그,
그가 생각하고 헤아려 굽어보는 모든 것들,
그는 하나요 전체라.
아디 그란트, 가우리 수크마니, M.5, p.279 (시크교)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지속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로마서 9.10-16 (기독교)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을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시편 139.15-16 (기독교)
알라의 사도, 진실이며 진실로 계시를 받은 이가 이르노니, “너희들 모두는 첫 40일 동안 그의 어머니의 자궁에 모아졌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다음 40일 동안 한 덩어리가 되었고 그러고 나서 다음 40일 동안 살덩어리가 되었다. 그 후 그에게 보내져 천사가 그의 육신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네 마디를 받아 적으라는 명을 받았다. 그의 삶, 그의 수명, 그이 행동, 그리고 그가 (종교 안에서) 비참하게 될 것인지 축복을 받을 것인지, 진실로 너희 중 하나가 천국에 있는 이들과 같은 일을 행하여, 그와 천국 사이의 거리는 단지 팔 하나 길이에 해당하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그에 대한 기록이 그를 앞지르니,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일을 행하기 시작할지라. 그리하여 그는 지옥에 가게 되리라. 또한 너희 중 하나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일을 행하여 그와 지옥 사이의 거리는 단지 팔 하나 길이에 해당하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그에 대한 기록이 앞지르니,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일을 행하기 시작할지라. 그리하여 그는 천국에 가게 되리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4 (이슬람)
말씀 선집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과거를 보고, 현재를 토대로 미래를 봅니다.
(100.93, 1978.10.08)
레버런 문이 태어날 때, 레버런 문이 이렇게 된다하는 어떤 동기가 있어서 태어나 가지고 이렇게 자랐겠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환경을 적당히 왔다 갔다 하면서 원소를 흡수해 가지고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본래부터 다 결정되었기 때문에, 눈 위에 수평선상이 같고···. 레버런 문이 이렇게 생긴 것은 중간에 자기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이렇게 생기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레버런 문 자신도 그 원칙에 따라서 자랐지, 원칙에 역행해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161.160, 1987.02.01)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어떤 사람이 복귀섭리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와 같이 미리 알고 계시는 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시는 하나님의 책임분담만으로는 그가 의롭다 함을 얻어 영광을 누리는 데까지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부름 받는 입장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할 때 비로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야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도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도록 예정되는 것이다. 다만 성구에는 인간책임분담에 대한 말씀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다.
(원리강론, 예정론 4)
로마서 9장 10절 내지 13절에는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 에서가 차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이 있다.
에서와 야곱은 복중에 있어서 아직 선악 간에 아무런 행동의 결과도 나타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 이것은 복귀섭리노정의 프로그램을 맞추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후편 제1장의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설명하겠지만, 에서와 야곱을 쌍태로 세우셨던 것은 그들을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자리에 갈라 세워 놓고, 아벨의 입장에 있는 야곱이 가인의 입장에 있는 에서를 굴복시킴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장자기업 복귀의 ‘뜻’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서는 가인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요, 야곱은 아벨의 입장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실제로 미워하시거나 사랑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서 좌우될 문제였다. 실상에서는 야곱에게 순종 굴복하였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야곱과 같은 사랑의 축복을 받는 입장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던 야곱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원리강론, 예정론 4)
2. 외관상 우연적 사건도 운명의 실제 작용
종교 경전
하늘에 계신 분의 뜻에 거역하는 의도를 갖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자기의 손가락을 망가뜨릴 수 없다.
탈무드, 훌린 7b (유대교)
네가 떨어지는 곳에서 너의 신은 너를 밀어 내린다.
이보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신께서 만드신 질서를 유한한 사람이 뒤엎지 못한다.
아칸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그대의 미혹된 생각으로 인해
업의 속박에 내몰리어
그대가 원치 않는 바를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될 것이니라.
일체만물의 내밀한 곳에
오, 아르주나여! 주가 계시나니,
자신의 신묘한 힘으로
마치 돌아가는 거대한 바퀴 위에 올려놓은 듯
일체만유를 돌리고 계시느니라.
바가바드기타 18.60-61 (힌두교)
악정자가 맹자를 보고 말했다. “제가 노의 평공에게 말해 올렸고, 평공도 선생님을 만나고 했습니다. 그런데 측근자인 장창이라는 자가 방해했으므로 평공이 끝내 오지 못했습니다.”
이에 맹자가 말했다. “사람이 가는 것은 시키는 무엇이 있으므로 가는 것이고, 멈추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멈추게 하는 것이 있어서 멈추게 되는 것이다. 가는 것이나 멈추는 것이나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나라의 평공을 못 만나는 것도 천명이다. 장창이라는 자가 어떻게 나를 평공에게 만나지 못하게 방해를 할 수 있겠느냐?
맹자 I. B.16 (유교)
어떤 일이든 나는 그것을 내일 하겠다고 말하지 말거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것도 첨가하지 말라. 네가 잊었다면 너의 주님을 기억하고 말하라. 나의 주님께서 이것보다 더욱 올바른 길로 가까이 저를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꾸란 18.23-24 (이슬람)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여러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16 (기독교)
네 의지와 관계없이 너는 모습을 갖추었고, 네 의지와 관계없이 너는 태어났고, 네 의지와 관계없이 너는 살아가고 있으며, 네 의지와 관계없이 너는 거룩하신 분, 왕 중에서 으뜸가는 왕이 되시는 분 앞에서 네 행적을 평가받을 것이다. 하나님께 큰 축복이 있기를 바라노라.
미슈나, 아보스 4.29 (유대교)
시간은 우리의 적도 친구도 아니다. 현 존재가 있게 한 전생에서의 행위들의 과보가 다하면 시간은 어김없이 우리를 잡아채 가느니라, 혹 수천 개의 화살이 가슴에 꽂힌다 해도 정해진 때가 오지 않는 한 그는 죽지 않는다. 다만 가녀린 풀잎 끝에 스칠 뿐이라 할지라도 정해진 때가 지난 후에도 살아 있을 자는 아무도 없느니라. 불사의 영약도, 마법사의 주문도, 거룩한 제사도, 신통한 기도자들의 간구도···. 죽음의 굴레에 든 자를 구해내지는 못하며, 과보를 나타내지 않은 악행이 있었다면 수백의 예방조치로도 그 과보를 막을 수가 없느니라. 만사가 이와 같거늘 무슨 연유로 그대가 불평하는가?
비쉬누 법전 20.43-46 (힌두교)
말씀 선집
한국에서는 10월 달에 주님이 온다고 야단하는데, 주님이 오기는 뭘 옵니까? 벌써 주님이 와서 잔치하고, 나발 불고, 피로연 다 했는데 누가 또 온다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행차 후에 나발 분다는 한국 속담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선생님이 지금 하는 일들이 우연히 아닙니다. 섭리의 프로그램에 의해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종결짓고 넘어가는 시대가 되고, 지금은 이런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에 ‘천지합덕’ 이라는 과제를 내세울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228.68, 1992.03.15)
여러분의 가정에 이게 모토 입니다. 오늘 선생님이 말씀한, 복귀역사는 재창조역사이고 환경 가운데 주체 대상이 있어서 상대적 대응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 가지고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가정은 종족을 위해서 플러스·마이너스 투입해야 됩니다. 가인적 입장을 구원하기 위해서 투입해야 됩니다. 가인적 입장을 구원하기 위해서 투입해 나가야 됩니다. 통일교회의 개인은 가정을 위해, 가정은 종족을 위해서 투입하고 희생하라는 이런 논리가 공식에 의한 논리지, 적절히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공식적인 논리라른 걸 알아야 됩니다.
(267.154, 1995.01.04)
우루과이를 중심삼게 되면 아르헨티나도 우루과이를 못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스페인계로서 제일 순종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브라질 사람하고 결혼 안 하겠다고 야단입니다. 우루과이가 그러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혈통을 존중합니다. 그것을 보면 한국 사람하고 딱 맞습니다. 우루과이 역사에도 33인의 애국자가 있고···. 백 년 전의 역사가 한국 역사하고 맞먹습니다. 기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우연지사가 아닙니다.
한국 사람은 순종을 바랐습니다. 순결을 지켜 나왔습니다. 핏줄을 지켜 나온 것입니다. 서자를 사람 취급 안 했습니다. 그런 역사는 세계에 없는 것입니다. 서자가 있고, 직계 자녀가 있었습니다. 서자는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거지보다도 더 천대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거 왜 그랬느냐 이겁니다. 지금까지 서자를 대해 나온 하나님의 슬픔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서자의 입장을 찾아 나가는···. 서자가 장손이 된다는···.
(302.55, 1999.05.18)
3. 운명과 자유의지의 관계
종교 경전
랍비 아키바가 말한다. “모든 것은 다 예건되어진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 세상은 은총에 의해 심판된다. 그러나 심판은 세상을 위해 봉사의 업적을 남긴 비중에 따라 진행된다.”
미슈나, 아보스 3.19 (유대교)
어떠한 재앙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아시는 분이시니라.
꾸란 64.11 (이슬람)
오, 나의 종복들이여! 너희들 중에 누구든 잘못을 저지른 자는 내게 인도해 준 자를 제외하고는 나의 인도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인도하리라. 오, 나의 종복들이여! 너희 중에 굶주린 자는 누구든지 내가 양육한 자를 제외하고는 나의 양식을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양육하리요.
오, 나의 종복들이여! 너희 중에 헐벗은 자는 모두 내가 옷 입힌 자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옷을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입히리라. 오, 나의 종복들이여! 너희가 밤낮으로 죄를 짓게 될 때, 나의 용서를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용서해 주리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24 (이슬람)
모든 것이 그대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나니,
권능은 그대의 것.
장기판 위의 온갖 말들을 움직이듯,
그대는 스스로 만든 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도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은 또한 떠나야 하리.
모두가 가야 하리.
어찌 생과 사의 주인이신 주를 망각하려 하는가?
아디 그란트, 아사 키 바르, M.1, pp.473-474 (시크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놓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이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뜻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절대자이시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복귀섭리의 뜻도 유일하고 불변하며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뜻에 대한 예정 또는 절대적일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사 46:11). 이와 같이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기 때문에 만일 이 뜻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이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은 그의 대신 다른 인물을 세워서라도 끝까지 이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아담을 중심삼고 창조목적을 이루려 하셨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후아담으로 보내시어 그를중심하고 그 뜻을 다시 이루시려 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 뜻도 역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기필코 완수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일까? 이미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뜻의 성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95퍼센트의 책임분담에 그 중심인물이 담당해야 할 5퍼센트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어서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책임분담 5퍼센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10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아담 해와를 중심한 ‘뜻 성사’는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되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노아가 방주(方舟)를 제작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섭리도 타락인간이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비로소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요 3:16). 그러나 인간들은 이 작은 책임분담마저 감당치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연장케 하였었다.
(원리강론, 예정론 1)
되어지는 모든 것은 인간이 아무리 주장하고 아무리 야단할지라도 이 우주의 천운이 원하는 대로 박자는 맞아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는 한 여기에 순응하기 마련이고, 여기에 순응하는 도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우주의 운세와 더불어, 맥박과 더불어 발전해 나갑니다. 영원히 존속할 것입니다. 서양 사람 마음대로 아무리 했댔자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사람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은 우주의 법도를 따라 거기에 박자를 맞추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원칙적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다시 연장되어 아시아, 세계의 문화권으로 남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나 혹은 개인이나 무엇을 막론하고 망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망합니까? 그건 누가 망하게 합니까?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우주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있는 인간들은 천운의 법도에 따라 박자를 맞춤으로 남아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영웅이 안 되고 싶고 성인이 안 되고 싶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94.19-20, 1977.06.19)
은총과 노력의 효과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 노력의 관계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이 공동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노력이 은총을 부르고, 그 은총이 또다시 우리의 노력을 자극한다. 수많은 경전이 은총을 입기 전에 먼저 이간의 선행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응답 이전에 있는 소명이나 부르심이라고 설명한다.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은 섭리 완성에 95%를 차지한다. 나머지 5%는 인간 책임분담으로 남겨두셨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나머지를 인간의 책임으로 남겨둠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의 위업을 함께하는 공동 창조자로서 영광을 누리도록 길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나 구원섭리역사를 바라볼 때, 인간 책임분담의 실패나 탈락으로 인해 하나님께 절망을 안겨 드린 적이 많았다. 하나님은 당신 혼자서 일방적으로 이 과업을 완수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책임을 다하리라 믿을 수 있는 분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책임분담을 주셨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우주의 운명을 우리 손에 맡기셨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교 경전
구하라 받을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7
도와 일치하면 도가 좋아하여 그를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이루게 해주고, 덕과 일치하면 덕이 좋아하여 그를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덕화시키고, 도와 덕을 잃으면 무도실덕이 좋아하고, 모든 것을 잃고 포악한 결과만을 얻게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성화시킨다면 그는 훨씬 성화된 존재가 될 것이며, 만약 그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성화시킨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성화된 자신의 모습을 갖게 될 것이며, 현재에서 자신을 성화시키는 자는 앞으로 도래할 세상에서 성화된 자신의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탈무드, 요마 39a(유대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오. 여러분 속에서 활동하셔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12-13 (기독교)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을 바꿀 때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상태를 바꾸지 아니하시도다.
꾸란 13.11 (이슬람)
온 마음을 나에게 전일하라. 그대는 은총으로 모든 고난들을 이기리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아만으로 인해 듣지 않는다면 그대는 파멸할 것이니라.
바가바드기타 18.58 (힌두교)
만일 네가 바른 길을 구하려 한다면 바르게 행하라. 곧장 그곳에 이르게 되리라. 그러나 만일 네가 보리를 구하여 용맹정진하지 않는다면 다만 어둠 속을 더듬거릴 뿐 그 진면목은 보지 못하리라.
육조단경 2 (불교)
하늘이 도와주는 것은 순종하기 때문이요, 사람이 도와주는 것은 신실하기 때문이다. 신실함을 이행하여 순종할 것을 생각하고 또 그것으로 어진 이를 숭상한다. 이 때문에 하늘에서 도와주니 좋아서 이롭지 않음이 없다.
역경, 계사전, 1.12.1 (유교)
하나님이 선언하시길, 나는 나의 종복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가까이 있도다. 그리고 그가 나를 회상할 때마다 나는 그와 함께하리라. 그가 자신 속에 나를 기억할 때 나도 스스로 그를 기억하리라. 그가 회중 속에서 나를 기억할 때 나는 회중 속에 있는 자들보다 더욱 그를 기억하리라. 그가 한 팔 길이로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세제곱으로 그에게 다가가리라. 그가 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올 때 나는 그에게 달려가리라.
하디스 (이슬람)
신은 각자에게 그의 과실을 딸 수 있는 갈고리를 준다.
이보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와 함께 먹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3.20 (기독교)
운동은 아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완성된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극을 주지 못하면 위에 있는 이들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아래로부터의 열망이 위에서의 완성을 가져오는 것이다.
조하르 (유대교)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숙명의 법칙과 인간의 노력 양자에 달려 있나니, 이들 중에서 숙명의 길은 불가해한 것이며, 인간의 노력의 경우에는 헤아릴 수 있느니라.
마누법전 7.205 (힌두교)
말씀 전집
여러분이 하나님의 창조위업에 가담해야 됩니다. 원래 타락하지 않았어도 그런 책임이 있습니다. 타락해 가지고 인간 책임분담이 설정된 것이 아니고, 타락하지 않아도 인간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완성할 수 있는 하나님의 95퍼센트 창조 이상적 형태를 다 갖추었더라도 자기의 5퍼센트 창조 이상적 형태를 다 갖추었더라도 자기의 5퍼센트 책임을 완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의 완성을 하나님만이 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거기에 보태 가지고 완성해야 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115.66, 1981.11.04)
생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인체의 중심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영인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양성)와 육신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음성)의 두 요소가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서 성장한다.
앉아 자기 신세를 탄식하는 그런 방식은 안 됩니다. 발전을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협조하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것을 바라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327.48, 2000.07.24)
하나님이 95퍼센트를 창조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창조 원칙에 협조해서 100퍼센트를 완성함으로서 우리 인간에게도 하나님이 뜻을 완성하는 데 동참했다는 가치를 주시는 것입니다.
(130.19, 1983.12.11)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일까?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뜻의 성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95퍼센트의 책임분담에 그 중심인물이 담당해야 할 5퍼센트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어서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책임분담 5퍼센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100퍼센트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이 담당했던 책임분담은 하나님이 그의 책임분담으로 담당하신 수고와 은사에 비하여 얼마나 미소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 섭리적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감당치 못함으로써 복귀섭리를연장시켜 왔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경미한 책임분담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얼마나 힘에 겨울만큼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치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예정론 2)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은사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인 믿음을 세우지 않으면 그를 찾아온 구원섭리는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부활의 혜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었고 그것을 믿고 안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인 것이다.
(요 3.16, 엡 12.8, 롬 5.1). (원리강론, 창조원리 5.2.2)
사랑이라는 말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성립되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리 절대자라 하더라도 사랑을 하는 데는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혼자서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 피조만물을 지었는데, 그 피조만물은 자신의 형상을 그대로 본따서 전개시켜서 지었고, 그중에서 자신의 인격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창조적인 입장에 세워 놓기 위해 지은 것이 인간입니다.
(39.8-9, 1971.01.09)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도상에서 아들딸을 책임지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응당 내가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협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책임지고 나오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응당 사탄의 공격을 받아야 됩니다.
(31.50, 1970.04.12)
준비와 멋진 출발
어떤 여정이든 그 출발이 좋아야 한다. 동양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주제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좋은 출발이란 첫째로 내적인 준비가 잘 되었다는 것이다. 심정을 정화시키고 확고한 결의로 자신을 무장하고, 행동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방법론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 후 그 과제에 대해 조사하고 앞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충분한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실용적인 조언이면서도, 특히 영적 구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가능하다. 삶을 가볍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은 처음의 시작점보다도 훨씬 낮은 자리로 전락하기 쉽다.
문선명 선생은 위대한 사람,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목표에 초점을 맞춰 살지 않는 인생은 그저 그렇게 아무 실적이 없는 인생이 된다. 결의를 다지고 자기 훈련 기반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도전에 패배당하기 십상이다. 문선생님은 부패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준비한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준비하는 삶의 전형적 모델을 부여주고 계신다.
1. 도전에 대한 준비
종교 경전
군자는 일을 하되, 어떤 일이나 처음부터 신중하게 생각하고 일을 시작한다.
역경 6. 재판 (유교)
성공은 선견과 결의의 결과이고, 선견은 스스로 비밀을 지키는 심사숙고와 계획에 달려 있도다.
나흐줄 발라가, 어록 46 (시아파 이슬람)
나무를 자르기 전에 도끼날을 살펴라.
온자크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군자는 병기를 정비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한다.
역경 45 (유교)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기 시작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로 밀고 들어오는 자를 만 명으로 당해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4.28-31 (기독교)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한 날에 능히 대항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한 뒤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에베소서 6.10.13 (기독교)
행복의 장을 확대시키기를 원하는 자는 그로 하여금 마음의 바닥에 기초를 쌓도록 해야 한다.
음즐문 (도교)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24-27 (기독교)
대양 가운데 있는, 잘 마련되지 못한 배는 싣고 있는 물건이나 상인과 함께 난파하기 마려이라네, 그러나 그 배가 잘 마련되고 갑판을 잇는 판자들이 잘 결합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서지지 않으며, 싣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건너편 언덕에 닿을 수 있다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고양되었으나 지혜가 부족한 보살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길에 금방 실패하고 마는구나.
그러나 그가 지혜, 최상의 완전과 원만하게 하나될 때, 그는 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지도 않은 채로 지나들의 열반을 경험하네.
‘반야’에 관한 시구들 14.7-8 (불교)
말씀 전집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깊은 믿음과 치밀한 계획과 실천하려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뜻길, p.323)
요즘 사람들은 모든 생활에 대해서 나태해지고 조직생활을 싫어하고, 친구관계를 싫어하고, 무슨 남녀 관계까지도···. 여자면 여자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전부 다 무책임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뭐 자기가 살 생활의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부딪치는 대로, 내가 좋고 내가 이로운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는냐? 어디에 가 부딪쳐 가지고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105.11, 1979.07.08)
어떤 일을 하겠다는 뚜렷한 관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20대가 되었으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이다.’를 딱 정해 가지고 일생 동안 싸워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역사적인 인물이 되든가 뭘 하나 남길 수 있습니다. 눈치 봐 가면서 환경에 적당히 박자 맞추고 살겠다고 애쓰는 사람은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관을 딱 정한 다음에는 그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투쟁해 나갈 수 있는 용맹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싫다 하지 않고 전부 다 소화할 수 있는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120. 299, 1982.10.20)
하늘은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을지라도 저희가 그 준비에 응하여 마음과 몸에 준비의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7.287, 1959.10.11)
아침에 사탄세계로 나갈 때는 눈, 코, 귀, 모든 세포, 마음까지도 무장을 해 가지고 ‘오늘도 무사고로 돌아올 수 있게끔 해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122.266, 1982.11.21)
인생은 단 한 번입니다. 그냥 길 가다가 마주쳐서 이럭저럭 살게 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가정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24.86, 1969.07.06)
여러분의 일생에 있어서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결심 여하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극복과 승리··· 극복과 승리가 자기 인생 전체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극복이라는 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배고픈 것과 잠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제일 사탄이 필요한 것이 잠자는 거예요. 잠하고 배고픈 것입니다. 다음에는 또 뭔가요? 남녀 문제입니다. 성공하려면 남녀 문제를 극복해야 됩니다.
(265.184, 1994.11.21)
여러분들은 성공을 하고 싶어 합니다. 성공은 누구나 하고 싶다는 겁니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성공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해야 됩니다. 준비를 해 가지고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금 구시대의 기반 위에 새로운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준비된 내용을 중심삼고 그 기반을 소화할 수 있어야만 됩니다. 새로운 기반을 능가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역사의 새로운 기반이 안 선다 하는 것이 역사적인 숙명적 결론입니다. 이것은 우리 일생이나 우리 국가가 가는 길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가 지금 뭘 하고 있느냐?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지만, 그 핍박 가운데서도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라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전 세계가 무서워하는 2억 4천만의 미국을 대해서 선생님이 혼자 싸우고 있습니다. 친구도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지도 간부나 식구들은 전부 다 그걸 모르는 것입니다. 누가 선생님의 힘이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냥 맹목적으로 안 됩니다. 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준비를 해야 되느냐? 사상적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신력에 있어서 그 사람한테 져서는 안 됩니다. 절대 져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노력에 있어서 미국의 역사 과정에 공을 세운 사람들과 비교하여 져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엔 뭐냐 하면 행동, 구체적 준비를 해야 됩니다.
철두철미한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사상을 가졌다고 가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준비된 사실 위에서 무한히 노력해야 됩니다. 노력을 하는 데는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이 기반을 능가할 수 있는 모체, 그 주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무한한 투쟁을 해야 됩니다. 지금 기성세대의 기반이 되어 있는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체제를 환영하게끔 안 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반드시 투쟁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투쟁 과정에서 망하든가 흥하든가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을 가지고 뚫고 나갈 수 있는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간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은 소화당할 수 있는 노력이 아니라 소화시킬 수 잇는 노력입니다. 그 다음에는 실천입니다. 실천하는데 우리 종교 지도자들이 투쟁할 수 없으니 말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여덟 시간 하면 나는 스물 네 시간 하는 것입니다.
(133.217-219, 1984.07.19)
2. 첫 걸음
종교 경전
아름드리 큰 나무도 터럭만 한 싹에서 생겨나고,
9층의 높은 누각도 한 줌의 흙을 쌓는 데서 시작되고,
천리의 먼 길도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도덕경 64 (도교)
군자의 도리는 먼 길을 나섬에 반드시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다. 마치 높은 산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중용 15 (유교)
말씀 전집
노아가 자기 일신을 정복하고 자기 가정을 정복하기 위하여 120년 동안을 싸웠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20년 후에 이 땅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노아는 ‘일 년이 지났으니 이제 119년 남았구나’ 하며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237, 1968.01.15)
1년의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서 그 해의 원단(元旦)에 어떤 목표를 정한 사람이 있다 할 때, 그 일년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삼백 예순 날 이상을 극복할 수 있는 투지력, 혹은 추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일 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1년에 10년이 가해지고, 20년, 혹은 30년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31.31, 1970.04.12)
영원한 출발은 내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출발은 내가 뜻을 알고 난 순간부터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초의 순간이라도 시간적 관계를 두고 비약이 있든가 구렁텅이가 생겨나면 영원은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애노정을 중심삼고 신앙 길을 가는 데 있어서 금년에 못 가면 명년에 가고, 명년에 못 가면 내명년에 가고, 10대에 못가면 20대에 가고, 20대에 못 가면 30대에 가고, 30대에 못 가면 40대에 가고, 40대에 못 가면 50대에···. 일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일생을 거쳐서 뜻과 더불어 하나될 수 있는 하루의 생활을 가져 보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살았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37.220, 1970.12.27)
불굴의 인내
어떤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란 단순히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꾸준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일단 결의를 하고 일을 시작하면 그 다음에 포기는 없다. 종종 결과는 아주 마지막 순간까지 가서야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끈기는 반대나 실패, 연장이 있더라도 초심을 꾸준히 지킴으로써 길고 고통스러운 길을 참는 것이다. 자기가 세운 원칙을 포기하고 지름길을 가거나 방향을 전환하고 싶은 유혹들을 물리치는 인고의 자세가 필요하다. 경전의 말씀은 인내의 덕을 다양한 은유로 설명한다. 땅에 우물을 파거나 나무에 구멍을 뚫는 것, 느리지만 굴하지 않고 바위에 흘러들어 구멍을 내는 물과 같은 것에 인고의 노력을 비유한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의 인고 세월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해방하고자 사랑과 희망으로 타락한 자녀들의 죄와 불복종을 참으시며 악과 슬픔으로 점철된 수천 년을 인내해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끈기와 인내를 이야기하는 지금,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고 노력을 닮아나야 되겠다. 고난을 참고 이겨낸 욥의 이야기는 제15장 ‘시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 인내, 감내와 참음
종교 경전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낙담하지 말라. 새로이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하라. 행운의 여신은 초지를 일관하는 자에게 마침내 미소를 보내리라.
마누법전 9.300 (힌두교)
인내는 하늘도 설득할 수 있다.
탈무드, 산헤드린 105a (유대교)
행운은 만사를 늘 숙명과 타의에서 구하려는 자들을 저버리며, 뜻한 바를 굳게 잡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를 돕는다. 이에 우리는 언제나 능동적이며 깨어 있어야 하느니라.
마트시야 푸라나 221.2 (힌두교)
공자께서 강가에 서서 말씀하셨다. “저렇듯이 모든 것이 밤낮을 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구나!”
논어 9.16 (유교)
고기 잡는 어부와 짐승 잡는 사냥꾼과 밭가는 농부는 다만 자신의 살 궁리를 하여서도 춥고 더운 온갖 고통을 참아내거늘, 세상 모든 이들의 즐거움을 구하여 나선 몸인 내가 어찌 참아 견뎌내지 못할쏘냐.
샨티데바, 보살행의 도 4.40 (불교)
일이 잘되거든 행복을 누려라. 일이 틀려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 아무도 한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
전도서 7.14 (기독교)
너희 믿는 자들이여! 인내와 예배로 도움을 구할지니, 실로 하나님은 인내하는 자편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두려움과 배고픔, 그리고 재산을 생명 및 수확의 손실로 너희를 시험하도다. 그러나 인내하는 자들은 재앙이 그들에게 덮칠 때 “오, 주여! 우리는 주님 안에 있으며 주님께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하도다. 그들의 기도는 주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은총이 내리리니 그들은 인도 되리라!
꾸란 2.153-157 (이슬람)
나나크여, 고난이 왔을 때 즐거움에 대해 물음이 쓸모없으니, 즐거움과 고난이란 주어질 때 반드시 받아 입어야 하는 의복과 같노라.
따져 물음이 무익하나니, 다만 만족함이 최선이라.
아디 그란트, 바르 마즈, M.1, p.149 (시크교)
우리는 포기자의 삶을 시작하는 때에 지녀야 하는 신념을 조금도 가감없이 지녀야 한다. 우리는 변덕스런 마음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아차랑가 수트라 1.36-37 (자이나교)
40세가 될 때까지 전혀 무학이었던 랍비 아키바가 어느 날 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도에다가 구멍을 내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물이 돌을 닳게 만든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부드러운 물이 돌에 구멍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분명히 딱딱한 철로 뒤덮인 것 같은 율법의 말씀도 인내와 부드러운 마음을 동반한다면 무지를 깨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학업에 열중하였다.
탈무드, 어보스 드 랍비 나단 7 (유대교)
배우지 않을지언정, 한번 배우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을지언정, 한번 물으면 알지 않고는 그만 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한번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할 바엔 독실하게 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한 번에 해낼 수 있는 일을 나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해낼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은 천 번에 한다. 과감하게 도를 따르고 행할 수 있다면,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고 유약해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중용 20 (유교)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은혜 베푸실 날을 기다리신다. 너희를 불쌍하게 여기시어 도우러 일어나신다. 여호와는 공평무사하신 하나님, 복되어라, 그분을 기다리는 자여!
이사야 30.18 (기독교)
말씀 선집
참을 인(忍)이라는 한자를 보면, 참는다는 말은 마음에 칼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큰 짐을 지고 큰일을 하려면 참는 것이 몇 백, 몇 천, 몇 만, 몇 백만 무한이어야 합니다.
(124.155-156, 1983.02.06)
동양에서 참는다는 말은 마음에다 칼을 들이대더라도 참는다는 뜻입니다. 마음에다 칼을 꽂으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천 번 참는 사람은 천 번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93.320, 1977.06.12)
이것을 찾아 나가는 데는 무한한 원수들이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과 싸우고 또 싸워야겠고, 나아가고 나아가며, 부딪치고 부딪쳐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인내의 제단을 내 어깨로 고이고, 발로 고이고, 손으로 고이고, 몸으로 고이고, 머리로 고이고, 인내의 고개를 넘기를 각오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92, 1959.03.29)
쓴 약을 먹으면서도 좋아한다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쓴 약은 그 쓴맛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쓴맛이 난 후에는 이게···. 쓴 약을 먹어 보십시오. 진짜 맛을 보십시오. 쓴맛을 진짜 보게 되면 그 후에는 단맛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쓴 약을 마시고 나면 향기가 있습니다. 향기로운 맛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곰의 쓸개를 알죠? 곰의 쓸개를 먹어 보면 처음에는 쓰지만 맨 나중에는 단맛이 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쓴맛보다도 그 단맛과 향기로운 맛을 알게 될 때 쓴 약도 통째로, 바가지로 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은 쓴맛 가운데 숨어 있는 단맛과 향기로운 맛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주고받는 이치입니다. 달면 쓰고 쓰면 달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98.205-206, 1978.08.01)
선생님은 아무리 피곤할 때라도 해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 모든 피곤이 일시에 달아나 버린다.
(뜻길, p.120)
오래 참는 길이 종교의 길이고, 오래 참고 희생하는 것이 종교의 길입니다. 인내와 희생으로 찾아진 위대한 사랑의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할 때, 그 이면에는 희생이 깃들어 있고 인내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112.51, 1981.03.29)
선한 편이 어떤 것이냐? 오래 기다리고, 오래 참고, 오래 소망을 두려고 하는 것이 선한 편이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악한 편은 그게 없습니다. 내게 불리하면 주먹이 가고, 대번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신입니까, 악신입니까? 하나님은 선신입니다. 사탄이 악신입니까, 선신입니까? 악신입니다. 그 이블 갓이니 굿 갓이니 하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겁니까? 무것 갖고 정하는 겁니까?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저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분해도 참는 것입니다. 참을 뿐만 아니라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그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걸 못 참게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못 견디게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절망적인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런 놀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93.112, 1977.03.21)
예수님이 죽어서 승리한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참고 가는 길, 위하여 사는 원칙을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 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 그렇게 안합니까?’ 했다면 다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랬기 때문에, 참고 넘어갔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그게 훌륭한 것입니다.
(76.227, 1975.05.21)
세상 그 어떤 고문과 형벌도 본인의 하늘 길을 좌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여섯 번에 걸친 감옥살이도 자식들을 찾아 나선 참부모의 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싸늘한 감방에 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면서 ‘저 물방울이 언젠가는 바위를 뚫듯이 내 눈에서 떨어지는 이 뜨거운 눈물이 기필코 얼어붙은 하나님의 한서린 가슴을 녹이고 해방 석방시킬 그날이 오리라.’고 다짐하고 맹세하며 살아온 사나이의 생애입니다.
(447.168, 2004.05.01)
하나님은 사탄세계와 지옥세계까지 품을 수 있고 또 거기에서도 참고 견딜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사탄들까지도 그 앞에는 머리를 숙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최후의 승리자, 최후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고자 원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으심을 여러분의 참음으로, 하나님의 견디심을 여러분의 견딤으로 여러분의 마음 몸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243, 1958.05.18)
아버지가 그러하시기에 아들딸 된 저희들도 그러하고, 아버지가 그러한 길을 가시기에 저희도 그러한 운명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 이 도상에서 지치지 말고 백절불굴의 심정을 가지고 최후의 승리자로 결정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젠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안식의 한날, 너희는 내 것이요, 이 천하는 나의 아들딸인 너희들의 것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한 날까지 참고 견디어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날을 맞이하기까지 고난에 동참하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3.236, 1964.03.22)
2. 결코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견뎌라
종교 경전
성서는 임무를 시작하는 자에게가 아니라 임무를 완수한 자에게 공적을 치하한다.
탈무드, 소타 13b (유대교)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13.13 (기독교)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창세기 19.26 (기독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꾸준히 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9 (기독교)
그대는 큰 강을 건넜다. 어찌하여 그대는 강가에서 꾸물거리고 있는가? 가우타마여, 서둘러서 피안에 닿아야 한다. 항상 주의하라!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10.34 (자이나교)
인의의 도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우물 파는 사람에게 비유할 수가 있다. 우물을 구인까지 팠어도 물이 안 나온다고 도중에 그만두면, 이는 마치 우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맹자 VII. A.29 (유교)
가령 어떤 이가 나무 속 깊은 곳에 자라나는 고갱이를 구하려 숲으로 갔는데, 다만 죽은 나뭇가지와 가랑잎을 한 짐 지고 나와서는 그가 구하는 바를 얻었다고 즐거워한다면, 그가 어리석지 않는가?
모든 슬픔에서 벗어날 길을 구하여 나선 이가 다만 조금밖에 나아갈 수 없는 길을 따라가 곧 그 끝에 닿고는 이로써 뽐내고 자부심을 지닌다면, 그는 고갱이를 구하려 숲에 들어간 이가 죽은 나뭇가지와 가랑잎 한 짐에 만족하여 돌아오는 바와 다르지 않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다만 나뭇가지 한 바리를 싣고 돌아와 만족한다. 자신의 마음이 차츰 맑아지고 생각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는 이가 곧장 자신의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자만하는 이는 바로 이와 같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그 대신에 장작을 한 바리 싣고 나와 이로써 만족한다. 자신의 마음이 차츰 맑아지고 생각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는 이가 곧장 자신의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자만하는 이는 바로 이와 같다. 또 어떤 이는 나무 속의 고갱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가 그 대신에 장작을 한 바리 싣고 나와 이로써 만족한다.
정진하여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얻은 이가 다만 이로써 만족하여 뽐내고 자만하는 이는 바로 그와 같다. 이와 같이 흡족하지 못한 노력을 하고도 쉽게 만족하여 자신의 노력을 늦추고 뽐내며 으스대는 이들은 쉽게 나태와 방종에 빠지리니, 필경 이들은 다시 고통과 슬픔을 만나게 되고 만다.
맛지마 니카야 I.192-193 (불교)
증자(曾子)가 말하였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짐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어짊(仁)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라야 끝나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논어 8.7 (유교)
말씀 선집
성경(마 24:1-14) 말씀 가운데 끝 날의 징조에 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끝 날에는 신앙을 중심삼고 살아나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혼란기를 극복하여 승리자가 되려면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237-238, 1958.05.18)
어디까지 참고 견뎌야 되느냐 하면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참고 견뎌 나오신 분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 천품과 피와 살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 아버지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44.28, 1971.05.04)
신앙생활은 하루아침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서, 내가 죽더라도 영원을 중심삼고 신앙해 나가는 길에 있어서, 내가 그 절개를 지켜야 할 것이 문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중심 되는 골자가 있어야 됩니다. 영원히 믿고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59.234-235, 1972.07.23)
여러분에게 참음이 있다 하지만 그 참음이 역사적인 참음의 종착점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인연된 사람들이 지쳐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통일교회는 좋지만 어려워서 못 가겠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땅을 두고 보면 행복한 자일지 모르나 하늘을 두고 보면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과연 가기가 어렵습니다.
가는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보고 울고, 느끼고 울고, 싸우면서 우는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이 더 연속되어야 하는, 즉, 더 참음의 눈물을 고대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늘이 처량한 모습들인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알게 될 때, 내가 참았다는 그 사실도 하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나왔으나 아직까지 내 참음의 한계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끝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끝나기를 바라는 그 시간서부터 자기를 살필 것이며, 그 시간서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느껴봐야 됩니다.
(6.89, 1959.03.29)
하나님은 한번 딱 정하면 억 천 만 년이 가더라도 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마음을 보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 변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가는 저녁에 가서는 ‘아이쿠···’ 한다는 것입니다. 수련을 받을 때, 말씀을 듣게 될 때 ‘그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결심을 하지만 돌아서게 되면, 며칠도 안 가서 사회에 부딪치게 되면서 다 흘려버립니다.
하나님은 한번 결심하면 그것을 몇 천 년이고 문제삼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분입니다. 가다가 이러고저러고 하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내가 뜻을 위해 간다’ 하지만 금년 말, 혹은 내후년, 혹은 십 년, 이십 년, 일생을 그렇게 갈 겁니까? 이것이 내려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데는 ‘내가 좋아야 가지 나쁘면 못 가겠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내가 죽든지 살든지 참입니다. 그것은 죽음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나, 죽음 위에 있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극복해야 되고, 변치 않는 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틀립니다.
이것들이 부딪치게 되면 변하는 것은 깨져 나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완연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이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때 죽음을 극복하고 삶으로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넘어서야만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두고 볼 때 참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때는 언제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다음에는 죽음과 삶이 여기에 나타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둘이 대결하는 때입니다.
(66.43-44, 1973.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