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개척과 목회 그리고 비전 - 이철호 목사(부평강성교회) -
[지역의 특성 ]
이 지역은 부평공단이 자리하던 지역이었다. 이 곳은 공단지역과 넓은 배 밭이 가로막고 있는 외진 지역이며, 300호 정도의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있는 계양산 밑의 고립된 지역이었다.
[교회 설립 ]
1984년 4월 22일에 인천시 계양구 효성동에 상가 2층 50평을 임대하여 개척을 시작했다. 합신을 졸업하고 강도사 인허를 받은 상태에서 시작된 개척이었다. 부교역자로 7년을 사역하던 중 개척을 결심하고, 섬기던 교회에서 떨어진 지역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강서구에 소재한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강동구와 수원, 안양 등을 돌아보던 중 부평 효성동을 소개받아 개척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에 기존 교회가 없었던 것이다.
새로 지은 연립주택에 붙은 상가 2층 50평을 1400만 원에 임대했다. 임대비용은, 1000만 원은 은행에서 융자를 얻고(친척담보), 400만 원은 우리 전세금으로 마련했다. 50평 가운데 절반을 막아 사택을 꾸미고 절반을 예배당으로 만들었다. 교인은 아내와 11개월 된 첫 딸, 두 명이었다.
[두렵고 떨림으로 ]
개척을 시작하면서 나 같은 사람이 개척하는 이 교회에 과연 교인이 와줄 것인가라는 자문을 수없이 하곤 하였다. 동시에 나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세우라는 사명을 주신 데 대해 감사와 두려움이 앞섰다. 교회를 세움에 있어 사탄의 엄청난 방해와 궤계가 있음을 생각할 때에 긴장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교회를 건축하여 이전한 86년까지 2년 6개월 동안을 강단에서 잠을 자며 기도했다.
[교회의 성장 ]
첫 주일 예배시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모르는 사람들이 10명이나 참석하여 모두 12명이 첫 예배를 감격스럽게 드렸다.
[성경공부 ]
그 후 서울 지역으로 출석하던 타교회 교인들이 저녁예배와 수요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몇 분이 성경공부를 부탁하여 나는 그들이 우리 교회로 옮기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약 3개월 정도 낮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난 부인들이 마침내 부부가 함께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부성경공부'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래서 3가정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고 8-10시까지 성경공부를 하고 11시부터 차를 나누며 신앙생활에 대한 상담과 교제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삶에 변화가 생기면서 이들이 우리 교회에 나오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동네에서 전도를 하여 우리 교회로 보내주게 되었다.
이 새로운 성도들과 함께 부부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잘 성장하여 결국 우리 교회의 장로와 안수집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서서히 지역주민들 사이에 말씀이 좋다는 소문이 나게 되었다. 지역의 불신 남편들이 소문을 듣고 강성교회로 가면 나도 같이 가겠다고 해서 교회를 나오는 부부들이 생기게 되었다.
[신학생들의 참여 ]
개척초기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산상보훈을 강해했다. 이 강해 시간에 고신 전도사들이 많이 참석을 했다. 효성동에 부산 고신의 예과 과정인 지방신학교가 있는데 그 곳에서 공부하던 신학생들이 매주 수요일 성경공부에 20-30명 정도가 참석을 하게 되었다. 개척교회에 교인이 별로 없던 시점에 그들의 출석은 매우 힘이 되었다. 그들이 지역에서 자취를 하면서 주인집과 이웃들에게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과 목사에 대한 자랑을 많이 해주었다. 그 결과 먼 거리에 있던 젊은이들이 수요 공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결혼을 하면서 우리 교회로 출석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1년이 지나는 동안 교인은 60-70명 정도가 출석하게 되었고 여전도회와 학생회가 창립되었다.
[기도 운동 ]
처음 개척을 시작하면서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목회를 했다. 화요일 저녁, 수요일 저녁, 목요일 저녁과 주일 저녁예배도 칠판을 놓고 성경공부를 했다. 새벽기도 시간에 다른 교인들이 나와 방언기도를 하면 조용히 불러다 다른 교회로 가든지 산에 가서 기도하라고 권면하며 출석을 금했다.
그러다 1년 6개월만에 처음으로 부흥회를 하게 되었다. 이 부흥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많은 은혜를 주셨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6개월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통하여 기도운동이 교회에서 일어났다. 성경을 공부하는 성도들이 교회 와서 철야를 하면서 기도했다. 60-70명 교인들 가운데 20명 정도가 매일 철야기도를 했다. 사람이 시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씀으로 무장된 그들에게 기도를 통한 은혜가 임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역 개발 ]
배 밭으로 둘려 있던 지역이 점점 아파트 단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된 개발은 소형 아파트 중심이었다. 12평에서 21평까지의 소형 아파트가 600세대 들어섰다. 그 결과 10구역 정도가 더 성장을 하게 되었다. 120명 정도의 교회로 성장을 했는데 3년이 지나면서 입주한 세대들이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소형 아파트의 문제는 2-3년 주기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싼 전세비와 주택 구입비로 인해 이사왔으나 자녀 교육 문제와 남편들의 직장 출퇴근 문제로 이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이사철에 50가정이 이사를 간 적도 있다. 이러할 때 낙심이 되어 하나님께 원망하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실컷 키워 놓으면 뭐합니까? 이 지역은 성경공부를 시킬 지역이 아닙니다. 나는 성경공부를 해서 교회를 성장시키는 목회인데(주일 저녁예배 시에도 흑판을 놓고 성경공부를 시켰음) 이렇게 가버리면 뭐가 되겠습니까?"라는 기도를 드렸다.
[교회 건축 ]
개척 초기 성경공부를 할 때에 나는 가르치기를 교회를 건축할 재정이 있으면 선교하는 데에 쓰지 왜 쓸데없이 그 많은 재정을 건축에 낭비하는가 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면서 전체 면적의 절반으로 쓰던 예배당이 2/3로 확장이 되었으며, 또 교실이 없어서 주일학교가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동시에 말씀은 좋은데 상가교회이기에 부담스러워서 등록을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반 문제로 교회 건축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목사의 목회적 욕심으로 생겨난 생각인지 구별이 되질 않았다. 이 문제로 3개월을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문제는 쉽게 해결되기 시작했다. 교인들 가운데 기도를 열심히 하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교회 건축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성경공부와 기도운동이 함께 어우러져 교회 건축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교회 건축이 결정되고 70명의 교인이 믿음을 가지고 건축을 시작하였는데 매일 철야기도에 힘썼으며, 또 낮에는 현장에서 봉사하였다. 전재산을 내어놓는 등 뜨거운 헌신으로 건축은 진행이 되었다. 이 건축 과정에서 교회는 120명 교회로 성장을 하고 있었다. 건축은 100평 대지에 연건평 278평으로 지하1층과 지상 4층으로 준공이 되었다.
이 건축 중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많았다. 믿음이 성숙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였고 복을 많이 주셨다.
날마다 저혈압으로 누워 있던 여전도회 회장은 철야기도와 낮에 식사봉사 등을 하면서 건강이 회복되었으며, 결국 부부가 헌신을 다짐하여 파라과이 선교사가 되어 출국하였다. 그리고 아내의 신앙생활을 반대하던 불신 남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역사가 많이 나타났다. 이 모든 역사들 가운데 가장 감사한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신 것이다.
목사인 나부터 그저 역사적인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건축 과정을 통하여 실제적이요 현재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과 홍해가 갈라진 것, 즉 역사적인 사건은 잘 믿고 있으면서, 오늘 내 앞에 있는 사형선고 받은 암환자가 나을 것은 믿지 못했으며, 건축 중에 압박되어 오는 재정문제가 해결될 것은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과 좌절과 원망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건축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길이 없어 보이던 상황에서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믿음이 성숙해 갔다. 끝없는 기도와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종종 하나님의 주특기는 '막판뒤집기'라고 말하곤 한다.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끝에 가서 상황을 반전시키시는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간증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담대한 믿음과 헌신을 갖게 되었고 건축 후 150명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지역의 변화 ]
부평공단이 점차 주거지역으로 변하면서 공장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장지역에 근무하던 교인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대신 새로 개발되는 아파트로 인하여 유입 인구가 많아졌다. 그리고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소형 아파트 중심에서 중형 아파트 중심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큰 평수를 찾아 먼 곳으로 이사가던 성도들이 그대로 이 지역에 남게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교인 이동이 심하지 않고 안정된 지역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10년이 지나면서 장년 450명의 교회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