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詩 - ‘이야기 詩’ 이론 연구>
햄버거를 먹으며
오세영
사료와 음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먹이는 것과 먹는 것 혹은
만들어져 있는 것과 자신이 만드는 것.
사람은
제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김치와 두부와 멸치와 장조림과……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이것 저것 골라 자신이 만들어 먹는 음식,
그러나 나는 지금
햄과 치즈와 토막난 토마토와 빵과 방부제가 일률적으로 배합된
아메리카의 사료를 먹고 있다.
재료를 넣고 뺄 수도,
젓가락을 댈 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한 입 덥썩 물어야 하는 저
음식의 독재,
자본의 길들이기.
자유는 아득한 기억의 입맛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장비평가가뽑은올해의좋은시] 96)
|작법공부|
필자는 나이 60 무렵까지는 시 소설 등 창작문학에 관한 관심과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왔다. 에세이를 시 소설과 동률로 읽어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에세이는 비창작일반산문으로 교양의 즐거움으로 읽어왔지 내 전공의 창작문학으로 읽은 것이 아니다. 그런 필자가 나이 60 이후 지금까지 근 20년 가까이 산문문학 문제에 빠져든 것은 순전히 ‘수필은 신변잡기’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산문공부에 빠져들었을 때 놀란 것은 우리 문단에 <산문론>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사실이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글은 산문에서 시작된다.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깨치자마자 시작되는 것이 작문공부다. 작문공부는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이어지고, 사회생활에서도 수시로 등장하는 것이 작문이다. 문학의 3대 양식으로 꼽는 시, 소설, 희곡 외에 동화, 드라마, 시나리오 등 모든 문학이 산문 기반의 문장에서 산출된다. 산문에서 나오지 않은 운문이 있는가? 산문에서 나오지 않은 시나리오가 있는가? 몽테뉴의 에세이는 창작문학에 뒤지지 않는 위대한 문학정신을 보여주는 일반산문문학의 대표적 양식이다. 이 같은 정신의 현대문학을 시작한지 100년이 지나도록 우리 말로 된 <산문론>이 없다는 이것이 진정 사실인가?
필자는 ‘수필은 신변잡기’라는 말에 놀라고, 다음에 ‘순문학적 수필(에세이)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찰스 램’(백철)이라는 말에 놀라 산문공부를 시작한 후 아무리 책방을 뒤지고 다녀도 <산문론>이라는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에 세 번째로 놀랐다.
필자가 이 작품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 같은 <산문론> 사정부터 말하는 이유는 이 작품의 전반부를 본래의 산문형식으로 이어 놓으면 그대로 에세이 곧 산문이 되기 때문이다. 산문문학의 본질적 성격을 조연현 교수는 몰톤(R.G. Moulton)의 말을 빌려 토의문학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전반부 내용은 사료와 음식에 관한 토의다. 필자가 지금 이런 식으로 논조를 펴가는 목적은 시가 토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토를 달 목적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시가 토의를 하면 안된단 말이냐?’라고 적극 묻고, 따지고 싶어서다.
독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시가 산문적 토의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필자는, 이 작품을 읽자마자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잘됐다, 꼭 필요한, 기다리던 작품이 나왔구나, 라는 듯 지금 이렇게 급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동안 필자가 읽어온 시론 어디서도 필자는 시도 에세이, 즉 ‘산문적 토의’를 할 수 있다고 쓴 시론을 읽어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산문적 설명(토의)은 시가 아니라는 듯 업수히 여기고 있었다.
현대시는 토의가 아닌 주정主情의 문학이라는 개념만으로는 부족한 듯 아예 ‘서정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오세영 시인은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교수이고, 필자로서는 다 읽어내지도 못할 학술서들과 시론서들을 펴낸 현시대 문단의 대가이시다. 그런 시인이 대한민국 시론이 ‘서정시’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에세이를 시로 썼겠는가?
필자가 이 작품 공부에서 하고 싶은 말은 문학의 소재, 주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이다. 문학이 다뤄서는 안 되는 소재, 주제는 없다. 하늘 아래에는 문학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없다는 것이 문학론의 본질이다. 문학에 금서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시대의 금서가 있을 뿐이다.
현대인에게 ‘시란 감정・정서만노래하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박히게 된 것은 현대의 서정시가 저지른 또 다른 오류다. 시론서에 보면 하나 같이 ‘동양의 시는 도道의 언어적 표현’이었다고 쓰고 있고, 서구 시 사상에는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오세영 [문학과 그 이해])
시는 본래부터 도道였고 가르치기 위한 에세이였다는 뜻이다.그러므로 시의 에세이 주제나 소재가 문제 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 말하는 방법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 시작법이다. 그림은 어떤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지만 그림이 춤을 춘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닌 무용이 된다. 노래는 어떤 노래도 부를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노래가 아닌 그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무슨 주제, 어떤 소재를 다루든 시를 써야 된다는 것이 시작법인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의 전반부 내용을 산문체 문장으로 이어 놓으면 그대로 에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단서는 ‘전반부’라는 말이다. 만약 이 작품이 전반부에서 끝났다면 필자의 진단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전반부’라고 한 것은 후반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전반부만 보면 에세이 일수밖에 없지만 거기에 후반부를 붙여놓은 결과 ‘아아, 시를 이렇게도 쓰는구나!’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가축이 좋든 싫든 이미 배합된 사료를 먹듯(전반부) 이미 배합된 햄버거를 먹는 인간도 사료를 먹는 가축과 다를 게 없지 않느냐는(후반부), 아메리카니즘, 혹은 기성품 같은 자본주의 독주에 대한 ‘시적 비틀어댐’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읽었다.(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