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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종교의 차이( 스가랴 7:1-14 )
글 : 김 강 석 목사
오늘날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종교와 신앙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종교와 신앙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종교를 신앙으로 착각하고 의외로 신앙이 아닌 종교의 길을 가는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와 기독교신앙의 차이는 종교는 사람이 선택하고, 사람의 행복과 가치를 추구하며 사람이 자기 자의적인 열심으로 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와 반면에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하나님 자신이 자기영광을 취하여 가지신다는 점에서 서로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 신을 찾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외의 대부분의 종교는 여러 가지 체험이나 선한 행위, 훈련 등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을 너무 동적으로만, 감정적으로만 생각을 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는 지식보다 단지 행동이나 감정 자체만을 가지고 신앙으로 판단을 하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행위를 모두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종교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불교든 유교든 천주교든 기독교든, 또는 이단이든 사이비든 가릴 것 없이 동일합니다.
비록 서로 가지는 종교로서의 의식의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그 목적은 거의 대동소위 합니다. 자기들의 신을 잘 공경하고 섬김으로서 그 대가로 복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에는 신을 공경하고 섬기는 종교의식에 그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할 때는 몸만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기는 자로서의 정성을 보이기 위해서 뭔가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 쪽에서 정성을 보여야 그의 신앙의 대상인 신이 비로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즉‘지성이면 감천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기독교의 참 된 신앙은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만을 추구하고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맥락에서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본문 2절부터 보게되면 북쪽 이스라엘 벧엘 사람이 부하들을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보내어서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자신들이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금식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 물음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 해마다 오월과 7월에 금식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이 오월이 되면 금식을 했던 것은 그동안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 파괴되고, 왕궁이 불타고 귀인들의 집들조차 파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을 기억하는 것이 5월의 금식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리고 7월의 금식은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된 예루살렘에 그달랴를 세워서 그 남은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지만 다시 반역이 일어나 그달랴를 죽이고 유다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이 날을 기억하며 금식 한 것이 7월의 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70년이 되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어느 정도 건축되어져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에서처럼 5월에 해 왔던 금식을 지금도 계속해서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벧엘에서 돌아온 몇 사람이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늘본문 3절에서 재계라는 단어의 뜻은 구별하여 바치다는 뜻으로 오락을 금하고 울며 탄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꾸어서 우리식으로 말하면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목욕재계하고 금식을 한다는 뜻입니다.
벧엘은 북 이스라엘 지역이지만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기에 그들이 묻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 오늘본문 5절과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구별하여 나를 위해 금식했지만 과연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라고 강조하여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식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종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종교가 뭡니까?
롬10:2-3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
바꾸어 말하면 자기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대적한 인본주의입니다.
신자들 중에 흔히 하는 말이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기도하여 응답받고자 할 때에 금식기도하면 응답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부흥사들이 하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자식이 금식하면 부모가 안달이 나서 들어준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금식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약발이 쎄니까 그렇게 한 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응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교회건축에 어려움이 없었고, 병도 낫고, 문제들이 해결되더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냥 자신들의 문제만 해결되면 와따 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우리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신다고 하시는데(빌2:13), 어떻게 된 일인지 가르치는 목사님도 그렇게 밖에 이해를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금식기도원이나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과연 누구를 위한 금식이냐?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이스라엘 유대백성들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되었던 그 날을 기억하면서 자기들의 죄를 기억하고 다시 시온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울며 금식하면서 기도한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회개하고 시온으로 돌아가고자 금식하며 기도한 것처럼 보이는데 속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본문 스가랴서 7:6절에 기록하고 있는 말씀처럼 금식 뿐만 아니라 절기 때마다 잔치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결국은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해 버리십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금식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나를 위하여 하는 것에서 달라질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저마다 금식을 했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한 금식이냐? 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즉 우상은 단순히 어떤 형상을 만들고 거기다가 절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우상의 본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며 금식을 한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 한 것이라면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든 것과 바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금식을 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본문 스가랴서 7:9절-12절을 보면 유다가 망한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재판을 진실하게 행하고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싫어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은 연약한 자로 출발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 기업을 얻고 복을 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수백년이 흘렀다고 해도 그들의 현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림으로서 그들은 약자의 피를 흘리는 죄로 가득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그들의 마음을 금강석같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유리위에 먹으로 글을 쓰면 어떻게 됩니까? 물로 씻으면 바로 지워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금강석처럼 되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기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진노하셔서 열국에 흩으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언약의 땅은 인애와 긍휼이 흘러야 되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긍휼로 베풀어 주셨기에 그들이 노력하지 아니한 약속의 땅을 받아서 거져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애와 긍휼을 베풀어야 할 약자를 오히려 학대하고 착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의 땅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이스라엘 유다는 자신들의 멸망의 이유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자신들이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을 하는 고통만을 생각했고, 그래서 무너진 성전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금식만하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한 금식입니다. 그리고 이걸 가리켜 종교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유다는 현재의 자신들의 고통만을 생각했을 뿐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었던 죄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만약 유다가 약자를 핍박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지 약자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듣기를 싫어하며 귀를 막았던 죄의 모습임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멸망과 현재의 고통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눈물을 흘리며 금식을 하고 애통해 하는 것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던 죄에 대한 애통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의미에서의 행동은 행동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얼마나 하면 될까?’ 항상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자기 행위를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따라서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하지 않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북쪽 이스라엘 벧엘 사람이 금식을 해야 하는지 묻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성전도 다시 건축되고 있는데 바벨론에서의 금식이 예루살렘에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 는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유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유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고국으로 돌아 온 것은 그들의 죄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역사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의 금식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었다면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해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고 금식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물음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것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질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신앙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고, 하지 않아야 수준 있는 신앙인이 되는가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관점에서 자기의 신앙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외면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의 신앙, 즉 종교 생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존재가치와 자기영광과 자기명예를 높이기 위해 뭔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은 너가 하는 그 일이 누구를 위해 한 것이냐? 를 묻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는 행위라고 해도 자신을 위한 것은 거부하십니다. 그것이 예배든 금식이든 거부하십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청종하게 되면 자신의 불의함을 보게 되기 때문에 자기 의를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하나님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자기의 불의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은 자기부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래의 피조물의 자리로, 죽은 흙의 자리로, 티끌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절대 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 하겠습니까?
이처럼 신자가 자기 불의함을 보게 될 때 진정으로 회개의 마음이 되고 애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소원을 두게 되면서 비로소 다른 이들에게 관심과 배려와 용서로 포용력을 갖고 사랑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사람에게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열심과 노력과 희생 봉사가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자신에게 이제 은혜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금식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성취하셔서 세상의 모든 얽매인 줄을 끊어버리시고 주의 사랑의 줄로 묶으시고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의와 생명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
이것이 예수님이 죄인을 불러 구원하신 참된 금식입니다. 이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