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인문학 이야기] 논어와 주판
"올바르게 얻은 부귀는 부끄럽지 않다"… '日 자본주의의 아버지' 경제관이죠
논어와 주판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입력 2024.10.29. 00:30 조선일보
올해 새로 발행된 일본 1만엔권 지폐예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이 그려져 있어요. 이전엔 일본 근대화 시기 교육가이자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초상이 그려져 있었답니다. /NHK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유능한 경제 관료였던 그는 민간 분야로 진출해 금융·철도·물류 등 다양한 분야의 회사를 세웠어요. 그가 설립에 관여한 회사가 도쿄전력, 기린맥주 등 500여 개나 됩니다. 그는 일본 금융의 기초도 놓았는데요. 일본어 ‘은행’도 시부사와가 영어 ‘내셔널 뱅크(national bank)’를 ‘국립은행’으로 옮기면서 만든 것이라고 해요. 이외에도 시부사와는 학교 설립을 지원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인이 존경하는 기업인인 그는 놀랍게도 젊은 시절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앞세우던 투사였습니다. ‘존왕양이’는 일본 왕을 중심으로 외세를 몰아내자는 말로, 조선의 전통 사상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의 ‘위정척사 운동’과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갔다 온 뒤로 그는 서양 문물을 빨리 배워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어요. 그러면서도 과학 문명의 이로움은 좇되,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는 더욱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논어와 주판’은 이러한 시부사와의 독특한 경제관을 잘 보여주는 책이에요. ‘논어’는 동아시아의 도덕과 가치관을 담은 고전입니다. ‘주판’은 셈을 돕는 도구로, 늘 돈 계산을 하는 상인의 상징이라 할 만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사농공상’의 신분 차별이 심했어요. 농부와 기술자, 상인은 비천한 이들이기에 수준 높은 교육이나 인품은 필요 없다고 여겼지요. 돈은 천한 것이기 때문에 사무라이는 이를 멀리해야 한다는 믿음도 뿌리 깊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업을 벌이며 돈을 벌려고 애쓰던 시부사와는 자신이 ‘논어주의자’라고 강하게 외칩니다. 책에서 그는 공자의 가르침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도리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부귀는 얻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나 올바른 도리를 다하여 얻은 부귀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에 따르면, ‘논어’는 올바른 상업의 길을 가르쳐주는 최고의 ‘상업 경전’입니다. 의로움과 이익은 일치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도덕만 내세우지 말고 한 손에는 논어를, 다른 손에는 주판을 들고 이로움과 이익을 좇으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거지요.
시부사와는 공익사업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세운 기업의 수만큼이나 많은 복지 사업을 벌였어요. ‘마음을 닦고 가정을 일구며, 세상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유교 이념을 삶으로 구현한 셈이지요. 그래서 “서양 경영학에 피터 드러커가 있다면, 일본 경영학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있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해요. 피터 드러커는 사회적 책임과 신뢰를 강조하는 미국의 경영학자입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새로운 1만엔권에 시부사와의 초상을 넣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적잖은 논란이 있어요. 시부사와는 일본 제일은행 지폐를 한반도에 유통해 대한제국의 금융을 흔들고, 경인선과 경부선 건설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아픈 과거를 넘어서려면 왜 당시 일본은 앞서가고 조선은 스러졌는지부터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깊은 문제의식을 품고 ‘논어와 주판’을 찬찬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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