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창작의 실제 〔시조시인 16인이 말하는 시조작법〕
■ 나의 시조 이렇게 썼다.
6․ 「역사 견문록」(우금치)의 시적 배경 / 이상범
마른 풀도 키를 낮춘 우금치란 언덕빼기
뼈와 살 함성마저 바람으로 누워 있다
일백년 잡초의 사발통문 깨지 않는 깊은 잠.
역사란 승자의 몫 죽은 자는 죄도 죽고
후대의 가슴에 남아 울음 우는 그날의 말
절통한 이 땅의 쑥물 대접으로 들이킨다.
송장배미 저수지 위 눈보라가 달려 가며
내뱉는 그 육성을 심장으로 엿듣고 있다
죽창에 쇠스랑을 든 수만 거친 숨소리…….
그날 동학에 합류한 나의 증조 할아버지
평생을 쫓기는 삶 쉬쉬하다 숨을 거두신
봉분에 큰 절 올리지만 아무 말씀 없으시다.
<역사 見聞錄․1> ―우금치․동학농민군 3만이 공주성을 향해 네 갈래로 진군, 관군 왜군과 맞서 싸우다 끝내는 주력군 1만이 우금치서 최후를 마쳤다.
증조부께서 동학에 참여하신 일에 대하여 후손들은 오래도록 입을 다물어 왔다. 여기엔 그 많던 전답을 날리게 한 장본인이었다는 점과 우리에게 오래도록 가난의 멍에를 씌웠다는 일도 얼마간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남은 가족의 피해 문제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대농의 집안을 증조부 당대에 모두 거두고 떠나신 까닭에서다. 역사적인 소명의식을 갖게 된 건 훨씬 뒤의 일이었다.
동학에 가담한 것이 알려진 까닭에 전답을 죄다 팔아 주거지를 옮기고 또 팔아 옮기는 생활이 되풀이되면서 천석지기가 닷섬지기로 줄어든 상태에서 증조부님의 일생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도 불과 90여 년 전의 일이었으니 그리 멀지가 않다. 농토를 처분해야만 했던 이면을 들춰보면 동학의 자금 조달에 쓰인 것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성가시게 구는 관리들의 입막음에 쓰인 것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간다. 또한 전답을 팔 땐 헐값에, 살 때엔 비싼 값이 적용되었으리란 상상이 가능해진다. 이같은 추론은 생존해 계신 몇몇 집안 어른들의 귀동냥으로 짐작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동학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시점과 동기가 있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다음해이면 백주년이 되던 해 9월쯤이었다고 기억된다. 맏형께서 전화를 해오셨다. 너는 시인이잖니? 증조부에 대해 무언가 시로써 한 마디 남겨야 하지 않겠냐며 운을 뗐다. 특히 내년이면 동학 백주년을 기리는 시기이니 고려해 보라는 귓뜸이었다.
그 해 동짓달 공주를 거쳐 우금치 현장을 버스로 찾았다. 때마침 눈이 내려 분위기는 더 할 수 없이 삭막함을 자아냈다. 우금치란 언덕배기는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언덕에 불과했다. 어떻게 저같은 언덕에서 그토록 치열한 전투가 가능했을까 싶었다. 지금도 작은 계곡마다 뼈 부스러기와 해골 등이 흙을 파헤치면 나온다고 했다. 작은 저수지는 송장배미란 이름으로 남아 있었는데 당시의 전사자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방어진지이자 최후저지선을 관군과 왜군이 구축했고 관군에겐 소총, 왜군에겐 스웨덴인가 노르웨이제 기관총이 지급되었다니 당시의 상황이 짐작이 갔다. 동학군에겐 기껏해야 죽창과 쇠스랑 등이 고작이었으니 희생자가 왜 그렇게 많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했다. 동학군 최후의 격전지였던,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전투였으니까. 지금의 송장배미에 쌓였던 시체더미가 산을 방불케 했다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꾸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당시 증보부도 살아남은 몇백 명 중 한 사람이었겠구나 싶었다.
필자는 그 길로 고향의 증조부님 산소로 향했다.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포를 사 들고 말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뜻깊게 삶을 마무리하신 업적, 지금에 와 생각하니 그것이 결국 커다란 위업이란 생각도 갖게 했다.
2. 「역사 견문록」 창작 동기와 의도
「역사 견문록」이라고 한 것은 역사의 현장을 가 보고 또한, 역사를 읽고 듣는 과정에서 스스로 감지한 기록이란 뜻에서였다.
'우금치'라고 하는 동학 최후의 역사 현장을 언제 가볼 것인가를 중시했다. 여름보다는 가을, 가을보다는 겨울이 시의 카메라 앵글을 대기가 십상이라 여겼다. 보다 비감함을 자아내기가 좋은 계절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눈이 내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른 풀도 키를 낮춘 우금치란 언덕빼기'의 서두(첫수 초장)가 풀리자 작품 전체가 잘 풀려나갔다. 시에서 최초의 첫행은 '신이 준 언어'란 말을 쓴다. 시조도 같다. 역사적 현장을 볼 진데 그 속이 성을 쌓은 곳도 아니요, 나즉한 언덕배기였다. 그러나 죽은 영혼에 대한 경건함에서 였는지 마른 풀마저도 키를 낮춘 듯이 느껴졌다. 다음의 '뼈와 살 함성마저 바람으로 누워 있다'에서 뼈, 살, 함성을 그 곳에서 감지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다만 세월 속에 묻혀 있을 뿐, 눈바람만이 들풀을 뉘이고 있었다. 뼈, 살, 함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그냥 바람으로 누워 있다고 했다. 언어가 강렬할수록 서정으로 감싸야 시에 있어서의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일백년 잡초의 사발통문 깨지 않는 깊은 잠'. 그러나 동학군이 봉기한 지 백 년이 지난 시점, 당시 있었다는 사발통문 <주모자를 숨기기 위해 관계자의 성명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삥 돌려 적은 통문(通文)>은 이제 당시 진품인 정본은 몇 장만 남아 있는데 후환이 두려워 없앴기 때문이란다. '잡초의 사발통문'이란 민중의 사발통을 암시한 말이다. '깨지않는 깊은 잠'은 바로 숱하게 죽어서 흙이 된 영혼들을 일컫는다. 여기까지가 네수 중 첫 수에 해당되며 '역사 견문록'의 서장에 해당된다. 이 연시조의 서장에서와 같이 강력한 이미지의 것을 서정으로 순화시킴으로써 안정적인 출발이 가능했다고 본다.
둘째 수의 초장에 '역사란 승자의 몫 죽은 자는 죄도 죽고'의 표현은 사실 결구에 가서나 보여줘야 할 강렬한 말이지만 시에 탄력을 가하기 위해 그냥 구사하기로 한 것이다.
일종의 시를 낯설게 하기 위한 수법이기도 하다. 그렇다. 어찌보면 역사란 이긴자의 기록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말을 진지한 메시지의 전달로 항변과 한탄으로 패러독스가 담긴 대목이다. '죽은 자는 죄도 죽고' 또한, 진한 상실감을 뒤집은 표현임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겠다. '후대의 가슴에 남아 울음 우는 그 날의 말'은 역사의 말인 동시에 죽은 자의 말로 시인 자신의 육감으로 느끼는 말이다. 이제 둘째수 종장의 '절통한 이 땅의 쑥물 대접으로 들이킨다'의 표현에선 삼키고 싶지 않아도 삼켜야 하는 역사적 실체와 진실의 수용을 암시한 말이다. 예서 '절통한 이 땅의 쑥물'은 내전임에도 불구하고 왜군에게 기관총을 사용케 하는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오점을 남긴 일을 개탄하고 있음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접으로 들이킨다'는 표현에서 많다는 의미 외에 당시의 집기를 인용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제 셋째 수로 들어가자. '송장배미 저수지 위 눈보라가 달려가며' 초장에서 송장배미란 어휘를 살펴봐야 한다. 시체가 얼마나 많았으면 그런 지명(연못의 이름)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같은 송장배미 저수지 위를 눈보라가 달려가며 '내뱉는 그 육성을 심장으로 엿듣고 있다.'의 중장에서 죽어간 그 많은 영혼의 마지막 말을 귀로 듣기보다는 심장으로 엿듣고 있는 것이다. '등살에 못이겨 이렇게 싸우다 우리는 죽었나니 이후론 수탈이 없는 세상,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태평한 나라를 만들어 주십시요!'하는 말을 숙연히 듣는 것이다. 종장의 '죽창에 쇠스랑을 든 수만 거친 숨소리……'의 표현에선 오히려 쉽게 얻어진 부분이라 하겠다. 당시 농민군에겐 신무기(예컨데 기관총, 소총)가 없었으니 죽창이나 쇠스랑 따위가 고작이었다. 기관총과 소총 앞에 죽창과 쇠스랑의 대결이고 보니 전사자가 많았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 마지막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넷째 수는 바로 동학에 가담하신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자 했다. '그날 동학에 합류한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바로 나의 조상을 시로 끌어들이려는 표현이다. 일반적인 역사의 상황에서 가족상황으로 옮아가는 대목이다. '평생을 쫓기는 삶 쉬쉬하다 숨을 거두신'은 증조부께서 동학에 가담하신 뒤의 삶은 쫓기는 삶이었고 남에게 알려질까 봐 쉬쉬하던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생을 마친 것이 증조부님의 삶이었다. '봉분에 큰 절 올리지만 아무 말씀 없으시다' 넷째 수 종장이자, 한 편을 마무리하는 끝말에선 동학에 가담하신 증조부님과의 하직인사다. 무슨 말씀이나 소리라도 귓뜸해 주실 것을 기대했지만 아무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역사 견문록」의 우금치 이야기에서 필자는 호되고 진한 쓰라림, 아픔과 한은 간직했지만 결코 누구에게라도 원한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작자는 이 작품에서 아픔과 진실,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숨져간 당시의 농민군에 대한 묻혔던 속엣말을 찾으려 했을 뿐이다. 아팠던 여러 정황을 짚어보며 서정으로 감싸야만 했다. 필자는 작품에서 인간회복을 위한 시의 최종 목표를 설정했음을 여기 굳이 밝히는 바이다.
< 이상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