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국 충절의 고장 밀양시 단장면(丹場面)의 지명 유래
12월 9일(토요일)에 있을 재경 밀양단장면향우회의 송년회를 앞두고,
국태민안과 각 지역 향우인들의 대동단결과 애향심, 애국심 고취를 위해
이글을 삼가 올립니다.
*단장리
세종실록 지리지에 밀양도호부 관내에 도기소가 한 군데가 있는데 그 소재지가 부동의 '단장리'라 하였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이존록>에는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다가 전사한 그의 외조부 박홍신 장군의 유의를 묻은 가묘가 단장리에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단장리란 마을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이어온 것임을 알 수 있고, 단봉정에서 유래한 '단정'이란 다른 이름도 전해온다. 이곳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홍제중학교가 있다.
*미촌리
17세기 말에 발간한 밀주구지의 기록에는 이곳을 사촌리, 일명 제초동이라 하였고, 그 후 구며리와 덕성리를 합하여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삼았으나 1906년 지방행정 개편시에 구미(龜尾)를 구미(九美)로 표기하여 사촌을 아울러 미촌리라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폐합조정에 따라 덕성리를 밀양읍에 이관하고 구미, 사촌, 안법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법정리로 미촌리를 두고 사촌과 구미를 행정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사촌에 사촌, 구미에 동촌, 서촌으로 나누어 오늘에 이른다.
*안법리
동리 한가운데 법흥, 감물의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한 안법천(연화수)가 서북으로 흐르면서 법흥, 안법, 미촌리 등 이른 바 삼동의 젖줄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방리가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웃 마을인 사촌과 함께 대개 조선조 초기 이래 선비들의 복거지로서 알려져 왔다.
*법흥리
법산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마을이 열린 곳인데, 1914 년에 지방 행정 구역 폐합시에 사지와 상봉을 아울러서 법흥리로서 행정 리를 삼았다. 법흥이라는 동명은 법산을 비롯한 여러 마을이 함께 興하라 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경남 무형문화재인 법흥상원놀이가 전한다.
*감물리
옛날부터 샘물이 차고 달았다 하여 단물리 또는 감수(甘水)를 감물(甘物)로 표기한데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하고 일제감정기에 감물(甘勿)로 변경하여 지금껏 부르고 있다고 한다. 용소 마을의 계단식 다랭이논이 유명하다.
*국전리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때에 진주동과 동진주동을 중심으로 장재골, 갓돌, 열두들 등 자연취락을 모두 합하여 국전리라는 법정리를 삼았으며 해방 후에 다시 편의에 따라 동, 서로 나누고 국동과 국서로서 행정마을을 개편하였다.
*무릉리
단장면(丹場面)의 중심 지대에 위치한 동리(洞里)이다. 구한말(舊韓末)에 발간한 밀주지(密州誌)에는 무릉동리(武陵洞里), 지사동(智士洞), 노곡(蘆谷) 등의 방리(坊里) 이름을 표시했는데, 모두 이 동리(洞里)에 소속된 것이며 관문(官門)으로부터 30리 거리라 했다. 산천(山川)이 수려(秀麗)하고 골짜기가 깊지만 비교적 수리(水利)가 좋은 경작지(耕作地)가 많아 옛날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다. 밀양 유림의 거목으로서 ‘유림단 사건’ 때 밀양 유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소눌 노상직 선생의 자암서당이 있는 곳이다.
*태룡리
태룡국민학교가 있는 옛 마을 태동을 중심으로 그 북쪽 들판에 들마와 면소재지인 연경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으며 단장천의 넓은 하천을 건너 용회와 마주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태동, 연경, 용회동, 야촌 등 네 자연마을을 합치고 있다. 3.1만세운동 후에 3.13 밀양만세운동에 이어 표충사 스님들이 용회동 장날을 기하여 4.4태룡리 만세운동을 벌인 곳이다.
*사연리
사연(泗淵)이란 지명은 사연(沙淵)의 음(音)을 표기하면서 사수(泗水) 또는 사빈(泗濱)으로 아화(雅化)하여 이 곳에 정거(定居)한 선비들이 붙였다고 한다.
*범도리
동리(洞里)의 중심 마을로 메물산(木麥山)을 등에 지고 고사천(姑射川) 동편(東便) 강가에 자리잡은 고촌(古村)이다. 마을 앞에 호수처럼 생긴 깊은 소(沼)가 있어 범도연(泛棹淵) 또는 도연(棹淵)이라 했으며 동리(洞里)의 지형(地形)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돛단배 같다 하여 붙인 지명이라 한다. 또 범돈, 범든이라 하는 것은 범도연(泛棹淵)의 발음이 줄고 바뀌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례리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유상(遊賞)했으며 승경 (勝景)을 읊은 시(詩)도 남기고 있으니, 농암대(밀양댐 건설로 수몰됨) 등 마을의 여러 지명도 선생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례리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형성 되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고, 당초의 지명은 고예(庫藝)라고 했다. 또 동리 (洞里)의 형국이 마치 서북쪽에 있는 범도행주(泛棹行舟)를 마고 할미가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 하여 고예(姑曳)라고도 했으며, 그 뒤 신선이 사는 곳을 가상하여 고사리(姑射里), 고사산(姑射山), 고사천(姑射川) 등으 로 아름답게 바꾸기도 했다. 재경밀양향우회의 장상환 회장도 필자의 외가 집안인 고례리의 인동장씨 집안 출신이다.
*구천리
이 마을은 원래부터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귀내(龜川)의 천명(川名)으로 인하여 귀내 또는 구내라 하였고, 구천(龜川), 구천(仇川)으로 표기된 것이다. 더구나 삼거(三巨), 시전(枾田)을 포함한 구천리(九川里)라는 법정리(法 定里)가 정해진 후로도 이 마을을 원래의 구천(九川) 곧 원구천(元九川)이라 한 것만 보아도 아홉개의 시내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 한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이곳 시전 마을의 재악산(載岳山) 아래에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 등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을 선 3대 의승장(義僧將)들의 위패를 모시고 충의정신을 기려 춘추로 향사를 올리는 호국성지 표충사(表忠寺)가 자리잡고 있다.
호국성지 재악산 표충사
농암대가 수몰된 밀양댐
소눌노상직 선생의 자암서당
법흥 상원놀이의 한 장면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홍제중학교
- 정대제님의 글을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