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문신
1243년(고종 30) ~ 1306년(충렬왕 32)
고려후기 제25대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문신. 학자.
경상북도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출신. 본관은 순흥(順興)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아버지는 밀직부사 안부(安孚)이며,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
1289년 11월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 해 돌아왔다.
1303년 밀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1304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장학기금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써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 해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imagefont)·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안향에 대한 평가는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안향이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주자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 안향을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금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 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 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골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안향의 이상이었다.
또한 안향은 자신의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이룩하려 하였다. 안향이 당시 고려의 시대 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하여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했다면, 안향을 단순하고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로 보기보다는, 적극적 의미에서 ‘주자학 수용자’로 유학사(儒學史) 내지는 교육사적인 위치 설정을 해도 좋을 것이다.
1306년 9월 12일 별세하자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안향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안향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안향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 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소수서원은 이렇게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탄생 되었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된 서원이다. 안향- 주세붕-이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서원 일 뿐만아니라 서원의 발달이 곧 조선의 성리학의 뿌리라고 봐야 한다. 최초는 주자학 즉 성리학을 토대로 서원의 학문이 깊게 학습 되어 많은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서원의 폐단이 있기도하였지만, 조선에서 서원의 역할로 과거제도 등등 조선의 지식과 문화는 지금 우리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휼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