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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소설창작론 (10~12)
10. 강을 건너는 이야기를 써라
흔히 소설은 유기체에 비유된다. 소설이 유기체라는 것은, 여러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조직이라는 뜻이다. 조직은 모임이고, 모임이되 질서 정연한 모임이다. 소설 창작에서 가공과 조작이 필연적인 것은 그런 이유이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소설도 인공이다. 아름다운 산천 앞에 서서 사람들은 더러 ‘예술이다!’라고 감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연은 예술이 아니다. 자연이 예술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가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누가 작품이라고 말하겠는가. 신의 작품이라면 혹시 몰라도 사람의 작품은 아니다. 사람은 자연을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인공이다. 따라서 이야기들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삽화들은 인과 관계에 따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체가 그런 것처럼,
소설의 육체 또한 그래야 한다. 아니, 소설이 하나의 육체이다. 그 과정에서 현장감이라고 할 만한 효과가 생겨난다.
소설을 쓰는 것은 길찾기와 같다.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은 약도(밑그림)를 가지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모험에 다름 아니다. 당신이 숲을 떠나 성에 간다고 가정해 보자. 숲은 이쪽이고 성은 저쪽이다. 숲은 당신이 지금 있는 곳(현실)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성은 당신이 가야할 곳(목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데 숲과 성 사이에 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강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강은 지금 당신이 있는 곳도 아니고, 당신이 가야 할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곳과 저곳이다. 그러나 당신은 강을 무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곳과 저곳 사이에 강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성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지 않고 성에 이를 수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은, 비록 강이 당신의 중요한 관심 사항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강을 향해 걸음을 내딛도록 유도한다.
소설을 쓸 때 조급한 사람들은 자기가 정해 놓은 목적지만을 향해 한 눈 팔지 않고 내달리려고 한다.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자기가 하려고 하는 중요한 이야기에 비해 시시하고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을 거치지 않고 숲에서 곧장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격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강을 지나지 않고 성에 다다를 수 없는 것처럼 과정을 무시하고 결말에 이를 수도 없다. 숲과 성만 써서는 안 된다. 강을 건너는 이야기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어떤 찻집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소설로 쓴다고 하자. 당신의 관심은 그 특별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 특별한 사건은 당신의 소설에서 아주 중요하다. 당신은 그 사건을 통해서 중요한 진실, 혹은 심오한 사상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럴 때 당신이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당신의 소설 속의 인물이 그 찻집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먼저 그곳에 가야 한다. 그러니까 그가 그곳에 어떻게 왜 갔는가를 먼저 써야 한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 갔을 수도 있고 차를 마시기 위해 갔을 수도 있고,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갔을 수도 있다. 그가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변심한 애인일 수도 있고, 20년 만에 만나는 스승일 수도 있고,
빚쟁이일 수도 있다. 그가 그곳에 차를 마시러 간 것은 그 집의 차 맛이 유난히 좋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찻집에서만 내는 특별한 차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가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그 찻집에 들어갔다면, 그 이유는 자기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일 수 있고, 꼭 봐야 할 프로그램이 바로 그 시간에 방송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혼자 갔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어울려 갔을 수도 있다. 가자마자 사건을 목격했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차를 마시다가 그랬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건 당신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신은 훨씬 중요하고 훌륭한 그 특별한 사건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것에 비교할 때 그런 것 따위 뭘 하러 갔느냐, 누구랑 갔느냐, 가서 뭘 하고 있었느냐는 시시하고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시하고 하찮더라도, 그것이 바로 강이다. 당신이 그 특별한 사건(성)에 이르기 위해 건너야 할 강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되면 몸을 적시게 된다는 사실도 함께 유념해야 한다. 몸에 물을 묻히지 않고 강을 건널 수는 없다. 몸에 묻은 물이야말로 강을 건넜다는 증거이다. 당신은 몸에 물을 묻힘으로써만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혹시 당신은 몸에 물을 묻히지 않고 강을 건너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가령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틀린 생각이다. 그 경우에 강을 건넌 것은 비행기나 배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다만 비행기나 배에 타고 있었을 뿐이다. 몸으로 건너야 한다. 발이 젖고 머리가 젖고 입 속으로 물이 들어갈 때 비로소 강을 건넜다고 할 수 있다.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 쓰기는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흙을 손에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압축과 비약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압축되지 않고, 될 수 없고, 비약할 수도 없다. 강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그리하여 물이 당신의 몸 속으로 스미게 해야 한다.
11. 시간이 만든 소설, 공간이 만든 소설
소설이 될 만한 뭔가가 떠오르긴 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할 때 참고할 만한 몇 가지 유형을 생각해 보자.다 그런 건 아니지만, 발상이나 소재가 그 안에 이미 소설의 완성된 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소재나 발상에 따라 더 잘 어울리는 소설의 유형이 있다는 뜻이지, 어떤 소재는 반드시 어떤 유형으로 써야 한다는 무슨 규칙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은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이 만드는 소설이 있고, 공간이 만드는 소설이 있다. 물론 시간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나 공간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씨줄과 날줄이다.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존재가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만든 좌표 가운데 어느 한 점을 점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소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유형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중요한 소설과 공간의 형상이 중요한 소설을 나눌 수 있다.
시간의 축에 있는 소설적 요소는 움직임, 사건, 기억, 회상 등이다. 이것들이 이야기를 만든다. 모든 이야기는 시간의 산물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이야기도 멈춘다. 움직임이나 사건, 기억과 회상에 의지하는 이런 소설은 서사 위주의 소설이 되기 쉽다. 사건이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형성되려면 인물이 움직여야 한다. 인물이 움직이려면 마땅한 동기가 주어져야 한다. 소설 속에서 인물은 합당한 동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른바 리얼리티, 혹은 개연성 확보의 문제이다.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리얼리티나 개연성을 증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 현실 속에서는 성수대교가 무너지기도 하고 중학교 3학년 애가 죽은 엄마 옆에서 6개월 동안 먹고 자기도 한다. 실제로 일어났고, 직접 경험했다고 한 일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현실의 경험은 개연성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증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이야기나 죽은 사람과 6개월 동안 한 방에서 지내는 사람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할 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 속에서는 몰라도 소설 속에서는 어떤 시시한 사건도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다. 역설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더 소설 같고, 소설이 더 현실 같은 이유이다.
인물을 움직이게 한다? 인물을 움직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극을 주어야 한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물이 움직여야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령 누군가에게 편지가 온다고 생각해 보자. 혹은 전화나 전보. 그리고 전해지는 내용이 누군가의 부음이나 사고 소식이라고 가정해 보라. 그걸 전해들은 사람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아주 흔하고 판에 박힌 하나의 소설 유형이다. 발신자가 있고, 그 발신자는 인물에게 어떤 임무를 부여한다. 이제 인물은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어딘가로 이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다. 고향에서 전화가 온다.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은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삼촌이나 할아버지, 또는 마을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죽었거나 위독하다고 알려온다. 그 사람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고향으로 내려올 것을 요구한다.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고민에 빠진다. 고민의 내용은 고향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다. 그런데 그는 왜 고민을 하는가.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사정이 가야 한다는 당위와 싸운다. 싸움은 치열할수록 좋다. 이제 우리의 인물은 그 싸움이 진행되는 사이사이에 고향에 갈 수 없는 사연의 내막을 독자에게 노출한다. 회상과 기억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사연은 기차나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까지 분산되어 소개된다.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고민과 갈등 끝에 고향에 이르고 문제를 해결하든가 화해를 이끌어내든가 한다. 그렇게 하여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있던 자리로 돌아오면서 소설이 끝난다.
사건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짜여진 소설들은 흔히 이런 패턴을 모방하거나 변용한다. 이와는 달리 공간 자체가 말을 하는 소설이 있다. 이런 소설에서는, 물론 여기서도 인물과 사건과 이야기가 없을 수 없지만, 분위기와 이미지와 상징과 묘사가 상대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령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함으로써 일정한 소설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소설들은, 그 버스 안을 세계, 또는 사회의 축소로 인식시킨다. 교실 안의 학생들을 등장시킨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버스나 교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계,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이루고 있는 특정 집단, 혹은 신분을 대표한다. 이른바 전형적인 인물.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우의성을 띄며 상징의 빛을 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터널 빠져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터널의 우의성을 이해한다. 이런 소설에서는 공간에 놓인 소도구들 하나도 그냥 놓이지 않는다.
소파가 있다고 하자. 시간이 만드는 소설(이야기가 중요한 소설)에서는 소파는 단순히 사람이 앉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 그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공간이 역할을 하고 묘사가 중요한 소설에서는 소파가 그저 단순한 도구일 수 없다. 도구 이상이다. 그것은 낡은 소파, 붉은 소파, 우단 소파 등의 배치를 통해 고유한 상징성을 확보하게 된다. 권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기다림을 표시하기도 하고, 열정을 표현하기도 하고, 폐기 처분 직전의 처지를 상징하기도 할 것이다. 안개나 비도 그냥 내리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내릴 만할 때 내리고 표현할 이미지가 분명할 때 내린다. 그것들이 만드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소설의 몸을 이룬다. 때때로 공간이 곧 캐릭터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경우이다.
12. 전략을 세워라 - 선택과 배치
화초는 물을 주면 저절로 자라난다. 어떤 사람은 소설 쓰기를 화초 기르기처럼 생각한다.
이를테면 단순한 이미지, 모호한 관념에 의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은, 지금은 희미하지만 쓰다 보면 어떻게 될 거라는 식의 (물을 주면 화초들이 저절로 자라나듯)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기야 물을 주는 것도 정성이라면 정성이다. 그렇게 해서 한 편의 소설이 써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해서 써지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밑그림 그리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말한 것처럼,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중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포기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소설 쓰기는 ‘기르기’ 보다 ‘만들기’ 쪽이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는’ 것이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다. 소설이 저절로 자라나는 식물이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형상을 부여받는 조형물이라는 인식은, 소설 창작의 모든 단계에서 거듭거듭 상기되어야 한다.
조형물을 만들 때 고려할 원칙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우선 선택이 중요하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겹쳐 있다. 선택은 취하기와 버리기의 작업이다. 우리 앞에는 재료들이 많이 있다. 때로는 너무 많이 있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 이것도 생각나고 저것도 떠오르고, 또 다른 것도 그럴 듯해 보여 혼란스러워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아무 단어든 쳐 보라. 수천 개의 웹 문서가 순식간에 뜬다. 가령 ‘사생활’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고 클릭하면, 그 단어가 들어 있는 온갖 문서들이 한꺼번에 모니터의 창을 가득 채운다. 인터넷의 바다 위를 떠돌던 잡다한 문서들이다. 심지어는 ‘사생 활동’ 같은 단어들, ‘교사 생활’, ‘의사 생활’ 같은 단어들까지 끼어 있다. 조그만 관련이라도 있다 싶으면 그 인연을 앞세워 얼굴을 내미는 형국이다. 우리는 그 많은 관련 문서들 가운데서 꼭 필요한 몇 개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버린다.
소설 쓰기의 과정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생겨난다. 어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앉으면 우리의 머리와 몸과 기억과 감각의 바다를 떠돌던 이런저런 관련 소재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가령 ‘사생 활동’이나 ‘교사 생활’ 같은 것까지 치고 올라온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사생 활동’이나 ‘교사 생활’이 ‘사생활’과 관련 있다는 건 명백한 오류이다. 자모음의 조합에 속고 있는 것뿐이다. ‘사생활’과 ‘사생 활동’, ‘교사 생활’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인터넷 검색 엔진이 자모음 조합의 유사성에 속아 엉뚱한 문서들을 토해내는 것과 같은 실수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도 번번이 일어난다.
언뜻 보기에 그럴 듯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울리지 않는, 또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어울리지 않는 에피소드나 사건이나 상징이나 진술이 들어 있는 소설들은, 대개 선택의 과정을 소홀히 한 탓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작품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든지 소설이 갈팡질팡한다는 독후감을 불러내게 된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취하기보다 버리기가 더 어렵다.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일수록 그렇다. 내가 경험했으니까 이것은 참이다, 라는 생각이 강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것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게임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참거짓 가려내기가 아니라 그럴 듯하게 꾸미기(조형)이다. 그럴 듯하지 않은 참이 아니라 그럴 듯한 거짓이어야 한다. 그럴 듯하지 않은 참은 소설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거나 소설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래서 요긴한 것을 고르는 안목과 요긴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과감함이 요청되는 것이다.
선택한 것들을 배치하는 일은 그 다음의 과제이고, 더 중요한 작업이다. 재료들을 놓는 자리와 순서에 따라 조형물은 달라진다. 가벼운 것을 아래 놓으면 안정감이 없고, 옆에 놓아야 할 것을 앞에 놓으면 모양이 사나워진다. 크기와 부피, 모양과 색깔을 고려하고 드러낼 것과 감출 것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하나의 조형물을 탄생시킨다. 아무리 아무렇게나 그냥 만들어진 것 같아도 아무렇게나 그냥 되어진 것은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앞에 쓸 것과 뒤에 쓸 것에 대한 고려를 신중히 하여야 한다. 많이 드러낼 것과 조금 드러낼 것에 대한 숙고도 필요하다. 어느 시점에서 얼마만큼 드러낼 것인가도 중요하다. 같은 재료를 주고 소설을 쓰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같은 소설을 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들뢰즈의 성찰에 의하면, 사물들은 본래적인 성격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과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뜻이 정의된다. 가령 ‘입’은 강의실, 마이크와 배치될 때 ‘말하는 기계’가 되고, 식당, 음식과 배치될 때 ‘먹는 기계’가 되며,침실, 연인과 배치될 때 ‘섹스하는 기계’가 된다. 우리가 선택한 재료를 무엇과 연결하고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사뭇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판을 읽는다는 말을 한다. 한 수씩 두지만, 한 점을 착수할 때마다 전체 판을 머리 속에 그린다는 것이다. 이 수 다음에 상대가 어떤 수를 둘지, 그 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리고 그 다음 수는 무엇이 될지 수많은 경우의 수를 다 헤아린다는 것이다. 한 수가 중요한 것은, 그 한 수가 전체 바둑의 모양, 또는 승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둑 기사는 한 수 한 수를 둘 때 전체 바둑과의 통일성을 생각하고 다른 수와의 연결성을 생각한다.
전략 없이 바둑을 두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전략 없이 소설을 써서도 안 된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바둑 기사처럼 치밀하고 정교해야 한다. 바둑을 두는 사람에게 바둑판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소설이 하나의 세계이다. 바둑 기사가 바둑 한 판을 경영하듯 소설가는 소설판을 경영하는 것이다.
하나의 재료(사건, 인물, 일화, 이미지, 상징, 진술 등)를 배치할 때 그것이 전체 소설을 이루는 데 적절하게 기여하는지(통일감),다른 재료들(사건, 인물, 일화, 이미지, 상징, 진술 등)
과 잘 어울리는지(연결성) 살펴야 한다.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설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소설가는 전략가여야 한다.
13. 긴장을 배치하라 (2004-03-01)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설이 달라진다는 말을 지난 호에 했다. 선택된 소재들은 적절히 배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배치의 방법이라고 할까, 구성의 원리라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일상 대화에서도 우리는 소박하고 단순하긴 해도 나름의 전략을 구사한다. 가령 부모에게서 용돈을 타내려고 할 때 대뜸 돈 주세요, 해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기분 좋아할 만한 말을 하고, 부모가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댄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를 상정해 보자. 어떤 여자가 자기 애에게 충고를 하려고 한다. 주제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다. 그녀가 선택한 말의 소재는 이런 것들이다.
1)옆집의 철수.
그 아이는 지난 학기말 시험에서 1등을 했다. 들어 보니 책상에 앉으면 다섯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일어나지를 앉는다고 한다.
2)대학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거기 다니는 학생들은 얼마나 많은가.
3)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고시에 패스한 친척 어른의 예.
4)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의 의미.
5)1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20대의 삶이 결정된다. 2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30대의 삶이 결정된다.
6)공부의 효과. 존재의 값이 높아진다. 친구들, 선생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7)아들의 습관. 쉽게 만족한다. 친구들을 너무 좋아한다. 결심은 하는데 끈기가 약하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한다. 대개는 소재 때문이 아니다. 이런 정도의 소재는 누구나 찾아낼 수 있다. 문제는 이것들 가운데 어떤 걸 선택하고, 어떻게 순서를 만들어 연결지을 것인가에 있다. 요컨대 플롯이다. 플롯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긴장감이다. 긴장감은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듣도록(읽도록) 하는 힘이다. 긴장이 없으면 듣지(읽지) 않는다. 들어도 건성으로 듣는다. 끝까지 관심을 갖고 듣거나 읽게 하는 것은 재미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재미가 없으면 누가 듣겠는가. 누가 읽겠는가.
그런데 재미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무엇이 재미있는 것일까? 웃기는 것일까, 울리는 것일까. 무서운 것일까, 싸우는 것일까. 누구는 사랑하고 헤어지는 멜로드라마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007 영화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야구 경기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바둑이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개그 콘서트가 재미있다고 한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대상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사람마다 재미를 느끼는 대상이 각각 다르다.
재미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잘 생각해 보면 재미는 긴장감의 다른 말이다. 긴장할 때 우리는 재미를 느낀다. 긴장하게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재미있다고 말한다. 놀이 기구를 탈 때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현상,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 ‘재미있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가슴이나 머리에서 일어난다. 그럴 때 우리는 재미있다고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긴장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읽거나 보지 않는다.
긴장은 추리를 요구한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추리이다. 긴장은 알고 있는 것과 알아야 할, 그러나 아직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나온다.
다 알려 주면 추리가 필요 없으니 재미없고, 너무 알려 주지 않으면 추리가 안 되니 재미가 없다.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교묘한 게임이 소설쓰기이다.
발생할 사건은 그 앞에서 어떤 기미를 보여 주어야 한다(복선). 사건의 진전이나 해결을 위해 실마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힌트). 복선과 힌트를 적절히 활용하여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한다. 사실은 동원되는 모든 이야기는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 대한 복선이고 힌트여야 한다. 드러내되 감추면서 드러내는 전술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요체는 궁금증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하나의 궁금증이 해결되는 순간 다른 궁금증이 생기도록 하는 것. 궁금증의 지속적인 생산이 중요하다. 소설쓰기는 이처럼 정교한 작업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사전에 복선이나 힌트를 주지도 않았으면서 난데없는 우연적 사건으로 소설을 끌고 가거나 어이없는 사건을 갑자기 등장시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 기계 장치를 타고 나타난 신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맡기는 일이야말로 무책임한 일이다. 소설은 플롯과 추리의 무대여야 한다. 어이없는 사건의 전개나 안이한 해결보다는 차라리 의미있는 (긴장감이 있는) 갈등을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낫다.
**내 소설에서 마지막에 불을 지르는 것보다....그 갈등을 유지하는 것이 나을까?
긴장은 구체의 영역이다. 그래서 플롯의 또 다른 원리는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적인 것들은 긴장으로부터 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은 돈 주세요, 하지 않고 책값 주세요, 한다. 아니, 그것도 추상적이다. 조금 더 구체적이려면 참고서와 시집을 사야 하는데 돈이 필요해요, 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도 충분하지 않다. 설득력이 있으려면, W사에서 나온 수학 참고서 7천 5백 원, N사에서 나온 과학 참고서 7천 원, 문학 시간에 선생님이 권한 서정주의 시집 한 권이 5천 원, 하는 식으로 목록을 제시해야 한다. 구체가 진실을 대변한다. 용돈 주세요, 책값 주세요, 하는 것보다 책의 목록을 대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전쟁과 평화, 죄와 고통……. 이런 단어들로부터 감흥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당신의 독자가 긴장하기를 바란다면 현장을 보여 주는 편을 택해야 한다.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고 자기 팔도 하나 잃은, 살가죽밖에 남지 않은 검은 얼굴의 소년이 진흙탕 속에서 빵을 건져 먹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긴장은 속도와 관련 있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극적 긴장을 보여 주어야 하는 순간에 오히려 슬로우 비디오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를 생각해 보라. 빠른 전개가 아니라 정교하고 유니크한 전개여야 한다. 구체는 속도감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 구체는 시간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날짜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시간 단위로, 시간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분 단위로, 분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초 단위로 바꾸는 것이다. 단위가 바뀔 뿐, 속도는 느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소설이 구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추기와 보여 주기의 전술을 제대로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 지하에도 물이 흐른다 - 상징과 은유 (2004-04-01)
소설을 거울에 비친 것으로 인식하는 의견에 우리는 꽤 익숙해져 있다. 이른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생각.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세계가 그 하나이고, 거울이 다른 하나이다. 세계가 있고,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있다. 세계는 복잡하고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세계는 둥글기도 하고 갸름하기도 하고 반짝거리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딱딱하기도 하고 물렁물렁하기도 하고 반듯하기도 하고 삐뚤빼뚤하기도 하고 깊기도 하고 높기도 하다. 둥글기만 한 것도 아니고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고 반듯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깊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소설은 종잡을 수 없는, 이것이면서 저것인, 그러나 이것만도 아니고 저것만도 아닌, 무정형의 세계를 비춘다. 그러나 세계가 그렇다고 소설 속에 비친 세계마저 종잡을 길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통해 반사되는 순간 세계는 일정한 형태를 얻는다. (얻어야 한다) 무정형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 소설 쓰기인 까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거울의 반사면이다. 거울은 감정도 욕망도 생각도 없는 죽은 물체가 아니다. 거울은 세계를 비추되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따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형태를 부여해서 비춘다. 거울을 통과해 나온 세계는 거울의 반사면(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되고 재구성된 세계이다.
어떤 거울은 예쁘게 비추고 어떤 거울은 날씬하게 비춘다. 거울이 다 같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거의 같지만 그러나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거울의 표면이 다 다르니까 비추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세계를 정리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역할은 작가의 세계관과 욕망과 체험이 맡아 한다. 세계를 반영하는 소설이 다 다른 것은 그것을 비추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욕망이나 체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계를 무시하고는 소설을 생각할 수 없지만 (왜냐하면 세계를 비춰야 하니까), 또한 작가의 세계관이나 욕망이나 체험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되고 재구성될 때만 (왜냐하면 세계를 다르게 비춰내야 하니까) 소설이 생겨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사건이나 현상을 그저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독자들은 대개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야?’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 반응의 속내에는 적어도 세 가지 생각이 숨어 있다.
‘무슨 소린지, 혼란스럽군’이 그 하나이고, ‘그 정도는 나도 알아’가 다른 하나이고, ‘그러니까 그게 당신에게 무엇인지를 말해 봐’가 또 다른 하나이다. 예컨대 소설 독자들은 맨-현실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