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를 비롯한 대부분 고대사회 제도가 그러했듯 본관도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반도에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본관을 군망(郡望)이라 불렀다. “고을(郡)에서 명망(望) 있는 가문(家門)”이라는 뜻이다. 주나라(周)는 이른바 봉건제(封建制)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봉건제후(封建諸侯)가 독립을 선언함으로 인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770~BC221)라는 난세(亂世)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국(戰國)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BC259~BC210)이 봉건제를 폐지하고 천하를 36개 군(郡)으로 나누어 지방관을 파견함으로 인해 군이라는 지방행정단위가 탄생했다. 진나라 지배는 짧게 끝나고 다시 통일한 한나라(漢)가 주(州)를 설치하고 아래에 군을 배속(配屬)시키므로 인해 군은 최소지방행정단위가 되었다.
삼국시대 위나라(魏) 문제(文帝, 187~226)가 이른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만들어 각 군에서 중정(中正)이 9품으로 등급을 나누어 추천하는 인재를 등용했는데, 중정을 장악한 토호(土豪)가 원하는 사람을 높은 품계(品階)로 추천하므로 인해 대대로 고위관직자가 나오는 이른바 명문거족(名門巨族)이 탄생하게 되었고 “고을에서 명망 있는 가문”, 즉 군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군망은 혈연(血緣)으로 연결된 조직체계이기 때문에 상하 위계질서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수장(首長)이 구품중정제를 통한 인재 추천권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조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한 단결력으로 뭉친 강력한 사회조직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晉)는 사치를 일삼다가 황자(皇子)끼리 싸움이 일어나 팔왕의난(八王之亂, 291~306)으로 발전했다. 싸우는 와중에 북방민족을 용병(傭兵)으로 끌어들였는데, 북방민족들이 돌아가지 않고 황하유역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움으로 인해 영가의난(永嘉之亂, 311)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른바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439)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9 )라는 수백 년간의 길고 긴 난세(亂世)가 펼쳐지게 되었다.
역사는 대개 삼국시대부터 수나라(隋)가 천하를 재통일할 때까지를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 220~589)라고 통칭하는데 북방(北方) 기마민족과 남방(南方) 농경민족까지 수많은 민족이 서로 뒤얽혀 죽고 죽이는 문자 그대로 난세(亂世)가 수백 년간 이어졌다. 수많은 나라가 명멸(明滅)하고 고향을 이민족(異民族)에게 빼앗기고 유랑(流浪)하는 난민(亂民)이 천하를 뒤덮었다.
사람들은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필요했고,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장(首長)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조직원이 필요했으므로, 위진남북조시대를 지나면서 군망은 혈연으로 똘똘 뭉친 사회 최하단위 조직체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남북조시대는 수나라(隋)의 천하통일로 종지부를 찍었다.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 문제(文帝, 541~604) 앞에는 커다란 난제(難題) 두 개가 버티고 있었다. 첫째 천하에 넘쳐나는 유랑민(流浪民)을 단속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일, 둘째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곳곳에서 웅거(雄據)하고 있는 호족(豪族)을 제압하고 통제하는 일, 이 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언제 다시 세상이 뒤집혀 난세가 되어버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첫째 문제해결방안은 바로 군망의 활용이었다. 각 군망 수장에게 주민 통제권을 주어서 주민이 함부로 군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또 유랑민을 붙잡아 군망을 확인하여 돌려보냄으로 인하여 유랑민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사회가 안정되었다.
둘째 문제해결방안은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도입하여 문과(文科) 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호족들이 중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구품중정제가 호족의 세력 확대 수단이었는데 이를 폐지하고 문과에 합격한 문인(文人)을 관료로 채용함으로 인해 무인(武人)이 지배하던 사회가 문민화(文民化)되었고 호족은 힘은 잃게 되었다.
수나라(581~618)는 비록 37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존속(存續)했을 뿐이지만 수나라 때 만들어진 제도를 당나라(唐)가 이어받음으로 인해 안정된 문민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