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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제 양이 많아 먼저 올립니다.
수업시간에 올린 자료는 더 줄일 예정입니다. 먼저 책을 읽으시면 좋고 여의치않으시면 발제문이라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제4장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론의 의미의 재 진술
초기교회 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서 인정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약 무엇인가를 완전히 파악했다면, 그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결론 지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다른 이미지를 탐구해야 한다. 또한 새로이 발견된 이미지들이 전통적 이미지를 대체한다기보다 보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든 어머니로 표현하든, 이 의미는 우리의 역사나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중언의 중심을 차지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확고한 사랑의 역사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신학자와 지역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탐구할 때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의 심층 문법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삶이 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인격적 삶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격을 획득하는 것은, 세상과 관계를 맺기 시작함으로써가 아니다. 영원 속에서 이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살고 사랑하고 계셨다.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존재 안에 이미 운동과 생명, 인격적 관계와 사랑의 교환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일성은 살아 있는 통일성이다. 그리고 이는 풍성함의 통일성으로 차이와 관계 양자를 포괄한다. 본질적으로 삼위일체는 사랑하는 인격들 간의 교제다.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서로 분리된 자율적 자아들로 이해될 수 없다.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관계성 속에서 인격적 정체성을 가진다. 인격성에 대한 근대의 견해는 인격적 존재를 자기의식과 개인적 자율성과 동일시하지만, 인격적 삶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근대적 견해는 타자와의 관계성이 인격적 삶을 구성한다고 진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타자와 분리되거나 타자에 대립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정의하는 자기 폐쇄적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 있는 “위격들”은 관계적 실재로서, 상호 주체성, 공유된 의식, 신실한 관계성, 사랑의 상호 교환에 의해 정의된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삶의 풍부함과 역동성 안에는 단순한 수학적 획일성이 아니라 구별성과 타자성이 존재한다. 타자성은 인격적 관계를 위한 전제이며 사랑의 사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죄 많은 인간의 태도와 행동이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나 증오에 의존하여 타자를 제거하거나 정복하려하는 것과 정반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타자성을 발생시켜 그것을 자기 삶의 내적인 역동성 안으로 포함시킨다.
2.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이해되는 관계성과 협력성보다 훨씬 더 깊은 교제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확증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7),신학자들은 창조 특별히 인간의 삶 속에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vestige)이나 유비(analogie)를 찾아왔다. 심리학적 유비는 인격이 자아와는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활동들로 형성된다는 견해에 토대를 둔다. 인격이 된다는 것은 기억, 이해, 의지의 상호 연관된 기능들을 소유한 자기 의식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유비이다. 이 유비에 따르면 인간의 관계적 삶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열쇠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의 ‘사회성’을 증언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교제 안에 삶을 세우고 유지하신다. 언약의 하나님은 피조물과 관계를 맺는 삶 및 피조물 가운데 거하시는 삶을 의지적으로 원하신다. 삼위 일체 신학은 인의 삶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기독교 사회 윤리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삼위일체론이 신학적 인간학을 위한 세밀한 청사진이나 인간 사회의 혁신을 위한 상세한 프로그램을 제공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며 우리는 피조물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삼위일체론은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자신을 벗어나” 이웃에게로 나아가며 하나로 모으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 차별을 뛰어넘는 진정한 공동체의 원천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3.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삶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며,이 사랑은 상처받을 가능성까지도 끌어안는 사랑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 때문에, 피조물을 통해, 피조물과 함께 고통당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과 소외와 죽음의 길을 가신다. 하나님을 이해함에 있어 삼위일체론이 충분히 적절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표명하는 혁명적 변화는 인간 의 상처와 불행이라는 낯선 나라로 오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여정에 의해서 야기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상호간에 자신을 양보하는 사랑의 무궁무진한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과의 상처받기 쉬운 관계 속으로 들어오실 수 있고 심지어 시간성, 빈곤, 고통, 죽음의 심연에 까지 들어오실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되었으며 인간의 우정, 긍휼, 희생적 사랑, 포용 하는 공동체의 영원한 원천과 활력이 된다. 더욱이 삼위일체 신앙은 구원의 의미를 재정의 한다. 무엇보다 삼위일체는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삶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삶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듣고 순종하면서 예배와 섬김을 통해 그 삶에 참여한다. 동시에 우리는 삼위일체를 미래에 대한 비전의 측면에서, 즉 세상을 창조하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목적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전망하며 이해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에워싼다, 그 역사 속에는 고통과 죽음이 포함되나, 동시에 새로운 생명과 부활도 포함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는 종말의 완성을 향하여 전진한다. 삼위일체 신학은 우리의 입술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과 실천을 통해 표현된다. 또한 신앙의 완성은 교리적 규정에서가 아니라 송영과 찬송과 예배와 섬김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속성
기독교 신학 전통은 자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입장을 보여 왔다. 즉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된 사랑으로서 긍휼히 여기고 고통당하며 승리하는 분이라고 믿는 신앙고백과, 불변성과 무고통성과 무감동성처럼 참된 신성을 구성한다고 간주되는 사변적 관념들을 종합하고자 시도했다.
하나님의 속성을 인식하는 방법 중 첫째는 부정의 길로서, 하나님에 대한 부정의 지식을 통해 도달된다. 피조물의 존재에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제함으로써 하나님이 무엇이 아닌지를 진술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유한하지 않으므로 무한하다. 둘째는 인과율의 길로서, 인과 관계의 방식을 통해 도는 탁월성의 길, 즉 하나님에 대한 긍정의 지식을 통해 도달된다. 인과율의 길은 하나님을 만물의 원인으로 모든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선한 덕들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탁월성의 길은 피조물의 덕들로부터 시작하여 그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고 탁월하게 실현된다고 추론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를 전개하는 스콜라 신학의 방법은 많은 문제를 야기하며 신학과 윤리에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의 무고통성과 불변성과 전능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복음에 비추어 재고하고 개혁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론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과 조화되지 못할 것이다.
다수의 현대 신학자들은 스콜라 전통과는 선명한 대조를 보이며 하나님의 속성 교리를 재구성하고자 노력했다. 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삼위일체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기독교적 하나님의 속성, 즉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한 이해의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을 삼위 일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찾았다. 바르트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함이 곧 자유이며, 자유가 곧 사랑함인 분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분리된 항목이 아니라, 변증법적 쌍 속에서 각각의 신적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처음에는 피조물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것에서 드러나며, 나중에는 타락한 인간에게 새 생명을 더 큰 선물로 주신 것에서 표현된다. 새 생명을 주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부으심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목적에 있어 항구성을 가지는 동시에,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늘 새롭고 변화된 행동을 취한다. 하나님의 불변성보다 훨씬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은 “새롭고도 예기치 못한” 일을 하실 때조차 그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의 특성에 일관 되게 일하며, 그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특성과 목적에 있어서 항구적이며 꾸준하고 신실하시다고 진술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주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는 구절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는 성경 증언이 의미하는 바이다. 절대적으로 불변적이며 전적으로 무변화인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살아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아니라 죽은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를 받을 수는 있지만 정복당할 수는 없다. 이런 진술은 하나님을 “고통에 무감각한” 존재로 보는 입장보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에 훨씬 더 가깝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은 불가분리적이다. 확실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유하게 일컬어진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능성은 타자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은 전능한 사랑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전능한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남을 지배하거나 강제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며, 주권적이고 효과적이면서도 피조물을 대체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지는 무한히 심오한 지혜이며, 은혜로운 인내와 함께 행사된다. 하나님의 지혜로 인해 피조물은 자신의 존재를 발전시키며 하나님의 사랑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시공간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의 지혜는 의로운 심판과 인내하는 사랑을 통하여 행사된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하나님이 항상 모든 곳에서 만물 속에 현존하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편재성이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이 모든 곳에 현존하되, 그러나 모든 곳에 자유롭게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는 대로 시간과 공간과 방식을 선택하여 현존한다. 하나님의 영은 마치 바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단순히 수학적인 일원성도, 홀로 있는 단독성도 아니다. 그분의 통일성은 교제 안에서의 하나됨이다. 교제는 살아 있는 하나됨으로서 구별과 관계를 포함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성은 영광스럽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무시간성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영속적인 삶은 개방적이어서 시간적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그것에 참여한다. 복음이 말하는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시간성을 지닌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많은 전통적인 입장의 치명적인 결함은, 성경의 증언과 그에 대한 교회의 삼위일체적 해석과는 상관없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에 해당하는 술어들을 그분께 적용했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 됨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로부터 배워야한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일 수 있고 또 그런 분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행한 분임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타락하고 이교적인 사상으로 드러나서 지탱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
기독교적 하나님 이해가 삼위일체적 논리를 따른다면,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뿐만 아니라 선택론 또는 예정론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교리(doctrine of the eternal decrees of God) 또는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처럼 오해되고 왜곡되며 수많은 논쟁과 곤경을 초래했던 교리는 많지 않다.
★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교리(Doctrine of the eternal decrees of God)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에 대한 교리로서,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인간의 구원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이미 결정하였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 교리는 개신교 신앙 공동체에서 논쟁이 되는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며, 그 이유는 이 교리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칼빈주의와 아르민주의라는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영원 전부터 결정하였다고 믿습니다. 이는 "선과 행위론"이라고도 불리며,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해놓았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르민주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에 따라 인간의 선택과 노력이 인간의 구원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과 파멸을 모두 이미 결정하였다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은 창세 이전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파멸시키기로 미리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중예정론은 칼빈주의에 속하는 개신교 신앙 공동체에서 주로 믿는 교리 중 하나이며, 일반적으로 "선택론"이라고도 합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파멸시키기로 결정하였으며,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은 그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루터,칼뱅과 같은 많은 고전적 신학자들이 다양한 형태의 선택론을 가르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이 개혁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독특한 표지로 간주되었다.
기독교 신학에서 선택론의 발전이 왜곡된 것은, 애초에 이 이론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택론의 송영적 의도가 다양한 동기에 의해 애매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맥락에서 선택론은 하나의 중심적 목적을 가진다. 즉 이 개념의 목적은 창조, 화해, 구원과 같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로 알려진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은혜 안에 그 시작과 목적을 가짐을 선언하는 것이다.
1. 선택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선택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미리 불변적으로 고정하는 자의적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신성이 어떠한가에 대해 마음대로 생각하는 관념들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술어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언약의 당사자로 삼는 하나님의 선택은,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상응한다. 선택은 하나님이 교제 안에 있는 자신의 삶을 타자와 함께 공유하기로 선택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전부터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우선적 의도를 재현한다. 선택은 세상을 위하는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그분의 영원하고 철회할 수 없는 결정이다.
2 선택에 관한 우리 지식의 기초는 바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며 성령과의 교제 속에서 공유된다. 선택론이 이런 기초를 중심으로 세워질 때 우리는 선택론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즉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전혀 없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며,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살 수 있다.(롬8:39)
3. 선택론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지, 고독한 개인들을 구원함도 아니며 특정한 민족과 인종 집단을 특권화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는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축복과 책임에 대해 인간의 마음을 개방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선택은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4.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에는 그분의 의로운 심판이 뒤따른다. 그러나 양자는, 전통적 이중 예정론의 제안처럼 두 개의 평행선 같은 관계는 아니다.
성경 증언에서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무시간적 결정도, 그분의 목적과 분리된 독립적 궤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을 섬기는데 작용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는 분리되지 말아야 하며, 영원한 버려짐의 결정을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와 병립시켜 가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와 “아멘”이다.(고후 1:20)
바르트는 칼뱅보다 더욱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선택론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인 동시에 버림받은 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선택과 버려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바르는 선택론이 “복음의 총화”이며,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모든 말 중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단언한다.
선택론을 삼위일체적 맥락에서 다시 살펴본다면, 선택의 의미와 목적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선택의 신비는 세상의 기초가 놓여질 때부터의 하나님의 뜻의 신비로서, 교제 가운데 하나님 자신의 삶을 타자와 공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데 이르게 하고자 뜻하시는 신비다.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의 교리는 모두 일반적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적 구체성 속에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참된 인간성에 대한 모든 견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를 함축하며, 동시에 참된 신성에 대한 모든 이해는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드러낸다. 만약 삼위일체론이 독특한 기독교적 신(神) 이해라면, 또한 이런 이해가 세상 속에서 기독교적 존재 방식의 방향과 형식을 제공한다면, 오늘날 교회에게 제기해야 할 질문은 명백해진다.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공동체적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오셨고, 성령의 권능으로 계속적으로 세상을 갱신하고 변혁하는 주권적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증거가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