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12편
* 한국 불교(韓國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현)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韓國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
무위한(無位閑,
몸도 마음도 없는 것)
松窓土壁溪邊地
송창토벽계변지
白首緇衣懶一翁
백수치의나일옹
意到忽然心自樂
의도홀연심자락
朗吟閑步任西東
랑음한보임서동
창밖에 푸른 솔이 보이는
시냇가 초암(草庵處所)에
흰머리 검은 승복
게으른 늙은이 하나
마침내 한 경지 다다르고 보니
마음(心)이 절로 즐거워(自樂)
낭랑한 목소리로 경(經典)
읊조리며 한가로이 거니네.
"
월파공(月破空,
달빛에 깨달음의 소리)
卓立庭前栢 탁입정전백
長靑直聳空 장청직용공
影從千古月 영종천고월
聲任四時風 성임사시풍
우뚝 선 뜰 앞의 잣나무
창공으로 솟은 늘 푸른 모습
천고(千古)의 달빛 따라
그림자(影) 드리우고(從)
사계절 바람 좇아
깨달음의 소리를 낸다.
– 무외선사 –
"
"
오매심(寤寐心,
일깨우고 잠드는 마음)
不學宣王敎 불학선왕교
寧聞桂吏玄 영문계이현
早入西山堂 조입서산당
唯傳六祖禪 유전육조선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한번도 배운 일이 없으니
노장(老莊)의 학설을
그 어찌 보고 들었으랴.
일찍이
서산의 집으로 들어가
오로지 육조의 선(禪)만을
참구(參究)했네.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서는
오심(悟心 깨달음)을 읊었다
"
"
오심(悟心,
깨달음의 마음)
雲走天無動 운주천무동
舟行岸不移 주행안불이
本是無一物 본시무일물
何處起歡悲 하처기환비
구름이 달려 갈 뿐
하늘은 움직이지 않는 법
돛 단 배가 움직여 갈뿐
언덕은 가지 않는 것을
일체의 본래 모두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 곳, 그 어디에
기쁨 슬픔 있으리요.
– 편양선사 –
"
※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이러한 게송(偈頌)이 있다.
“
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보리(菩提, 반야 광명 지혜)는
본래 나무(樹)가 아니요(無)
명경(明鏡 맑은 거울) 또한
누대(樓臺 다락 정자)가 아니다
본래 하나의 물건도 없는 것이니
그 어디 티끌(塵)이 일어나리오.
”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의 게송(偈頌)이다.
게송(偈頌)의
가장 중요한 요점(要點)은
“
제 아무리 좋은 것도
본래 없었던 것만 못하다.
”
라는 뜻이다.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은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물론
모든 사물(事物, 물질 空色)도
본래 텅 비어 있어(本來卽空)
그 어떠한 것도 실체(實體)로서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그 어떤 것
무엇이더라도
애써 소유(所有)하거나
품어만고 가질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意味)이며
털끝만큼도
집착(執着)을 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텅 비어(空) 있는
《본래무일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갈 때 가지고 갈 것이 없다.
아무리
많은 재산(財産), 명예(名譽),
처자권속(妻子圈屬)도
가져가지 못한다.
오직 하나
자신이 지은 업(業 카르마)만
따라 다닐 뿐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선업(善業)을 짓고
복덕(福德) 공덕(供德) 쌓고
자신의 업(業)을
잘 닦아야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천차만별(千差萬別)
다양한 삶(人生, Life)이
존재(存在)한다.
스스로 지은 업(業報)이
저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自己 自身)의
현재 인생人生, Life)이
불만족(不滿足)스럽다면
자신이
지은 업(業 karmma)을
탓할 일이지
결코 남(他人 他者)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
사사(私私)로운 감정이나
손익(損益 이익이나 손해)
대립(對立) 갈등(葛藤)
근심(謹心)과 번뇌(煩惱)
또한 본래 없다.
단지
우리가 그런 것들에
붙들려 사니 문제다.
거기에 붙들려
노심초사 안절부절하니
오히려 번뇌만 깊어지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본래가 아무 것도 없었으나
업력(業力)을 짓고 쌓은 진화로
존재의 유상(有相)이 생겨나고
순식간에
순수(純粹)함이 오염되면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불성(佛性, 佛種子)은 사라지고
탐진치(貪嗔痴)
애욕(愛慾)의 싹이 트면서
번뇌(煩惱 망상 잡념)의
고통(苦痛)들이 생겨나며
본래 자리(本來眞面目)
자체를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무상(無相 존재의 상이 없음)을
유상(有相 존재)인양 착각하고
마음과
육신의 종(노예)으로
오욕락(五慾樂)만을
쫓아다니다가
육신이 배반할 때면
애욕(愛慾)의 씨앗을 못 잊고
회한(悔恨)에 눈물 흘리며
이 세상 머무는 동안
텅 빈 마음의 욕구(欲求)를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무상(無相)의 세계로
떠날 것조차 예상하지 못한
어리석음(탐진치)을
하루 속히 떨쳐내고
버려야하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듯
행복과 불행이 둘이 아니다.
영원한 강자나
약자도 없는 것이
참되고 참된
부처님(佛)의 세계(世界)이며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
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