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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인내
전도서 8 : 9 - 17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이는 그것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돈을 벌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때로는 친구도 형제도 몰라볼 정도로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돈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모두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돈을 사용해야지 돈에게 사람이 끌려 다니게 되면 큰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돈을 맡아 잘 관리하라는 관리인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치심치 말라”(시편 62:10). “부하려 하는 자들을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다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디모데전서 6:9) 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본이 됩니다. 대개의 죄가 물질에서부터 생기기 때문에 예수님도 물질에 대해서 다른 것보다 다섯 배나 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권력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권모수술도 사양하지 아니하고 권력 쟁취를 위해서 안간힘을 다 합니다. 아마 인류 역사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전쟁인데 말하자면 전쟁의 역사인데 이 전쟁도 결국은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의 판도로 만조하고 있으면 전쟁이 생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아서 그 영토를 넓혀 보려고 하니까 전쟁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대로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권세욕이라고 했는데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세를 누리면 돈도 가지게 되고 그밖에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다 소유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수상(首相)의 자리에 오르면 그 자리가 얼마나 좋은지 정신이 좀 약한 사람은 미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모든 산이 낮게 보이고 사람들은 개미 만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권력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싸웁니다. 권력이 나쁜 것은 다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권력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 동안 맡겨주신 것입니다.
가령 자유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어떤 공직에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국민의 공복으로써 봉사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권세를 맡겨 주신 동안 겸손한 마음으로 국민을 바로 봉사해야 합니다. 권세가 오래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 권세에 대해서 역사가 심판합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 인간의 모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머리를 싸매고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사실입니다. 사람이 모르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좋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식하므로 그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 보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좀 배워서 그 방면에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 (로마서 12:16)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압니까? 우주 만물에 대한 지식에 비하면 감히 비교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말 좀 많이 배운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그러나 좀 덜 배운 사람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아는 것이 많아 보이기 때문에 아주 교만합니다. 대학의 2학년쯤 되면 세상에 높은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교수도 다 형편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이 다 무식해 보입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많이 알고 제일 훌륭해 보입니다. 그러기에 영어로는 대학의 2학년을 Sophomore라고 하는데 그 뜻을 어리석은 지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우쭐대는 사람은 사실 아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 세기적인 유명한 과학자 Issac Newton은 어떤 청년이 와서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아시는 분 가운데 한 분이신데 얼마나 행복하시겠습니까?”하고 말했더니 Newton의 대답이 “제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되나요? 저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저 광대 무변한 바다에 대해서 아는 정도나 될까요. 아니 그보다도 못할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돈을 무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권세를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지식이 소용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지혜를 얻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호화는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삼일 저녁 기도회 시간마다 특별한 경우를 내놓고는 계속해서 성경을 강해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열심히 참석하시고 말씀을 경청하시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교회 삼일 기도회 시간이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책가방을 든 채 집에 들리기 전에 교회로 찾아옵니다. 청년들은 직장 시간이 끝나자 저녁 식사도 잊고 총총 걸음으로 교회에 찾아옵니다. 저는 이 광경을 볼 때마다 우리 교회의 생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 찬송도 갖고 올 시간이 없어서 그냥 오는 분도 상당수에 이르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청년들이 볼 수 있는 찬송가를 뒤에 마련해 놓았습니다. 찬송가를 갖고 오시지 못한 분은 들어오실 때 가지고 들어오셔서 보시고 돌아가실 때는 출입구 안내상에 다 놓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그거 찬송가를 그렇게 비치해 놓으면 다 없어지지 않겠어요?”하고 걱정을 하세요. 그러나 저는 그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삼일 기도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그런 분도 한 분도 없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혹시 돈 내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나 가지고 가고 싶어하는 분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그 찬송가 가지고 가서 다른 노래를 부르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찬송가책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책을 못 가지고 교회에 오신 분들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많이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 기도회 시간을 은혜롭게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 계속 열심히 출석하시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날로 다원화 되어가고 복잡해지는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삶의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을 바로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연구하고 그 말씀 위에서 살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 17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그렇습니다. 무한하시니 하나님을 유한한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안다고 하면 어떤 때는 소경이 코끼리 구경한 것이나 다름없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여함이여, 그의 판단은 믿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지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 깊으므로 우리 인간의 얕은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너무 부요하므로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 배울 수도 없습니다. 가히 판단할 수도 없으며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몇 달 전부터 남산 올라가는 길목이 매우 복잡해져서 통행에 얼마나 불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거기에 입체 교차로를 만드는 모양입니다. 저는 토목 공학을 전문하지 않았고 그 설계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장차 어떻게 완성될는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가 완성되면 이 근방의 교통 체중이 해소되고 많이 도움이 되겠지”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사장을 지난 때마다 혼자 생각해 봅니다. “요렇게 조그만 공사 하나 하는데도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전혀 짐작도 못하겠는데 하물며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로마서 12장 첫 부분에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뜻과는 맞지 않지마는 하나님의 뜻일 때는 그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의 명령이면 순종하는 생활, 그것이 곧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척과 고향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러면 어디로 가라 십니까?”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떠났습니다.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 명령하실 때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내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노라고 애썼지마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맥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우리가 밤새 애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이 갈릴리 바다는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이나 다름없이 잘 압니다. 제가 아는 대로는 깊은 곳에 고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자기 생각이나 경험대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많은 고기를 낚았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체험입니다. 계산과 경험, 인간의 지식만 따르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초이성이요, 초과학이요, 초경험이요, 초지식입니다. 이해할 수 없으나 따르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여러분, 금년 일년 주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십니까?
1.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2.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 서지 않겠네
3.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출발했습니다. 금년 일년 동안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 날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주님을 믿고 그 하시는 일에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알게 되고 아멘 할렐루야 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십시다. 10절 이하에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지낸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선을 행하는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여러분,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의롭게 살고 진리 따라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이 고민입니다.
“이 세상은 상선벌악(常善罰惡)의 세상인데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야 마땅한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오히려 더 많아 악을 행하는 사람이 기세가 당당하여 그러니 이거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에 인생들이 악을 행하면서 마음이 담대합니다.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해도 오히려 장수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되어서 그렇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편 73편과 37편 말씀을 찾아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실 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당장 벌을 내리신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저부터도 벌써 죽은 지 오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무관심한 것 같고 어떤 때는 죽었다고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롱펠로우의 말은 매우 옳습니다. “하나님의 연자멧돌은 너무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의심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매우 보드랍게 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12절 하반에 뭐랬어요?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요.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하였습니다. 일의 결국을 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대로 “악인의 행한대로 받은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 낙심하거나 의심하거나 반항하지 말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종말을 주의해 보십니다.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으나 마지막이 바로 되면 결국은 바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금년 일년을 살아가면서 당장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어도 잘 순종하며 인내해서 금년 여러분의 삶의 성공적이고 승리적인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