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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케네디가의 대모인 로즈 케네디 여사가 95년 1월 22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느 석간신문은 이런 칼럼을 실었습니다.
"케네디가의 대모인 로즈 케네디여사가 22일 104세로 타계했다. 한 명의 미국 대통령과 두 명의 상원의원을 길러냈고, 그녀 자신도 104세나 장수를 누렸다는 점에서 로즈 여사의 일생은 "영광의 일생"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이 영광의 이면에는 자녀 넷을 잃어야만하는 '비극'이 함께하고 있었다.
장남인 조셉 케네디는 해군 조종사로 2차대전 참전 중에 추락사했다. 사년 후 차녀 케슬린도 알래스카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로 죽었다.
63년에는 차남인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68년에는 3남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대통령 선거유세 중에 역시 암살되었다. 그래서 여사의 일생을 "영광과 비극"을 넘나든 생애였다고 말한다.
로즈여사 자신도 "인생은 고통와 환희의 연속"이라고 말해왔다.
우리는 한 세기 이상을 살다간 한 여인의 삶의 고백을 통해서 인생의 비극과 환희의 대조의 반복을 배웁니다.
인생의 길에는 환희가 있을 뿐 아니라, 비극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항상 비극만 있는 것 같지만 환희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 항상 환희만 있는 것 같으나, 실은 비극도 체험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인생의 경험하는 환희와 비극의 반복이라도, 처음에는 비극이지만 나중에 환희가 된다면 그 당장의 그 비극도 참을만하고, 슬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즈 케네디 여사 같이 처음은 좋고, 환희에 찬 시작이라도, 가면 갈수록 더 비극적이요, 슬픔 뿐이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온 환희라는 것도 위장된 것이요, 그 인생을 속이는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왕이었던 솔로몬 같이 이 땅에서 재미와 쾌락을 누려 본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고,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그 두 손에 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늙어서 전도자가 되어서 자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잠시 이 세상에서 낙을 누리든지, 슬픔의 고난을 당하든지 그것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인생 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과연 이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영원한 내세가 있을 것이다! 추측하고, 추론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인생 강건하여도 7, 80인데, 지상에서도 누렸던 즐거움과 슬픔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날아가는 살과 같이 지나다가 썩어지는 육신과 함께 땅에 묻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생의 내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그 끝이 다 해피 엔딩이 아니라, 행복 끝/ 불행 시작입니다. 언 해피엔딩입니다.
인생의 덧 없는 죽음과 영원한 세계를 조금이라도 느낀 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라도 세상에 살면서 신바람 나는 삶을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 나던 날이 기쁘고, 즐거운 날이라면, 장례식은 슬프고 고통스런 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삶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슬픔이요, 고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더 고통 스럽고, 슬픈 영원한 사망이 예수 밖의 모든 인생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항거하겠지만 이 말씀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인생의 죽음입니다. 인생이 죽는 이유는 죄 값입니다.
그런데 시작은 비극이었지만, 그 끝은 희극인, 진정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이야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작은 비극이요, 죽음이었지만, 생명으로 끝나는 책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작은 장례식이었지만, 결혼식으로 마치는 책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룻기서입니다.
우리는 1장에서 슬픔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4장에서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봅니다.
1장에서 불안하고, 방황하는 가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4장에서는 참 안식과 평강을 찾은 가정을 봅니다.
1장이 고독이라면
4장은 교제입니다.
1장이 저주 받은 인생이라면
4장에서는 회복된 삶, 축복받은 사람들의 아름다움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은 죽음과 장례식입니다. 그러나
4장에서는 새로운 출발인 결혼과 새 생명의 출생이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1.끼니도 해결할길이 없어 이삭을 줍기나 해야했던 룻이 이제는 보아스의 신부가 되었고, 그 밭의 안주인이 되었습니다. 보아스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한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 2.이스라엘 백성 중에 감히 끼일 수가 없어서 공회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이방 여인 룻이 이제는 의엿한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가 앞에 1장에서 나오미에게 말한 소원대로 다 되었습니다.
(룻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때 이방인 가운데서 믿고 구원을 얻는 사람은 참으로 희귀한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떠합니까?
지난 삼일 예배 때에도 예수님께 귀신들린 자기 딸이 와서 고침을 받은 사건을 가지고 증거했는데, 우리가 바로 그 가나안 여인같이 짐승과 같이 여김을 받던 이방인인 것을 알아야합나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되고, 그리스도의 신부된 것이 얼마나 큰 복을 받은 것인지 느껴집니까?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은혜입니까? 너무 큰 은혜는 우리가 어리석고, 둔해서 잘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분을 높여주시고, 우리에게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우리의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가지고 가셨습니다. 무엇을 우리가 가지고 있었습니까?
우리 가진 것은 죄와 저주에 속한 불행,가난,고통,사망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 남김없이 다 주님께서 가지고 가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다 가져가셨음을 믿습니까?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이 고엘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입니다.
또한 주님의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된 것을 믿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까? 주님이 가지신 부요와 존귀와 영광과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안식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모든 것입니다. 아낌없이 다 주신 것입니다.
이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것입니다.
들은 바의 말씀에 생사를 겁시다.
이 말씀들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 듣기 좋아라고 주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말씀들은 무엇을 어떻게 행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알자는 것입니다. 알고,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것입니다. 어떠한 은혜가 우리에게 와 있습니까? 이를 느끼자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는 일, 느끼는 일, 감사하는 일, 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이 우리가 어떤 말씀대로 행위를 하는 것보다 어떤 일을 하는 것 보다 더 큰 것입니다.
이 룻기를 묵상하면서 나오미나 룻이나, 보아스 같이 복된 사람이 있는가하면 불쌍한 사람, 그 이름도 잊혀진 사람, 은혜의 기회를 놓친 어리석고 억울한 삶을 산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이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겠다는 안타까움에 이 말씀을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을 그의 가치관에 따라서 몇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운명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생은 어차피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니까, 그런대로 한 세월 보내자는 회의주의자들입니다.
둘째는, 긍정주의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행복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여, 힘껏 긍정적인 자세로 살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일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이 사람을 세상에서는 좋게 평가를 하겠지만, 냉정히 이 세상을 살피고, 영원한 인생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 행복이나, 평강은 없습니다. 병든 사람은 병든 것을 알아야 고칠 수 있습니다. 병든 자를 긍정적으로만 본다고 그 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또 셋째는, 쾌락주의자입니다.
이 세상은 잠간인데, 내일을 걱정하면 무엇하느냐? 신나게 살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쾌락주의 입니다.
넷째는, 금욕주의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된 줄알기 때문에 이 헛된 것을 좇는 욕망을 억제하고, 극기하는 것 만이 가치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금욕을 제일로 삼는 금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이나, 불행이나,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인생의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며, 영원한 것인 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지 않고, 세상이 말하는 가치관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룻기에서 그 이름이 영영히 묻혀버린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누구신지 아십니까?
한 사람은 나오미의 또 다른 며느리인 오르바입니다.
이 오르바는 룻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다가 도로 제 본토, 아비 집으로 돌아간 여인입니다.
그 때의 선택은 자기로서는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도리상, 시어머니를 따라 갔지만, 그길에 당장 무슨 희망이 보입니까? 그래서 시어머니를 뒤에 두고 제 살 길을 찾아나선 오르바입니다.
걸어오던 좁은 길을 버리고, 넓은 길을 따라 세상으로 나간 여인입니다.
미래를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나님도, 시어머니도. 약속의 구원도 버린 심히 어리석은 여인입니다.
일시적인 눈에 보이는 조건을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선택하여 나간 롯과 다름 없습니다. 그 결과는 실패입니다. 그의 미래, 세상은 어떠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장래를 생각해 볼 때에 그녀는 실패자입니다. 선택의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권리를 줘 버린 아무개씨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재산에 손해될까해서 형제의 고통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이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룻은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다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룻이 얼마나 복되게 됩니까?
모든 것을 버린 룻에게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그는 보아스를 만나서 은혜를 입을 뿐 아니라, 베들레헴의 백성들과 장로들에게 축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을 세운 라헬과 레아 같기를 기원합니다.
이 기원은 룻이 이스라엘을 세우는 자가 되어달라는 기원입니다.
보아스에게 백성들이 축복을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유력하고, 유명한 자가 되어달라는 기원입니다.
또 보아스의 가정이 룻이 낳은 아들로 인하여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말이 낳은 아들이 유다의 가계를 이어나간 것 같이 룻의 아들도 가계를 이어나가는 복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이 기원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드디어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게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십니다.
그 때에 이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를 축복하고는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이며, 노년의 봉양자가 되리라 했습니다.
그 이름은 오벳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대로 다 응답하셨습니다.
보아스와 그의 낳은 아들 오벳을 통해서 위대한 왕인 다윗이 납니다.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이 다윗의 왕가에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주십니다. 룻은 다말과 기생라합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이 선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룻기 1:4에서 오르바가 룻 보다 먼저 소개 되는 것을 보면 오르바가 큰 며느리입니다.
그녀는 마땅히 큰 자부로서 같이 예루살렘까지 따라 왔다면 기업을 무르는 일에서도 룻보다도 먼저 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를 가치 없게 여기고, 업신여기고, 신앙보다 세상을, 하나님 구원의 은혜보다 제 미래를 더 큰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무개씨도 그렇습니다. 보아스보다는 룻에게서는 더 가까운 친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치관이 세상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손해될 것을 염려해서 이 기업무를 일을 보아스에게 양보합니다.
보아스의 이름은 오늘 까지 영광되게 기억되지만, 아무개씨, 그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히 후회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이 오르바나 아무개씨를 생각할 때에 한그릇 팥죽을 탐하여 장자의 명분을 헌신짝 같이 판 에서가 생각납니다.
오르바나 아무개씨나 에서나 공통점이 있다면 이 은혜를 누구보다 먼저 입을 수 있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세상 것들과 바꾸어 버립니다.
히12:16에서는 이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하면서 버린 바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느냐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 가치관에 따라서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선택합니다. 당장에 어렵고, 희생이 있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좁은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자가 있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대로 그 넓은 길을 선택하고 마는 어리석은 가치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 뿐이라면 잘되어도 한 평생, 못되어도 한 평생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오늘 나는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일으키시고, 움직이시는데, 사람을 붙들고 역사하시기를 기뻐합니다.
그저 이 세상 뿐이라면 룻이나, 나오미나, 보아스가 무슨 복될 것이 있으며, 그것이 은혜를 받은 것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큰 것으로 보입니까?
세상의 것이 큰 것으로 보입니까?
신앙이 크고, 하나님의 약속이 크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크고, 여기에 쓰임 받는 것이 크다고 여겨집니까?
적어도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사는 헌신자들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여겨집니까?
내가 그 길을 못 가도 그래도 그 길이 가장 귀하고, 내 후배에게 내 자녀에게 이 길을 가라고 권면하면서 크게 여깁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눈이 열린 것이요, 바른 가치관, 영원히 변치않고, 후회함이 없이 영광된 가치관을 가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이 작게 보이고,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은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하나님 은혜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역사가 시시하게 보입니까? 원시치 못하고 세상 만을 보고 사는 것 때문에 세상 것은 여전히 크게 보입니까? 눈이 어두워져서 그렇습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야합니다. 바로 봐야 바로 걸어갑니다. 그 사람이 가는 길은 그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그 길을 걸어갑니다.
영원한 대우와 영광과 환영이 있습니다.
이 관점으로 볼 때에 보아스가 잘했고, 나오미와 룻이 잘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 같았으나, "지혜 있는자"였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 같았으나,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닥쳐온 기회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지혜자입니다.
세상은 잠간입니다. 기회는 지나갑니다. 이 귀한 세월을 무엇을 하고 지나보내십니까?
로즈 케네디 여사와 같이 처음은 좋고 영광되나, 갈수록 비극적인 삶이 좋습니까?
룻과 같이 비록 비극으로 시작되고, 비참하였으나, 갈수록 더욱 영광되고, 갈수록 더 존귀해지는, 영원히 귀한 자가 되는 이 길이 좋습니까?
이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당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당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당신의 모든 미래까지도 다 하나님께 드리고, 맡겨야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순종해야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회, 쓰임 받는 기회를 놓치면 후회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은혜요, 가장 크고 영원한 가치있는 삶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다가 가야하겠습니까?
지혜자가 됩시다.
출처 한서노회(http://cafe.daum.net/harnsu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