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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4: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 벧전 4: 9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2. 성도들의 새 생활 ( 4: 7 – 11 )
⑦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⑧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⑨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⑩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⑪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이 세상의 만물은 시작과 끝이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때가 그 시작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때가 그 끝이다.
구약성경의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지 4천년이 지난 때에 예수께서 오셨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도들도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 11에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가르치셨고,
요한 사도도 요한일서 2: 18에서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간증 하셨다. 다시 말하면 신약시대도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시대이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
본문은 그런 삶을 서너 가지로 증언한다.
첫째, 성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일과 쾌락에 빠져 있거나 술 취하고 방탕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는 것을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의 일들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며 우리의 부족과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이해하고 그 뜻을 행할 힘을 간구하여 얻는다.
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만물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3: 10, Stibbs).
'가까이 왔으니'(엥기켄)은 '가까이 잡아당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엥귀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임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승천시 감람산에서 재림의 약속을 직접들은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마지막 때라는 긴박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요점은 마지막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데 있었다.
2]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다'(소프로네사테)는 '소리'라는 뜻의 '소스'와 '마음'이라는 뜻의 '프렌'의 합성어로서 '올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을 의미한다.
'근신하여'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벧전 4: 8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둘째, 우리는 열심히 서로 사랑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1: 22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다.
1] 무엇보다도 뜨겁게(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 롬 13: 10 -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주께서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서로 용서하며 형제를 받들어 섬김에 대한 본을 보여주셨다.
사도 바울도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했다(고전 13: 4, 7).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오래 참고 용서하며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에크테네)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야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2]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 잠 10: 12 -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린다.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려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으로써 자신의 죄를 덮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의 잘못이나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고 기꺼이 가려주게 된다는 의미이다.
* 고전 13: 4-7 -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품은 자들은 이웃의 허물을 얼마든지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벧전 4: 9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
셋째, 성도는 서로 원망하지 말고 대접해야 한다.
대접하는 것은 서로를 마음으로나 말로 너그럽게 대하며 상대가 아프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방문하고 물질로 돕는 것이다.
성도가 서로 대접하는 것은 받을 것을 예상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냥 베푸는 것이다. 계산적이지 않게 대접하는 자는 상대가 자신을 위하지 않을 때라도 마음이 상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1] 서로 대접하기를
대접(Hospitality)이란 외래인이나 손님을 친절히 대우하는 행위를 말한다.
성경에는 나그네와 행인을 대접하는 장면이 창세기에서부터 나오는데, 이는 중근동 지역에서만 있었던 풍습이 아니라 시리아, 애굽, 그리스, 로마에서도 있었다.
아브라함(창 18: 1-8, 창 24: 11-61), 롯(창 19: 1-8), 라반(창 24: 29), 욥(욥 31: 32), 엔돌의 신접한 여인(삼상 28: 24-25), 수넴 여인(왕하 4: 8)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공복의 군중을 대접하시고
* 막 8: 1-9 –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자신도 바리새교인의 두령의 집에서 받으셨고
* 눅 14: 1 -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베다니의 마르다의 가족으로부터도 받으셨다.
* 요 12: 2 -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여리고 삭개오의 집에서도 대접을 받으셨다.
* 눅 19: 5-10 –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라는 말씀은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 마 25: 35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요 13: 20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신약시대에도 바울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회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 롬 12: 13, 20 –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히 13: 2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대접하기'(필록세노이)는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와 '나그네'를 의미하는 '크세노스'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풀다'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다.
* 딤전 3: 2 -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 딤전 5: 10 -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 딛 1: 8 -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쫓겨 다니면서 전도 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Lenski, Cranfield).
따라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여서 사도들은 자주 이 덕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 롬 12: 13 -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 히 13: 2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요삼 1: 5-8 - 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⑥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⑦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⑧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2] 원망 없이 하고
베드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조건으로 '원망 없이'할 것을 권면한다.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에 겨울 수도 있었으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불평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마 25: 35, 38, 40 -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