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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목사의 밧모섬 기행(성지답사)
1. 밧모(Patmos)섬을 향하여
쿠사다시(Kusadasi)는 평화롭고 서민적이며 오밀조밀하여 친근감이 있고 약간 높은 지역에 있는 호텔에서 내려다보니 만(灣)으로 된 해변 부두에 크고 작은 유람선 등 돛단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흥밋거리이기도 하다. 석양이 붉게 물드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밤이 되니 시가지(市街地)가 약간 술렁거린다. 여행객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 시작한다. 부두에 정박 중인 대형 크루즈 유람(遊覽)여객선이 불을 밝히고 있는데 뒷산 보다 더 커 보인다. 야경(夜景)을 따라 간간히 예쁘고 굵은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시내에 이끌려 나가 보니 연인이나 가족, 친지들이 끼리끼리 공원 카페에 조용히 앉아 간단한 식사와 차(茶)를 마시는 사람들 외엔 적막하기만 하다.
쿠사다시 Pine bay Marina hotel 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아침 일찍 밧모섬으로 떠나는 연락선이 있는 선착장으로 향하였다. 간단한 출국수속을 하고 터키의 가이드와는 헤어진 다음 배를 타려다가 동일교회 안막 목사님을 만났다. 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터키와 그리스를 순례중이었다. 우리와는 답사행로나 일정이 약간 달랐지만 밧모섬에서 그리스 아테네까지 동행하게 되어 반가웠다.
쿠사다시는 국제항(港) 답지 않게 한산하였고 밧모섬을 향하는 선박은 전세선(專貰船)으로써 우리 일행과 동일교회 성도들만 승선한 소형 선박이었다. 밧모섬은 소아시아 남서쪽 해변에서 약 55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기에 250km 나 멀리 떨어진 그리스와의 거리를 볼 때 그리스 영토가 아닌 느낌이다. 터키 국기(國旗)를 단 배는 사모(Samos) 라는 큰 섬을 옆으로 끼고 푸르고 푸른 에게(Aegean) 해(海)의 맑은 물결을 가르며 비교적 시원하다고 느껴지는 망망대해를 요란한 기관 소리와 함께 시끄럽게 미끄러진다. 하얀 배 갑판 위에는 사진찍기를 즐겨하는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열심히 포즈를 취하며 바다 여행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다.
4시간 정도의 항해를 하는 동안 맑은 하늘과 짙푸른 비취빛 바다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고 드문드문 나타나던 작은 섬들을 뒤로 하고 망망한 대해(大海)를 지나 드디어 돌로 만들어진 화산섬 밧모가 앞에 나타나니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끼워 연신 셔터를 조작하여 밧모섬의 전경(全景)을 기록하였다. 포근한 밧모섬에 가까이 다가서니 출렁거리던 파도도 조용해지고 산꼭대기에서부터 아랫동네까지 옹기종기 평화롭게 앉아 있는 네모 난 가옥(家屋)들이 눈이 부실만큼 깨끗하다는 느낌과 함께 이 섬의 고집스런 하얀 덧칠 일색인 건축물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지켜온 역사 속에 숨 쉬는 순수, 순백, 순결함을 한 폭의 그림처럼 엿볼 수 있었다.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타고 온 대형 유람선이 두 척이나 정박해있는 백색의 항구 스칼라(Scala) 포구의 선착장을 중심으로 길다란 해변을 따라 각국에서 모여든 많은 관광객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2. 밧모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한 배(SultaKM)가 영해(領海)를 지날 때 배의 깃발은 붉은 바탕에 흰 초승달 모양의 터키 국기에서 파란 바탕에 하얀 십자가 무늬의 그리스 국기(國旗)로 바뀌어 있었고 4시간이 지나 11시가 되니 밧모에 도착하여 하선(下船)하자 금방 우리 일행을 알아차린 현지 가이드 박영란 사모(선교사)님이 고국에서 이곳을 방문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우리와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반가이 맞아주신다. 순례객들의 목적지이기도 하는 이 섬에 발을 디디니 감격스럽기만 하다.
날씨가 궂으면 밧모섬에 못 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걱정을 많이 했고, 또 여행사나 성지 순례객들이 밧모섬 투어를 쉽게 강행하지 않기도 하는데 우리 일행은 무사히 밧모섬에 도착하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구수하고 걸걸한 목소리에서 오랫동안 이국 땅에서 고생을 많이 한 모습이 배여난다. 큰 딸은 한동대학교 재학 중이며 작은 딸은 헝가리에 유학하는 고등학생을 둔 어머니로써 남편(차인수 선교사)은 선교 보고(報告)차 고국에 간 상태이며 홀로 낯선 곳에 현지인 할머님 한 분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의 GMS(총회세계선교회:Global Mission Society)라는 선교단체와 자신들의 모 교회에서 에게 해 낙도인 밧모섬 선교를 위해 파송 받은 자들로써 선착장에서 도보로 약 5분 거리에 2층 집을 전세 내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운 고국 사람들을 위하여 하루 종일 들뜬 마음으로 기도로 음식을 준비하며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는 선교사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외딴 섬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얼마나 피곤하고 어려운 생활인지 짐작이 된다. 우직하고 남성적인 성격을 가진 후덕한 사모님이기에 이곳 어려운 상황에서 견뎌 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러모로 어렵게 꾸려 나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들은 희랍정교회에 찌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문서사역을 하는 분들이었다. 개신교의 선교사(宣敎師)라는 직함(職銜)을 드러내면 정교회의 수도사들이나 당국자들에 의해 추방을 당할 수밖에 없어 직접전도는 불가능하고 문서사역(성서와 신앙서적을 출판하는 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의 정체가 탄로가 나서 종종 전기와 수돗물이 끊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 분들은 순천에서 12년간 목회를 하다가 성지순례를 하다가 밧모섬에 왔던 일이 계기가 되어 그로부터 3개월 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우리 일행의 정삼열 목사님 사모님과 고교 동창생이어서 반가움이 더했다. 이 섬에 성지 순례객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 하시는 분들이 몇 팀이 있는데 대부분 희랍정교회 소속들이라고 하여 또 한번 마음이 씁쓸해진다.
3. 밧모 섬의 이모저모
밧모섬은 그리스 영토이기 때문에 전체 인구의 98%가 그리스 정교회 신자(信者)이다. 그들은 기독교(改新敎)를 이단(異端)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기독교의 핵심교리 때문이란다. 정교회 측은 어찌 인간이 감히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고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그들의 신앙과 다만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 안에 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선행(善行)을 쌓은 후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릴 뿐이라고 한단다. 성령의 역사도 부인(否認)하고 고대희랍어로 기록된 성경을 현대어로 번역한 성서를 전승(傳承)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정도라고 한다. 기독교 국가라고는 하지만 개신교 선교가 제한을 받는다고 하니 더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여행 엿새째라 우리들도 피곤에 지쳐있고 향수(鄕愁)에 젖어있을 즈음인데 한국인의 손맛에 우러나는 김치를 담구었다는 말에 기대감이 더했다. 4월의 따가운 지중해의 햇볕이 내리쬐니 땀이 식을 줄을 모른다. 아직 점심식사 때가 이른지라 밧모섬 투어를 시작했다. 대형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 2-3 시간만 렌트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잠은 자지 않는다. 새벽 2시에 출발하는 야간 페리를 타고 피레우스 항으로 가도록 예약이 되어있다.
이곳에서 아테네로 가는 배는 요일별로 출발시간이 다르다. 우리의 일정 계획으로는 밤 10시로 알고 있었는데 4시간이나 늦게 떠난다니 더 많은 시간들을 머물러야 한다. 그 시간까지 쉴 수 있는 여관들이 있지만 우리는 좀 불편하긴 하지만 선교사님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여행 가방들은 그날 밤 늦게 그리스 가는 배를 타게 될 선착장 근처 파출소 앞에 가지런히 모아놓았는데 이곳에선 여태껏 여행객의 가방이 한번도 분실한 적이 없다는 말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수없이 많은 여행객들을 싣고 크고 작은 선박들이 입출항(入出港) 하는 복잡한 항구인데 길 한쪽에 가방을 두고 밤늦게까지 섬 여행을 한다는게 어쩐지 믿어지지가 않아 걱정이 되어 조마조마했다. 조그만 섬인데 지중해의 당당한 국제항(港)으로 대형 유람선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며 평화로운 모습에 감명을 받게 된다.
산 정상에 있는 성 요한 수도원 등 유적지까지는 걸어 올라가도 될, 손에 잡힐 듯 하는 거리로써 약 500m 정도인데 여기저기 들러야 하기 때문에 버스를 이용해야만 한다. “밧모”(Patmos)는 "송진"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에게 해에 있는 도데카네스(Dodecanese) 제도의 13개 섬들 중에 아주 작은 환상적인 섬이며 현재 그리스 지명으로는 피티노(Pitino)라 불리고 있다.
4. 요한 계시동굴
16세기경 이 섬은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가 자치행정을 하다가 1832년에 터키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1912년에는 이태리로 귀속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7년에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AD 94-96 경 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96세의 노령으로 초대교회의 집사 중 한 사람인 브로고로와 함께 동행했으며,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 때에 이곳에서 약 18개월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고생도 많이 하면서도 계시(啓示)를 받고 묵시록(요한계시록)을 기록했고 네르바 황제 때에 풀려나 에베소로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포구와 함께 오목조목하며 잘룩한 허리를 가진 이 섬의 면적은 34평방 km이며 해안선의 길이가 63km이고 인구는 약 3,000명이라고 한다. 로마제국시대에 이 섬은 종교, 정치범을 귀양(歸養)보냈던 곳이다.
이곳에는 밧모섬의 중심지인 호라 마을에 성 요한 수도원이 있고, 계시록을 썼다는 요한의 계시동굴, 18세기에 세워진 희랍정교회 신학교가 있고, 마을 아래 바닷가 쪽에는 요한이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세례터가 있다.
우리는 맨 먼저 스칼라 항과 바닷가가 잘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절경의 지점에 백색건물로 서있는 요한의 계시동굴(기도동굴)로 향했다. 밧모 섬에는 14개의 동굴이 있는데 아포칼립시스 라는 이 동굴은 원래 제우스 신전이 있는 자리였으나 그리스 정교회에서 요한의 계시동굴로 정하여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 조그만 문 위에 요한이 계시 받고 있는 모습의 모자이크가 그려진 성 안나교회로 명명한 교회가 있고, 이곳 정문의 두 기둥엔 영어와 헬라어로 “계시록의 거룩한 동굴”이라고 쓰여져 있으며 교회의 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꾸불하게 지하로 내려 가 동굴이 위치한 곳에 이르게 된다.
이 동굴교회는 항상 개방되지 않고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반까지만 개방된다고 하니 답사 팀들은 정해진 이 시간을 이용해야만 한다. 5평 남짓 한 좁고 어둑컴컴한 공간이었고 한 켠에는 요한이 계시를 받는 내용의 프레스코 성화들이 놓여있고 제자 브로고로가 대필(代筆) 하는 장면의 그림도 보인다. 요한이 손수 새겼다는 십자가와 동굴에서는 사진도 찍을 수 없도록 감시자가 지키고 있으며 감시카메라도 작동하고 있어서 아쉬움을 더했다.
요한의 초상화의 특징은 머리(이마)에 큰 혹 같은 굳은살이 배겨 있는게 인상적이다. 항상 엎드려서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란다. 나이 많은 요한이 기도하다가 일어설 때마다 붙잡고 일어났다는 손잡이용 바위 구멍을 몇 번이나 손을 넣어보기도 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릴 때 세 갈래로 갈라졌다는 천장(삼위일체 상징)을 몇 번이나 올라다보며 거대한 바위 아래에서 계시를 받았던 요한을 생각하며 역사(歷史)의 현장을 돌아서야 했다.
5. 요한 수도원
스칼라 항을 내려다보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전경이다. 군데군데 호화 별장도 있는데 정원과 야산이 조화를 이루며 잘 조성되어 푸르름이 더한다. 기독교의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시의 현장이니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의미가 있다.
요한은 갈릴리 사람으로 예수의 사랑을 받는 세 제자 중 한 사람이었고, 항상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말년에 에베소에서 “서로 사랑하라” 는 교훈을 많이 남겼던 사랑의 사도로 불리어지고 있다.
요한 동굴에서 가까운 바로 위에 희랍정교회의 파티미안 신학교가 있는데 사도요한처럼 깊은 사랑과 기도로 뭇 심령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곳이다. 정상에는 요새와 같이 붉은색 성벽으로 둘러쌓인 요한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주전 4세기 경에는 이곳에 아데미(Artemis) 신전이 세워졌지만 11세기에 아리스토 둘로스가 요한기념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의 원장(院長)으로 있었다고 한다. AD 11세기에 수도원이 많이 생기면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부유한 수도원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는데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이 수도원은 유명한 보물들을 소장(所藏)하고 있다. 희귀한 성경사본들과 매(每) 장(章) 첫 글자가 순금(純金)으로, 나머지는 은(銀)으로 양피지에 쓰여진 5세기의 마가복음(Mark)도 있다.
요한수도원과 요한박물관의 내부는 휘황찬란하고 벽화들은 정교한 금으로 도색이 되어 있고 성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비교적 잘 보존되어지고 있어서 순례자들의 발길을 들이게 하는 것 같다. 40인 순교자 그림이 너무 인상적이다. 40명의 기독교인들을 에베소에서 아우텔리우스 황제 때 얼음판에 발가벗겨 동사(凍死)시키는 그림이다.
수도원 밖에는 강매(强買)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기념품을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하고 종종 검은 옷에 길고 긴 흰 수염을 기른 수도사들이 경건한 모습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면 반가워하는 모습에서 순수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흔적들을 가슴에 안고 산을 내려와 예약된 식당으로 향했다. 전날 사모님이 하루종일 준비했다는 김치는 양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이상한 맛이 나는 젓갈을 넣어 만든 것인데 아무리 시장기가 있었다 손 치드라도 구미에 당기지 않았지만 정성껏 준비하셨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국산 김치를 기대했는데 현지식이 오히려 더 나았다고 본다.
밧모섬에 들어오면 1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나갈 수 있는데 불과 1시간 남짓에 우리가 보고 싶은 곳을 다 다녀오고 나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도보로 5분 거리인 선교사님의 집으로 향하여 쉬기로 했다. 오후에 심심하던 차에 마을로 내려왔으나 시가지는 철시되어 너무 조용하고 쓸쓸하고 냉냉했다. 아마 오침(午寢)시간인 듯하다.
6. 세례터와 밧모섬 낙수(落水)
심심하던 차에 오전에 바닷가에 놔 둔 우리 일행의 가방이 무사히 잘 있는가싶어 나가봤더니 그 상태대로 놓여 있어서 안심하고 돌아왔다. 물론 파출소 앞이니 경찰들이 지켜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루종일 뜨겁게 작렬하던 태양이 서편으로 기울어지니 산과 바다가 단풍 노을로 물들여진다. 비가 오락가락하며 샘이 난 듯 우리의 마음에 조바심을 심게 한다.
선교사님의 집에서는 좀 느리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이용할 수가 있어서 미니 홈피와 교회카페에 들러 밧모섬에서의 안부를 전하고 이멜(E-mail)도 확인하며 인터넷 신문을 통해 고국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현지에서의 저녁 6시는 우리 시간으로 주일이 되는 날이어서 주일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사모님들과 여(女)성도들은 찬양을 준비하고 한 마음이 되어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던 선교사의 가정에서 문을 열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으니 활기차 보이고 또한 합심해서 기도하며 합창하는 찬송소리가 흘러나오니 선교사 사모님은 너무 행복하고 좋으신 모양이다. 우리가 떠나면 다음에 기약없는 순례객들이 방문할 때까지 또 얼마간 적막이 흐를 것인데 고독함과 외로움을 느낄 그 가정이 안타까워진다.
예배 후엔 선교사님의 집에서 가까운 곳이며 차량이 쌩쌩 달리는 바닷가에 위험스럽고도 초라하게 위치한 요한의 세례터를 마지막으로 답사했다. 사도요한의 복음증거를 통하여 예수 믿기로 결심한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장소인데 거의 방치된 듯하다. 시멘트 계단 아래 조그만 바위에 팻말과 안내문 뿐이다. 신기한 면도 있지만 너무 초라하여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헬라어로 자세히 세례터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어서 순례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그리고 세례 터 바로 앞에 오두막처럼 생긴 예배당이 있는데 시카니아(Sykania) 교회인데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처음 도착했을 때 유숙했다는 곳이다. 구름 사이로 요한이 들었던 하늘의 계시(啓示)가 들리는 듯하다.
저녁이 되니 여기저기 불이 켜지고 골목길을 따라 식당과 거리카페, 기념품 가게 등 도시(都市)기분이 나고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거리는 끼리끼리 카페에 앉아 이야기에 취한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기념품 가게들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낮에 식사했던 그 식당에 다시 모여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여행 기간 동안 생일이 되신 분이 세 분이나 있어 가까운 제과점에서 케익을 준비하여 이국 땅 식당에서 조촐한 생일축하식도 가졌다. 마침 식당 여주인이 그리스인인데 선교사님의 전도를 받고 개신교로 개종하여 신앙고백문을 작성하여 우리 앞에서 낭독하며 눈시울을 훔치는 모습이 또한 감격스러웠다.
12시간 동안 배를 타고 가다보면 배가 고플 것이라며 선교사 사모님은 정성껏 샌드위치로 대용식(代用食)을 만들어 준비해 주셨다. 다음날 아침 배에서 먹을 아침식사인 셈이다.
새벽 1시가 되어 부두에 도착하여 우리가 타고 갈 배를 기다리는데 2시 반이 되니 입항을 한다. 예정시간보다 더 늦어진 것이다. 몇 시간의 만남을 뒤로하며 밧모섬의 가이드인 박 선교사님과 헤어져 배에 올랐다. 그리스 본토 아테네로 가기 위함이다.
7. 아덴을 향하여
밧모섬에서 그리스의 아테네 피레우스(Piraeus)항으로 가는 대형 페리 크루즈 선(船)은 난생 처음 타 보는 큰 배다. 7층으로 되어있는 객실(客室) 중 우리 일행은 배의 5층에 객실이 정해져 있었는데 4인이 들어가는 2층 침대로 각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갖춘 비교적 깨끗한 호텔과도 같았다. 자칫 잘못하면 배에서 길을 잃을 것 같은 미로(迷路)를 통해 객실을 찾아야 할 만큼 복잡하였지만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다.
자동항법장치로 야간 운행을 하는 2만 5천톤 급의 그리스 선적의 이 배의 이름은 ΡΟΔΑΝΘΗ 이며 넓은 홀(hall)과 식당 및 각종 유락(遊樂)시설을 갖춘 지중해의 정기 항로 여객선이었다. 배가 출발하고 나니 칠흑같은 어두움에 가랑비가 내리는 바닷길은 지루하지만 그리스를 향하는 기대감으로 바다 위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약간의 진동이 느껴질 뿐 배를 탔다는 기분보다는 육지에 머무는것 같아 사람들은 하나 둘씩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자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거나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이룰 수 없는 처지여서 나는 잠간 새우잠을 자는듯했으나 곧장 일어나 갑판으로 올라가 보기도 하고 특실이 있는 7층부터 3층 아래 출입이 허용되는 곳이라면 구석구석 배의 이곳저곳을 오르락내리락 구경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지중해의 한 복판에서 야간투어를 하게 되었다.
배낭여행객들은 대부분 3등실(三等室)을 이용하는 바람에 선실(船室) 여기저기 체면불구하고 누워 잠을 자는 진귀한 모습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바닷물과 섬들, 그리고 지중해의 하늘을 구경해야 할 것인데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배는 세찬 바닷바람을 가슴에 안고 약 12노트로 유유히 항해(航海)중이다. 좀 더 재촉하고 싶은 바닷길인데 자신의 속도로 서서히 움직이는 배가 야속하기만 하다.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것도 아니지만 왠지 ‘지중해의 밤’ 이 생각난다. 바다이지만 짠 내음이 나지 않는 시원함과 상쾌함이 살갗에 부딪히는데 간간히 구름 사이로 내미는 별들이 총총히 우리를 인도하는 듯하다. 피곤한 탓인지 동료들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데 나는 선실(船室)에 있을 수 없어 갑판 위에 올라 구름 가득 낀 아침을 맞으며 선교사 사모님이 준비해 준 샌드위치로 간단히 아침 요기(療飢)를 했다. 딱딱한 우유식빵에 토마토와 치즈를 넣어 만든 이 음식은 맛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이거라도 먹어야 여행을 계속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날이 밝아지니 저 멀리에 지중해의 수평선이 아련하게 보이는데 망망대해에 간간히 떠있는 무인도(無人島)를 만날 때마다 오랜 시간의 항해에서 육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반가움이 더한다. 그리스 본토에 가까워지니 여기저기에 떠있는 더 많은 섬들이 다도해(多島海)처럼 다가온다. 어디에서도 다시 구경할 수 없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광경들이 눈앞에 밝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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