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명시 감상 (11)
꽃 -김춘수(金春洙):1922-2004)-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작가소개 및 작품 감상
김춘수 시인은 1922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여 경기중학과 일본의 니혼대학의 예술과 3년을 수료하였다.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교사와 마산대학과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1947년 제 1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한 이후 계속 문단에 주목을 받아 1958년에는 <한국 시인협회상>을, 그리고 다음 해에는 <자유아세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인은 독특한 그의 시론(무의미 시론)을 전개하여 한국 시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으며, 1960년대의 소위 <순수(純粹)‒참여(參與)>의 대립(對立)에서 순수시(純粹詩)를 지켜온 시인이다.
그의 작품 경향(傾向)은 대체로 순수와 객관(客觀)을 지향(指向)하는 것으로 보이며, 관념(觀念)의 사물화(事物化) 혹은 언어의 절대화(絶對化)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조금은 난해(難解)한 느낌을 갖게 되지만, 극도(極度)로 절제(節制)된 언어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緊張感)은 우리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認識)으로 인도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놓치고 있는 존재(存在)의 지평(地平)을 열어 보여 주고 있다.
1946년 해방 1주년기념 시화집 <날개>에 시 '애가(哀歌)'를 발표하면서 시작(詩作)을 시작했으며, 대구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온실(溫室)'외 1편을 발표하였고 첫 시집 <구름과 장미>가 발행됨으로써 문단에 등단, 이어 시 <산악(山嶽)>, <사(四)>, <기(旗)>, <모나리자에게>를 발표, 문단(文壇)의 주목(注目)을 받았으며 이후 에는 주로 <문학예술>, <현대문학>, <사상계>, <현대시학> 등에서 창작활동과 평론활동(評論活動)을 전개했다.
♣ ♣ ♣
김춘수 시인의 <꽃>은 얼핏 보기에 아주 감상적(感傷的)인 연애시(戀愛詩)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는 ‘나’라는 고독한 실존이 불안 속에서 하나의 확실한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요, 절절(切切)한 외침이다. 단순한 산문체(散文體)의 시 같으면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 난해시(難解詩)이다. '꽃의 존재'의 의미를 조명(照明)하고 그 정체(正體)를 밝히려는 의도를 가진 이 시는,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이 주종(主從)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만남의 관계임을 형상화(形象化)하고 있다. 꽃으로 대표되는 사물 속에 담고 있는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세, 곧 꽃의 참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나'와 '너'의 관계는 인식(認識)의 주체(主體)와 인식의 대상(對象)의 관계이다. 시적 대상인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 다시 말해서 내가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 즉 다가가고 싶지만 쉽사리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즉 '나'는 '너'의 실체를 알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는 드러내지를 않는다. 이 시를 통해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本質)이 영원히 우리의 인식 저편에 불가지(不可知)의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의 제 1연과 2연에서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니까 몸짓에 불과하던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있다. 여기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가 아직 나의 시야(視野)에 드러나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를 찾고 있었고 그 찾는 행위가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며, 그러한 ‘이름 부름[命名行爲]’을 통해서 그는 ‘꽃’이 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언어라는 빛'을 부어 줌으로써 그 때까지는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그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내가 부른 것은 그의 '이름'이고 이때의 ‘이름’은 그 대상에 대한 규정(規定)이며,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개별성(個別性)의 부여(賦與)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나무'도 아니고 '새'도 아닌 ‘꽃’이라는 존재의 성격이며, 그 주체를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하여 나타내 보여 주는 바의 그것이다. 따라서 아직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무엇이라고 규정되지 않은 막연한 것, 즉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꽃은 코스모스나 봉숭아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내가 이름 부르기 전에는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다만 막연한 몸짓이었지만 이제 이름을 부른 후에는 그는 어떤 것 즉 꽃이라는 존재자로 내 앞에 드러나는데 그것은 나에게 꽃이라는 존재의 표상이다. 즉 그는 이제 막연한 몸짓이 아니라 꽃이라는 하나의 ‘의미’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름 없는 몸짓인 ‘그’를 불러 꽃이 되게 한 ‘나’는 무엇인가? 이 시의 3연과 4연은 ‘나’와 ‘그’와 ‘너’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고 있는 ‘나’는 아직 무규정(無規定)의 존재자(存在者)이다. ‘나’가 어떤 안정된 존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어서 그가 꽃이 된 것처럼 누군가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아직 무엇이라고 이름 할 수 없는 ‘나’는 그러므로 쓸쓸하고 고독한 하나의 불안스런 존재이다. 실존철학에서는 이러한 불안이 내가 나를 각성(覺醒)해 가는 실존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실존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월(超越)하려고 한다. 그러한 ‘나’는 바로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든지 이러한 불안한 세계의 무규정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제 4연에서처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며 그 ‘무엇’ 이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이 ‘눈짓’이란 우리의 존재의 확인, 즉 우리들의 실존의 근거에 대한 확인이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우선 보는 사람으로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사물(세계)과 만날 때 그것을 시로 표현한다. 우리의 앞에는 언제나 사물이 펼쳐져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사물 그 자체의 진정한 실상(實像)을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태도나 방식은 어떤 선입견(先入見)이나 통념(通念)에 의해 왜곡(歪曲)되어 있다.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를 볼 때도 우리는 그것을 본래의 모습으로 보기보다는 목수로서 또는 목재 상인이나 식물학자로서 보기 때문에 각기 다르게 생각하며 그 나무를 자기 나름대로 유용하게 쓸 방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무는 참다운 나무 그 자체가 아니라 '집 짓는 재료' 혹은 '돈 버는 자원' 또는 '식물학적인 대상'으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 그 자체를 참되게 보기 위해서는 선입견을 버리고 순수(純粹)한 시선(視線)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 그런데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빛이라는 밝음 속에서 노출되어야 한다.
이때 그러한 밝은 빛을 비쳐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사물을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언어 속에 드러낸다는 일이 된다. 시인은 사물을 보는 사람이므로 그는 사물을 언어의 밝음 속에 불러내어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다. 언어로 불러낸다는 것은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이름 지어 규정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시인 김춘수는 한국시에 철학적인 사유(思惟: 어떤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등을 행하는 이성적 작용이며 인간은 이것에 의하여 논리적인 대상을 인식하거나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음)를 끌어들임으로써 한국시의 영역(領域)을 넓힌 시인이다. 아름다운 서정시와 전위적(前衛的)인 실험시(實驗詩), 사회비판적인 참여시(參與詩)는 김춘수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시를 통해 하나의 '사유'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는 김춘수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폐허 (廢墟)위에서 개인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해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옮겨간다. 이 모든 질문은 ‘언어’의 문제로 귀결(歸結)이 된다.
|
첫댓글 김춘추 시인님의 꽃
잘 감상하고 갑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