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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간의 해외연수기( 바티칸 베드로 성당과 박물관) 11
1월 11일, 로마 시내에서 , 바티칸 박물관
아침 8시 30분, 호텔을 출발해 바티칸 박물관으로 갔다. 토요일이라 사람이 엄청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적다는 것이 안내인의 설명이다. 조금만 늦게 와도 입장하는데 한 시간 이상은 걸린다고 한다.
바티칸의 높디높은 벽을 따라 박물관까지 들어가는데는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바티칸 박물관이 오늘날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힐 수 있는 이유는 오늘의 바티칸 성당을 세운 율리우스 2세 이래로 역대 교황들의 지속적인 유물 수집 덕분이다.
오늘날 서양 문명의 원류가 된 그리스⋅로마시대의 뛰어난 조각 작품들로부터 시작하여 고대 이집트 왕조시대의 조각품들은 물론 르네상스 시기의 탁월한 조각품들과 성당벽과 천정에 그려진 당대 최고 예술가들의 최고 작품들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 두 시간에 걸쳐 박물관은 물론 시스틴 성당의 천장 벽화와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시티 광장까지를 둘러봐야 했다. 눈으로 사진 찍듯이 아니 이미지를 부지런히 담아두고 나머지는 나중에 개인적으로 모은 영상자료 등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일정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이, 언챙이 콩가루 집어먹듯이 돌아보는 일정이지만 그간 사진으로만 접했던 작품들을 직접 대면하고 영상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영상물이란 것은 그것을 담아낸 사람의 눈으로만 보게 하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을 두루 살펴보게 되었다는 점이 얼마나 행복한가.
복잡한 계단을 지나 바티칸 안뜰의 하나인 ‘솔방울 안뜰‘로 갔다. 네로 황제 때 전차 경기장에 있던 4m 높이의 거대한 청동 솔방울이 전시되어 있어 그렇게 부르는 곳이다. 뜰 가운데는 최근에 만들어진 오존파괴로 신음하는 지구의 모습을 담은 공모양의 작품도 있었다. 이곳에서 전체적인 설명을 듣고 박물관 답사에 나섰다.
팔각형의 안뜰에는 신화의 주인공들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우리의 미술책에도 소개되는 ‘라오콘‘상이다.
트로이 사제인 라오콘이 목마 속에 그리스 적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트로이시민들에게 알렸다하여 그리스신에게 벌 받아 두 아들과 함께 온몸이 뱀에 칭칭 감겨 죽어가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칭칭 감겨진 뱀을 떼어내고자 안간힘을 쓰는 그 처절한 표정들과 몸부림치는 듯한 근육의 실룩거림, 손발톱 하나하나까지 사실보다도 더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해야 할까.
그 다음에 보게 되는 ‘토르소‘도 마찬가지만 바로 이런 예술성이 오늘의 서양문명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다른 모습을 보게 한다. 동양이 구도자로서 인간 본성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승화시키려는 과정이라면 그들은 진작부터 인간 ‘정신의 자유와 육체의 자유로움‘을 구가해 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성당의 장엄한 회랑을 따라 이어지는 감동의 대작들을 스치듯이 지나가며 보아야 하는 그 안타까움이라니. 밟고 지나가는 바닥도 각양각색의 대리석으로 문양을 넣었는데 개중에는 다른 곳에서 수집해 온 것도 있었다.
네로 황제의 궁에서 가져온 5m폭의 아름다운 대리석 욕조 아래를 장식하고 있는 바닥인데 3세기때의 어느 온천 바닥을 장식한 대리석 모자이크이다. 회랑을 지나다보면 이런 모자이크 조각이 몇 개 더 있는데 특히 보석 취급을 받는 코발트색의 대리석은 신비로운 아침의 푸르름을 느끼게 한다.
시스틴 소성당의 천정화와 최후의 심판
기원전후 2∼3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촛대(샨데리아) 회랑을 지나고, 이탈리아 주요 도시 40개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지도회랑을 지나갔다. 부드럽고 우아하면서 화사한 색조를 구사한 라파엘로의 그림이 있는 방을 지나 드디어 시스틴 소성당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여러 유명 화가들의 그림도 있지만 이곳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와 안쪽 벽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높이 20m가 넘는 천정에 통상적인 성화의 개념을 넘어서 미켈란젤로는 벌거벗은 인체의 다양한 표현을 통해 인간성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개념의 성화를 낳았다고나 할까. 율리우스 2세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1508년부터 1512년 사이에 그리게 되는데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고 혼자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당시 성직자들이 거룩한 성당 천정에 이 벌거숭이의 그림들을 보았다면 경악하고 당장 지우게 했을테니 무리도 아니다. 천지창조부터 시작해 술취한 노아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를 9장면으로 구성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은 1540년 바오로 3세때 그린 그림으로 미켈란젤로 만년의 작품이다. 그림의 위 가운데에는 당당한 체구의 예수가 무표정인 듯한 모습으로 눈을 지긋이 감은 듯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리고 심판하는 모습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표정과 모습으로 심판을 맞고 있는 그림이다.
성모 마리아는 아예 얼굴을 외면한 채이고 예수 주변의 사람들은 경악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모두 391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성인이 자신의 벗겨진 피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고도 한다.
천지창조의 오른쪽 맨 아래편으로는 율리우스 교황의 의전관이었던 비아지오 다 체세나라는 사람이 온몸에 뱀이 감긴 채 심판을 받고 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대해 목욕탕이니 식당 그림이니 하면서 계속 혹평을 가했던 사람이다. 그 때문에 천정화를 그릴 때 미켈란젤로는 한때 보따리를 싸들고 고향으로 가버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교황은 선물을 잔뜩 보내며 설득해 데려왔다고 한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서 철저히 복수를 했다. 그림이 다 완성된 뒤 체세나는 그것이 자신임을 알아보고 길길이 날뛰지만 바오로 교황은 자기가 면죄부를 주어 구제해 줄테니 걱정말라고 달랬다니,
미켈란젤로도 대단하지만 당시 그런 벌거벗은 그림을 성당에 그리도록 아낌없는 후원을 해준 율리우스와 바오로 교황의 탁월한 심미안이 더욱 위대해 보인다. 재능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때만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벌어졌다. 얼굴에 늘 근엄한 표정을 짓고 느리느릿한 걸음으로 위엄을 보이려는 성직자들에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아무래도 낯 뜨겁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1563년 트렌토 공의회에서 ‘성스러운 장소에는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예의의 형식을 갖춘 작품만을 만들게 한다‘고 결정함으로써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기저귀가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 작업을 담당했던 화가는 미켈란젤로와 가장 화풍이 닮았다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란 인물이다. 예수의 아랫부분은 하얀 천으로 가려지고 마리아는 푸른색 치마(작품 전체적으로 가장 튀는 색깔이다.)로 휘감기며 나머지 드러난 성기 위로는 모두가 일본인들의 훈도시 같은 색색의 기저귀들이 채워진다.
덕분에 볼테라에게는 ‘기저귀 화가‘란 별명이 붙여지고 그로부터 얼마 안가 자신이 한 일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어떠한 손상을 입혔는지 그리고 예술가로서 그것이 얼마나 치욕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그는 자살하고 만다.
이 작품들은 5백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먼지와 때가 끼어 칙칙하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 기술에 의해 1980년부터 1994년에 걸쳐 깨끗이 청소되고 그림을 그렸을 당시의 선명한 색깔로 되살아 한 예술가의 위대함과 더불어 우리 현대인들에게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때 볼테라의 기저귀를 떼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는데 그것도 시대의 한 조류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자는 다수 의견이 있어 그냥 두었다고 한다.
성베드로 대성당
이집트의 고대 신전 건축물들이 ‘거대함의 미학‘이라면 베드로 대성당은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라고 표현해야 할까. 박물관과 시스틴 성당, 베드로 대성당은 서로가 복잡한 통로 들로 이어져 있는데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인간이 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화려함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이곳은 본래 네로 황제의 경기장이었고 그 왼쪽에, 지금 돔이 있는 아래쪽으로는 이방인들 즉 기독교 순교자들의 공동묘지라 하고 그중 하나가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본격적인 성당 건축에 들어가기 시작해 1600년 베르니니에 의해 거대한 광장이 이루어짐으로써 완성을 보게 된다.
하늘 위에서 보면 (천국으로 가는) 열쇠 모양이다.
미켈란젤로가 24살에 만들었다는 성모마리아의 비탄상이 방탄유리 너머에 놓여 있고, 베르니니가 80세가 되어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만들었다는 알레산더 7세의 기념비와 그 아래의 조각품이 내부 작품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다.
비탄상이야 워낙 유명해 여기서 다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겠지만 베르니니의 이 작품은 부드러움과 괴기스러움이 한데 녹아 있다.
알렉산더상 아래로 붉은 색 대리석이 마치 주단을 펼쳐놓은 듯 만지면 부드럽게 잡힐 듯이 주름진 아래로 청동의 해골상이 거꾸로 서서 모래 시계를 들고 있는데 이는 죽음의 불가항력을 의미한다는데 죽음 앞에 선 베르니니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베르니니는 청년기에 대성당 돔 아래 제단 앞에 청동으로 만든 천개(天蓋)를 만들기도 한 장본인이다. 이때가 우르바노 8세 교황인데 그는 바르베리니 가문 출신이다.
천개에 쓴 동판들을 판테온 신전의 것들을 뜯어다 사용함으로써 ‘야만인(이태리어로 바르바)도 하지 않은 짓을 바르베리니가 하고 있다‘는 속담이 만들어졌다는데 공교롭게도 베르니니의 이름도 떠오른다.
성당내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베드로 성인상이 의자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 발가락을 쓰다듬었는지 발가락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반질반질거릴 뿐이다.
거대한 성당의 벽감마다에는 예외없이 성인의 모습들이 조각되어 있고, 교황의 무덤도 보였으며, 벽면마다에는 색색의 유리 모자이크 작품이나 대리석 모자이크 작품들이 붙여져 있어 성당 내부를 더욱 화려하게 하고 있다. 또한 움뿍 들어가게 만든 공간은 작은 미사를 집전하게 되어 있었다.
돔 위로도 올라가 로마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우리 일행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쉽다. 성당을 나오면서 광장에 우뚝선 오벨리스크를 보았다. 로마에 있는 13개 중의 하나인데 이국땅 이교도의 광장과 희한하게 잘 어우러졌다.
오른편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아름다운 복장의 바티칸 시티 경비병들이 눈에 띄었다. 교황청이 어려울 때 유일하게 도움을 준 곳이 스위스라 지금도 여전히 스위스 젊은이만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그들이 입는 복장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바티칸 시티를 뒤돌아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이자 기독교인들에게는 장엄한 성지 순례지이리라.
왼쪽 골목길로 접어드니 기념품 가게들이 있다. 한국인 유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로 갔다. 책 몇 권을 고르고, 뭐 좀 특별한 게 없을까 하고 보니 이탈리아 토산품인 유리세공 손목 시계가 눈에 띄었다. 4만원이 좀 넘는 가격이다. 얼마전 딸아이가 손목시계를 사 달라고 했는데 아이에게 잘 어울리는 시계인 것 같았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그냥 나왔다.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영화 ‘로마의 휴일’을 따라
중국식당에서 마파두부와 쌀밥으로 점심을 먹고 스페인 광장으로 갔다.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의 얼굴이 교차되기 시작하는 곳이다. 스페인 대사관이 근처에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로마의 정취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햇볕이 나서인지 분수 주변과 광장 계단에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광장과 통하는 골목들은 로마의 팻션 거리이자 명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그 사이에 그레꼬라는 카페가 있는데 1760년에 문을 연 유서깊은 카페란다. 카푸치노커피가 특별히 맛있는 곳이라 마셔보기로 했다. 자리에 앉아서 마시면 4달러, 서서 마시면 1달러라고 한다. 당연히 후자 쪽이다. 우리의 키메라가 커피를 주문하고 있는 사이 카페 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긴 통로처럼 생긴 아담한 커피하우스인데 오래된 그림들이 빼곡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집의 유물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해도 팔지 않는 그림들이라고 한다. 이 집의 웨이터들은 연미복을 입은 노신사들인데 이곳에서 20년 이상을 일해야만이 입을 수 있는 권위있는 복장이라고 한다.
전통의 멋이 한껏 담긴 커피하우스이다. 한바퀴 구경하고 나오니 주문한 커피가 나와 있었다. 마셔보았다. 여지껏 마셔본 카푸치노 가운데 단연 최고의 맛이었다. 진한 크림향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옛날 골목길을 따라 트레비분수 일명 애천분수로 갔다. 가는 도중 어느 가게 앞에는 ‘로마의 휴일‘ 영화 장면들이 빛바랜 채 걸려 있기도 했다.
분수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거대한 조개마차에서 내리고 그 아들인 전령신 트리톤이 뿔고동 나팔을 불어 강의 신들에게 포세이돈의 뜻을 알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분수 뒤편의 건물과 분수 바닥, 조각 작품들 모두가 거대한 한 덩어리의 대리석 위에 새겨진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감탄을 하며 돌아보다가 분수에 던질 동전을 찾아보니 없었다.
분수 오른쪽에는 세계에서 최고로 맛있다는 아이스크림집이 있었다. 비싼 것도 아닌데 맛보지 않고 그냥 갈 수 있나. 하나 사서 먹으면서 햅번이라도 된 양 폼재고 사진도 찍어두었다. ‘딸 아이가 이 사진을 본다면 어지간히 샘을 내겠지!‘
로마 시내는 전지역이 그대로 유적이라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과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 몇 개를 골라 적는 수 밖에 없다. 시내에 있는 집들이 최소한 2∼3백년은 된 건물들이고 절대적으로 신축은 할 수 없으며 보수를 하거나 색을 새로 칠할 경우 로마 당국의 허가를 받은 뒤에나 가능한데 그것도 지정된 색깔 이외에는 쓸 수도 없다. 문화유적을 관리하는 방법이 철저하다.
도로도 옛날 로마 제국 시절에 만들어놓은 그대로를 쓰고 있는데 길이 20∼30cm의 사각형 돌들을 땅에 박은 길이다. 말을 달릴 때 ‘따각 따각‘하는 소리가 잘 울려퍼지게 하기 위해서란다. 로마제국의 위용을 나타내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지금도 굳이 도로를 아스팔트 등으로 바꾸지 않는 이유는 유적 보호라는 이유도 있지만 혹시라도 하수도 공사를 하더라도 돌들을 들어냈다가 다시 박아두면 되므로 경제적 편의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길이기 때문에 도로에 차선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별다른 접촉 사고 없이 잘 다닌다는 것이 이탈리아 방식이다. 그리스와 비슷한 점이다.
이어서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을 겉에서만 돌아보고 그 앞쪽에 있는 개선문을 훑어보았다. 옛날 로마의 도로와 이어진 곳에 있는데 파리 개선문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 왼쪽으로는 캄피돌리오 언덕인데 돌아서 그 아래에 있는 원로원과 또하나의 개선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직도 유적을 발굴 중인 곳이다.
그 위로는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는 통일기념관도 있었다. 중간에 가다가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 보았다. 그레고리 팩과 오드리 햅번의 장난이 떠오른다. ‘진실의 입‘은 둥그런 탓에 한때 하수도 뚜껑으로 쓰이기도 했단다.
카피톨리니 박물관
캄피돌리오 언덕 광장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 모조품이 있는데 진품은 옆의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이 박물관은 청동 박물관으로 유명하다는데 그냥 지나칠려고 한다. 가보자고 했더니 다들 시큰둥하다.
희망자만 가기로 했는데 나와 또 한 동료의원밖에 없었다. 30분을 예정하고 돌아보기로 했다. 기마상은 워낙이나 커 별도의 유리방에 넣어두고 밖에서만 볼 수 있게 했다. 이탈리아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이리의 젖을 먹고 자라나는 모습을 담은 청동조각품은 물론 많은 대리석 인물상들과 신상들이 즐비한데다 아름답게 조각을 넣은 다양한 종류의 석관들도 많았다. 놓쳤더라면 정말 서운했을 것이다.
하얀 대리석상들을 보면서 거기에 따뜻한 피만 흐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일까를 생각해보았다. 퓌그말리온이 자기가 만든 대리석 여인상이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사랑하게 되고 그녀가 정말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그 애절한 마음이 아프로디테를 감동시켜 대리석 여인상은 정말 사람들으로 환생하여 퓌그말리온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신화가 있다. 대리석상을 바라보고 있다보면 누구든지 그런 생각을 갖게 될 정도로 정말 완벽한 인체를 표현하고 있었다.
바쁜 마음에 서둘러 보고 자세한 내용은 ‘카피톨리니 박물관‘ 책을 사서 떼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키메라씨가 우리를 찾으러 왔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 사이 일행들은 베네치아 광장과 통일기념관을 둘러보았다고 한다.엊저녁 식사를 했던 식당에서 저녁을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은 여전히 서늘했다. 난방을 최대한 돌려보지만 시끄러운 바람 소리만 났다. 도로 꺼버렸다.
<출처 : 家苑 문화유적답사 문집 (해외편) : http://tae11.org 2004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