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을 침략하다
전국시대의 혼란에 빠져 있던 일본을 최종적으로 통일한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쓰시마 도주 소씨(宗氏)를 호출하여 조선의 일본 복속 교섭을 명령하였다. 그는 조선을 복속한 후, 조선을 길잡이로 삼아 명을 침략한다는 망상적 목표를 추진하고자 했다. 오랜 기간 조선과 무역을 해왔던 쓰시마는 조선이 응할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쓰시마는 히데요시의 요구를 통신사 요청으로 바꾸었고 교섭 끝에 조선의 허락을 받아냈다. 조선은 선조 23년(1590)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종사관 허성으로 구성된 통신사를 파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복속사절로 생각하고 거만한 자세로 접견했다. 히데요시를 만나고 귀국한 통신사 일행 중 황윤길과 허성은 그의 침략 가능성을 전했지만, 김성일은 그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이는 여론이 혼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남부지방의 수비를 보강했다. 그러나 이는 소극적인 대책이었다. 조선은 일본 전체의 국력을 동원한 대규모 전쟁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선봉으로 한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에서는 정발이, 동래에서는 송상현이 이들을 막아섰으나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정은 최정예부대였던 신립의 군대를 내보냈다. 하지만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피난을 결정했다. 선조는 4월 30일 한성을 떠났다.
일본군이 평양에 임박하자, 선조는 한반도의 서쪽 최북단인 의주로 향했다. 선조는 의주 도착 전부터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요동으로 가려고 하였다. 확실하게 명나라의 보호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신하들은 이에 반대했다. 이덕형은 국왕의 요동 피난 여부를 물었으나, 명으로부터 의주에 머물되 부득이하면 최소한의 인원만 들어오라는 답변을 들었다. 또한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위로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의병봉기를 촉구하게 하였다. 임해군과 순화군도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냈으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북상하던 일본군은 한성에 모여 회의를 가진 뒤, 고니시의 군대는 평안도 방면으로, 가토의 군대는 함경도 방면으로 북상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일본군은 각자 다른 도를 맡아 조선 지배를 시도했다.
수군·의병의 활동과 명군의 원조
의주로 피난한 조정은 8월 24일 정곤수를 명에 파견하여 구원병을 요청하게 했다. 명은 조선이 일본군과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품기도 했으나, 곧 구원을 결정했다. 200년간 명나라에 충성을 다한 조선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였다. 요동에 있던 조승훈의 부대가 파견되었으나 일본군을 가볍게 보다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자, 명 조정은 송응창과 이여송이 이끄는 대규모 부대를 파견하였다.
관군의 참패로 남부지역 대부분을 일본군에 내주었으나, 전세를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수군을 이끌고 5월부터 전투를 개시했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억기, 권준, 이순신(李純信) 등도 이순신을 도와 활약했다.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은 한산도에서 일본 수군에 대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해로를 통한 수송이 어려워지고 곡창지대를 점령하지 못한 일본군은 군량을 현지에서 마련한다는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수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경상도에서는 곽재우·정인홍 등이, 전라도에서는 김천일·고경명·최경회 등이, 충청도에서는 조헌, 함경도에서는 정문부, 황해도에서는 이정암, 평안도에서는 조호익, 양덕록, 경기도에서는 홍계남 등이 봉기하였다.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 영규 등이 승병도 일어났다. 이들은 일본군과의 전면전보다는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무너졌던 관군도 재정비 후 여러 전투에서 성과를 올렸다.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대표적이었다. 의병들의 활동과 보급의 어려움은 일본이 강화교섭을 시도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은 1593년 1월 8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던 평양성을 탈환했다. 일본군은 평양과 개성을 버리고 한성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을 가볍게 여긴 이여송은 소규모 부대만으로 한성으로 진격하다가 벽제관(경기도 고양시)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이여송은 겁을 먹고 군량 부족을 이유로 개성으로 후퇴했다.
강화교섭과 정유재란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여송과 일본군은 강화교섭에 나섰다. 강화교섭은 명의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서 추진되었다. 명은 일본군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했고, 히데요시는 조선의 왕자나 조선의 영토 할양을 바라고 있었다. 교섭의 결렬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은 명나라가 공격을 포기하고 강화교섭 노선을 취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으며, 강화교섭에 조선이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사실에 분노했다.
1596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왕으로 책봉하기 위해 명의 책봉사가 오사카성에 도착했다. 조선에서도 이들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사절을 보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섭 조건에 불만으로 조선사절과 접견조차 거부했다.
명 조정은 히데요시가 군대를 철수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도요토미는 책봉은 달갑게 받아들였으나, 자신이 바라던 전리품을 얻지 못하자 재침을 결심하였다. 그는 명에 보내는 문서에서 조선 사절이 일찍 사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협상을 방해했다는 등 재침의 원인을 조선에 돌렸다.
1597년 2월에 다시 조선에 상륙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7월부터 북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충청도 직산(천안)에서 접전을 벌인 후 퇴각하였다. 퇴각한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해안에 튼튼한 기지를 세운 후 장기주둔 태세를 취했다. 또한 조선인에 대한 코와 귀를 베는 행위 등 폭력성이 농후해졌다. 조선에서 베어간 코와 귀는 교토의 귀무덤에 묻혀있다.
전쟁이 재발하면서 잠시 조선에서 물러나 있던 명나라 군대도 다시 파견되었다. 양호가 이끄는 명군은 강화교섭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를 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1597년 12월 말부터 시작된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패전 위기에 몰렸으나, 추운 날씨와 마침 도착한 구원군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울산성 전투 후 일본군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해상의 주도권 역시 조선 수군이 쥐게 되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의 사후 정치를 담당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하 다섯 명의 다이로(大老)들은 일본군에 철수를 지시했다.
전쟁의 종결과 피해
일본군들은 각자 안전한 철수를 위해 명군과 철수 교섭을 시작했다. 일본군을 해안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던 명군도 교섭에 응했다. 조선은 이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순신은 명군의 일본군 철수 보장을 무시하고 일본군을 막으려 했다. 순천왜성에 고립되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이들을 추격하여 접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하였다. 전사 소식을 들은 명군 수군도독 진린이 통곡하였다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였던 순천왜성을 마지막으로 일본군들은 각자의 요새에서 철수하여 부산으로 집결하였고, 이후 더 이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로써 임진왜란은 종결되었다.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조선이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농토는 황폐해졌으며, 인구도 급감하였다. 수많은 백성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경복궁, 종묘, 불국사 등 문화재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실록과 실록을 작성하기 위한 사초, 그 외에도 많은 문서가 소실되었다. 유성룡은 전쟁 기간 중의 경험을 《징비록》으로 남겼다.
첫댓글 임진왜란에 대한 주요사실이 간략하게 잘 정리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