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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 3차 논제
■ 논제 :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에서 결격 사유가 되어야 하는가. 찬반을 밝히고 그 이유를 논하시오.
# 1.
‘반장 네가 대표로 결정해.’ ‘반장 네가 대표로 혼나자.’ 초등학교 시절, 반장을 맡았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두 문장이다. 청렴결백(淸廉潔白). 누군가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왜 이러한 특성은 공직자들에게 더 요구되는 것일까. 이는 이들이 국민들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민들을 대표해 중요한 정책에 대해 논의하고, 주요 현안의 해결방안을 결정하며 국민들을 대표해 외교에 나서기도 한다. 선거가 존재하는 의미, 그들이 자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이처럼 누군가를 ‘대표’하는 것은 여러 권리가 주어지는 동시에 막중한 의무와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선거철이 되면 자극적인 보도가 난무한다. 대부분의 보도는 특정 후보자의 과거 행동, 후보자 가족의 부정행위 등에 관한 것이다. 후보자는 후보자의 직계 존비속이 행한 부당한 행위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근거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설치 목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수처는 공직사회의 특혜와 비리를 근절하여 공직사회의 신뢰성을 높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국민에게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부정행위를 저질렀지만 공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사실이 은폐되는 상황은 왕왕 발생한다. 동시에 익명의 누군가는 이유도 모른 채 경쟁의 기회를 빼앗기기도 한다. 과거에서부터 최근까지 가족의 부정행위로 인해 후보 자리에서 물러난 사례는 많았다. 자리의 위상에 상응하는 엄중하고 치밀한 기준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 글로리, 약한 영웅, 피라미드 게임. 모두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빈도가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학교 내외의 장소나 온라인 상에서 특정 학생을 대상으로 신체적, 심리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주는 학교폭력은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기에는 작은 일들도 크게 와닿기 마련인데, 이 시기 때 겪은 참혹하고도 잔인한 일은 한 성인으로서의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학교폭력을 멈추라는 수많은 캠페인과 광고가 만연한 현실이지만, 여전히 근절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폭력의 처벌 수위는 강화되어야 하며 형사 처벌이 가능한 나이의 하한선은 더 낮아져야 한다.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고위공직자 임명과정에서 명백한 결격사유다. 설령 자녀의 행위가 형사처벌을 받은 행위가 아니었을지라도, 그것이 국민의 정서에 반하고, 피해자가 명백하게 존재한다면 고위공직자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작년 2월 정순신 변호사는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취임 하루 전 아들의 학교폭력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는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대통령실은 고위공직자 인사검증 과정에서 자녀의 학교폭력을 비롯해 직장 내 괴롭힘, 성인지 감수성, 약물 오남용 여부 등을 확인하는 등 자격 요건을 대폭 강화했다. 혹자는 ‘본인’도 아닌, 철없는 ‘자녀’의 실수 때문에 고위공직자의 자리를 박탈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오래된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준 자녀를 양육한 자가 국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리에 올랐다는 두 명제는 꽤나 모순적이다. 고위공직자의 자격에 대해 재고해볼 시간이다.
# 2.
고위공직자가 임명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이러한 인사청문회에서 주요하게 보는 결격기준은 위법성, 도덕성, 개인의 능력 등이 있다. 결격기준 중 자녀가 학교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고위공직자 임명과 결부되는 것은 도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성은 범죄성립 요건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민을 대표해 나라의 굵직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고위공직자로서, 국민정서에 바람직하지 않는 행동을 저질렀다면 마땅히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그러나 이 도덕성 기준으로서 자녀의 학교폭력 사실이 고위공직자 임명에 결격 사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연좌제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좌제는 폐지됐으며, 자신이 저지른 죄가 아님에도 헌법 상의 권리인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그 어떤 이유도 되지 않는다. 성폭행범의 공무원 및 교육기관 취업 자격을 제한하는 것은 '그'가 직접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자녀의 죄로 부모가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자유 보장, 즉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보장은 법에 규정된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보다 앞서 지켜져야 한다.
물론, 고위공직자 당사자의 자녀 학교 폭력 사건 개입 시도가 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 것은 더 이상 자녀만의 문제가 아닌, 고위공직자 당사자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학교폭력 문제는 아니지만, 자녀 문제로 똑같이 논란이 됐던 조국과 한동훈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자녀 특례입학 문제는 어떻게 보면 자녀만의 문제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입학 과정에 '직접' 개입해서 논란이 된 경우다. 이 때문에 조국은 인사청문회는 통과했으나 취임 한 달여 만에 사퇴하기도 했다. 이들 사건은 공직자 당사자의 도덕성 결여가 그 원인이 된 것이다.
연좌제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친족 혹은 지인이라는 이유로 처벌 받는 것을 의미한다. 4.3 사건 당시 학살당했던 피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취업 등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고 감시당했던 제주도민이 그렇다. 5.18 민주화 혁명 당시 시위에 참여한 가족을 두었단 이유로 '빨갱이'로 몰렸던 이들이 그렇다. 이들의 사례로 확인해 보았을 때,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인권이 중요시되는 민주주의 사회에 맞지 않는 가치라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와 같이 연좌제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뺏는 것을 4.3, 5.18 피해자의 입장으로 바라봐야 한다. 독재 정부의 상징인 전두환이 1990년 연좌제를 폐지한 것처럼, 구시대적 유물인 연좌제는 철 지난 시스템일 뿐이다. 고위공직자의 결격기준인 도덕성을 30년 전에 없어진, 개발도상국의 연좌제가 아니라, 21세기의 연좌제가 폐지된 선진국으로서 도덕성의 기준을 명확히 세워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 3.
가족이 죄를 지었단 이유로 같이 벌을 받는 연좌제는 사회적인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으나 법적으로 폐지된 것이다. 공직자의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를 한 사실과 그 공직자가 고위공직자로 임명받는 것은 전혀 별개의 명제이다. 둘을 한 가정의 소속이기에 완전히 관계가 없다고 보긴 어려울 수도 있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은 전혀 다른 인격체이다. 다른 한 측이 저지른 잘못을 서로에게 전가하는 것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부모가 자식을 온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린아이가 물건을 부쉈을 때, 보호자의 감독 여부는 법적인 책임을 질 때 주요 쟁점이다. 보호자가 감독을 부실하게 하였을 경우 그 책임을 부모가 진다. 반대로 보호자가 감독을 충실하게 해도 막을 수 없던 우발적인 사고라면 그 중간과정에서 벌어진 일의 책임은 온전한 부모의 몫이 아니게 된다. 학교폭력도 이와 같다. 학교라는 부모가 온전히 배제된 공간에서 자식이 하는 잘못은 부모가 개입하고 저지할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자식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를 복구하기 위한 책임을 질지언정, 자식이 학교폭력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부모의 직업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한국에는 직업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 공직자 역시 하나의 직업이다. 이 직업선택에 있어서 가족의 죄는 결격 사유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살인자의 자식을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으며, 취업에 있어서 불이익을 주지도 않는다. 학교폭력을 저지른 자식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로 저러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정작 이러한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 횡령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고위공직자는 내부 징계로 끝내는 일이 허다한데 고위공직자 당사자가 저지르지도 않는 죄로 직업선택에 있어서 불이익을 받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부모의 직업이 공직자라는 이유로 자식이 우대를 받는 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자식의 잘못이 부모의 불이익이 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학교폭력이 사회의 관심을 받고 잘못된 행동임을 모두가 인지하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부모의 불이익이 되는 것은 부모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이고, 하나의 사적 제재이다. 밀양 집단 성폭행범이 정당한 법의 처벌을 받지 못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었지만, 유튜버와 같은 개인이 이것을 처벌하기 위해 신상을 유포하는 것은 엄연한 범죄이고, 가해자의 여자친구에게 집단적인 사이버 괴롭힘을 거는 것, 전혀 엉뚱한 사람의 신상이 유포되는 것과 같이 무고한 피해를 만들기도 하였다. 사적 제재를 가하는 것 자체도 잘못되었을뿐더러, 전혀 엉뚱한 피해자가 생기기도 한다.
고위공직자는 사회의 공인이다. 다른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보다 더욱 청렴할 것을 요구받고, 실제로 품위 유지의 의무도 존재한다. 당사자가 하지 않은 잘못은 의도하지 않은 품위 손상이며, 고위공직자는 피해자이다. 또 다른 방향의 피해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전혀 올바르지 못한 방향이고, 고위공직자의 직업에 피해가 가서는 안 된다.
# 4.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 관념은 현재도 유효한 통찰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는 국민을 닮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만백성이 '수신'과 '제가'에 힘 쓸 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한 관념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선 해당 개념을 기계적으로만 해석해 공직자에게만 과잉 적용하고 있다. '제가'를 올바르게 못했으면 '수신'도 부적절 할 것이므로 '치국'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해당 개념의 본뜻을 오해한 것이다. 또한 공직자 윤리를 지나치게 강조해 유능한 이가 사소한 흠결로 인해 국정에 참가할 기회를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다. 따라서 공직자 평가 기준에는 자녀가 일으킨 물의가 포함돼선 안된다. 공직자 윤리 문제는 공과 사를 분리해 판단해야 한다.
한국에서 공직자 윤리는 엄중한 사안인데, 주로 정서적인 이유에서 그렇다. 인사도 통치행위이므로, 국민들의 정서와 괴리된 인사를 하면 민심을 반영하지 않는 통치를 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후보자 자녀의 학교 폭력 문제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정권 차원에서도 치명타다. 학교 폭력은 한국 사회에서 정서적 거부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 정서에 근거해 인사라는 통치행위를 하게 되면 대의제의 취지와 어긋나게 된다. 전체 국민의 이성과 감성 총합이 국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국익 훼손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래서 '통치자는 피치자의 의사에 귀속되지 않고, 피치자들의 추정적 동의를 바탕으로 그들을 자유롭게 대표한다'라는 일종의 필터링 요소를 대의제에 가미 한 것이다. 대의제 본질 상 인사는 국민 정서와 반대로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점에서, 공직자 자녀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 당사자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해당 공직자의 능력이 출중하고, 자신의 지위나 권한을 이용해 사건을 무마하지만 않으면 된다.
또한 공직자 윤리의 지나친 강조는, 우수한 인재가 공직에서 일할 기회를 뺏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36대 대통령, 린든 존슨은 <TIME>지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욕쟁이 대통령이었다. 문제적인 여성 편력이 많았고, 백악관 직원들에겐 일상적으로 서류를 집어던지는 등 고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를 선포하며 각종 복지제도를 창설했고, 사회보장지출을 대폭 늘렸다. 또한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보장한 '짐 크로(Jim Crow)법'을 폐지하고, '민권법' 제정을 통해 흑인의 실질적 법적 평등도 이뤘다. 암살 당한 전임자의 계획을 승계해 아폴로 프로젝트도 달성했다. 린든 존슨의 재임기간은 미국에서 'The Great Society(위대한 사회)'로 불린다. 만약 유권자들이 그의 비윤리적인 인격에만 집중했다면 그가 국정을 수행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공직자의 능력보다 도덕성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면, 유능한 인재가 내각에서 활약할 기회를 뺏는 것이고, 유권자 스스로 민복증진의 기회를 놓치는 것과 같다.
물론 학교 폭력 문제가 있는 자녀를 둔 후보자는 꺼려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럴 때도 후보자의 능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하면, 공인일 때와 사인일 때 면모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다. 공직자에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는 위기대응능력이다. 예컨대 자녀와 관련한 이슈가 발생했다고 가정할 때, 이에 대응하는 방식을 중점적으로 봐야 한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자녀를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처리하며,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피해보상이나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등,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해당 후보자에게 위기대응능력과 최소한의 수오지심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직접적으로 저지른 오류가 아닌데도 책임지려는 모습을 통해 무한책임 태도라는 공직 윤리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대응하는 인물은 입각시켜선 안된다. 결국 업무 능력 평가가 곧 공직자 윤리 평가다. 사인일 때 면모나 자녀 문제까지 평가 요소에 넣는 등의 공직자 윤리 강조는 지양해야 한다.
# 5.
고위공직자는 국민을 대신해서 국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고위직일수록 사실 판단보다는 가치판단의 여지가 많아진다. 그들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자신의 가치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위공직자는 자신의 언행과 결정이 타당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할 책무가 있다. 책무성이 있는 고위공직자가 자신의 결정과 언행에 대해서도 아닌 사적인 일에 대해서 변명하고 해명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는 아들의 학교폭력 문제로 25일 만에 사퇴했다, 정 변호사 아들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재심과 재재심을 거쳐 전학 처분을 받았지만, 당시 검사였던 정 변호사가 직접 나서 전학 처분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 했고 인맥까지 동원해서 변호를 했다. 결국 패소했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아들은 전학 처분이 결정된 시점에서 약 1년이 지난 후에야 학교를 옮겼다. 재판 기간 동안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저지른 셈이나 다름없다. 고위공직자는 그 역할 자체가 대표성을 띤다. 국민 모두에게 존경 받지 않더라도 질타 받을 행동은 해선 안 된다.
요즘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어떤 아파트 사는지 물어보는 게 관례라고 한다. 비싼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끼리 친해지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소외되거나 심하면 왕따도 당한다. 어른뿐만 아니라 이제 자녀들까지도 어린 나이에 피라미드 구조를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는 반 배정표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는데 아이들 이름 옆에 아파트 이름이 적혀 있어서 논란이 됐다. 수억 원 차이가 나는 아파트 공개는 부모의 재력을 공개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고 모두가 평등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만약 고위공직자의 자녀가 학교폭력 전적이 있는데도 임명과정에서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다면 이런 피라미드 계급 사회를 만든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이다. 피라미드 위에 있더라도 충분한 자격이 있다면 그 누가 피라미드 꼭대기를 보고 욕하겠는가.
피라미드 계급 사회를 당장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위로 올라갈 때 공정하고 청렴하게 올라가야 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말이 있듯이 윗물부터 고이기 시작하면 아랫물은 물조차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에서 설문지로 자녀의 학교폭력을 묻는 질의가 추가 되었다고 들었다. 질의뿐만 아니라 이제는 철저하게 자녀들의 범죄 여부와 학교폭력까지도 추적 조사해야 한다.
# 6.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에서 결격 사유가 되어야 한다. 흔히 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번진다고 하지만, ‘학교폭력’은 심각한 범죄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응답하는 비율은 매년 증가하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 학교마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꾸려지고, 현재는 교육청의 학교폭력심의위원회로 이관되며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학교폭력 가해자의 부모가 사건을 무마하려 하거나 고위공직자로 임명된다면 피해자는 더 큰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공직자는 ‘공직자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2023년 2월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아들의 학교폭력 문제로 사퇴한 정순신 전 변호사는 자녀의 처벌을 피하고자 소송까지 진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권력형 학폭 무마’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국수본부장은 경찰청장 바로 밑 직급인 ‘치안정감’에 해당하는 고위 직급이다. 고위직급인 만큼 높은 도덕성과 자질이 요구된다. 논란 이후 대통령실은 홈페이지에 ‘공직 예비후보자 자기검증 질문서’를 공개했고, ‘공직자로서의 품위’ 항목을 새로 포함했다. 공직자는 국민의 수임을 받아 공직을 수행하는 자로서 바람직한 행실과 태도를 보여야 한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은 권력 사회를 더 견고하게 만든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김승희 대통령실 전 의전비서관 등 주요 공직 자 자녀의 학교폭력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그 권력은 올곧은 시민을 길러내야 할 학교를 흔들면 안 된다. 엘리트층의 특권의식 문제가 불거지는 상황에서 부모가 고위공직자일수록 그 잣대는 엄격해야 하는 이유다. 도덕성이 국민 눈높이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장관들로는 신뢰를 얻을 수도, 국민 통합을 이뤄낼 수도 없다. 기회가 균등한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한국 사회가 부모의 부와 권력이 자식에게 곧장 이어지는 불평등한 계급 사회였다는 점을 노출했다.
공직사회의 처벌 강화를 보면 그 사회의 방향이 보인다. 지금 사회는 공정과 정의에 대한 요구가 과거보다 활발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마저 ‘공정과 상식’을 강조하는 상황이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고, 가해자가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많아졌다. 국민 정서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다. 자녀의 잘못을 부모에게 전가하기 보다, 권력을 가진 부모 덕분에 잘못을 무마시키는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아빠 찬스’라는 큰 틀 안에서 반복되는 불공정은 청년들에게 무력감을 준다. 학교폭력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이 사회의 공정과 상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 7.
가화만사성,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 누군가의 자녀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라는 사실은 해당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부모가 자녀를 방치하거나 또는 자녀의 잘못을 묵인하거나. 이 두 상황은 모두 부모가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고위공직자가 가진 책임은 한 가정을 돌보는 것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가정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라의 일을 맡기는 것엔 무리가 있다.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에서 자녀의 행실을 확인하는 것은 새로운 역할을 맡기에 앞서 기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 왔는지를 묻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녀의 비행이 부모의 무관심에서 비롯됐다면 책임의 문제, 부모의 과잉보호에서 비롯됐다면 공정의 문제가 대두된다. 2023년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의 낙마는 공정의 문제가 대두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인 정변호사의 자녀는 명문대생이 되었고, 피해자 학생은 학업을 중단했다는 사실이 국민에 알려지며, 불공정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국민들은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사적영역에서의 불공정은 결국 공적영역에서의 불공정으로 이어질 것임을 염려한 것이다. 결국 정변호사는 자녀의 학교폭력으로 처음 낙마한 고위 공직자가 되었다
물론 기존 한국에서 학교폭력은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으로 해석되어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지 못했다.
하지만, 학교폭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문제가 심화되고 실존하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학교폭력은 검증의 잣대가 되었다. 이제 국민의 눈높이에서 학교폭력은 더 이상 단순한 어린아이들의 싸움이 아니다. 2023년에 방영된 드라마 '더 글로리'의 시청 반응을 보면, 시청자가 단순히 가해자들에게만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해자를 극한의 피해자로, 가해자를 영광의 가해자로 만든 그 부모들에게도 분노를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한 동네 치킨집 사장의 자리가 아닌,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는 고위공직자는 학교폭력이라는 검증의 잣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젠 자녀의 비행이 부모의 입신양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말이 되는가를 묻기보다는, 새로운 검증 잣대인 학교폭력에 어떤 기준을 세울 것인지 논의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현재 고위 공직자 검증 과정에선 본인 또는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를 숨겨도 공식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따라서 누군가의 폭로로만 검증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다. 따라서 제도적인 부분을 마련해 검증할 수단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제 공직자가 나라를 둘러보기 위해선, 나라보다 가정을 둘러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 8.
1980년 사회적 요구에 따라 연좌제는 폐지됐다. 헌법 13조 3항에는 자신이 아닌 친족의 행위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이 명시돼있다. 여기서 말하는 불이익은 단순히 법률적 불이익 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경제적, 행정적 불이익을 포함한 폭넓은 불이익을 가르킨다. 그러기에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에서 단순히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결격 사유가 되는 것은 국민 정서와 헌법에 위배되기에 옳지 못하다.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에서는 주변인의 결점을 찾는 것보다 후보자가 고위공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느냐를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위공직자의 주된 역할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조직을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검증하는 데 있어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이 결격 사유가 될 수는 없다. 혹자는 자녀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데 조직을 이끌 수 있겠냐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자녀의 일탈은 자녀의 자율성을 존중해줬기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공직사회에는 아직까지도 가부장제의 병폐가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기에 공직사회에는 조직원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는 가부장적이지 않은 자가 더 필요하다.
고위공직자의 책임에는 크게 결과에 대한 책임과 윤리적인 책임이 있다. 자녀의 학교폭력 사건 처리 과정 속에서 후보자가 개입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이 과정 속에서 개입이 없었다는 것은 발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직사회에는 좋지 못한 결과에도 책임을 지는 자가 필요하다. 또한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이 공개된 점 역시 중요하다. 약점이 될 수 있는 사안이 공개됐다는 것은 그만큼 투명성이 담보된다는 것이다. 이는 후보자가 윤리적 책임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자녀의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점을 통해 오히려 후보자가 고위공직자의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
후보자의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통해 사회는 학교폭력이라는 사안을 공론화 할 수 있다. 나아가 후보자가 고위공직자로 임명됐을 때 학교폭력 발생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촉구할 수 있다. 후보자 검증 과정 동안 학교폭력이라는 사안의 무게를 몸소 체감했기에 관련 문제를 위해 힘 쓸 당위성이 충분하다. 자녀의 사유가 아닌 후보자 본인의 자격 검증을 거쳐 고위공직자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검증해낸다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기대할 수 있다.
나아가 고위공직자 검증은 후보자 개인에게 한정돼야 한다. 주변인에 대한 과도한 검증 절차는 정치적 목적으로 자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고위공직자의 역할과 책임과는 관련 없는 한 가정 혹은 공동체의 사회적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 검증 과정 속에서 발생한 폭력을 이미 목도한 바 있다. 후보자 검증 절차는 후보자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판단해 사회를 위해 힘 쓸 사람을 선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정치적 목적은 설 자리를 잃어야 한다.
# 9.
고위공직자 자녀의 학교폭력 논란은 책임에 대한 문제다. 공직자는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직업적인 행동 뿐만 아니라 가정 안에서의 역할에서도 모범이 돼야 한다. 자녀의 행동은 부모의 모습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고위공직자의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은 도덕성의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에 충분하다. 자녀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는 공직자는 국민의 신뢰를 얻기 힘들다. 따라서 학교폭력 논란이 인사 검증 문제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녀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서울대 검사 출신 정순신 변호사는 아들이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했다. 정 변호사의 자녀는 다른 학생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학습권을 침해했다. 정 변호사는 강제전학 처분을 당한 아들을 위해 1여년 동안 소송을 진행해 3학년이 되어서야 학교를 옮겼고, 정시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반면 피해 학생은 2년간 학교에서 정상 수업을 받은 날이 단 2일에 불과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까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만약 강제전학 처분을 받았을 때, 진정으로 사과하고 처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학생이 교육받을 기회를 뺏어가면서도 가해학생은 권력을 가진 부모님을 이용해 법과 제도를 유리하게 사용하는 것은 근절되어야 한다.
공직자를 검증하는데 자녀 문제까지 등장하는 것은 과하다는 반론이 있다. 고위공직자는 정직하고 투명해야 한다. 이를 생각하면 과할 정도로 검증을 하는 것이 피해학생의 2차 가해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고위공직자로 정 변호사가 임명되는 것은 가해학생의 부모인 것을 모를 리 없는 피해학생에게는 떠오르기 싫은 기억을 생각나게 하는 고통일 것이다. 전직 청와대 행정관은 “탈탈 털어도 털 수가 없는 게 인사검증이죠.”라고 말했다. 고위공직자의 인사 검증 과정에서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까지 총동원해 조사한다고 해도 한 사람의 모든 ‘서사’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배우자나 직계 존비속과 관련한 사건들을 조사해야 하는 거다. 과하다는 여론이 있다고 해도 2차 가해나 반복으로 인사를 임명하는 등의 추가적인 부담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한때 한솥밥을 먹던 동료의 과오에 대해 몰랐다는 대답은 국민들이 믿기 힘들다. 윤석열 대통령은 인사 검증이 실패한 것에 대해 문책하지 않고 있다. 대신 ‘대책 마련이 우선’이라며 교육부 장관에게 ‘학폭 종합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책임도 크다. 검찰 출신 인사 검증라인에 의한 허술한 인사 검증을 개선해야 한다. 고위공직자 자리를 탐하기 전에 민정수석실이 하던 인사검증 업무를 법무부와 나눠 책임소재를 확실히 해야 한다. 누구의 책임도 아닌 일로 마무리되는 것은 또다른 피해를 생성한다.
# 10.
군자는 청렴을 신조로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다.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명재상으로 평가되는 황희는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지만 자식들의 호가호위는 막지 못했다. 자식들은 횡령과 절도 행각으로 직첩이 회수되었지만 황희는 직첩을 회복해 줄 것을 임금에게 호소했다. 유학의 부자유친에 입각한 것이다. 이런 행각은 현대 사회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게 나타났다.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정순신이 학교폭력 가해 아들을 감싸 큰 논란이 됐었다. 이들이 자식을 감쌀 수 있던 것은 권력에 있다. 권력은 이들로 하여금 잘못된 행동을 은폐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고위공직자에게는 엄격한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고위공직자에게 더 많은 윤리적 책임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이유는 권력을 남용하지 않을 만한 도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직자의 도덕성은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적 도덕성이 존재한다. 도덕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공직자는 보여지는 사회적 도덕성을 우선해야 한다. 고위공직자는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로, 국민들의 신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위선마저 사라진 공직자는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고 볼 수 없다. 공직자는 위선일지라도 자신과 자신 주변의 행태를 살피고 돌봐야 한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신념윤리는 신념 실현을 달성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수단을 선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책임윤리는 행위로부터 예견되는 결과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줄 아는 태도가 더 중시된다. 정치인에게는 책임윤리 실천이 우선이다. 자신이 공직자라는 직업을 택한 이상 가족의 잘못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생각하고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와 자녀는 독립된 개체다. 그러나 고위공직자 부모와 자녀는 서로 연루된 주체다. 직접적으로 서로의 잘못에 가담하지 않아도 부모,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관계다.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오로지 그가 한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정당하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위공직자와 그 자식의 관계는 일반적인 책임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위공직자는 사회적 신뢰와 도덕적 권위를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이로 인해 그들의 가족 구성원 역시 일정 부분 사회적 책임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가 저지른 행위가 부모의 공직 수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부모의 윤리적 책임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한다. 이 운동장에서 일어나는 게임의 승자는 항상 정해져 있다. 고위공직자의 자녀는 부모의 지위와 자원을 통해 다양한 특권과 혜택을 누리며 출발선에서부터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위공직자 자녀가 저지른 잘못은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기 어렵다. 따라서 고위공직자로 임명 과정에서 윤리적 책임을 더욱 무겁게 요구하고, 자녀의 행동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책임지게 해야 한다.
# 11.
국민은 고위공직자에게 전문성과 도덕성을 요구한다. 고위공직자는 업무를 깊이 이해하고 효율적이고 혁신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유능함과, 사적 이익이 아닌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청렴한 공직사회를 만드는 데 솔선수범하는 도덕성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고위 공직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할 때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가 있다. 가족의 불법행위는 후보자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어린 나이에 약자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자녀의 행동이 부모로부터 비롯되지는 않았을지 우려한다. 하지만 자녀의 비도덕적 행동을 근거로 부모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데엔 무리가 있다.
학교폭력 사실 그 자체보다는 부모로서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만약 후보자가 자녀의 학교폭력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회적 지위를 악용해 사건을 무마하려 하고 피해학생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면 그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정 변호사가 아들 학교폭력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법조계 인맥을 동원해 ‘2차 가해’를 저지른 사실이 밝혀져 국민의 분노가 들끓자 사퇴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후보자가 부모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자녀의 잘못 인정과 함께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손해배상 및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후보자의 도덕성을 비난하기 쉽지 않다.
인사청문회는 능력 있고 청렴한 고위공직자를 선출하기 위해 검증 절차를 밟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 인사청문회는 후보자를 ‘낙마’시키기 위한 ‘신상털기’ 장으로 변질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국정 운영 역량 검증보다는 비교적 흠결을 찾기 쉬운 도덕성에 초점을 맞춘다. 후보자는 물론이고 후보자의 친인척까지 세세하게 파고들어 결격사유를 만들어낸다. 현재 방식의 청문회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누군가 대역죄를 저지르면 죄를 지은 본인뿐만 아니라 죄인의 가족에게도 연대책임을 물어 모두가 함께 죄를 책임지도록 했다. 엄중한 형벌을 가하여 대중에게 경고함으로써 추가 범죄를 억제하고 스스로 행실을 바로잡게 했다. 전근대 시대 주로 시행됐던 연좌제는 현대사회에 들어서며 폐지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자기결정을 보장하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부담하는 자기책임을 전제로 한다. 자기가 결정하지 않거나 결정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따라서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에서 가족의 불법행위를 따지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보다는 후보 당사자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흠결을 찾기 위한 검증이 아니라 미래 발전을 위한 검증이 필요하다.
■ 논제 : 윤석열 대통령의 잇따른 거부권(법률안 재의요구권) 행사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진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하라.
# 1.
대한민국은 주인될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 중에서도 대다수 국민들을 대표할 대표자를 선출해 그들에게 권리를 위임하는 식의 대의 민주주의 형태를 띄고 있다. 대의 민주주의의 병폐와 한계가 언급되는 이유는 시스템의 존재 이유가 흐릿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대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대의 민주주의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식으로 그 모양이 바뀌어가고 있다.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이 숱하게 통과되어 실행되고, 불필요한 정쟁만이 만연하는 현실은 이를 시사한다.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참여와 의견수렴이 활성화된 제도가 필요하다. 지난 정권 뜨거운 화제가 됐던 국민청원 제도는 정권교체 후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국민의 의사가 공개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삼권분립이 이루어지는 한국에서 대통령은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대통령은 집행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법률안 거부권을 권리로 가지며 동시에 행정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은 필요하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각 권력은 서로를 견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 역시 거부권을 행사해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7회, 노무현 전 대통령은 6회, 박근혜 전 대통령은 2회를 행사함으로써 임기 동안 다뤄진 법안에 대해 국회에 재의결을 요구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입법부가 무분별하게 입법 진행 할 경우, 이를 당해낼 수 있는 권력이 없다. 다만 그 권리 행사는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대통령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는 올해 만 2년을 넘어섰다. 현 정권에서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은 특히 더 논란이 됐다. 윤 대통령이 전례없는 빈도로 권리를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10건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올 들어서만 4건에 적용했다. 최근에는 대통령이 채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크게 논란이 된 바 있다. 그는 여당과 야당의 합의가 되지 않았고, 당시 공수처에서 수사 중임을 거부권 행사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공수처 수사 결과만을 기다리기엔 긴 기간 동안 증거 삭제의 가능성이 높았다. 또 공수처는 기소권이 없기에 공수처의 수사 후에는 결국 사건이 검찰에게 이첩되어야 했다. 대통령이 행사해왔던 거부권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지금껏 행사된 대부분의 거부권은 국민의 이익과 진실의 규명에 다가서기보다는 진실을 은폐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재의 요구권 행사는 독인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재의 요구권은 대의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라는 체제 하에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목적성이 지금과 같이 개인의 이익과 진실의 은폐여서는 안 된다. 합당한 이유없이 권리가 남발될 경우, 대통령의 권리는 더 이상 큰 힘을 갖기 어렵다. 또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민주주의의 이념 또한 흐릿해지기 쉽다.
# 2.
정부가 국민에게서 신뢰를 얻어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국민을 대신해 나라의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민이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면 정부의 지지도가 하락하며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 이는 야당과의 불협치 가능성을 불러오고,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는 것보다는 정치 싸움에 나라 운영의 추가 옮겨 간다. 이는 국민의 뜻을 대신 수행한다는 대의 민주주의 정신에 크게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윤석열 대통령의 14차례에 걸친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진화를 저해하는 행위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 침범에서 나아가, 이는 국민 주권에도 악영향을 준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입법부를 구성하는 국회의원을 뽑는 까닭은 국민의 의지에 따라 국가를 이끌어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잇따른 법률안 재의요구권 행사는 국민의 뜻에 따라 이뤄진 입법부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민주, 인권, 진보로 위장한 공산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 세력이 활개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는 대통령의 행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스스로를 비판하는 꼴이다.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출범한 정부의 "내로남불"은 국민의 믿음을 저버린다.
물론 윤석열 정부를 법률안의 거부권 행사가 정당했다며 항변한다. 거대 야당이 그 숫자로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14번에 달하는 거부권 행사는 민주화 이후 전례가 없으며, 입법부를 견제해 국익을 위하는 기능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표적으로 '김건희 특검법'을 들 수 있다. 삼권 분립의 엄격한 원칙 아래 세워진 국가에서, 특검법이 통과되었더라도 특검은 결국 검찰이다. 검찰은 법무부 소속이며, 법무부는 행정부 산하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을 몇번이고 강조한 윤 대통령이 삼권 분립을 믿지 않고 정치공세로만 일축하는 것은 대통령이 국익이 아닌 사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대통령이 정말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한다면 삼권 분립에 따라 이뤄진 수사 결과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지지도는 2024년 들어 30% 대에서 지난 5월 20% 초반대로 추락했다. 이는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원인으로 풀이된다. 어쨌든 윤 대통령의 임기 기간 내내 거대 야당과 함께 정국을 이끌어 가야 한다. 야당이 특정 법안을 통과시키고 그 법안을 거부하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 아니라 협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전 정부에서도 여소야대 상황은 있었으나 법률안 거부권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정치가 아니라 야당과의 싸움을 한다면, 지지도로 나타나는 국민의 신뢰도는 사라진다.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 국민의 대표자로서, 국민에게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 3.
대통령의 거부권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한으로, 국회의 입법 활동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고, 국회가 국민의 뜻에 맞지 않는 법안을 통과시킬 때 이를 저지하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거부권은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만약 거부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국회는 통제되지 않은 입법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이는 국회가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국회의 이득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국회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면 국회의 독주를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부권은 국회의 독주를 방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부권이 남발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거부권의 과도한 사용은 대통령이 입법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후퇴로 이어질 수 있다. 대통령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균형이 깨지고, 이는 정치적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 특히나 윤석열 대통령이 21대 국회 마지막 날에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는 논란이 되고 있다. 재의결이 불가능한 시점을 선택하여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안 좋은 선례이며, 앞으로의 대통령들이 선례를 핑계로 거부권을 남용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
지금까지의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경우는 노무현 4회, 이명박 1회, 박근혜 2회 등 초대이자 12년간 임기를 보낸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그 횟수가 손에 꼽았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2년간 14회의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거부한 정책 중에는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순직 해병 수사 특별법 등의 국민이 진상을 밝히기를 강력히 요구한 사건들이 있었다. 이러한 행위는 국민의 의지를 억누르고,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이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입법부에 대한 중요한 견제 수단이지만, 사용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거부권이 처음 시작된 로마의 공화정 역시 거부권의 남용으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지금의 대한민국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속 가능한 한우 산업을 위한 지원법안’과 같은 법안을 상대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고 더욱 중요한 의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 또한, 로마와 같은 사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거부권을 더 이상 남용해서는 안 된다.
# 4.
법률안 재의요구권은 대통령제를 고안한 미국연방헌법에서 유래했다.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의회의 강력한 권한이 국왕을 무력화해온 것을 목격한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은 의회의 입법권이 남용될 것을 우려하여 행정부 차원의 방어 수단을 고안했다. 다만 군주제가 아닌 권력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대통령제를 수립해야 했기에 이 제도는 완전한 거부권이 아닌, ‘재의요구권’의 형태로 채택되었다. 즉, 법률안 재의요구권은 권력분립의 원칙을 토대로 행정부의 견제를 통해 입법부의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정치 지형은 다르다. 엄격한 권력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미국의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 입법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 수단은 법률안 재의요구권이 유일하다. 반면 한국은 행정부가 법률안 제출권, 예산안 편성권을 갖는 등 입법과정에 비교적 넓게 개입할 수 있다. 또한, 한국 헌법은 법률안 재의요구권에 대한 절차적 요건은 규정하고 있으나, 실질적 요건은 “이의가 있을 때”라는 모호한 내용이다. 이처럼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한국에서 모호하게 명시된 법률안 재의요구권은 권력 분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행정부의 권력을 지나치게 강화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잇따른 법률안 재의요구권 행사는 정당성 없이 남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확히 그 사례에 들어맞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채상병 특검법’에 대한 재의요구권 행사의 핵심 근거로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특검을 도입한 전례 없음’을 들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시절 참여했던 ‘국정농단 특검법’은 검찰 수사 도중에 통과되었다. 게다가 대통령의 외압이 의심되는 사건에 대한 특검법을 대통령 스스로 ‘거부’하기에는 빈약한 논리다. 이러한 행태는 국가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여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한다는 민주주의의 본래 목적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한국은 긴 시간의 정치적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룩한 서구적 정치사를 거치지 않고,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도입한 특이한 나라다. 행정부의 권력이 사실상 우위를 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법률안 재의요구권을 남발하며 행정권을 남용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적 면모라 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를 지나오면서 민주주의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된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이 민주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행정부의 지나친 권한을 축소하고, 국민의 정치참여 기회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
# 5.
대통령의 잇따른 거부권 행사는 대한민국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다. 1988년 민주화 이후 총 16차례의 거부권이 행사되었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가 3년 남은 상황에서 현재 14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통령 거부권은 입법부를 견제하기 위한 권한이며 민주주의의 삼권분립에 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이를 남용해서 안 된다. 그렇지만 여야가 살얼음판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재의요구권 행사는 여당입장에서는 마지막 보루인 것이고, 야당입장에서는 내는 법안마다 거부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합의점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총선의 결과로 야당은 과반수의 의석을 가져갔다. 그에 비해 여당은 적은 의석을 가져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법률 개정안에 대한 의견이 불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의견이 나누고 여야가 서로 견제하며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은 여야의 경쟁이 과열되어 정작 중요한 민심은 보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주권주의이다. 이는 국가의 모든 통치 권력의 행사는 국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을 위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있는 것인데 서로 견제하기 위해 하는 일종의 행위들은 개와 고양이가 서로 밥그릇을 위해 싸우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로 약점을 찾아 싸우려 하기보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긍하면서 발전해나가야 한다. 최근 윤 대통령은 ‘전세사기특별법’을 포함한 4개 법안을 동시에 거부했다. 야당은 ‘간호법’등 이미 한 차례 거부권을 사용한 법안들을 다시 상정했다. 이렇게 된다면 계속 거부권과 법안 상정이 반복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이런 행위는 발전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이다. 서로 타협안을 찾아서 개정이 되는 법안이 없이 룰렛처럼 돌고 돌기만 반복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국민을 위한 법을 개정한다고 해도 계속 여야 간의 갈등이 유지된다면 더 좋은 효율을 내지 못할 것이다. 서로 과열돼서 국민을 보는 눈을 가리지 말고 삼권분립의 원래 역할처럼 의견 대립이 생기더라도 견제는 하되,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경쟁과열을 식히고 가려진 상황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 6.
대의민주주의는 권력 분립이 제대로 작동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대리자를 뽑아 일정 기간 주권을 위임한다. 군주나 귀족 계급의 독재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민주적 선출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없다. 선출된 대표가 권력을 남용하게 된다면 또 다른 독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푸틴은 일당독점체제와 초대통령제라는 권력 구조를 활용해 입법부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다. 푸틴은 자신이 결정해 제출한 헌법개정안과 법률을 아무런 견제 없이 의회에서 통과시켜 왔다. 입법부의 본래 기능인 행정부 견제와 법안 심의 제정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는 부패인식지수에서 2010년 이후 ‘매우 부패한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로 간의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는 권력 분립의 실현이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이다.
잇따른 거부권 행사는 대의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국회를 통해 표출되는 국민의 의견과 요구가 거부권 행사로 무력화될 경우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대의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정치는 권력 분립이 아닌 ‘대립’인 상황이다. 야당은 거대 의석으로 정부의 발목을 잡고, 정부는 거부권으로 이에 응한다.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늘어져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2년 만에 거부권 14회를 행사했다. 지난 21대 국회 법안 처리율은 36.6%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여의도와 용산의 싸움으로 AI 기본법, 구하라법, 모성 보호 3법 등 주요 민생 법안은 본회의 문턱을 넘지도 못하고 폐기됐다. 국민들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다.
거대 야당의 입법 폭주 견제를 위한 거부권 행사는 당위성이 있다는 반박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 이해관계가 있는 거부권 행사는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 헌법 학계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을 통설로 본다. 즉 법률안 거부권이 대통령의 자유 재량행위에 속한다 하더라도 예외적 권한은 매우 신중하게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윤석열 대통령은 ‘김건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에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했다. 수사 외압 의혹을 받고 있는 ’채상병 특검법‘에도 거부권을 재가했다. 정치적 중립성을 잃은 거부권 행사는 결국 총선 패배라는 정권심판론으로 이어졌다.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곪아있는 환부를 슬쩍 덮으면 결국 썩어 잘라내야 한다. 정공법으로 맞서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정부와 여당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의 응축된 요구를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거부권 남용이 사유화된 통치술로 자리 잡을 것이 아니다. 입법권의 견제 수단으로 국민적 지지와 함께 행사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이러한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여야 간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데 중심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대통령과 국회가 상호 협력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해 정치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길이다.
# 7.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삼권분립을 주장했던 때는 ‘1748년’이었다. 이후 1760년에서 1820년 사이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국가는 소극적 국가였다. 행정부가 비대하지 않아 균형의 추가 엇비슷하게 맞아 들었다. 하지만 현대 국가는 불어난 인구와 복지 증대로 행정부가 더욱 커졌다. 게다가 군사권과 경찰, 검찰이라는 수사권까지 가지고 있어 군부독재와 같은 부작용도 발생했다.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이미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스캔들’과 ‘채상병 특검’, ‘잼버리 사태’와 ‘이태원 참사’와 같은 행정부 부패의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으로서의 지위와 소속 정당을 위해 정당활동을 할 수 있는 ‘사인’으로서의 지위가 충돌할 때 ‘헌법기관’으로서의 지위가 우선한다고 판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소속정당인 ‘국민의 힘’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해싿. 여당 초선의원 당선자 모임에서 “거부권을 적극 호라용해래”고 독려한 게 드러났다. 이미 대통령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가지고 의무에 충실히 임하지 않고 있다.
대의 민주주주의에도 맞지 않는다. 국민은 직접 정치를 하기 어려워 효율성을 위해 대리인을 선거로 뽑는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그들이다. 대통령은 불신임한다는 뜻으로 지난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켜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국민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난다.
# 8.
플라톤은 국가를 동굴에 비유했다. 지혜를 가진 지도자가 동굴 밖에서 배운 것들을 동굴 안 사람들에게 전달해 공동체가 최대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을 소유하고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인 대통령은 국민이 권력을 올바르게 행사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의 이익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지 않게 하고 소외된 개인이나 집단을 챙겨야 한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용호하거나 국민 정서에 크게 위배되는 입법의 경우에는 공동체에 위협을 줘 최대 행복을 얻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국민이 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해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으므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처럼 거부권은 공동체의 회대 행복을 위해 국민들의 의견을 존중함으로써 민주주의가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형식이 먼저 갖춰지고 그 내실이 채워지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거부권은 어떻게 행사되느냐에 따라 내실이 채워지는 지의 여부가 달라지므로 우리나라에서 특히 그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는 일제강점기 이후 기반이 부실한 채로 급속하게 들어왔다. 선거와 3권 분립과 같은 형식은 마련됐지만, 좌익과 폭력 투쟁이 여러 차례 발생하면서 1987년 개헌 이후가 되어서야 5년마다 정권이 안정적으로 교체되는 안정화가 이뤄졌다. 절차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는 등 실질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대통령 거부권은 절차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 국민의 권리를 위협하거나 소수를 억압하는 입법을 막을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상황에서 대통령 기부권의 영향력이 큰 것은 그래서다.
하지만 현재 윤 대통령의 잇따른 거부권 행사는 거부권의 원래 취지에 맞지 않게 행사되고 있다. 국민의 이익과 정서에 반하는 결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정이 공동체의 최대 행복을 얻는 방향 또한 아니다. 대표적으로 윤 대통령이 채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 있다. 공수처가 이미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대롱령실의 개입과 은폐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상관의 잘못된 지시로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에 대해 명백한 진실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의견을 받아드리지 않은 것이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다수인 야당이 여당의 의견은 무시한해 단독으로 입밥을 진행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당 단독으로 입법이 진행되고 있는 법이라도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면 정당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잇따른 거부권 행사가 이뤄진 정권을 겪은 국민들은 22대 총선의 투표 결과로 그 입장을 보여줬다. 87년 절차 민주주의가 완성된 이래로 집권 기간 중 야당이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차지하게 된 유래없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윤 대통령의 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이고 국민의 목소리와 반대되는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국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어 그들의 의견이 정치에 반영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목표인 만큼 윤 대통령의 잇따른 거부권 행사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써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윤 대통령은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여 무조건적인 거부권 행사를 멈추고 야당과 협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발전에 힘써야 할 것이다.
# 9.
민주주의 기본 원리에는 권력 견제 및 분산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원리가 대통령 대 의회라는 구도를 통해 구현되었다. 그러나 연이어 행사된 대통령의 거부권은 정치 불통을 넘어 기본적인 권력 견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제왕적 대통령제와 의회의 미성숙이다.
먼저, 대한민국의 정치적 토양부터 대통령에게 많은 권력을 실어주고 있다. 같은 대통령제 하에서도 한국은 미국보다도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한 편이다. 미국은 연방국가로서 중앙정부의 권한이 제한적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이민자 정책에 보인 상반된 입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추진된 정책의 성과는 큰 격차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만큼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에 부여된 권력이 크지 않은 것이다. 한편 한국의 정치는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불릴 정도로 구조적인 요인이 존재한다.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은 본인과 가족에 관련된 법안을 포함하여 총 14개의 법안에 대해 거부하고 민의 반영과 국정 운영을 지체시켰다. 이는 민주사회에서 명백히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다. 구조적으로 권력이 과다 부여되었고 이것이 권한의 남용으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자체는 반드시 필요하며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다.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입법부의 결정에 대해 한 번 더 숙고해보라는 신호는 긍정적인 권력 분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도가 지나쳐 가족의 이해관계가 포함된 안건에도 당사자의 이익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공정성과 정당성을 벗어난 일이다. 우리 사회가 개정해야 할 법률의 허점에 해당한다. 윤 대통령의 행위에는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에서 법치주의에 대표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점 또한 보여준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나 그것의 결과적인 모습은 사회에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점을 말한다.
이같은 현상은 의회의 미성숙이라는 문제에도 기인한다. 의회는 민의의 대변자이자 행정부에 대한 권력 견제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견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재의요구권이 헌법의 의도대로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한 숙고보다는 정쟁, 대립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당제의 권력 구조하에서 당파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해당 제도를 둔 헌법의 취지는 국회의 과도한 입법권 행사를 방지하고 숙의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에 있다. 그러나 국회의사당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상호 존중과 의사소통의 모습이 아닌 적대적 대치의 장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의지가 공표되면 협상과 타협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겠다는 태도가 보여야 한다. 그런 자세보다 여야당의 정쟁수단으로 ‘거부권’ - ‘재표결’을 거듭 반복되는 현상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정치나 사회 형태는 시간에 따라 발전한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그러나 정치학자 쉐보르스키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의 모습, 특히 민주주의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생성되었다 소멸되었고, 이후에는 베네치아에서, 그 다음은 현대이다. 민주주의가 다시 한번 소멸, 쇠퇴하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행사한 14번의 거부권은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경종을 울리고 있다
■ 논제 :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을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언론인 이유와 함께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논하고, 언론이 아니라면 아닌 이유와 함께 어떻게 명명해야 하는지를 논하시오.
# 1.
국민의 알 권리 충족, 균형적인 공론장 제공, 자본과 정치 권력 감시 등. 모두 언론의 역할과 기능이다. 언론이 이러한 기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저널리즘의 본질 때문이다. 저널리즘은 '무엇이 뉴스가 되는지 결정하는 과정'이다. 기자는 국민들이 알아야 할 정보들을 각자 판단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한다. 데스크는 기사들의 중요도를 그들이 선별해, 보도 여부나 순서, 분량 등을 결정하고 윤전기와 송출 장비를 가동한다. '김어준의 뉴스공장'도 그렇다. '무엇이 뉴스가 되는지 결정하는' 활동을 하며, 제작한 뉴스를 유튜브를 통해 대중에게 공급한다. 따라서 뉴스공장도 언론으로 분류된다.
김어준씨와 뉴스공장의 정체성 논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레거시 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김어준씨는 레거시 미디어와 다르게 윤전기나 방송 송출 장비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근무하는 기자들 수도 적으며 사옥도 작다. 하지만 그의 사회적 영향력은 레거시 미디어 못지 않다. 과거 TBS에서 그가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동시간대 청취율 1위였다. 현재 그가 유튜브에서 매일 진행하는 뉴스공장은 조회수가 기본 100만이 넘는다. 거꾸로 인력과 자금 규모가 훨씬 큰 신문사·방송사들의 사정은 악화되고 있다. 구독자와 시청자들은 대거 모바일 플랫폼으로 이탈했고 광고 시장은 성장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발행하는 신문도 없고, TV 방송도 안하는 소규모 인터넷 매체가 인기를 끄니, 자신과 그의 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레거시 미디어와 함께 '무엇이 뉴스가 되는지 결정하는 과정'이 존재하며, 매스(Mass 대중)를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 김어준씨는 언론인, 뉴스공장은 언론매체로 분류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뉴스공장이 성숙한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다. 뚜렷한 정파성으로 선호가 비슷한 수용자의 속을 시원하게 함으로써 계속 찾게 만드는, 이른바 '해장국 저널리즘'과 확증 편향 문제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 과정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이용해 팜플렛을 유포시키자, 로마 교황청은 인쇄기 때문에 신을 모독하는 거짓이 확산되고 있다며 개탄했다. 저널리즘이랄게 없고 당파지만 낭무하던 시절, 윤전기가 도입될 때 사람들은 거짓뉴스만 생산되며 여론은 오염될 것이라 우려했다. TV와 라디오가 보급될 때도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있었다. 현재 우리는 그것이 지나친 기우였다는 것을 안다. 기술혁신으로 인한 효용은 컸고, 부작용은 충분히 교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장국 저널리즘'이나 확증 편향 문제는 IT기술 혁신과 그에 따른 미디어 제작 환경 변화 등, 포괄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지, 뉴스공장에게 미흡한 언론의 역할을 시정하라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물론 뉴스공장은 정파성이 짙다. 현재의 야권에게 친화적이다. 그러나 판매부수•열독률•구독율•TV채널 소유 여부•수용자 및 언론인을 상대로 한 매체별 영향력 평가 등. 종합적 요소를 고려했을 때 한국 언론 지형은 보수 언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지적은 과거부터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야권 친화적이며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뉴스공장을 통해 불균형한 언론지형을 교정할 수 있다. 이는 균형적인 공론장을 유지함으로써 올바른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언론의 의무와도 맞닿아 있다. 언론사가 균형을 지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론과 공론장이 균형적인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저널리즘의 선두자인 BBC 로비에, 수많은 강렬한 정치적 저술을 남긴 조지 오웰의 동상이 설치된 사례는 음미해볼만하다.
# 2.
1인 미디어의 확산은 언론의 위기를 초래했다. 방송 전파와 지면을 보유하지 않아도 언론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레거시 미디어의 지위를 흔들며 언론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남겼다. 언론의 소명은 다양한 주제를 의제화하는 공론장의 역할을 하며 수용자들에게 깊이 있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론은 더이상 거대한 채널을 보유한 레거시 미디어의 것만이 아니다.
소셜 미디어의 발전과 플랫폼의 다양화 속에서 언론의 영역이 확장됐다. 큰 영향력을 지닌 이들은 다양한 플랫폼 속에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며 하나의 언론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 김어준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청취자들에게 심도있고 명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처럼 언론의 역할을 다하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언론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김어준의 보도는 중립적이지 않고 편파적이기에 언론이라 부를 수 없다고 비판 받는다. 그러나 김어준의 보도 방향은 오히려 언론 전체의 중립성에 기여한다. 김어준은 주로 진보 진영의 관점에서 보도했기 때문에 중립적이지 않고 편하적이라 지적 받는다. 그러나 이를 따져보기 전에 보수 언론사가 주를 이루는 한국 언론 환경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주요 일간지는 오랜 전통이 있으며 보수 성향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구독자를 보유해 언론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김어준의 진보 관점의 보도는 언론 전체의 보수와 진보 균형을 맞추는 데 기여한다. 그러기에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중립성을 실천하는 언론이다.
언론사는 기업에 소유되거나 기업의 광고료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이러한 점은 언론이 소수의 엘리트 계층만을 대변한다는 엘리트주의로 이어져 비판 받는다. 그러나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언론의 엘리트주의 한계를 극복한다. 김어준은 소수 계층을 위한 사안을 다루고 뉴스를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이는 유투브라는 자본과 권력에 독립된 환경에서 진행되기에 가능했다. 또한 기존 언론은 엄숙하고 진지한 논조로 뉴스를 보도하고, 기사를 작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대중을 뉴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정보의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김어준은 유머러스한 태도로 뉴스를 보도하고 감정적인 논조로 이야기를 펼친다. 이러한 방식은 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접근성을 낮춰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이처럼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기성 언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 언론으로 기능한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언론으로 호명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고양시킨다. 언론으로서 지위를 사회적으로 인정한다면 다양한 시각을 지닌 채널들이 하나, 둘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채널은 여러 입장을 대변하고, 상이한 시각을 제공한다. 이를 토대로 언론의 표현의 자유는 한 단계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다. 다양한 의견이 모인 공론장은 소수자의 문제까지도 공론화하며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 3.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정치선전 방송이다. 방송의 목적이 언론과 다르기 때문이다. 김어준은 ‘아무튼 대통령과 여당 탓이다’라는 편협한 시각에 갖혀있다. 언론인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취재에 임해 기사에 언론인의 시각이 전혀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언론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균형있게 파악하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김어준은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에 국민의 힘 한기호 의원이 연루돼있다는 의혹을 보도할 때 간단한 사실확인도 하지 않았다. 한기호 의원은 야구 커뮤니티 회원의 질의에도 “친손녀가 없고 친손자만 둘이며, 외손녀는 중학생”이라고 답했다. 전화한통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의혹이 있다는 사실만 취사선택해 전달한 것은 야당을 옹호하기 위한 아전인수 목적이 다분하다. 사람들이 김어준을 ‘킹메이커’라고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온다.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다르다. 표현의 자유는 1차적 목적이 개인의 영달이지만 언론의 자유 목적은 공익이다. 김어준의 방송은 공익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의 정치적 표현을 위해 정치인과 교수, 전문가 패널을 이용한다. 다각도로 사실에 접근하지 않아 전문가를 모아도 내용에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어준의 다스 뵈이다’에서는 20대 남자 윤석열 지지자를 ‘이대남’이라고 비난하며 싸잡아 프레임에 씌웠다. 과거 시민의 세금으로 출연료를 받는 TBS의 김어준에게 출연료를 공개하라는 요구가 있을 때 거부해 TBS 대표와 이사장이 배임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그에게 경제적 이익과 같은 개인의 영달에 목적이 있다고 의심된다.
언론의 가면을 쓴 표현은 공익을 해친다. 정치발전소 박상훈 학교장은 ‘반(反)정치의 정치학’이라고 하며 반정치적 정서 역시 일종의 정치적 기획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권위주의를 키우기 위해서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이름에 ‘뉴스’라는 단어를 직접쓰며 언론을 주장하지만 개인의 영달을 위한 개인 유튜브 채널에 가깝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가짜 언론은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을 키우며 특히, 무조건적인 상대편 비판에 얼룩진 정치선전 방송은 시민들로부터 정치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해 결국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들 것이다.
# 4.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이 널리 수용되는 이유는 그래서다. 언론은 시민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넘어 해결 방안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인 여론을 형성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언론에서 아무리 사회의 문제를 말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말해도 사람들이 관심 갖고 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어 뉴스공장은 언론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전통 미디어와 비교하면 방송을 전달하는 통로만 TV, 신문 등 전통 미디어에서 유튜브라는 새 미디어로 바뀌었을 뿐 정보를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어준의 겸손은 어려워 뉴스공장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언론보다 더 그 역할을 잘 수행하는 측면이 존재 한다. 콘텐츠를 전달하는 미디어 환경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기 위한 경쟁이 치열 해졌다. 뉴스 또한 그 영향을 받아 TV 뉴스를 유튜브에 동시 송출을 하거나 온라인 전용 뉴스를 만드는 등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어 뉴스공장은 전통 언론과 달리 직설적으로 사건의 문제를 전달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 첫 방송한 날 이미 구독자는 50만명을 달성했고 현재 1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며 그 인기를 지키고 있다. 게다가 단순히 의견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댓글로 소통하는 장을 만들었고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언론은 더 이상 전통 미디어의 소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어 뉴스공장이 언론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냐하는 물음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시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인데, 문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파악해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어 뉴스 공장이 제 역할을 못하는 지점이다. 표면상으론 공정성을 말하지만 실체는 편향된 정보의 전달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쟁점 중 하나인 병립형 비례와 연동형 비례 의제에 대해 병립형 비례를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만 전달한 것이 그 예이다. 허친스 위원회는 '사실적으로는 맞지만 실질적으로는 거짓일 수 있는 기사'에 대해 경고했다. 편향된 보도는 보도된 입장이 사실이지만 다른 입장을 고려해서 전체적으로 분석하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거짓된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시민들의 정치 참여의 목소리가 커지고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정당에 가입해 당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시민들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을 돕는 언론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 시점이다. 하지만 언론의 신뢰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권력에 순응해 문제의 핵심을 외면한 채 자극적인 갈등만 다룬 것이 이유일 것이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어 뉴스공장과 같은 새로운 언론은 그 핵심을 가감없이 말하며 시청자들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고 있다. 장강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언론으로서 빠르게 자리잡고 있는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어 뉴스공장은 다양한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는 언론의 책임을 명심하고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5.
시청률 저하에 따른 TV 위기론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황금 시간대에 50%~60% 까지 기록되던 TV시청률은, 10%를 달성하기도 힘든게 현실이다. 1인가구 증가, 청년층 주거환경 변화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디어 환경 변화를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언택트(untact) 시대가 도래하며 유투브로 미디어의 권력이 바뀌고 있다. 뉴미디어의 파급력이 레거시 미디어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구독자 160만명 이상을 보유한 대형 유투브 채널이다. 공영방송에서 볼 수 없는 유쾌한 분위기와 여당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시청자들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영상들의 평균 조회수는 기본 10만뷰를 기록하며,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영상은 약 90만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유투브 숏폼 컨텐츠인 “숏츠”는 모바일 엄지족들에게 짧은 시간내에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언론은 시청자에게 깊이있고 다양한 시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뉴미디어는 시청자들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며 언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유권자들의 정치적 참여는 중요하다. 대의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직접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선정해 권력을 위탁해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참여율이 낮을 수록 정부가 국민의 의지를 정확하게 대변하는지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며 대의민주주의의 정당성이 약화된다. 뉴미디어는 다소 지루하고 딱딱할 수 있는 ‘정치’에 많은 시청자를 참여하게 할 수 있게 한다. 국민들에게 현안에서 다뤄지는 다양한 정보와 견해를 손쉽게 전달해주고 있어 언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김어준의 행동과 발언이 ‘야당친화적이다’, ‘지나치게 편파적이다’라는 의견이 있다. 김어준의 유투브 채널을 들어가 보면 대통령의 인지 수준에 대해 수위 높은 비판을 하는 컨텐츠, 대통령 얼굴을 코믹하게 작화하는 썸내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편파적이여 언론도 언론이다. 뉴미디어인 유투브 내에는 다양한 정당을 지지하는 유투버들이 많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도 그중 하나일 뿐이며,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한 유투버들의 의견을 참고해, 본인의 정치적 견해를 설립하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다. 뉴미디어는 다양한 견해를 제공해 국민들로 하여금 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 받는다. 뉴미디어는 레거시 미디어에선 다룰 수 없는 더 깊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룰 수 있다. 다양한 주제에 시청자들은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게 된다. 더 많은 채널들이 시청자들에게 심도있고 명확한 정보를 전달해 언론의 역할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6.
때로는 언론같지 않은 언론이 언론다운 언론보다 언론이 되는 세상이다. 알수없는 역설이 통하는 이 현상은 레거시 미디어의 권위가 해체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기존의 매스 미디어 매체에 애통하게도 언론의 조건에 더 이상 권위와 질은 필수적이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훌륭한 언론의 조건에 팩트 체크와 정치적 중립의 노력이 요구될 수 있는 있으나 ‘언론’이라 불리는 일에 높은 도덕성 혹은 정보의 품질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언론에 요구되는 제1의 역할은 사람들의 눈이 되는 것이다. 한국어 모국어 화자는 한국어로 세상을 접하고, 영어 구사자는 뉴욕 타임즈를 통해 영어권 화자에 의해 쓰여진 관점을 접할 수 있듯, 언론은 시민의 눈이고 돋보기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누구보다 충실히 이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뉴스공장의 단단한 지지층인 진보 성향을 대상으로 사안을 밝혀주고 담론을 제공하는 일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이다. 평균 조회수 130만, 정치 관련 유튜브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의제의 설정자라는 전통적인 언론의 역할을 논한다면 이견의 여지가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뉴스공장을 언론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이들의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기계적인 중립성일지라도 객관성을 지니려 노력하는 태도는 언론이 지향해야 할 자세가 맞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에 따르면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사실은 이미 언론의 주관성이 개입된 정보이다. 특히 사람들이 정보를 습득하는 주된 뉴미디어 환경이 알고리즘에 의해 편향성과 당파성을 심화하면서 객관성은 신화에 가까워졌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특징을 고려하면, 한 매체 내에서 객관성을 견지하는 방식보다는 외재적으로 여러 언론이 서로 다른 두 주장을 자유롭게 표할 수 있는 것이 객관성을 좇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도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균형의 추를 맞추는 것에 있어 뉴스공장이 주관성으로서 전체의 객관성을 더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기술하자면, 오늘날에는 사회의 현안을 대상으로 가공하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영향력있는 매체는 언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의 진입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이제는 언론인가 보다 어떤 언론인가가 더 중요한 시대이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어떠한 매체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과는 별개로 그들의 보도경향과 매체 환경을 이유로 언론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민주적인 환경 함양을 위해 모든 언론에 대하여 당파적인 주장을 지양하고 언론 자체의 질을 높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 7.
‘객관성’은 언론의 핵심 원칙이면서도, 그 경계가 모호해 학계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는 개념이다. 다만 미국의 복잡한 요건 속에서 발전한 객관주의를 한국 언론이 형식적으로만 수용한 결과, 오히려 객관이 사라지고 언론의 탈정치화가 이뤄졌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객관성에 대한 단편적 해석을 토대로 ‘편파적 언론’을 표방한다. 객관의 불가능성을 주관의 다양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작년, 김어준은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언론의 기계적 중립을 비판하면서 언론이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객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조건 객관성의 폐기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객관의 불가능성은 극복의 차원이 아니라, 성찰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뉴스를 생산하여 보도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소통’은 주요 수단이자 목적이다. 그러나 성찰 없는 극복은 자신의 자아를 강화하여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킨다. <뉴스공장>은 현실정치의 복잡한 맥락을 소거한 채 ‘사이다 감성’의 손쉬운 이해만을 제공하면서 정치혐오를 강화한다. 정치를 우파와 좌파의 힘겨루기로 인식하고, 정치적 사안의 뒤에 상대편의 일종의 ‘음모’나 ‘공작’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특정 집단의 배타적인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적’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다.
언론의 객관성은 본질적 규범이기보다 수단에 가깝다. 어떤 부분적 사실이 완벽한 객관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인정은 그 사실이 복잡한 사회적 맥락 속에 놓여있다는 인식이다. 그로부터 언론은 총체적 진실에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도,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도 처음에는 부분적 사실로부터 출발했다. 그로부터 언론은 ‘주장이 경쟁하는 자유시장’이 아닌, ‘성찰적 주체 간의 관계’로서 공론장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파편적 사실에 근거한 주장을 펼치는 장이 아니라, 깊이 있는 시각으로 성숙한 토론할 때 민주주의가 제대로 안착할 수 있다.
따라서 언론의 핵심 원칙을 져버린 <뉴스공장>은 형식적으로 언론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언론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정보를 재구성하여 대중에게 전달하지만, 정보의 객관성과 깊이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뉴스공장>의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은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8.
김어준은 겸손이 힘들다고 했다.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실천하기 어렵다고 한다. 전자는 자신이 논란이 되는 주제나 강한 의견을 자주 다루고 중립에서 벗어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후자는 언론인들은 사실을 보도하고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압력이나 개인적 신념과의 충돌을 겪는 갈등을 담았다. 이 둘의 공통점은 언론인으로서 자신들의 경험과 고민을 반영해 저널리즘의 본질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김어준은 평소 보수 세력에 강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진보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왔다. 자신의 색이 뚜렷한 만큼 기성 언론의 보도에 답답함을 느껴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한 것이다.
관점을 담은 뉴스는 저널리즘이 아니라고 무조건적으로 배척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칼럼니스트와 논설위원들도 언론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의견을 담았다고 저널리즘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저널리즘을 매우 협소하게 이해하는 관점이다. 언론인 개개인의 정체성은 저널리즘을 방해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독립성이다. "기자들은 그들이 취재하는 대상으로부터 반드시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 저널리즘의 네 번째 원칙이다. 언론인은 취재 대상은 물론 자신의 편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편부당하거나 중립적인 것은 저널리즘의 핵심원칙이 아니다. 객관성은 저널리즘의 핵심원칙이 맞지만 객관성과 중립성은 다른 개념이다
<뉴욕타임스>의 새파이어는 퓰리처상의 비평 부문을 수상할 정도로 존경 받은 칼럼니스트다. 정치인이었던 새파이어가 언론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독립성에 있다. 그는 원래 지극한 보수주의 정치인이었지만 언론인이 된 후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했다. 독자에게 특정 입장을 강요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으며 독립된 중간 지대에 섰다. 그는 자신의 의견과 관점을 갖는 동시에 취재와 관련된 대상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했다. 여기서 저널리스트와 김어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새파이어는 자신의 정체성이 있으나 특정 입장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어준은 자신의 정파성을 시청자에게 강요했고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허위사실 유포도 감행했다.
정파성은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더 낫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믿음이다. 언론 또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런 편향이 사실까지 왜곡하는 상태는 크게 잘못됐으며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훼손한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언론이라고 말하려면 올바른 정파성을 내세워야 한다.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 자유롭게 논의가 이루어질 때 진실에 가까워진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은 좋은 기사를 시작하는데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올바른 정파성을 내세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댓글창을 통해 공론장을 활성화시켜 자유로운 의견을 오갈 수 있게 한다면 그때 언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논제 : 언론인, 방송인, 예능인 등 아나운서에게 요구되는 정체성과 역할은 다양하다. 아나운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하시오.
# 1.
‘액체 근대’의 사회에서 직업적 정체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4차 산업혁명 이후 사회는 유동적으로 변화했다. 바우만의 책 <개인들의 방황하는 사회>에서는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사회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고정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유동적인 사회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정체성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모호함은 때론 그 자체만으로도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정체성이 한가지로 정의되는 것은 현시점에서 도태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모호함은 아나운서에겐 기회였다. 언론인, 방송인, 예능인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확장됐다.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유동 인간인 아나운서의 정체성은 확장된 것이다. 아나운서가 예능에 출연하면서 아나운서가 뉴스만을 전달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 1926년 경성방송국 이옥경 아나운서를 시작으로 초기에는 뉴스 진행자만을 맡았다. 2010년대부터 개국한 종편으로 인해 아나운서의 역할은 다양하게 변했다. 케이블 채널과 유튜브 등 매체 발달로 각 방송사에서 자체적으로 아나운서를 선발했다. 다양화된 프로그램만큼 아나운서도 방송인, 예능인 등 다양한 정체성이 생겼다.
하지만 방송인으로의 아나운서가 그저 방송인의 정체성을 가져서는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시청자는 ‘언론인’인 방송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단어를 활용하여 말을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을 기대한다. 혹은 예능에서 웃긴 행동을 하더라도 지적인 이미지가 있기에 반전 매력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원한다. MBC 김대호 아나운서는 <나혼자산다>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언론인이면서도 방송인인 모습이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지적인 이미지를 지녔으면서도 자연인처럼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대중에게 매력적이었다. 아나운서가 언론인의 정체성을 잃는다면 방송인과 예능인으로서 가치는 하락한다. 다른 유명 연예인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능에서의 아나운서는 어떤 의무가 있는가? 아나운서의 정체성 중 하나는 ‘한국어의 표준어’ 사용이다. 우리는 짧은 쇼츠, 유튜브 등을 보며 자극적이고 간단한 문장에 익숙하다. ‘줄임말’은 난무한다. 아나운서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아나운서는 그러한 예능에 뛰어들어야 한다. 다소 분위기가 밝은 예능에서도 표준어를 사용하며 대중에게 올바른 한국어 사용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한국어의 표준어를 지키는 것 또한 아나운서의 의무이다. JTBC <아는형님>에 출연한 강지영 아나운서는 한국어를 활용한 게임을 통해 올바른 발음을 알리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나운서는 ‘유튜버’로서도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MBC <뉴스안하니>는 구독자 16만 명을 보유하며 대중과 소통한다. 유튜버는 SNS를 주로 사용하는 근대사회에 적응하며 새롭게 생겨난 아나운서의 정체성이다. 앞으로 정체성은 더 확장될 것이다. 언론인이라는 본질적인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방송인, 예능인, 유튜버라는 정체성을 확장해야 한다. 그것이 액체 인간인 아나운서가 직업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논제 : AI아나운서가 등장하면서 인간 아나운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AI아나운서와 비교해볼 때 인간 아나운서만이 가질 수 있는 비교 우위의 장점을 3개의 키워드로 제시하면서 논하시오.
# 1.
Chat GPT, 오늘 기사 요약해서 영상으로 만들어줘. 인간지성이 아닌 ‘인공지능’을 지닌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만들어진 인간, 만들어진 정체성이다. ‘포스트 휴먼’은 기술적 발달로 변화된 비인간적 존재의 형상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구분하였던 ‘경계’의 해체이다. 그 경계에서 우리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찾아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진화생물학의 시대에서 실험실의 동물이나 파블로프의 개를 바라보듯 ‘인간’을 이해하면 안 된다.
인간 고유의 특성은 각자 개성이 있다는 점이다. 아나운서 또한 각자의 특색이 있으며 이는 대중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러 방송사 뉴스 프로그램 중 특정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본다. 정치적 선호도를 포함하여 아나운서가 지닌 뉴스의 전달력, 이미지, 인지도 등 다양한 이유로 특정 프로그램을 선택한다. 즉 각 개인의 개성은 시청자를 끌어들인다. MBN 뉴스 앵커를 맡고 있는 김주하 아나운서의 진지한 뉴스 진행 분위기를 보며 우리는 뉴스에 몰입된다. 김주하 아나운서가 주는 진중한 이미지가 시청자를 끌어들인다. 최근에는 MBC 김대호 아나운서는 <나혼자산다>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아나운서임에도 진중하지만은 않고 소탈한 이미지가 대중을 사로잡았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개성과 매력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비용 측면 때문에 AI 아나운서를 인간 대신 사용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 먼저 아나운서에 대한 정의를 해야 한다. 아나운서를 단지 리딩(reading)하는 사람으로만 정의해서는 안 된다. 인간 아나운서는 패널과 소통할 수도 있으며 언어로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진다. 수십 개의 카메라가 인터뷰 대상자 앞에 놓여 있고, 화면 속에 AI 아나운서가 덩그러니 질문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회견자가 온전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에는 불편하다. 인물을 인터뷰할 때 아나운서의 소통은 AI 아나운서와 구별되는 점이다. 미국 CNN 뉴스는 우리나라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방송 중 앵커끼리 농담을 사용하기도 한다. 글을 단지 리딩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한다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뉴스 스튜디오에 일반인이 출연하여 인터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앵커가 직접 야외에서 뉴스를 진행하기도 한다. 즉 아나운서는 ‘일방적인 리딩’이 아닌 ‘쌍방적인 소통’이다.
더 나아가 인간 아나운서는 한국어 표준어를 구사하는 ‘인간’이라는 점이 차별점이다. 인간이 한국어의 표준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곧 전통 유지와 연결된다. ‘한국어의 전통’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짧은 쇼츠, 유튜브 등을 보며 자극적이고 간단한 문장에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단음 사용, 발음 규칙에 따라 말하기 등 한국어의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 아나운서는 꾸준히 노력해 왔다. 현재는 ‘한글 표준어 인간 문화재’라는 호칭은 없을지라도, 인간 아나운서가 사라진다면 언젠가는 가능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한국어의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가치는 올라갈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처하기 전에 인간 아나운서로서 한글의 고유성을 지켜야 한다. 인간이 유지해야 할 전통을 AI 라는 수단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
■ 논제 : 최근 1년간 예능/드라마/라디오 프로그램 중 '내가 꼽는 최고의 프로그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논하되, 그렇게 생각하는 구체적인 이유와 해당 프로그램의 장점을 미래에 제작할 자신의 프로그램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를 논의에 포함하라.
# 1.
예능에서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어왔다. 예능은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시청률을 위해서, 혹은 출연자들에게 생길 수 있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민감한 사회문제는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기존의 예능에서 출연진이 정치색을 언급하거나, 사회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일은 곧 자신에게 하나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올해 초 권성민PD가 선보인 <사상검증: 더 커뮤니티>는 이러한 예능계에 이단아처럼 등장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포용하는 연습을 해야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타인의 의견을 듣고, 이해하고, 수용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꺼내는 것이 어려운 일일 뿐더러 타인이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것도 두렵기 때문이다. <사상검증: 더 커뮤니티>는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는 불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정치, 계급, 젠더, 개방성의 카테고리에서 자신의 사상을 점수화하고 타인에게 발각될 시 퇴소처리가 된다. 그 와중에 매일밤 저녁 주어진 사회문제에 대해 찬반 토론을 진행해야했다. 내부엔 늘 분열이 존재했지만, 이런 분열이 외부에 들어나지 않도록 연기를 하는 출연진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잘 보여주었다. 이는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프로그램과 현실 속의 분열을 연관지어 생각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끝에서, 우리는 서로 헐뜯지 않아도 공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얻는다. 프로그램 내에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켜야하는 ‘반동분자’ 캐릭터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고도 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출연자들 사이엔 분열을 일으킨다. 이는 우리의 현실 세계 속 군열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색출해서 없애고 싶어한다. 프로그램 속 결말은 시청자들이 서로를 비방하는 것 외에 포용을 하고 함께 커뮤니티를 이끌어가면 어땠을까란 질문을 남긴다.
예능은 단순히 즐거움을 주는 것에 안주하면 안된다. 즐거움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인 미디어와 숏폼이 넘쳐 흐르는 사회에서 예능은 시청자들에게 1시간 짜리 긴 영상을 볼 이유를 제공해야한다. 단순히 즐거움 위해서라면 단시간 내로 빠르게 웃을 수 있는 쇼츠를 보는 것이 시청자 입장에서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우리는 ‘예능’이 전달할 수 있는 메세지의 힘을 고려해봐야한다. 국민 프로그램으로 뽑히는 <무한도전>을 예로 들어보자. <무한도전>의 ‘Shall we dance?” 댄스 스포츠 장기특집에서 멤버들은 처음 도전하는 분야에 80일 동안 매일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예선에서 도전은 끝이 났지만, 시청자들은 포기하지 않는 멤버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시청률 또한 함께 수직 상승했다. 사람들이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를 필두로 서로 소통하게 해야한다. 예능은 사람들의 사상에 침투해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능이 가진 힘은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전달할 수 있음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회 문제를 지적하고 그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해보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한다. 사회의 분열을 하나로 묶는 시작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청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사회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사회 문제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
■ 논제: 자신이 기획하는 프로그램을 이끌어갈 인물 한 명을 설정하고, 프로그램 제작자의 입장에서 그 인물을 내세울 경우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하는 논술을 작성하시오.(시사교양/예능은 대표적인 출연자나 진행자로, 드라마는 주인공이나 핵심 등장인물로, 라디오는 진행자로 설정하세요)
# 1.
세상에 거짓말을 한번도 안 해본 사람은 없다. 선의의 거짓말이든, 진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든, 누구든지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속에 사실과 반대되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진실이 절대 세상에 들어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거짓말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되는지를 밝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권일용 프로파일러를 섭외하고자한다.
프로파일러란 범죄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하여 데이터 분석을 하는 직업이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상황을 정리하여 진실을 찾아낸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거짓말에 능한 일반 출연진들을 섭외하여 그들의 거짓말이 언제까지 숨겨질 수 있는지 찾는다. 총 5명으로 구성된 일반인 출연진은 각자 사전에 제작진에게 전달받은 거짓말을 숨기며 함께 생활한다. 그들의 목적은 ‘거짓말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다. 반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선택지도 동시에 주어진다. 진실만을 말할 시 출연진은 자신이 실제로 겪은 사건의 이야기를 한다. 들키지 않는다면 거짓말을 한 사람은 상금의 100%를, 진실만을 말한 사람은 상금의 30%만 가져갈 수 있다. 거짓말을 들키거나,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들킬 시 상금은 주어지지 않는다. 거짓말을 포착한 출연자는 거짓말을 고발할 수 있으며 해당 출연진의 상금은 성공적으로 고발한 사람에게 넘어간다.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옆 스튜디오에서 생중계되는 영상을 통해 사건을 프로파일링하고, 출연자 다수의 거짓말을 포착해야만 상금을 받아갈 수 있다.
프로그램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시청자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한다. 예능은 일주일에 한 회차씩 공개되기에 그 빈 기간동안 사람들의 입에 올라 회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가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는 프로그램의 초반에는 시청자들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 시청자들이 각자 셜록 홈즈가 되어 직접 추리를 진행하는 것이다. 2022년 환승연애가 유행했던 배경에는 시청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승연애 리뷰” 영상들은 사람들에게 프로그램에 대해 댓글로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은 출연진의 심리 분석을 위해 영상을 끊임없이 돌려보고, 자신도 리액션 영상을 올리며 유행이 만들어졌다. 이 프로그램의 성공 요인 또한 ‘출연진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에 존재한다. 또한 프로파일러의 논리적인 분석과 자신의 추리를 비교하는 재미 또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을 파악한 사람의 영상은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예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데에 의의가 존재한다. 처음에는 여느 관찰예능과 비슷하게 ‘관음’적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거짓말을 숨기면서 나오는 분위기와, 감정 노동을 프로그램을 통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 거짓말일지라도, 그것이 질의응답을 통해 더욱 커지는 과정을 보게 된다. 프로그램을 비판하고, 출연진의 심리를 추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다.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이 가져올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프로그램을 통해 제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