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헤드셋, 무지개]
마흔이 된 희진에게는 오래된 보석이 있다. 아주 얇고 가벼운 보석. 신원미상의 편지다. 30대 초반, 현실에 치여 갈피를 못 잡던 희진이었다. 첫 회사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힘겹게 이직한 두번째 회사. 그 근처로 거처를 옮기려 이삿짐을 싸다, 우연히 발견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학창시절 한 친구의 편지가 오래도록 희진의 마음을 달랬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친구는 항상 헤드셋을 끼고 조용히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딱히 어떤 행동을 하지 않지만, 모든 선생님들이 신뢰하고 예뻐하는 그런 친구였다. 또 희진과는 같은 무리였지만 단 둘이 만난 적은 없는, 가깝고도 어색한 사이였다. 조용해서 신비한 친구였고, 호기심 많은 희진은 항상 그 친구를 궁금해하기만 했다. 멀리서 두고두고 응원하고 싶은 연예인을 바라보는 마음이었을까. 희진은 그 친구의 모든 걸 속속들이 아는 것보다, 관찰 대상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희진이 기억하는 그 친구의 고요한 모습과 달리 편지는 형형색색이었다. 글을 읽고 쓰길 좋아하는 만큼 필통이 빵빵했던 그 친구는 자신이 가진 펜을 다 동원해 열심히 편지를 완성했다. 희진을 보면 항상 웃음이 나곤 했다는 그 친구는 자신에게 없는 모습을 가진 희진이 부럽다는 내용을 담았다. 항상 뭐든지 열심인 희진은 학창시절에도 모든 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여러 과목의 부장을 맡으며, 모두에게 친절하기까지 열심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 친구는 희진의 그런 모습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다. 적극적이지 않아 사춘기 또래 사이에서 겉돌았던 자신에게 희진의 친절이 항상 고맙고 따뜻했다고 했다.
이 편지를 발견할 무렵 희진은 과중한 업무에 더불어, 직장에서 ‘희진씨는 가식적이다’라는 말을 건너 듣곤 관계에 회의감에 무력하던 때였다. 잘 하려고 한 행동들이 오히려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힘들었다. 열심히만 하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고, 그땐 그렇게 하지 말 걸 후회만 가득한 날들에 우연히 찾아온 위로였다. 신원미상의 진심 어린 시선과 몇 마디의 따뜻함으로 희진은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을 멈추었다. 희진의 진심을 알아주는 어린 시절의 친구가 희진의 흔들리는 뿌리를 꼭 잡아주었다.
희진은 유일하게 그 친구와 단 둘이 걸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 따라 다른 친구들은 청소 당번에 걸려, 어색한 귀가길이 될 뻔 했던 날. 부슬비가 멈추고 희미하게 자리한 무지개가 분위기를 띄웠다. “무지개가 신기하다. 진짜 예쁘다.”는 말로 공백을 채우며 헤어진 그 날을 떠올리니, 희진은 문득 그 편지가 오래도록 자신에게 ‘무지개’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구름과 비만 가득한 것 같던 희진의 젊은 날에 우연히 찾아온 무지개. 빨, 주, 노, 초, 파 형형색색의 활자가 희진의 겉도는 마음에 빛이 되었다. 희진은 지금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친구의 말을 아끼고 아낀다.
첫댓글 보석, 헤드셋, 무지개 키워드를 그대로 사용하기 보다,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서 좋았다.
내 글을 읽으면 보편적이고 공감적인 요소가 항상 있는듯, 같은 무리지만 단 둘이는 만나지 않는
그걸 잘 살리는 게 강점인듯
남들의 기억에 남는 표현을 남겨두면 좋은데,
희진의 뿌리는 잡아주었다 >> 와 같은 표현들이 기억에 남았다.
신원미상의 편지 >> 어라?? 누군지는 아니까
통찰력을 더 잘 살리려면 >> 어린 시절 친구에 대한 보편적인 코드를 더 살려보면 좋을 것 같다
예) 가치관이 형성되기 전에 친해진 친구는 달라도 어렸을 때의 추억 만으로 관계가 유지됨
희진이 극복한 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살려보면 좋겠다.
알고보니 서로가 부러워하는 관계,
초라하다고 느꼈지만 누군가에게는 빛나는 사람이었구나.
핍진성이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