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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승상부 앞 아전가(衙前街)
관제묘에서 관우를 만나고 걸어서 조승상부로 간다. 관제묘를 나와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 쯤 걸어가면 아전가(衙前街)란 석패방이 보이고 멀리서 조조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를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아전가 거리엔 노란색 가로등이 눈에 띄지만 옛 아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상가들만 즐비하다.
▶ 조승상부 앞 석패방
아전가를 지나자 석패방이 보이는데 석패방 중앙에는 승상부원(丞相府苑)이라 쓰여 있어 이곳이 조조가 승상으로서 일을 보던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석패방 좌우에는 안방(安邦), 치세(治世)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인 것 같다.
▶ 조승상부 입구에 서있는 조조의 석상
석패방을 지나면 조조가 양손을 활짝 벌린 채 왼손에 칼을 들고 있는 석상이 있다. 조조의 엷은 입술, 짙으나 숱이 많지 않은 수염,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을 하고 정면을 바라보는 조조의 두 눈이 날카로워 보인다. "너무 무섭게 쳐다보지 마시오! 난 당신의 적이 아니라 당신이 살던 집에서 당신과 옛날 이야기를 하러 왔으니 잘 좀 봐 주시오!"라고 이야기하며 석상을 한 바퀴 둘러본다.
▶ 조승상부 정문인 승상부(丞相府)란 현판이 걸린 부문(府門)
석상 뒤엔 승상부(丞相府)란 현판이 걸린 부문(府門)이 있는데 이곳에서 입장권(門票)를 사는데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50세 이상이면 반표다.(1人/60元, 반표 30元) 조조가 인심이 후한 걸까? 쉬창市가 다른 곳보다 나이 든 사람들을 우대하는 걸까? 좌우간 처음 반표의 혜택을 보니 무척 기분이 좋다.
표를 사 안으로 들어가니 조조가 북쪽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다 갈석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는 관창해(觀滄海) 부조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부조를 바라보니 칼을 허리에 차고 갈석산에 올라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기개를 떨쳐 보였던 조조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관창해(觀滄海)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라 해야 할 것이다.
관창해(觀滄海) -曺操 東臨碣石(동림갈석) : 동쪽의 갈석산에서 以觀滄海(이관창해) : 창해를 바라보나니 水何澹澹(수하담담) : 바다는 얼마나 힘차게 출렁이는가. 山島竦峙(산도송치) : 섬들엔 산들이 우뚝 솟아 있네 樹木叢生(수목총생) : 수목은 빽빽이 자라고 百草豐茂(백초풍무) : 풀들은 무성하다. 秋風蕭瑟(추풍소슬) : 가을바람 소슬한 가운데 洪波湧起(홍파용기) : 거대한 물결이 용솟음친다. 日月之行(일월지행) : 해와 달이 마치 若出其中(약출기중) : 저 속에서 나오는 듯 星漢燦爛(성한찬란) : 찬란한 은하수도 若出其裏(약출기리) : 저 속에서 펼쳐져 나오는 듯 幸甚至哉(행심지재) : 지극히 기쁘구나. 歌以詠志(가이영지) : 내 뜻을 노래하리. |
이곳에 조조의 승상부가 있게 된 것은 조조가 한나라의 도읍을 뤄양(洛陽)에서 쉬창(許昌)으로 옮겼기 때문으로 조조가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는 천문관의 이야기를 듣고 결심했다고 한다. 동탁이 죽자 장안으로 동탁의 볼모가 돼 끌려갔던 황제가 다시 뤄양(洛陽)으로 돌아온다. 폐허나 다름없는 뤄양은 동탁이 뤄양을 버리고 황제를 납치해 장안으로 도망할 때 모두 불태워 버렸다. 황제가 뤄양으로 돌아오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제를 조조가 모시면서 승상의 자리에 오른다. 이 때, 천문관이 조조에게 金과 火의 두 별이 만나면 반드시 새 황제가 나타난다고 하는데 한나라의 맥은 머지않아 끊기고 새 황제는 진위(晉魏)지방에서 나타날 기운이 보인다며 한 왕실은 화성의 가문이고 조조는 토성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이미 하늘이 한 왕실을 멸하고 조조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라고 계시를 내렸다고 보고한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담으랬다고 새 세상은 땅의 기운마저 호응하는 새로운 곳으로 천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조조는 토성방향의 땅인 쉬창으로 천도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조조는 황제에게 뤄양은 이미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할 때 불 질러버려 폐허나 다름없으니 천도하기를 청한다. 황제도 처음에는 조상이 일군 곳이라 반대했지만, 지금은 조조에 위탁하는 처지라 반대할 수 없기에 결국 조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쉬창으로 천도는 이렇게 천문관의 말 한마디 때문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한 고조인 유방이 사상(泗上)에서 뜻을 펴면서 3척이나 되는 칼을 차고 망탕산에서 흰 뱀을 베고 의병을 모아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뜻을 펴고자 한지 3년 만에 진(秦)나라를 멸하고 5년 만에 다시 초(楚)나라를 평정해 한나라를 세운지 400여 년이 흐른 뒤 토성의 기를 받은 조조가 이제 한실의 끝을 보려 천도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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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를 섬긴 장수들(무신)
▶ 조조의 초상화-문신과 무신 중앙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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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를 섬긴 문신(책사)
관창해를 감상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영현당(迎賢堂)이 보인다. 조승상부에 에 대한 로 들어가면 1층, 2층, 3층 건물이 차례대로 나오는데, 각각의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건물이 영현당(迎賢堂)인데, 조조의 현대적 평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현당에는 조조의 인재와 관련된 것들이 전시돼 있고, 조조의 참모와 장수들을 소개하고 있다.영현당 안에는 조조와 동고동락하며 목숨을 함께 한 문신과 장수의 상을 전시해 놓았는데 곽가, 사마의, 순욱, 정욱, 진림, 순유, 종회, 진군 등 10大문신(文臣)들과 조조와 함께 천하를 누비던 하후돈을 선두로 조흥, 하후연, 우금, 조인, 장료, 악진, 이전, 서황, 장합 등등 16명의 무신(武臣)들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은 조조의 문신들을 다 합해도 공명의 머리보다 못하고 조조의 장수들을 다 합해도 관우나 장비 한 사람보다도 못한 걸로 그리고 있다. 나관중이 많이 오버한 것 같다.
▶ 의사청(議事廳)
▶ 조조가 의사청에 문신과 장수를 모아 토의하는 모습
▶ 관도대전을 앞두고 토론을 하는 그림
영현당을 뒤편에는 의사청(議事廳)이 있다. 의사청 내에는 조조가 회의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조조를 중심으로 조조의 오른쪽엔 무장들이, 왼쪽에는 책사들을 배치되어 있다. 이는 조조가 어떤 일을 결정을 할 때 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결정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조는 정치적, 군사적인 주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의사청에 문신과 장수를 모아 토의를 한 다음 신중히 결정했다고 한다. 이는 권력이 있는 자가 독단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던 것과 달리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는 합리적 방식을 취한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이다. 의사청 내에는 관도대전을 앞두고 토론을 하는 그림이 있는데 누구보다 똑똑한 조조는 이렇게 큰 전투를 앞두고 모든 사람이 모여 의견을 개진하게 했으며 그 의견을 받아들여 전투에 임함을 보여주고 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 갚겠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하고 오나라로 출병하려다 장비마저 죽게 했으며 자신도 육손의 화공에 빠져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오지도 못하고 백제성에서 시름시름 앓다 죽음을 맞이한 유비와 대비되는 점이다.
▶ 의사청과 부시루 사이에 있는 삼국지 영웅들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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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면들의 앞면(좌)과 뒷면(우)
의사청을 돌아보고 뒤편 건물로 향하는 마당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의 가면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 경극을 할 때 쓰는 가면인 것 같은데 제갈량, 관우, 장비, 주유, 조자룡 등의 특징을 잘 표현한 듯하고 뒷면에는 간략히 그들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부시루(賦詩樓)
▶ 조조가 두 아들 조비, 조식과 이야기하는 동상
▶조씨삼걸(曺氏三杰)에 대한 설명도
▶ 칠보시(七步詩)를 짓는 조식(曺植)
승상부의 맨 뒤 3층 건물은 부시루(賦詩樓)다. 부시루 안으로 들어서면 조조가 두 아들 조비와 조식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상이 우리를 반긴다. 그 옆에는 조씨삼걸(曺氏三杰)이라 해 조조(曺操), 조비(曺丕), 조식(曺植) 삼부자에 대한 인물도와 함께 설명이 쓰여져 있다. 그 옆에는 칠보시(七步詩)가 그림과 전시되어 있다.
煮豆持作羹 漉豉以爲汁 (자두지작갱 녹시이위즙) 萁在釜下燃 豆在釜中泣 (기재부하연 두재부중읍) 本自同根生 相煎何太急 (본자동근생 상전하태급) 콩을 쪄서 마실 죽을 만들고, 콩을 삶아 먹을 즙을 만든다. 콩깍지는 가마솥 아래서 불타고, 콩은 솥 안에서 흐느끼는구나. 본디 같은 뿌리에서 나왔건만, (삶아 댐이) 어찌 이리 급하단 말인가? |
이 시를 지은 조식은 조조의 셋째 아들로 재주가 워낙 출중해 조조에게서 총애를 받고, 형인 조비에게서는 심한 질시와 견제를 받는다.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자신보다 뛰어난 조식이 걱정되어 해치울 기회만 엿보던 어느 날 조비는 조식에게 네가 그렇게 시에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 형제라는 뜻이 들어가되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지으라고 명령하며 만약, 그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칙명을 어긴 이유로 중벌에 처한다고 한다. 이때 조식이 지은 시가 칠보시(七步詩)인데, 조비는 이 시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동생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형제간에도 권력을 두고는 남보다도 못한가 보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게 인간사회인가보다.
▶ 건안칠자의 인물화
부시루 2층에는 조조시대에 꽃을 피웠던 건안문학을 알리려는 공융, 왕찬, 진림, 유정, 서간, 완우, 응창 등 건안칠자의 인물화와 함께 그들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건안칠자란 건안시기에 새로운 조류의 문학을 발전시킨 일곱 명의 문학인들을 가리키는데, 조조와 조조의 두 아들을 삼조라고 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킨 인물들이다. 또한 당시의 그들이 지었다는 시도 전시되어 있다.
2층 한 쪽에는 삼국지(漢魏) 8대 미녀들에 대한 설명과 그림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미녀들은 삼국지연의가 지어진 후 민간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누가 정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첫 번째 미녀는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손꼽히는 초선(貂蟬)인데 삼국지연의에서 왕윤(王允)의 수양딸로 왕윤의 계책에 따라 동탁(董卓)과 여포(呂布)사이를 이간질시켜 동탁을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동탁이 사망한 후 여포를 따라 전쟁터를 누비다가 여포와 함께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인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미녀는 대교(大喬)와 소교(小喬)로 이교(二喬)라고도 불리는데 언니 대교는 오(吳)의 손책(孫策)과, 동생 소교는 오나라 장수 주유(周瑜)와 결혼을 한다. 제갈량(諸葛亮)이 주유의 화를 돋워 오나라를 적벽(赤壁)대전에 참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조식(曹植)이 지은 시 ‘동작대부’에 유독 유부녀를 좋아한 조조가 대교와 소교를 탐하려한다는 내용으로 바꿔 넣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문소황후(文昭皇后) 견씨(甄氏)가 네 번째로 견씨는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의 정비로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된 견씨는 원래 원소(袁紹)의 차남인 원희(袁熙)의 아내였지만 조조가 기주(冀州)성을 함락하자 조비가 원소의 저택을 기습해 견씨를 아내로 삼는다. 삼국지연의는 조조와 조식(曺植)이 견씨를 보고 모두 탐냈다고 쓰고 있다.
▶ 손상향(孫尙香)과 축융부인(祝融婦人)
다섯 번째는 손부인(孫夫人)인데 손견(孫堅)의 딸이자 손책, 손권(孫權)의 이복여동생으로 이름은 손상향(孫尙香)이다. 적벽대전 후 손권이 유비를 동오로 꾀어내기 위해 유비를 손부인과 결혼시킨다. 이후 유비가 서천(西川)으로 출정을 가자 손부인은 동오로 돌아간다.
여섯 번째 축융부인(祝融婦人)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가공인물로 맹획(孟獲)의 아내다. 중국 신화의 불의 신이자 남쪽의 신인 축융(祝融)의 후예로 무예가 출중하며 특히 단도를 잘 던졌는데 제갈량(諸葛亮)에 생포됐다가 풀려난 후 맹획과 함께 제갈량에 항복한다.
▶ 헌목황후(獻穆皇后) 조절(曹節)
헌목황후(獻穆皇后) 조절(曹節)이 일곱 번째다. 조조의 딸로 헌제(獻帝)에게 시집가 후궁이 되었고, 복황후(伏皇后)가 죽은 뒤 황후에 오른 한나라의 마지막 황후다.
마지막 미녀는 채염(蔡琰)이다. 채문희(文姬)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후한의 중신 채옹(蔡邕)의 딸이다. 시재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부시루 건물 뒤의 양쪽으로 대형 죽간을 만들어 전시했는데, 나무로 만들었지만 죽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조승상부는 조조가 승상으로 있을 때 업무를 보았던 곳인데, 지금의 조승상부는 승상이 업무를 보는 곳을 재현한 게 아니라 조조의 삶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 조조의 일생을 동판 부조로 만들어 담장에 붙여 놓았다
조승상부 양쪽으로 담장을 따라 조조의 삶을 동판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파란만장한 조조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다. 그 뒤엔 조조의 일화에 관한 이야기를 부조로 만들어 보기 쉽게 만들어 놓았다.
이들을 보며 조조의 삶을 따라 가 본다. 환관의 손자로 태어 난 조조는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렇게 조조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자와 출신부터 달랐다. 조조는 당시 있는 자에게 주어지던 효렴(孝廉)이라는 제도를 이용해 도성의 문을 관리하는 직책의 관리가 된다. 그러나, 근무에 충실한 나머지 통금을 위반한 환관의 친척을 때려죽인다. 당시 환관은 십상시를 중심으로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인데, 법을 위반한 권력자에 당당히 맞서 자기업무를 충실히 하다 파직당한 조조야말로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닐까?
젊은 시절 세상 돌아가는 일에 환멸도 느낀다. 동탁의 전횡에 대항해 동탁을 암살하려고 왕윤에게 보검을 받아 동탁의 처소에 들어가 낮잠을 즐기는 동탁의 목을 치려고 했지만, 거울에 비친 보검이 돌아누운 동탁의 눈에 비쳐 미수에 그치고 귀한 보검을 바치려고 한다고 거짓말을 해 죽음을 모면하고 도망간다. 당시 동탁에 맞서 동탁을 없애자고 모두 입으로만 말할 때 직접 칼을 들고 들어간 사람은 조조밖에 없었다. 도망 중에도 아버지의 친구 집에 갔다가 그를 대접하려 돼지를 잡을 칼을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해 그 가족을 모두 죽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일로 인하여 조조는 의심많은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당시 황제를 볼모삼아 천하를 호령하던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모두 두려워 머뭇거리며 두려워할 때, 조조는 분연히 일어나 앞장서 원소가 주축이 된 반동탁 연합에 주동적으로 참여한다. 또한 유관장 삼형제가 초대받지도 않은 채 찾아와 문 앞에서 제지당했을 때도 조조가 도와줘 회의장으로 들어온다. 두 영웅들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동탁의 수하 화옹이 군사를 끌고 회의장 앞에 나타나 욕을 하며 놀려대며 반동탁 연합군 장수를 하나씩 죽이자 모두 두려워 아무도 화옹을 대적하러 나가려 하지 않는다. 이때 관우가 자청하자 모두 비웃었지만 조조가 나서 출전을 허락하고 따뜻한 술 한잔을 내린다. 관우는 화웅의 목을 베어 온 후 마시겠다는 말을 하고 단신으로 동탁의 장수 화옹에 달려가 청룡언월도를 휘둘러 단칼에 목을 치고 그 목을 들고 회의장 안으로 들고 들어와 보란 듯이 내동댕이치며 아직 식지도 않은 술을 마셨던 일화도 그려져 있다. 조조가 처음부터 도와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조조의 도움으로 유비는 드디어 삼국지의 주전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관우는 영웅 반열에 들게 된다. 삼국지연의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돼 있지만 실제 화웅을 죽인 영웅은 손견이다. 나관중은 관우를 주연으로 띄우기 위해 손견의 공을 가로채 관우에게 넘겨주는 소설 속의 이야기다.
동탁이 죽자 이곽과 곽사의 손에서 황제를 구출해 장안에서 낙양으로 모셔오지만 낙양은 이미 동탁이 떠날 때 모두 불 질러버려 폐허나 다름없었다. 천하에 영웅이라고 촐랑거리고 나대던 군벌은 어느 누구 하나 황제를 맞아주질 않았다. 그 이유는 곽사와 이각의 보복이 두려웠고 개털 신세보다도 못한 황제는 사실 짐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모두가 모른 체 할 때 혼자 분연히 나서 황제를 모시고 허도로 도읍을 옮긴다.
황건적을 토벌하며 재기해 연주에 머물 때 황건적 출신인 청주병을 수하로 받아들여 조조는 그 후 많은 군벌과 경쟁해 하나씩 부술 때 가장 조조의 정예병으로 활동한 부대가 바로 청주병으로 비록 잡군이었지만, 조련하고 훈련시켜 정예병으로 만든 것이다.
▶ 둔전법 시행
▶ 운량하(運粮河)를 파는 조조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켰다 동탁을 잡는데 실패하고 이제 연주라는 곳을 차지하고 비록 지방의 작은 군벌이지만,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오르자 조조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조조가 연주에서 부모를 모시겠다고 하자 낭야에 피신해 살고 있던 부친 조승은 조조가 있는 연주로 가기 위해 서주를 거쳐 가는데 서주에서 호위를 하던 장수는 바로 얼마 전까지 황건적을 이끌던 장수로 천성은 어쩌지 못하고 조조의 부모를 살해하고 보따리를 챙겨 산속으로 들어가자 조조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서주로 쳐들어가 서주를 점령하고 서주 시람들을 살육하게 된다. 서주 살육이 끝나고 황실의 피폐한 재정을 일으키고 황건적이 되어 천하를 떠돌던 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둔전법이라는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지금도 운량하(運粮河)라는 이름으로 쉬창 시내를 흐르는 운하를 파 곡식을 운반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농사를 더 편하게 지을 수 있는 수로며 쾌적한 삶을 위한 물길을 만들어 난민들을 다시 농토로 불러들인다. 이로 인해 왕실의 재정이 풍족해지고 난민들은 정착해 안정화 한다.
이어, 조조는 북방지역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다. 병사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식량기지를 급습함으로 불리했던 전투를 일거에 역전하고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삼국지의 세 세력 중 가장 먼저 가장 넓고 큰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로써 천하는 셋으로 나뉘며 삼국지라는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맞는 계기를 만든 사람이다.
▶ 검소하게 식사하는 조조
이렇게 몰려다니며 골목 대장질 할 때도 민초가 지은 농사를 망치지 않게 하려고 모든 병사에게 보리밭도 밟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전투를 위해 식량조달을 하려고 공명은 아직 익지도 않은 밀까지 훑어갔지만. 조조는 농사를 짓는 민초의 고생을 생각해 식사마저도 간편하게 먹었다고 한다.
▶ 조카와 아들을 죽였던 장수(張绣)를 항복시켜 수하로 들인 조조
자신의 조카와 아들을 죽였던 장수(張绣)를 항복시키고도, 과거의 치욕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 수하로 들인다. 적을 받아들여 자신의 수하로 만든 사례는 조조에게 수없이 많다.
계륵이라는 말을 만든 조조는 바로 한중을 점령하며 생긴 말이다. 장로의 땅이었던 한중은 조조에게는 계속 주둔하기도 껄끄럽고 그렇다고 철수하자니 아깝고 그런 조조의 마음이 그날 밤 암호로 정한 말이 계륵이라고 했다. 머리 좋은 양수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남보다 빠르게 철수 준비하다 바로 조조에게 참수형을 당한다. 하루 먼저 가려다 평생을 먼저 간 사람이 양수다. 이 또한 먼 후계구도까지 생각하며 양수를 제거한 투시력까지 지닌 조조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조조도 아픔이 있었다. 적벽으로 내려가 큰 전투를 준비하며 천하 대업을 꿈꾸었으나 방통의 연환계와 공명의 동남풍에 어이없이 당하고 만다. 조조에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지만 적벽대전에서 애송이라 여겼던 떠오르는 주유를 만나 인생의 쓴맛을 본다. 공명의 동남풍에 이어지는 주유가 이끄는 동오 수군의 불화살 공격장면은 나 같은 사람은 이 장면에서 박수까지 치며 감동까지 하지만 그 동남풍이 잘나가던 조조를 한순간에 멍청이로 만들었다. 조조는 처음 대패의 맛을 보고 삶의 회의마저 느끼며 패주하기 시작한다. 패주하며 가는 곳마다 공명의 계략을 우습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군사를 매복시키면 적은 군사로도 얼마든지 자기를 쉽게 포박할 수 있다고 껄껄 웃으며 비아냥거리다가 그때마다 매복한 적에게 식겁하고 꽁지가 빠지라 도망갔다. 결국, 마지막까지 화용도에서 공명의 친 마지막 덫인 관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며 옛정을 생각해 살려 달라 애원하고서야 돌아오게 되었고 도읍도 쉬창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나 고민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다가도 공명만 생각하면 잠이 싸악 달아났다고 한다.
▶ 자식교육을 시키는 조조
조조는 자식교육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비의 아들 유선과는 달리 조조는 아들을 전쟁터의 맨 선봉에 서게 했다.
▶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조조
조조가 세상을 하직할 때 마지막 유언을 하며 평상복차림으로 장사지내고 묘를 화려하게 만들지 말고 그 안에 보석도 넣지 말라는 유언을 한다. 또, 그는 살아생전 유명한 많은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을 거두어 군비에 보탰기에 아무도 모르게 무덤을 10개나 만들라고 했고 무덤 안에는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자기가 평소에 했던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조는 천하를 쥐락펴락했고 모든 것을 가졌지만, 황제 자리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탐하지 않았다. 황제 아래 제후 자리인 위 왕으로만 만족한 사람이었다. 능력이 모자랐나? 아니면 따르는 사람이 없었겠나? 조조는 자신의 본분과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조승상부를 나와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듣고 유비에게 갈 때, 조조와 이별하던 파릉교 관공사조처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