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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고수부지출발 08시 회원 26명 출발
영천휴계소 08시 40분
하응두씨 인사(甲戌生91세)
죽서루 도착11시
단체사진
이 현판의 글씨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역시 조선 숙종 대 삼척 부사를 지낸 이성조(李聖肇)의 작품이다.
竹西樓重修記
西樓 吾鄕舊物也 樓之刱 不知在何代 而自永樂癸未府使金孝孫修廢墟重起 至今丁亥 爲年凡五百四十五 重修凡十九 而今丁亥之役 沈基達金東錫沈基鴻池禹範朴熙昇李在鏞徐基煥之力最大 樓復翼然自如於千丈層岩蒼壁上 吾鄕愛古之心 不淺也 余嘗愛西樓之高古 月一再登登 輒不忍下 敬誦列聖朝御製及先正詩 令人心感怳然 若超嬴劉而在江沱汝漢之間 嗚呼 自眞珠觀廢 不復登斯樓也 猶不忍決忘 常往來于中 沈基達李在鏞 叩蓬門曰 子記之 余何忍辭 遂書之爲竹西樓記
丁亥秋七月旣望
鄕人唐城洪百鍊記
죽서루는 우리 고을의 오래된 건물이다. 누각의 창건이 어느 시대에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락 계미년(癸未年)에 부사 김효손(金孝孫)이 황폐화된 옛 터를 정비하여 다시 건립한 이후 지금 정해년(丁亥年)까지 무릇 545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중수한 것이 총 19번인데, 금년 정해년의 중수 공사는 심기달(沈基達)ㆍ김동석(金東錫)ㆍ심기홍(沈基鴻)ㆍ지우범(池禹範)ㆍ박희승(朴熙昇)ㆍ이재용(李在鏞)ㆍ서기환(徐基煥) 등의 노력이 가장 컸다.
누각이 다시 날아갈 듯이 높고 푸른 층암절벽 위에 옛 모습 그대로 솟았으니 우리 고을이 고적을 사랑하는 마음이 얕지 않다. 내가 항상 죽서루의 고상한 옛 풍취를 좋아하여 달마다 한두 번 올랐는데 번번이 차마 내려가지 못하여 역대 임금들이 지은 시와 선현(先賢)들이 지은 시를 공경하여 읽으면 사람의 마음에 황홀감을 느끼도록 만드니 마치 시대를 뛰어넘어 장강(長江)ㆍ타강(沱江)ㆍ여수(汝水)ㆍ한수(漢水)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아! 슬프다. 진주관(眞珠觀)이 허물어진 이후로는 다시 이 누각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차마 결코 잊지 못하여 항상 누각에 왕래하였었는데, 심기달(沈基達)과 이재용(李在鏞)이 나의 집을 찾아와 말하기를 ‘자네가 기문(記文)을 쓰게’라고 하니 내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이에 마침내 죽서루기(竹西樓記)를 썼다.
정해년(1947) 가을 7월 16일
향인(鄕人) 당성(唐城) 홍백련(洪百鍊)이 쓰다
중수기(重修記)
관동 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보물 제213호)는 오십천 푸른 물이 감돌아 흘러 수십 길 기암절벽에 어울려진 천혜의 단애(斷崖)위에 터를 잡아 장관인데 옛부터 시인 묵객이 다투어 찾아와 시정(詩情)에 젖었던 유서깊은 곳으로 이 고장 젊은이들의 꿈과 낭만이 충만한 이상적 역사의 현장으로써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관동의 제1루로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 당시 최규하 대통령께서 취임직후 경내 확장을 칙지(勅旨)함에 따라 1981년 10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4일까지 2억 1백만 원을 들여 경내 면적을 3천 8백 1십 3평으로 확장하고 누각 개수, 화장실 신축, 평삼문(平三門) 개축, 담장 설치 등 대대적으로 중수함으로서 독특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누각과 수려한 주변경관은 세계적인 명소로 불멸의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늦게나마 최규하 전대통령께서 배려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삼척 시민의 뜻을 모아 이 중수기를 쓴다.
1991년 12월 20일
삼척시장 김광용(金光容) 근지(謹誌)
陪安集使兵部陳侍郞(諱子俟)登眞珠府西樓次板上韻[배안집사병부진시랑(휘자사)등진주부서루차판상운]
半空金碧駕崢嶸(반공금벽가쟁영) 掩映雲端舞棟楹(엄영운단무동영)
斜倚翠岩看鵠擧(사의취암간곡거) 俯臨丹檻數魚行(부림단함수어행)
山圍平野圓成界(산위평야원성계) 縣爲高樓別有名(현위고루별유명)
便欲投簪聊送老(편욕투잠료송로) 庶將螢燭助君明(서장형촉조군명)
李承休(이승휴)
안집사(安集使) 병부시랑(兵部侍郞) 진자사(陳子俟)를 모시고 진주부(眞珠府) 서루(西樓)에 올라 판상(板上)의 시를 차운(次韻)하다
높은 하늘 고운 색채 높고 험준함을 더하는데
햇빛 가린 구름조각 용마루와 기둥에서 춤추는구나
푸른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날아가는 고니 바라보고
붉은 난간 잡고 내려다보며 노니는 물고기 헤아려 보네
산은 들판을 빙 둘러싸 둥그런 경계를 만들었는데
이 고을은 높은 누각 때문에 매우 유명해졌구나
문득 벼슬 버리고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태 임금 현명해지기를 바라네
이승휴(李承休)
竹西樓重建上樑文
興替有數 聿覩百尺華構重建之辰 平陂無關 固知千層岩壁自在之地 溪山依舊 風景如新 竊惟三陟西樓 九郡南阜 金使君修廢墟重起 亶在永樂元年 李居士次板韻尙傳 盖自勝國中葉 屛鳳凰高坮 而隔滄海之觀 自成一家 依葛夜古城 而案頭陀之雄 遠照三面 浮嵐積翠 岩峀杳冥 名勝無爭 膾炙聞三千里 群湍有力 屈折爲五十川 脩瀨灣回 綠波瀲灩 鳥時行而白沙成篆 魚或躍而碧浪破紋 雲漢逈昭 回於紗籠 烟霞幷品題於玉軸 四境無事 太守風流 古寺有傳 竹藏鐘磬 庾樓夕月 縢閣朝雲 雖在官衙城頭 如入蓬萊島上 然且有形而立 焉能無年而長 夫何降雨之隤 往在白狗之祀 鄕父老胥爲嗟惜 國道郡競乃佽相 肆諏吉辰重營土圭之定 一仍舊貫 僉同堂構之謀 杞梓여樟 乃斧乃鉅 甃甓磉礎 奚탁奚磨 不日告工 如子來父 今玆衆人眼前突兀 實自徐侯心上 經營助擧 虹梁式騰燕賀
抛梁東 鳳凰臺屹碧天東 自成一局元由此 桑海風波籠隔東
抛梁南 三樂亭墟草沒南 昔日鄕人兄弟會 洽如晉阮北而南
抛梁西 頭陀雄相遠臨西 凝然如涉石船坐 應是爾時來自西
抛梁北 古城葛夜鎭堅北 一時崔相遷移 略侵掠憂 深蒙古北
抛梁上 十二欄干碧落上 仙笛戞然 群鶴舞謠 民耕鑿渾忘上
抛梁下 長川五十始灣下 銀刀玉尺 浮沉穩 爰得所哉魚樂下
伏願上梁之後 海波不起 溪山永淸 四野農歌繼擊壤之餘韻 一聲絃誦 保鄒魯之遺風
唐城洪鍾凡 製
檀紀四千三百四年辛亥四月二十六日巳時上樑
흥망성쇠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이에 높고 화려한 구조를 가진 누각을 중건하는 날을 보게 되었지만, 누각의 온전함과 기울어짐에 관계없이 층암절벽이 제멋대로 기이하게 우뚝 솟아 있는 곳이라 시내와 산은 옛 모습 그대로이지만 경치는 새로워진 것 같음을 새삼 알겠다. 생각건대 삼척의 죽서루는 아홉 개 군(郡) 가운데 남쪽에 있는 높고 큰 누각으로서 김 부사가 황폐화된 옛 터를 손질하여 다시 세운 것은 확실히 영락(永樂) 원년(1403)의 일이었고, 이 거사(居士)가 현판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가 아직도 전해오고 있으니 대체로 고려 중엽부터 있었던 것 같다.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높은 봉황대와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경관은 원래 매우 아름답고, 뒤쪽의 갈야산 옛 성과 마주 보이는 두타산의 웅장함은 저 멀리 세 방향에서 빛나는데 푸른 기운이 짙게 서려있어 바위로 된 골짜기가 그윽하고 어둑하다. 이에 아름다운 경치로는 겨룰 곳이 없다는 평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전국에 알려졌다.
여러 세찬 급류가 굽이치면서 오십천을 이루고는 여울을 만들며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데 푸른 물결은 번쩍번쩍 빛나고, 새들은 때때로 거닐면서 흰모래 위에 전서체(篆書體)의 글자 모양을 만들고, 물고기는 간혹 뛰어올라 푸른 물결의 무늬를 흩뜨리고 있다. 은하수가 저 멀리 밝게 빛나니 사롱(紗籠)에 둘러 쌓인 것 같고 연기와 노을은 아름다운 두루말이에다 품평(品評)하는 것 같다.
온 고을이 무사태평하면 태수가 풍류를 즐겼는데 옛 절에서는 전해오는 죽장사(竹藏寺)의 종소리와 경쇠소리가 들리고, 유루(庾樓)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저녁달이 떠오르고, 등왕각(滕王閣)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아침 구름이 피어오르니 비록 몸은 관아의 성 부근에 있으나 봉래도(蓬萊島)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나 형체를 가지고 서있는 것이 어찌 무한정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지난 번 흰 개를 잡아 제사를 지내던 날 약간 내린 비에 무너져 내려 고을의 어른들이 모두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겼는데, 국도(國道) 변의 여러 군(郡)들이 곧 다투어 보조해 주었다. 이에 좋은 날을 택하여 중건을 시작하되 오로지 옛 모습대로 할 것을 물었더니 모두가 옛 모습 그대로 수리하는 계획에 찬성하였으므로 좋은 목재를 마련하여 자르기도 하고 깎기도 하고, 벽돌과 주춧돌을 깨기도 하고 갈기도 하여 며칠만에 완공하였는데 백성들이 자진해서 공사에 참여하여 도왔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 우뚝 높이 솟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서 군수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 공사를 함에 도와서 거들어주었고, 들보를 올리는 의식에서는 축하의 글을 써 전해주었다.
동쪽 들보를 올리니 봉황대(鳳凰臺)가 푸른 하늘 동쪽에 우뚝 솟았구나. 그곳이 스스로 하나의 형세를 이룬 것은 본래 이것 때문이니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풍파가 동쪽으로 보이지 않게 멀리 떨어져 있네.
남쪽 들보를 올리니 삼락정(三樂亭) 옛 터의 풀이 모두 남쪽으로 향하여 누웠구나. 옛날 고을 사람들과 형제들의 모임에서 화목함이 남북으로 나뉘어 살던 진(晉)나라 완씨(阮氏) 집안 같았네.
서쪽 들보를 올리니 두타산의 웅장한 모습이 멀리 서쪽에 마주 보이는구나. 그 견고함이 석선(石船)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으니 마땅히 그 옛날 서쪽에서 왔을 것 같네.
북쪽 들보를 올리니 옛 성이 있는 갈야산이 북쪽에 진산(鎭山)으로서 굳게 서있구나. 잠시 최 재상(宰相)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침략의 근심을 줄이고 몽고를 북쪽으로 멀리 물러나게 하였네.
위쪽 들보를 올리니 열두 난간이 푸른 하늘에 떠있구나. 신선의 피리소리 들리니 여러 학들이 춤추고 노래하는데 백성들은 농사일에 정신이 없네.
아래쪽 들보를 올리니 긴 하천 오십천이 굽이돌아 아래로 흐르기 시작하는구나. 은도(銀刀)․옥척(玉尺)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함이 평온하니 여기에서 물고기가 즐기기에 알맞은 장소를 얻었네.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로는 바다에 파도가 일지 말고, 시내와 산이 영원히 맑아지고, 온 들녘에서 농부들이 계속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고, 오로지 거문고 타고 시 읊는 소리만이 울려 퍼져 공맹(孔孟)의 학문을 지켜가도록 해주소서.
당성(唐城) 홍종범(洪鍾凡) 지음
단기 4304년(1971) 신해년(辛亥年) 4월 26일 사시(巳時) 상량(上樑)
이 현판의 글씨 ‘죽서루(죽서루)’는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다.
竹西樓記
東界多名區 其絶勝八 如通川叢石亭 高城三日浦海山亭 䢘城永郞湖 襄陽洛山寺 溟州鏡浦臺 陟州竹西樓 平海越松浦 遊觀者 獨稱西樓爲第一 何也 盖濱海州郡 關嶺以外 東盡大海 其外無窮 日月迭出 怪氣萬變 海岸皆沙 或匯爲大澤 或矗爲奇岩 或鬱爲深松 自習溪以北 至箕城南境 七百里 大體皆然 獨西樓之勝 隔海有高峯峭壁 西有頭陀太白 嵬峨巃嵷 浮嵐積翠 岩峀杳冥 大川東流 屈折爲五十瀨 間有茂林墟烟 至樓下 層岩蒼壁千尋 淸潭修瀨 灣回其下 西日綠波 粼粼澹灩 岩壁別區 勝槪與大海之觀絶殊 遊觀者 其樂此而云云耶 考官府故事 樓不知作於何代 而至永樂元年 府使金孝宗 修廢墟起此樓 洪熙元年 府使趙貫 施丹雘 其後四十六年 成化七年 府使梁瓚 重修之 嘉靖九年 府使許確 增作南檐 又其後六十一年 萬曆十九年 府使鄭惟淸 復重修之 自太宗永樂元年癸未 至康熙元年壬寅 爲二百六十年 樓下古有竹藏古寺 有竹西之名 盖以此云 仍誌之以爲竹西樓記 今上顯宗三年壬寅 月 日
行都護府使許穆記
동계(東界)에는 경치가 뛰어 난 곳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 난 곳이 여덟 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䢘城)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嶺)을 제외하면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奇)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다 물이 큰 못같이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이 우뚝 솟기도 하고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북쪽 지역으로부터 기성(箕城)남쪽 경계 지역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그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큰 하천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은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관부(官府)의 고사(故事)를 살펴보아도 죽서루를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락(永樂) 원년(1403:태종 3)에 부사 김효종(金孝宗)이 폐허화된 옛 터를 정비하여 이 죽서루를 건립하였고, 홍희(洪熙) 원년(1425:세종 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하였다. 그 46년 뒤인 성화(成化) 7년(1471:성종 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하였고, 가정(嘉靖) 9년(1530:중종 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덧대어 지었고, 또 그 61년 뒤인 만력(萬曆) 19년(1591:선조 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 대인 영락 원년(1403) 계미년(癸未年)부터 지금 강희(康熙) 원년(1662:현종 3) 임인년(壬寅年)까지는 260년이나 된다.
죽서루 아래에는 옛날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기록하여 죽서루기(竹西樓記)로 한다.
현종 3년(1662) 임인년(壬寅年) 월 일
행도호부사 허목이 기문(記文)을 쓰다.
敬次石川(경차석천)
天地無心客(천지무심객) 江湖有約人(강호유약인)
斜陽樓百尺(사양루백척) 虛送故園春(허송고원춘)
己未仲夏旬三(기미중하순삼) 全義李俊民(전의이준민)
삼가 석천(石川)의 시를 차운(次韻)하다
세상일에 무심한 나그네
강호에 살기로 사람들과 약속했네
백 척 누각에 해 넘어가니
고향에서의 젊은 시절 헛되이 보내구나
先祖參贊公次石川詩 壁上有題 今已九十餘歲 不勝感愴 謹書以記云
丁酉季春 曾孫 江陵府使 枝茂
선조 참찬공(參贊公:이준민을 말함)이 석천(石川)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가 벽 위에 쓰여져 있으니 지금 벌써 90여 년이 되었다. 사모하는 마음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몇 자 적어 이렇게 기록하노라.
정유년(1657) 3월 증손 강릉부사 지무(枝茂)
③兩祖登臨地(양조등림지) 今來感慕人(금래감모인)
賡題前後詠(갱제전후영) 百五十三春(백오십삼춘)
두 분 할아버지가 오르셨던 곳
이제서야 찾아와 감동하여 사모하는 후손이라네
두 분이 이어서 지은 시가 앞뒤로 걸려있으니
세월은 흘러 벌써 153년이 지났네
先祖參贊公題竹樓 後九十九年 祖父承旨公次題 又其後五十四年 不肖孫守玆邑 謹續次以寓感慕面 恐各板見失 模本集刻云
辛卯季春 五代孫府使聖肇
선조 참찬공(參贊公:이준민을 말함)이 죽서루 시를 지었는데, 그 99년 후에 조부 승지공(承旨公:이지무를 말함)이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고 또 그 54년 후에 불초(不肖) 후손 내가 이 고을에 부사로 와서 계속 차운하여 시를 지어 감동하여 사모하는 체면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각 목판을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원판의 시를 본떠 모아서 이렇게 새겼다.
신묘년(1711) 3월 5대 손 부사 성조(聖肇)
惟我八代祖五代祖曾祖考 三世五言節句 同一板揭竹西樓久矣 不肖孫潤國 來守鎭營 見樓上無所存 此必歲遠朽落 不勝悲歎 乃取家中所藏印本 改刻還揭 嗚呼 曾王考以肅宗辛卯作府伯 不肖孫潤國莅鎭 亦在此年 一甲纔回 改懸詩板事 若有不偶然者 謹書于下端 以識追感焉
辛卯冬日不肖孫營將潤國謹書
나의 8대 조와 5대 조 그리고 증조 이 3대가 쓴 오언절구의 시가 같은 목판에 새겨져 죽서루에 걸려 있은 지는 오래되었는데, 불초(不肖) 후손 윤국(潤國)이 삼척 진(鎭) 영장(營將)으로 부임한 후 죽서루에 이 시판(詩板)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반드시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썩어서 떨어진 것이겠지만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인쇄 본을 가져다가 고쳐 새겨 다시 걸었다. 아! 슬프다. 증조 할아버지가 숙종 대 신묘년(辛卯年)에 삼척 부사가 되었는데 불초 후손 윤국이 삼척 진 영장으로 부임한 것도 역시 신묘년이니, 막 60년이 지나 시판을 고쳐 걸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이에 아래쪽 끝에다 삼가 몇 자 적어 추모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신묘년(1771) 겨울 어느 날 불초 후손 영장(營將) 윤국(潤國)이 삼가 쓰다
⑤先祖孝翼公板韻之刑 弊許久矣 後孫來守本鎭 感慕而重修焉
甲午七月日十二代孫營將晳鎬
題竹西樓(제죽서루)
頭陀山落起高樓(두타산락기고루) 樓下長江不盡流(누하장강부진류)
巖削二三層壁立(암삭이삼층벽립) 魚廻五十谷川游(어회오십곡천유)
誇今棟宇千年史(과금동우천년사) 懷舊文章七月舟(회구문장칠월주)
古來賢達逍遙地(고래현달소요지) 余亦當時百里憂(여역당시백리우)
檀紀四二九四年一月一日(단기사이구사년일월일일) 前郡守(전군수) 尹 昇老(윤승로)
죽서루 시를 쓰다
두타산 뻗어 내린 자락에 높은 누각 우뚝 솟았는데
누각 아랜 긴 강은 끊임없이 흘러가네
깎아지른 층암절벽 솟아있고
물고기는 쉰 구비 냇물 따라 놀고 있네
지금 누각은 천년 역사 자랑하는데
옛 글들은 초가을 뱃놀이 생각나게 하네
예로부터 현인(賢人) 달사(達士)가 놀던 곳인데
나는 그때 겨우 지방 다스릴 걱정만 하였구나
단기 4294년 1월 1일 전 군수 윤승로(尹昇老)
이 현판의 글씨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삼척 부사를 지낸 이규헌(李奎憲)의 작품이다. 이규헌은 1835년(헌종 1) 7월에 삼척 부사로 왔다가 1839년(헌종 5)에 능주 목사로 옮겨갔다. 그는 재임동안 부세(賦稅) 감면, 유생 교육, 백성 교화에 노력하여 선정(善政)을 펼쳤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떠난 후 선정비(善政碑)와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정조어제시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돌을 쪼고 절벽 깎아 누각 하나 세웠구나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누각 옆에는 푸른 바다 해변에는 갈매기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죽서루 있는 고을 태수 누구 집 아들인가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미녀들 가득 싣고 밤새워 뱃놀이 하겠구나
五十川韻(오십천운)
川自牛山來(천자우산래) 沙明苔蘚綠(사명태선록)
縈紆何盤盤(영우하반반) 四十七回曲(사십칠회곡)
深厲淺則揭(심려천즉게) 石齒嚙我足(석치교아족)
時見浣紗女(시견완사녀) 白晳顔如玉(백석안여옥)
家住水東西(가주수동서) 柴扉掩幽谷(시비엄유곡)
我欲從之遊(아욕종지유) 微辭屢往復(미사루왕복)
佳期在桃月(가기재도월) 一諾終不宿(일낙종불숙)
沿流惆愴歸(연류추창귀) 疎風響修竹(소풍향수죽)
‘오십천’을 차운(次韻)하다
우보산에서 흘러내린 냇물
모래는 깨끗하고 이끼는 푸르구나
굽이쳐 흐름이 몇 구비인가
마흔 일곱 구비 돌아 흐르네
깊은 곳은 옷을 허리까지 걷고 얕은 곳은 무릎까지 걷고서 건너니
돌부리 내 발을 찌르고
때맞추어 보이는 빨래하는 여인은
얼굴이 옥과 같이 희구나
집들은 냇물 동서로 자리잡았는데
사립문이 깊숙한 골짜기를 가리는구나
내 마음은 쫓아가 노닐면서
소곤소곤 많은 정담을 나누고 싶지만
3월에 만나기로 하였으니
한번 승낙함에 결국 머물지 못하고
흐르는 물 길 따라 쓸쓸히 돌아오려니
간간이 부는 바람 긴 대나무 숲을 울리네
②次(차)
大嶺之東八九官(대령지동팔구관) 竹西風景最淸閑(죽서풍경최청한)
川回斷岸縈紆處(천회단안영우처) 棟壓層巖縹緲間(동압층암표묘간)
半夜灘聲琴奏曲(반야탄성금주곡) 三冬雪色玉爲巒(삼동설색옥위만)
佳人不識詩人意(가인불식시인의) 笑殺吟肩似聳山(소살음견사용산)
차운(次韻)하다
대관령 동쪽에 여덟 아홉 개의 고을이 있지만
죽서루 풍경이 가장 맑고 조용하구나
냇물은 절벽을 휘감고 돌아 흐르고
용마루는 층암절벽 위에 높게 솟아 아득하구나
한 밤의 여울물 흐르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것 같고
겨울의 설경(雪景)은 옥이 쌓여 작은 산을 이룬 듯 한데
사모하는 님은 시인의 마음을 몰라주니
웃음소리에 시인의 어깨만이 산처럼 치솟는구나
③又(우)
江面危橋橫一木(강면위교횡일목) 人去人來行也獨(인거인래행야독)
山連北塞勢巍巍(산연북새세외외) 水注東溟流曲曲(수주동명류곡곡)
神仙風馭遊怳惚(신선풍어유황홀) 猿鶴幽栖在岑鬱(원학유서재잠울)
蓬壺遙望海漫漫(봉호요망해만만) 巨鰲頭高長不沒(거오두고장불몰)
또 차운(次韻)하다
강 위에 놓인 위태로운 외나무다리
오가는 사람 혼자서 건너야 하고
북쪽 지경에 늘어선 산들 그 기세 높고 크며
동쪽 바다로 흘러가는 물 구불구불 흘러가니
신선이 바람을 타고 황홀하게 노니는 것 같고
원숭이와 학이 산봉우리 울창한 숲 속에 깃들인 듯 하네
저 멀리 봉래산(蓬萊山)바라보니 바다는 아득한데
큰 자라 머리 높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구나
④和韻呈府伯(화운정부백)
使君豪氣足風流(사군호기족풍류) 出守猶分第一樓(출수유분제일루)
密席戱令紅袖狎(밀석희령홍수압) 高歌還挽綵雲留(고가환만채운류)
眞心好箇罇中蟻(진심호개준중의) 浪說何須海上鷗(낭설하수해상구)
老子狂吟應伯仲(노자광음응백중) 千場大笑播東州(천장대소파동주)
화운(和韻)하여 부사에게 주다
부사 그대의 호방한 기상 풍류를 즐기기에 충분하더니만
수령으로 나감에 또한 제일 좋은 누각이 있는 지방에 임명되었구려
조용한 자리 마련하고 미인을 가까이하여 즐겁게 노니
큰 노래 소리에 비단구름마저 머무는구나
진실 된 마음에 술을 적당히 마셨는데
뜬소문에 어찌 바다의 갈매기가 내려와 놀아 주기를 바라겠는가
노자(老子)가 취기 어려 시가를 읊음이 마땅히 이러하였을 것이니
한바탕 큰 웃음소리만이 동쪽 고을로 퍼져가네
⑤又贈短律(우증단율)
玉堂金學士(옥당김학사) 江外謝宣城(강외사선성)
過客同文擧(과객동문거) 論兵慕孔明(논병모공명)
重來靑眼豁(중래청안활) 話別白髭生(화별백자생)
此後明思處(차후명사처) 孤燈夢不成(고등몽불성)
藥峯(약봉) 徐渻稿(서성고)
또 짧은 율시(律詩)를 지어 주다
옥당(玉堂)의 김 학사(學士)가
강 너머에서 작별하고 선성(宣城)으로 떠나 갈 때
이 나그네도 글 모임에 함께 참석하여
병법(兵法)을 논하며 제갈량(諸葛亮)을 사모하였었는데
다시 찾아오니 반겨주는 눈은 광활하지만
이별의 말을 나누자니 흰 수염이 생겼구나
이후로 그리움만 더해 가는데
외로운 등불아래 꿈조차 꿀 수 없구나
약봉 서성이 쓰다
이 현판의 글씨 ‘제일계정(第一溪亭)’은 삼척 부사를 지낸 허목(許穆)의 작품이라고 한다. 허목(1595-1682)은 자를 문보(文父) 혹은 화보(和甫)라 하였고, 호를 미수(眉叟) 혹은 태령노인(台嶺老人)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60세가 넘어 지평(持平)에 임명됨으로써 벼슬을 시작하였다.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삼척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대사헌ㆍ이조 참판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주장하여 남인(南人)이 탁남(濁南)ㆍ청남(淸南)으로 갈리게 되었다. 학문ㆍ글씨ㆍ그림ㆍ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전서(篆書)를 잘 썼다. 저서에 동사(東事)ㆍ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ㆍ경설(經說)ㆍ경례유찬(經禮類纂)ㆍ미수기언(眉叟記言) 등이 있다.
허목은 1660년(현종 1) 10월에 삼척 부사로 왔다가 1662년(현종 3) 8월에 진상(進上)을 궐봉(闕封)하여 파직되었다. 그는 재임동안 삼척 지방 최초의 사찬읍지인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였고,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그의 독특한 서체인 고전체(古篆體)로 각석(刻石)하여 척주동해비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허목은 향약을 실시하고 이사제(里社制)를 실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에 읍인(邑人)들이 1825년(순조 25)에 그를 경행사(景行祠)에 추배(追配)하였다.
이 현판에는 1947년 죽서루 중수 시 기부금을 낸 인물․회사 및 단체의 이름과 기부금 액수를 기록한 ‘죽서루중수기부금방명기(竹西樓重修寄附金芳名記)’를 써 놓았다. 기부금 내역을 보면 다음 표와 같다.
기부금액수 (원) | 기부 건수 | 기부금총액 (원) | ||
개 인 | 회 사 | 단 체 | ||
20,000 | 3 | - | - | 60,000 |
15,000 | - | 1 | - | 15,000 |
10,000 | 5 | 3 | - | 80,000 |
7,000 | 1 | - | - | 7,000 |
6,000 | 3 | - | - | 18,000 |
5,000 | 10 | - | - | 50,000 |
3,000 | 6 | - | 1 | 21,000 |
2,500 | 1 | - | - | 2,500 |
2,000 | 11 | 1 | 2 | 28,000 |
1,000 | 5 | 1 | 2 | 8,000 |
500 | 1 | - | - | 500 |
합 계 | 46 | 6 | 5 | 290,000 |
위 표에서 보면 개인 46명, 회사 6곳, 단체 5곳에서 총 290,000원의 기부금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500원부터 많게는 20,000원까지 기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교중(校中)에서 기부한 2,000원은 송목(松木) 20본(本) 대신으로 낸 것이고, 김씨 종중(宗中)에서 기부한 1,000원은 송목 2본 대신으로 낸 것이다.
次竹西樓板上韻(차죽서루판상운)
關東第一竹西樓(관동제일죽서루) 樓下溶溶碧玉流(누하용용벽옥류)
山靜鳥啼叢桂樹(산정조제총계수) 月明人語木蘭舟(월명인어목란주)
百年泉石如相待(백년천석여상대) 千古文章不盡遊(천고문장부진유)
采采瓊華生遠思(채채경화생원사) 白雲歸駕故掩留(백운귀가고엄류)
沈英慶(심영경)
죽서루에서 판상(板上)의 시를 차운(次韻)하다
관동에서 제일 가는 누각 죽서루
누각 아래 푸른 물 도도히 흐르는구나
산은 고요한데 우거진 계수나무 숲에서는 새 소리 들리고
달은 밝은데 목란으로 만든 배에서는 사람들 이야기 소리 들려오네
오랜 세월 물과 돌이 어우러져 만든 듯한 이 경치
천고(千古)의 문장으로도 다 표현할 수가 없구나
무성한 아름다운 꽃들은 옛 추억 생각나게 하는데
떠가던 흰 구름 도리어 오래 머무르네
심영경
竹西樓(죽서루) -松江(송강) 鄭澈(정철)-
關東仙界陟州樓(관동선계척주루) 虛檻憑危夏亦秋(허함빙위하역추)
天上玉京隣北左(천상옥경인북좌) 夢中銀潢聽西流(몽중은황청서류)
疎簾欲捲露華濕(소렴욕권로화습) 一鳥不飛江色愁(일조불비강색수)
欄下孤舟將入海(난하고주장입해) 釣竿應拂鬱陵鷗(조간응불울릉구)
죽서루 -송강 정철-
관동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척주의 누각
커다란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서니 여름 또한 가을 같구나
하늘나라 서울 옥경(玉京)은 북쪽 왼편에 이웃해 있어
마음을 가다듬으니 은하수 서쪽으로 흘러가는 소리 들리네
성긴 발 걷으려 하니 빛나는 이슬 축축하고
한 마리 새조차 날지 않으니 강가의 경치 수심 가득하구나
난간 아래 외로이 떠있는 배 바다로 들려 하는데
낚싯대 울릉도 가는 갈매기 쫓아 휘두르네
임원항에서 오찬
울진봉평리신라비 방문
울진 조선시대 지방관들 송덕비
정자이름 없슴
골동품의 천국 장사휴계소
영천도착19시 조교운주산식당에서 만찬후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