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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지주의와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
예수님의 형제였던 유다는 영지주의 자들과의 전쟁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나자신이 먼저 내부의 영지주의적 가능성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내게서 이기면 외부의 영지주의를 이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는 비유적 차원에서 영지주의적인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인 노인처럼 큰 물고기에 작살을 꽂지 않으면 영지주의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와 “노인과 바다”
(유1:1~2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영지주의와 “노인과 바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이지요, 이 소설의 내용을 읽지 않아도 우리는 대부분압니다.
하도 유명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너무나 많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잘 아는데, 52년에 나온 이 소설로 헤밍웨이가 53년에 퓰리처상을 받고 5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게 됩니다.
오늘 말씀과 연관 지어서 필요하기 때문에 잠깐 내용을 반복하면, 무려 84일 동안이나 고기를 못 잡고 허탕을 친 쿠바의 노어부가 85일 때 되는 날 멀리 바다에 나갔다가 어마어마하게 큰, 그러니까 1500파운드, 거의 7, 800KG 정도 되는 청새치라고 하는 주둥이가 삐죽한 물고기가 낚시에 물리고, 그 낚시로 사흘 밤낮을 사투 끝에 고기가 지쳐있을 때, 작살을 꽂아서 심장을 관통시킵니다.
그래서 지친 몸으로 그러나 큰 고기를 잡았다는 기쁨으로 이제 항구를 향해 돌아오는 길에, 엎친 데 덮친다고 상어 떼들이 몰려옵니다.
그러니까 그 청새치를 지키려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상어들과 사투를 벌이는데, 상어를 몇 마리 죽였어요, 그리고 그리고 항구에 도착해보니까 결국 다른 상어들에 의해서 그 청새치가 다 뜯어 먹혀서 머리와 뼈만 남게 되어 있더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에서 헤밍웨이가 뜻하는 바는 상어 떼가 죽음이에요.
죽음에 의해서 우리는 소멸돼가게 되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소멸될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기정사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대해서 용기를 갖고 살아가는 그런 어떤 실존철학의 기반을 둔 삶에의 용기를 노래했다고 해서 노벨상이 주어졌는데, 정작 헤밍웨이 당신 자신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자살을 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죽음과 맞서서 용기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그냥 그것은 지식일 뿐이고 소망이고 꿈일 뿐이에요.
그러나 실제의 인간의 존재는 그런 식으로 맞서 싸운다고 삶이 훌륭하게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반증하고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에서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헤밍웨이의 삶을 보면 ‘아, 사람은 헤밍웨이의 소설처럼 그렇게 죽음과 맞서 싸우는 용기 있는 존재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가 없구나, 라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는 겁니다.
자, 이 얘기에서 뭐 깊은 철학적인 얘기 이런 걸 염두에 두실 필요는 없고, 한 장면을 염두에 두시면 됩니다.
낚시에 걸린 이 청새치와 사흘 밤낮을 사투를 벌인 끝에 청새치가 지쳐서 물에 떠올랐을 때 작살을 꽂습니다.
이 작살을 꽂는 순간 완전히 포획을 한 거예요, 내 것이 된 거죠.
이 장면을 염두에 두시면 됩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에서 비유적인 도움을 받으려면 그 장면을 염두에 두면 좋다는 거예요.
유다서를 쓴 유다가 누구냐 하면 가롯유다도 있고 유다라는 이름이 많은데, 예수님의 동생, 그 중에 유명한 분이 야고보인데, 그 야고보의 동생이 또 유다에요.
그런데 이분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믿지 않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믿어서 오순절 이후부터 교회의 일원이 되고, 아주 중요한 직책을 맡고 지도자격인 역할을 수행하신 분들입니다.
그 유다가 이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요.
근데 주 내용이 뭐냐 하면, 이게 70년에서 80년 사이에 쓰였다고 믿어지는데, 역시 영지주의자와의 전쟁을 강력하게 수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아주 영지주의 이단이 1세기 교회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했던 존재에요.
이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웬만큼 그 윤곽을 아실 거예요.
이 육체나 물질을 아주 천하게 여깁니다,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를 굉장히 고귀하게 여깁니다, 이원론자들이에요.
그것이 논리적으로 발전하다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실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잘것없고 더럽고 추한 육체를 입으실 리가 없습니다.
육체를 부인하다보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다는 것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잠깐 빌려 쓰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시다가 십자가 전에 그리스도의 영은 다시 떠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니고 예수라는 인간의 육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믿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이러다보니까 문제들이 많이 생기게 되는데, 그게 교회를 완전히 파탄으로 이끌어가고 있더라 이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이원론, 육체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이고 영적인 것만 고귀하다는 이원론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영지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위험을 모든 기독교인이 개인 속에 다 갖고 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영지주의화 돼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속에 영지주의적 가능성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를 보고 그걸 싸워 이기면, 외부적인 영지주의와 싸워 이기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내부적인 영지주의적 위협이 어떻게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겁니까?
영지주의가 뭐에요?
육체는 더럽고 하찮은 것이니까 영적인 차원에 대한 고상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런 얘깁니다.
영지(靈知),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에요.
근데 이게 우리들에게 어떻게 영지주의적인 위험이 나타나느냐 하면, 우리가 지식적으로 영지주의와 다릅니다, 지식적으로 영지주의는 지식적인 차원에서도 틀렸어요.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를 입고 인간이 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얘기가 오늘도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얘기합니다.
근데 이 믿는다는 게 인격적인 믿음이 돼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우리가 대부분 어떤 상태에 머물고 있나 하면, 지식적인 상태에 머뭅니다.
영지주의와는 다르게 지식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었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고 믿고 있다고 하지만, 인격적인 시인이 되지 못하고 지식에 머물고 있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지식에 머물고 있는 상태가 되었으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때 문제가 뭐냐 하면, 영적인 차원에 대한 어떠한 깊은 지식이 있어도 그 지식과 내 마음은 맞물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그 지식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식과 마음은 겉돌고 있다는 얘깁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깊고 신비한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이 많아도 영지주의와는 다르게 모든 게 정통신앙에 입각해서 올바른 지식을 다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별개로 논다 이겁니다.
이 사실을 영지주의가 간과해버리고, 그럼으로써 죄성 친화적인 사상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자, 죄성이라는 게 뭘까요?
영지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될 때, 즉 지식을 갖고 있음으로써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게 되는 영지주의적 성향이 나타날 때 나타나는 위험이 뭐냐 하면, 우리 마음과 인격 속에 스며있는 죄성이 이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 놓고 발휘돼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영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도 우리 마음과 그 지식이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지 않는 거예요, 따로 놉니다, 따로 놀아.
그러니까 대한민국 교회가 성경공부를 이렇게 많이 하는데도 교회의 현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고, 모든 교회가 지향하는 것이 큰 예배당과 숫자적인 부흥과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들을 하면서, 가정에 와서는 전혀 복음적으로 신앙적으로 살지 않고 있는 이런 형태가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그 많은 성경공부의 지식이 다 맞아요, 사소한 데서 디테일 한 데서 차이가 있더라도 근본 줄기가 다 정통적인 신앙의 지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마음이 맞물려 들어가서 그 지식과 합일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따로 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게 바로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지식만 갖고 있어도 구원 받은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죄성이 뭡니까?
죄성은 에덴을 항상 염두에 두시면 돼요.
기쁨을 뜻한다는 에덴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근데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어서 만족하고 만족함이 기쁨으로 변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성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겨났어요, 기쁨의 동산이니까 기쁨의 동산에서 쫓겨나면 기쁨을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에덴 바깥에는.
근데 기쁨이 없는 이 세상바다에서 낚시질을 하는 거예요.
이 쿠바의 노어부가 낚시질을 하는 것처럼 낚시질을 하는 겁니다.
비어있는 배를 낚시를 통해 고기를 잡아서 채우려는 것처럼 마음의 배를 채우려고 낚시질을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이게 바로 죄성입니다.
낚시질을 하다가 어느 게 걸려들어요, 걸려든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저거가 있으면 내가 만족하겠구나! 해서 작살을 꽂아버립니다.
작살을 꽂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상어 떼들과 싸웁니다.
많은 노력을 통해서 내 마음이 작살을 꽂은 것을 해결하고 소유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가는 이게 바로 죄성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바다에서 마음이 꽂히는 것.
어떤 대상에,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상황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바다에서 꽂힌 상태에서 그것에 끌려가는 거예요.
끌려가면서 온 인생의 에너지를 다 소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획득하고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
이게 바로 죄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죄성이 아닌 상태, 죄의 상태가 나타나지 않게 되면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냐?
우리 마음이 이 세상바다에서 청새치들에게 꽂히지 않는 겁니다.
마음을 거기다 꽂지 않는 거예요.
예를 들어, 명품 백을 들고 가는 어떤 멋진 미즈를 보고는 ‘아, 나도 저런 명품 백이 있으면 좋겠다!’ 마음에 꽂히는 거예요.
근데 이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 이게 꽂히는 거예요.
내가 자식을 잘 길러야 되겠다, 내가 인생에서 이러이러하게 사업을 잘 일구어야 되겠다, 이 세상바다에서 이룰 꿈과 비전에 꽂히는 겁니다.
그 꿈과 비전이 청새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며 죄성이 아닌 상태는 뭐냐, 중립에 있는 겁니까?
하나님께 꽂히는 거예요, 하나님께.
오늘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얘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의 얘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얘기해요.
그 얘기를 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그렇게 심판을 받을 것이고, 더 확대하면 영지주의적인 성향에 먹혀버린 모든 신앙인들이 그렇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얘기하면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 얘기를 해요.
그들이 왜 멸망합니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어요,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고기와 만나도 먹었어요.
그런데 이들의 마음이 하나님 때문에 얻게 되는 이 세상바다에서의 청새치들에 꽂혔지, 하나님 자신에 마음이 꽂히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에덴에서 아담의 삶은 날마다 하나님께 꽂히는 삶입니다.
꽂힌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께 꽂히고 세상바다에 꽂히지 않는, 죄성이 없는 삶을 완벽하게 사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의 삶을 한번 보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8장 15절에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육체를 따라 판단한다는 게 뭡니까?
육체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을 내 마음이 판단해버려요, 그게 바로 꽂히는 거예요.
꽂힌다는 것은 좋아서도 꽂히지만 거부감도 꽂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육체를 통해 만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반응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어떻게 육체로 만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사셨을까?
5장 30절에 이렇게 얘기해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무슨 말입니까?
똑같이 사람을 봤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도 얼마든지 생각하시고 판단하실 수 있지만 다 멈춰버리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판단하시는 판단을 받아서 말하고 행동하셨다는 얘깁니다.
이게 바로 죄성이 없는 상태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와 비교할 때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분명히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어요.
죄 사함을 받았는데 밖에 나가서 살다보면 육체로 만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마음이 또 꽂히는 거예요.
하나님께 꽂히질 않는 거예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적을 일으키시면 일어난 기적에 마음이 꽂혀버렸지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께 꽂히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체를 따라 판단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싫다 좋다, 싫으니까 뿌리쳐야 되고 벗어나야 되고 좋으니까 내가 가져야 되고.
그래서 명품 백, 명품 차, 명품 아파트, 명품 옷, 이런 것들을 보면 마음이 꽂혀버립니다.
그리고 시시한 것들은 다 거부해버려요.
이것이 내가 아직도 선악을 판단하면서 이 세상바다에서 청새치에 마음을 꽂아가면서 살고 있다는 거예요.
나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큰 염려를 합니다.
그 마음이 그 상황에 작살을 꽂은 거예요.
나쁜 상황이다, 좋은 상황이다, 판단할 것도 없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지 마음이 하나님께 꽂히면 하나님으로 마음이 배부르고 평강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그 상황에 판단과 결단을 알려주시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결국 영지주의의 문제가 뭡니까?
신령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그래가지고 내가 구원 받았다고 확정해버려요.
그걸 바로 8절에서 꿈꾸는 자들이라고 얘기해요.
꿈꾼다고 하는 것은 허망한 착각에 빠져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내가 신령한 지식이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육체를 따라서 판단하면서 육체를 따라 마음이 작살을 꽂아가면서 사는 죄성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데,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버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도덕적 방종과 윤리적 타락, 그리고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추구가 완전히 고삐 풀려서 정당화돼버리는 겁니다.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이루고 싶은 것은 다 이루기 위해 추구하고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이론이 덧붙여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이미 받아놓은 것이니까.
이런 영지주의적 성향에 의한 착각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여러분?
왜 몇 천억 짜리 예배당이 필요한 겁니까?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목적은, 선택받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삶의 자리에서 그 마음이 세상바다의 청새치들에게 꽂히지 않고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꽂히도록 이끌어주는 겁니다.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근데 그거 하는 데에 몇 천억 짜리 예배당이 왜 필요하지요? 필요 없어요.
몇 천억 짜리 예배당이 필요한 것은 왜 그렇습니까?
왜 많은 숫자가 모여야 교회가 성공한 것이고 교회가 부흥하고 바른 것으로 이해합니까?
고삐가 풀려버려서 그래요, 고삐가 풀려버려서.
그리고 모든 교인이 이 세상적으로 잘되기를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지주의자가 따로 없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을 시인하는 거로 믿고 있는 겁니다.
아니에요, 천지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걸 시인한다면 그 사실을 단 한시도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세상바다에서 육체를 따라 만나는 대상에 마음이 꽂히는 이 죄성은 과거의 모든 죄 값이 다 사해져도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싸우라는 거예요, 싸우라는 겁니다.
어떻게 싸웁니까?
이 죄성은 고혈압과 같아요.
고혈압 환자들이 혈압 약을 먹습니다, 하루라도 약을 안 먹으면 혈압이 다시 올라가요.
그래서 혈압 약을 매일 먹어야 돼요, 매일.
그래야 혈압 수치가 낮은 상태로 유지가 됩니다.
죄성도 똑같아요.
육체를 따라 만나는 이 세상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꽂히려고 하는, 마음의 작살을 던져서 그것을 꽂으려고 하는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이 죄성은, 그래서 세상바다에서 있는 것들로 내 마음을 채우고 만족하고 기뻐하려는 이 죄성은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먹지 않으면 끊임없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근데 영지주의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자체를 부인해버렸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죄 사함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용한데, 일상 삶에 나가서는 십자가 다 잊어버리고 마음의 작살을 세상 것들에게 꽂은 다음에, ‘내가 이 사업을 잘해야겠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 이렇게 작살을 다 꽂은 다음에 그것들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다닙니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거기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십자가는 내 과거의 죄 값만 사해주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육체를 따라 내 마음이 작살을 꽂게 되는, 즉 소원을 갖게 되고, 아니면 싫은 것들은 거부하게 되고, 상황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그렇게 끌려가게 되는 거예요, 작살을 꽂은 대로.
상황이 걱정스러우면 거기에 작살을 꽂아가지고 마음이 걱정으로 끌려가고, 상황이 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잘되면 거기에 작살을 꽂아가지고 기뻐하고, 일희일비 하면서 끌려가고 있는 거죠.
이게 바로 방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겁니까?
날마다 혈압 약 먹듯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겁니다, 죽음을 먹는 겁니다.
내 마음이 죄성이 발휘되려고 하고, 어떤 것을 보았을 때 ‘저거 갖고 싶다’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걸 먹어야 됩니다.
‘내가 죽은 사람인데, 주님이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가 같이 죽었는데 그게 있어야 기쁘다는 게 무슨 소리냐, 내가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명품 백이 있어야 기쁠 것 같다는 이 마음이 명품 백으로 기뻐질 수 있는 그 양만큼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기뻐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 기도를 드릴 때 성령이 오셔서 지금 승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와 교통하시는 그 자리에 우리를 참여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평강 가운데 임할 때,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면 그 뜻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거를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시장에서건 어디서든지 삶의 현장에서, 누구 앞에서든지 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영지주의적 성향을 피하는 것이고, 영지주의적 죄적 친화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이겁니다.
영지주의의 위험이 뭐라고요?
지식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함으로써 인격 속에 숨어있는 죄성이 마음대로 발휘되도록 방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덕적 폐기론자들이 영지주의자들 속에서 생기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영지주의자와 같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아요.
올바른 정통신앙의 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 지식과 마음이 맞물려가지 않습니다.
마음의 죄성은 무엇으로만 다스릴 수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만으로써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이 세상바다에서 청새치를 잡아서 만족하고 기뻐하려 하는 생각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나올 때마다,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 주님의 죽음을 복용하는 혈압 약처럼 먹음으로써 그 마음을 뿌리에서 자르지 않으면, 이미 그게 자라기 시작한 다음에 자르면 점점 힘들어집니다, 아예 시작할 때 잘라버리고 죽여 버리고, 마음이 오직 하나님께 꽂히는 그러한 주님의 동선을 따라갈 때에야 우리가 영지주의의 죄적 친화력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오늘도 많은 우리의 동료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적 죄적 친화력에 사로잡혀서 방종의 상태에서 이 세상 것들을 꿈과 비전이라는 명목 하에 추구해가면서 하나님께 그것들을 이루게 해달라고 하는 영지주의적 성향의 이단적 신앙생활을 영위해가는 것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마음의 작살을 이 세상의 바다에서 육체를 따라 만나는 것들에 꽂고, 그것을 포획하려는 이 죄성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혈압 약 복용하듯이 복용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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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복음을 먹고서야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알았습니다.
청새치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잃어버린 시선을 회복하게 하시고 십자가생활화가 이루어짐으로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전이 되게 하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영지주의가 십자가복음의 말씀으로 쇄신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필이 꽂히다'라는 경험을 지금까지 한 적이 없습니다.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큰 상처 경험도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머리만 아니라 가슴도 사로잡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모든 것 버리고 모든 것 얻는 길, '상처를 통한 온전함'이라고나 할까요?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의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뿐임을 고백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