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0-07
안 빈 낙 도(安貧樂道)
박 병 민 목사(새터공동체)
옛 사람들은 군자삼락(君子三樂)을 말한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얘기하는데, 곧,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다 무고한 일, 위로 하늘과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서 가르치는 일을 말한다. 다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 한 층 더 나아가면 사람을 겪으면서 일어나는 일일 진데, 물오르는 봄기운 가운데 한량의 너스레가 아닌 가을날의 낙조의 잦아듦 속에서 베어내는 말일 것이다. 나의 초록의 나이로는 이와 같은 고매함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아니 사전적 말에 불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말에 사족(蛇足)을 달고 싶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겠네”라는 노래를 개사(改詞)하고 싶다고.... 여럿이 쓰는 화장실에 칫솔걸이를 마련하여 부착하였다. 일곱 개의 걸이못 옆에 다음과 같은 영어 말이 써 있어서 좋았다. “I love my family" 사랑하면서의 즐거움, 이것 남 모를 일이다. 우리집은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가 아닌, 서로의 성(姓)은 다르지만 지붕을 하나로 한 가족공동체(家族共同體)로 엮여가고 있다.
목사 1연차로 논산(論山)에서 있으면서, 대구(大邱)에서 사시는데 지나는 길이라면서 들리신 연세 50쯤의 목사님을 만난 기억이 난다. 그 어른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먹고 입을 것은 푸짐하게 주시는데, 호주머니 두둑하게 돈은 아니 주시더라”는 돈방석에 앉아보지 못한, 그런 지난날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성경에서는 이 이야기를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명심(銘心)케 하는 잠언에서는 “곧 허탄(虛誕)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8-9). 그전에는 어려서 잘 모르며 지나쳤는데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산림녹화” “퇴비증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불일 듯 일으킨 것이 우리들에게 밥술이나 먹게끔 해주어서 좋았지만, 등뒤에서는 어이없고 허황(虛荒)된 허풍(虛風)만이 풍선처럼 높이높이 솟고있다. 이러다 보니 뻥치는 거짓말도 사람들 간에 우쭐대는 상용어가 된 것 같다. 동전에는 「가이사」만보이고 하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배춧잎 속에는 세종대왕만 앉아 계시고 하나님은 문간에서 서성이신다. 몇 달 전에 들은 어느 신문기자 집사님의 말씀이 꼭 맞게 마음에 와 닿는다. “하나님은 무섭지 않는데, 사람들이 오히려 무섭다”고 이 말이 하나님을 보고하는 농담인가? 사람을 보고하는 농담인가? 구분은 못 짓겠으나, 그저 농담였으면 좋겠다.
안빈낙도(安貧樂道)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道)를 즐기는 것을 말함인데, 나는 이 가운데 어이없는 식도락(食道樂)을 말하려 한다. 우리 식구들은 도를 전해듣기 위하여 함께 앉고, 먹기 위하여 함께 앉는다. 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보고 앉을 때 공동체가 된다. 우리들은 변변하게 먹지는 못한다. 하지만 허기(虛器) 속에서 먹을 것 앞에 놓고 허둥대지는 않는다. 아이 때에 교회에서 들은 우화(寓話)에, 천국과 지옥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흙 푸는 삽처럼 생긴 큰 숟가락을 하나님께서 각각 하나씩 주었는데, 팔이 짧아 그 긴 숟가락을 가지고 밥술을 퍼 흩기만 하는 제 입만 아는 사람들과, 반면에 상대방을 먹여줌으로써 나도 받아먹는다는 도를 터득해 가는 낙원(樂園)의 낙도(樂道)의 우렁찬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오히려 혼자서 잡수시지 못하는 박 선생님과 같이 나는 식도락을 즐길 수 있으니 좋다.
변변치 않은 상차림 속에서의 도란도란 식도락, 이것이 안빈낙도가 아니겠는가?
공동체 이야기
나 무
양옆으로 산과 개울이 아우라지처럼 우리들을 싸고 있다. 한편에는 전에 아랫 마을 사람들이 먹는 물로, 혹은 허드렛물로 썼다는 물도랑이 있고, 맞은 편으로는 그늘을 이루며 울의 뒤 안과도 같은 곳인데, 군락만은 못하지만, 제 딴에 밤나무와 아래쪽으로는 내딛이면서 곧게 솟은 대나무가 키 대기를 하고 있다. 작년 여름가을로 울안에서, 사람 없이 지낼 그 때에 대나무가 나를 사로잡았다. 대나무 보는 즐거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철지나 우후죽순(雨後竹筍)이 자란 뒤 안 일이지만, 내 년에는 내 마음을 달랠 우후죽순(雨後竹筍)의 사람들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대나무처럼 세워갔다.
올 식목일(植木日)을 앞두고 조바심을 갖으며 나무들을 심었다. 선풍을 일으키게 될 것을 내다보기라도 하 듯 매실나무 몇 그루, 꽃피지 않는다는 말을 가진 무화과나무, 등 기대고 앉을 등나무도 심었다. 지금 와서 보니 예사롭지 않던 무화과나무 두 그루는 모두 죽었다. 무화과나무 이상으로 들마루 귀퉁이에 심어, 애지중지 여긴 등나무는 새순에 잎을 달아가며 뻗고 있다. 대와 달리 드넓게 땡볕을 가려줄 등나무를 생각하니 성경의 겨자씨가 생각난다. 하나님의 나라를 땅에 심겨진 모든 씨앗보다 작은 겨자씨와 빗대어 말하면서, 심긴 후에는 그 무엇보다도 큰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마가복음 4:31-32). 차광(遮光)의 아름드리 나무, 나는 어느 때 되어서 그와 같은 둥치를 이루게 될 것인가? 7월 1일에 영동의 무래가 우리에게 왔다. 응석부리지 못하고 외로이 커 와서 그런가? 우리를 귀찮게 한다. 몇 일이 못되는데도 받아줌이, 거반 밀어냄이 되어간다. 무래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나를 떠나지 못하고 “목사님 있잖아요. 목사님 있잖아요” 이것은 무래에게는 무례(無禮)히 행치 않는 일이고, 어쩌면 마땅한 노릇일 것이다. 우왕좌왕은 무래가 아니라, 무래 앞에서 우리들이 하는 것 같다.
7월 12일에, 나 없는 사이에 농아인교회를 이끄시는 대전의 이 목사님 부부께서 다녀가셨단다. 전에 오셨을 때 나무판자로 앞에 붙여진 십자가가 무겁지 않고 가볍게 보였던지(?) 이쁘장하고 묵직한 십자가를 놓고 가셨다. 나무 십자가는 놓을 것이 아니라, 달아야 될 것임을 알고 병만이 형제와 나는 박 선생님이 달아준 밋밋한 십자가를 떼어내고, 그곳에 불룩한 십자가를 올려 달았다.
그 나무십자가를 잘 간수해야 될텐데,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공 동 체 소 식
☻ 새터 공동체 가족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99. 7.16)
김교은 (99.12.14)
박성규 (00. 1.12)
어귀녀 (00. 1.15)
김창준 (00. 3.21)
김병만 (00. 5. 2)
박종만 (00. 5.28)
정무래 (00. 7. 1)
☻ 새터 공동체에서는 거처를 정하지 못하는 노인, 장애인 분들을 모시고자 합니다.
☻ 기도하며 함께하신 분들
낭월교회4여전도회,김경환(박경숙),대전서노회,삼둘회,포도원교회(정구진),금산군새마을부녀회,일양교회,금산군생활개선과부녀회,장호성,이정렬,왕지교회,사랑방교회(김광수)작은자선교회이원교회,진수정,분평청북교회,박종만.서울금촌교회청년부(김중권),대덕교회양인기,이장훈(박경애),예수마을,한삼천교회,이종국,유인숙,채윤기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