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1
"네 종조부 안국군은 힘이 없어 죽은 게 아니다. 칼을 들고 일어설 수도 있었지만 사직의 안녕을 위해 인간으로서 하기 힘든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너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을불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비슷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노인의 얘기를 들으니 새삼 안국군의 생전 모습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런 을불의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혀를 차며 나직한 목소리를 뽑아냈다.
"내 달가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너에게 세 번 물을 기회를 주겠다. 하니 깊이 생각하여 질문하도록 해라."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노인은 그저 약초나 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을불은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부족한 몸이지만 감히 지혜를 청합니다."
"자, 무엇을 물을 것이냐?"
한참 동안 말머리를 고르던 을불이 이윽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지금 온 나라가 폭군에게 눌려 신음하고 있지만, 강약(强弱)이 부동(不動)이라 저에게는 그를 당할 힘이 없습니다. 어찌하면 힘을 길러 이 나라 고구려를 구하고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을는지요?"
노인의 얼굴에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이 모나고 조급하구나."
"……?"
"너는 고구려의 적통 왕손이 아니냐. 게다가 상부는 세상에 다시 없을 폭군이니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순리대로 모든 게 자연스레 흘러갈 것이다."
을불이 놀라서 되물었다.
"하면 제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그 일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너만 뜻을 바로 세우고 있으면 자연히 사람이 모일 터."
"조정의 신하들은 폭군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고, 백성들조차 저를 밀고하여 부귀영화를 얻으려 하는 마당인데 어찌 기회가 오겠습니까?"
"껍데기만 보고 어찌 속을 판단하려 하느냐? 민심을 잃은 왕을 세상천지에 너 홀로 미워하겠느냐. 상부의 자식들도 아비 못지않게 한심하니, 굳이 내가 대답할 일이 아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노인이 힐난조로 답하자 을불은 곰곰 생각했다. 노인의 하는 양을 보아 어떤 질문을 해도 욕을 먹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느낌과 함께 이런 때는 큰 질문보다 작고 현실적인 질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을불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저는 지금 오직 홀몸으로 도망하는 신세입니다. 백성들이 저를 고발해 한 팔자 고치려 하는 통에 어디 가서 밥 한 끼 얻어먹을 수조차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밥을 얻어먹겠습니까?"
"허허, 허허허."
노인은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차라리 아까보다 나은 질문이구나. 신성 밖에 저가라는 세력가가 있으니 그를 찾아가 당분간 몸을 의탁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숙신에서 달가에 의해 등용된 자이다. 그러니 거기서 일신을 정돈하고 안국군의 옛 동료들과 연을 이어 후일을 도모하도록 해라."
"저가는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란 없다. 설사 성인이라 한들 누군가에게는 신뢰를 주지만, 또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라. 그러니 거기 있더라도 너의 신분을 드러내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을불은 신성의 저가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넣었다.
"애초에 세 가지만 물어보라고 했는데 어찌 이토록 질문이 허수룩한가. 이제 마지막 한 가지 질문에만 대답할 것이니 깊이 생각하여 제대로 묻도록 해라."
을불은 한참 동안 말없이 노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 번째 질문은 먼 훗날 다시 찾아뵙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네놈이 제법 잔꾀를 부리는구나. 두고두고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렷다? 그러나 내가 이미 나이가 많아 그때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니 너의 꾀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을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노인은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는 그나마 왕재(王材)다운 풍모를 보이는구나. 세 번째 질문을 아껴두었다가 삼백 개로 만들겠다는 지혜로다. 바로 그것이다. 남을 통솔하려는 자는 힘보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너의 그 깨우침이 가상하니 약간의 지혜를 주마."
노인은 정색을 하고 말을 시작했다.
"백제는 낙랑과 다투느라 당장은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돌궐과 흉노는 강맹하나 멀리 있으니 걱정할 게 없고, 숙신은 달가가 잘 다루었으니 계속 회유해 고구려의 속민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맥은 본시 고구려와 뿌리가 같으니 품으려 하면 따라올 것이다. 부여, 옥저, 동예 등은 잔재만 남아 있고 중원의 진나라 역시 내란을 거듭하며 몰락하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을불은 진지하게 노인의 말을 담으며 물었다.
"그러나 이들도 간혹 고구려를 침하는데 그냥 버려둬도 되겠습니까?"
"모든 나라를 적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라. 적들 중에는 화친해야 할 상대가 있고 맞서 싸워야 할 상대가 있는 법이니, 어느 적과 화친하고 어느 적과 싸울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잘 해내면 다수의 약한 적들을 규합해 크게 영토를 넓힐 것이요. 잘 못 하면 소수의 강한 적에게 침탈당할 것이니라."
"다수의 약한 적은 친구로 만들고 소수의 강한 적에게 힘을 집중하라는 말씀, 큰 지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현도와 대방은 어떤 적입니까?"
《고구려 1》, 김진명, 새움(2011), 125~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