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碧花)가 살고 있는 날이군(捺已郡,지금 영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땅(奈已郡)이어서 신라의 입장에서는 항상 신경이 쓰였고 친 고구려적 성향을 가진 이 지역을 늘 관심을 가지고 관리해야 했다. 북쪽에는 장수왕이 다스리는 고구려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서 소지왕은 백제왕 모대(동성왕)와 우의를 다지기 위해 백제의 동성왕에게 이벌찬 비지의 딸과 혼인을 맺게 하여 고구려의 공격에 대응해왔던 곳이 바로 영주지역이었다. 이런 소지왕(마립간)이 서기 500년 가을(9월) 어느 날 병사를 위문하고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서라벌(경주)을 출발하여 고타군(현재 안동)을 거처 고구려 접경 지역이며 군사적 요충지인 날이군(지금 영주)에 행차하였다. 왕이 온다는 말에 날이군 군민들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고 왕을 칭송하였다. 마침 영주 지역의 호족 세력가인 파로(波路)는 왕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극진히 왕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파로에게는 벽화라는 딸이 있었는데 신라 최고의 미인(國色)이었다. 파로는 왕이 떠나기 전날 자기 딸 벽화(16세)에게 당나라에서 수입한 최고급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그 가마를 채색 비단으로 덮어 왕에게 바쳤다. 소지왕은 이 지역 최고 호족 파로가 보낸 선물이 음식인 줄 알고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은 어린 소녀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려고 하는 장미처럼 영롱한 벽화를 보는 순간 소지왕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벽화도 평소에 상상해왔던 신라왕의 단아한 기품과 용맹스런 모습에 마음 한 쪽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지왕은 변경지역 위무라는 책무를 생각하면서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면서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벽화를 물리도록 했다. 그러나 환궁하는 내내 소지왕의 머릿속은 벽화라는 아이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마침내 대궐로 돌아왔으나 평소 왕후 선혜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소지왕은 밤마다 쓸쓸히 궁궐을 거니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래다가 그 해 가을에 만난 영주지역 호족의 딸 벽화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집무를 보거나 밥을 먹을 때나 벽화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참다못한 소지는 몰래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까운 신하를 데리고 영주에 있는 파로의 집을 찾았다. 파로는 소지왕을 단번에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하였으나 왕은 차려진 산해진미에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벽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마음이 조급하였다. 파로는 별채를 따뜻하게 꾸며 딸 벽화가 왕을 모시게 하였다. 이 때 왕의 나이가 60세였다. 왕은 꿈에도 그리던 벽화와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그렇게 벽화를 만나고 궁궐로 돌아온 소지왕은 업무에 전념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벽화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져만 갔다. 달을 보아도 음식이 담긴 쟁반만 보아도 벽화의 얼굴로만 보이니 왕의 집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업무는 제쳐두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까운 신하를 데리고 걸핏하면 벽화를 보기 위해 날이군(영주)을 다녀오곤 했다. 변장하여 몰래 만났다고 하나 이내 소지왕이 벽화를 만난다는 소문이 궁궐 안과 인근 지역까지 파다하였다. 당시에는 왕과 지방호족간의 혼인관계는 그 지역의 세력 판도를 바꿀 정도로 큰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 이웃 고타군(안동)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평소 라이벌 관계에 있던 고타(안동)지역 호족들은 이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고타군(경북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평민으로 변장한 왕이 지역 민심도 알아볼 겸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요즘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왕을 훌륭한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영주)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이 고기의 옷을 입으면 업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지금 왕은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 스스로 신중하기 못하니 이를 성인이라 한다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럽게 여겨서 더 이상 날이군(영주)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벽화는 날이면 날마다 왕을 기다렸으나 왕은 자기를 찾아 주지 않았다. 결국 벽화는 자기를 버린 왕의 무심함을 원망하며 서구대에 무신탑(無信塔)을 세우면서 왕이 자신을 찾아 줄 것을 소원하였다. 그러자 그런 벽화의 마음이 통하였는지 벽화의 소식을 전해들은 소지왕은 사랑하는 벽화를 궁궐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벽화를 몰래 마차에 숨겨 태우고 궁궐로 돌아와 가장 으슥한 별실에 두고 서로 사랑을 불태웠다.
삼국유사에는 무신탑(無信塔)은 영주 '서구대'에 세웠다고 했다. 영남읍지(규12173)_영천(榮川) 지도를 보면 '서구대의 위치가 뚜렷하게 나온다.
바로 이 곳에 1000년 전 신라시대의 불같은 뜨거운 러브스토리를 보여주는 무신탑을 세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유구성과 믿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