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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생의 방해물 제거의 함정>의 줄거리:
내 인생에 등장하는 방해물이나 방해꾼을 극복하는 것은 성공적인 인생의 필수조건이라는 상식은 정말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우리의 삶에 혼돈과 공허가 뒤 덮히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가, 누구인가를 방해물이나 방해꾼으로 느끼는 순간입니다. 방해를 제거하려하고 피하려하면서 행하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 우리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한편 복음 안에는 애당초 방해꾼 제로인 삶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생의 방해물 제거의 함정
(창4:8~15)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인생의 방해물 제거의 함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내가 내 인생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방해물이나 방해꾼이 있을 수 있지요, 이러한 방해물이나 방해꾼을 제거하려고 할 때 나는 내 인생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에 갇혀버리고 만다, 이런 얘기입니다.
최근에 대전에서 한 경찰간부가 어머니를 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경찰간부는 어머니가 수면제를 먹고 잠든 사이에 강도를 위장해서 집으로 들어와 볼링공으로 어머니를 세 차례 위에서 가격을 합니다. 볼링공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원래는 어머니의 척추부위를 가격하려고 했는데 그만 잘못돼서 어머니의 가슴에 이 볼링공이 맞게 됐다는 겁니다, 죽이려는 의사가 없었다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늑골 여섯 대가 부러지면서 흉간에 과다출혈이 일어나서 어머니가 숨지고 맙니다.
도대체 왜 그랬느냐?
잡힌 다음 이 경찰간부가 이유를 말하는데, 어머니가 십여 년 전에 보험설계사로 생활하고 계실 때, 아마도 당신 자신이 건수를 하나 올리기 위해서 스스로 보험에 가입을 한 모양이에요.
그 보험이 척추장애 보험입니다.
즉, 척추에 문제가 생기면 보험금 5천만 원을 타는 거예요.
그 5천만 원을 타려고 어머니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척추를 가격하려고 했다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이러한 보험범죄가 잦아요, 특별히 생명보험.
남편의 이름으로 생명보험을 들었습니다, 그 보험금의 수혜자가 아내입니다.
이럴 경우에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거꾸로도 가능하지요.
이런 비슷한 예로, 유산에 마음을 두는 순간, 아버지의 존재가 방해가 됩니다.
왕위에 마음을 두는 순간, 세자에게는 선왕의 존재가 방해가 됩니다.
10년 전에 척추장애 보험을 들었어요, 근데 그 보험금을 마음에 두는 순간, 어머니의 멀쩡한 척추는 방해가 됩니다.
또, 남편이 10억 짜리 생명보험에 들었다.
남편하고 잘 살면 되잖아요, 그러다 남편이 일찍 죽으면 10억을 타면 되는 건데, 남편에게 마음을 두고 남편이 죽는 것보다 먼저 10억에 마음을 두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남편이 방해물이 돼버립니다.
여기서 인생의 원칙이 하나 생깁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갖기 원하는 것이 생기게 되면, 방해꾼과 방해물이 생겨납니다.
이상한 거지요?
남편보다 생명보험금에 마음이 먼저 가닿으면 남편이 방해꾼이 되고, 유산에 마음이 먼저 가닿으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그 유산을 갖게 되는 데에 방해꾼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빨리 죽어야 되는 거예요.
왕위에 마음을 두면 선왕이 방해꾼이 돼버립니다.
내 삶에서 방해꾼을 만난다는 것, 내가 방해물을 느낀다는 것, 주변상황이나 주변인물이 내 마음에 방해꾼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마음이 무엇인가를 강하게 갖고 싶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강하게 그곳으로 도달하고 싶은 상태나 위치가 생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방해물이 느껴지는 거예요, 방해꾼이 느껴지는 거예요.
마음에 생명보험금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기면, 남편은 그냥 사랑하는 남편이고 배우자입니다.
그런데 보험금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남편이라는 존재를 넘어서 먼저 보험금에 도달하게 되면, 아니 그렇게 사랑하고 평생을 같이하던 남편이 갑자기 방해꾼으로 변해버려요.
유산이라는 것에 눈을 뜨자마자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는 방해꾼이 돼버린다는 거예요.
이때 우리가 하는 일이 뭡니까?
방해물 제거작업에 들어갑니다.
이 방해물 제거작업이 반드시 내 인생을 함정에 빠뜨린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일을 보았어요.
서울시내에서 제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내가 탄 버스가 오른쪽 선으로 가고 있는데 왼쪽 옆 차선에 승용차가 있고 그 앞에 트럭이 한 대 있어요, 저랑은 다른 차선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승용차가 신경질적으로 우리 버스 차선으로 들어서면서 앞으로 나가는 거예요.
결국 우리 버스에 부딪치고 말았어요.
버스 머리가 앞으로 나가있는데, 오면서 버스 옆구리를 받아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탄 버스가 옆에 있는 걸 못 본 겁니다. 앞에 있는 트럭만 본 거예요.
트럭이 늦게 가니까 방해가 된 거죠,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고 빨리 가고 싶은데 방해가 되니까 그 방해물을 제거하려고 옆으로 팍 튀어나오다 버스에 부딪친 겁니다.
너무 화가 나서 못 본 겁니다.
그 트럭은 가버리고, 승용차 운전자는 젊은 여자였는데 못돼먹었었더라고요.
자기 잘못을 하나도 인정하지를 않으니 버스 기사님이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법정에 가게 되면 내가 증언을 서줄 테니까 내 전화번호를 받아 적으시라고 하고 저는 강릉으로 내려왔어요.
잘 해결이 됐는지 연락은 없었어요.
화가 나고, 분이 나가지고, 안타깝고 아쉬워가지고 방해물을 제거하려고 하는 순간에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인생의 함정에 빠진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8절에 ‘가인이 아벨에게 고하고…’ 뭘 고했겠어요? 그냥 들판으로 나가자고 했던 것 같아요.
들판이라 함은 가인이 농사를 짓는 곳인지, 거기서 아벨을 쳐 죽입니다.
이게 바로 인류 역사상 방해물 제거의 첫 번째 현장인 것이죠.
아벨로 인해서 도대체 가인이 방해를 받는 게 뭡니까?
아벨이 무슨 방해를 했어요? 방해한 게 없잖아요.
근데 방해를 느끼는 겁니다.
생명보험금 10억이 마음에 가닿자마자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남편이 방해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아벨이 방해를 한 게 아니라 방해물로 느껴진 거예요.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아벨의 경우나 예로 든 남편의 경우나 선왕의 경우나 이런 경우는 방해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방해물로 느끼는 거 아닙니까.
아벨이 방해물로 느껴진 거예요.
그의 제사 행위가 가인에게는 일종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된 고발입니다.
끊임없이 고발을 하는 거예요.
‘형, 가인이여! 당신이 지금 잘못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른 것이냐?
‘당신 마음이 가닿아서 갖고 싶은 그것을 완전히 버려야 됩니다, 더 정확히는, 갖고 싶은 그것을 향해 가는 당신이 죽어야 됩니다, 당신이 죽음으로써 갖고 싶은 것에 대한 관계를 끊어야 됩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갖고 싶은 걸 못 갖게 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면 나쁘다고 얘기하니까.
그래서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이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봅니다.
자, 아벨과 가인을 비교해보면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있잖아요.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셨어요.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는 제사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이 상 주심을 믿는 거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것이 뭡니까? 우리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돼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다는 그 말을 저는 안 믿어요.
왜 안 믿느냐? 여러분이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계심을 아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하늘과 땅 차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심을 아는 것을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거라는 것은 뭐냐?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드리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다는 건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되, 첫 번째로 드려야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첫 번째로 마음을 드리는 것이 아니면 다 부차적인 게 돼버려요.
내가 마음을 첫 번째로 돈에 드렸다, 그러면 그 돈으로부터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과 사람 관계와 사물 관계가 다 결정됩니다.
첫 번째 마음을 둔 돈을 버는 일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심을 아는 것은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고 믿는다는 것은 첫 번째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심을 아는 중에도 마음은 첫 번째로 돈에 드릴 수도 있고, 그게 돈 계심을 믿는 거예요. 첫 번째로 마음을 드리는 거니까.
자식 계심을 믿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 계심을 아는 중에도 자식이 있음을 믿는 거예요. 자식에 먼저 마음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제사가 믿음의 제사가 아니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게 하나님의 존재에 제일 먼저 마음을 드리는 건데, 가인은 지금 다른 데에 두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에 두었겠습니까?
농사 잘 지어서 돈 많이 벌겠다, 요즘으로 말하면 비즈니스죠, 비즈니스.
그 옛날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벤처사업 아닙니까?
농사법이라든지 이런 것이 다 온전하지 못할 당시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 자연에서 따먹고 채취하고 수렵생활을 하던 시절에 가인이 농사를 지었다는 것은 벤처기업을 한다는 거예요.
벤처기업을 할 때 마음을 어디다 둡니까? 이익에 둡니다, 돈에 두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온 거예요, 이건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벨의 제사가 첫 번째로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된다는 걸 알고 자꾸 이 세상의 다른 것에 첫 번째로 마음이 끌려가는 자기 자신을 제사를 통해 죽이는 거였어요.
이 양이 자꾸 마음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먼저 끌려가는 나의 인격이고 그리고 이것이 죽어야 된다, 하고 제사를 드린 겁니다.
그리고 상 주심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 제일 처음으로 마음을 드릴 때라야만 내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는 기쁨을 얻고 살아갈 수 있다. 그 다음에 그 이외의 일들은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으로 살아가면 된다.’
이걸로 자꾸 고발을 한 거예요.
고발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좋다고 여겨져서 농사지어 갖고 싶은 이익을, 부자 되는 것을, 풍요와 다산이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이고 반역하는 것이고, 그렇게 이익에 먼저 가닿아서 쥐고 있는 내가 죽어야 된다고 자꾸 얘기하니까, 이익을 향해 가는 내 여정에 방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인 거예요.
이게 지금까지도 가인의 후예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 방해물을 제거해서 땅에서 나는 농산물로 이익을 얻으려고 그랬는데, 땅으로부터 이익이 주어지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유리방황하게 됩니다.
더 큰 함정에 빠져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 안에서의 삶이란 어떤 삶이냐?
희한해요, 방해꾼이 없어요, 방해물이 없어요, 방해 free life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방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아벨의 제사가 바로 그것을 예표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덕목으로서 기리고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하는 아름다운 인격적 항목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거예요.
목적지가 있을 때 그 앞에 놓인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광야를 지나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이게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산과 강과 광야가 방해가 되는 이유는 뭡니까?
그 너머에 있는 목적지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굉장히 긍정적이고 좋은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꼭 부정적인 의미에서 보험금을 타먹으려고 남편을 죽이는 그런 범죄행위가 아니라도 긍정적인 면에서의 방해물을 제거하고 장애를 극복하면서 이루려고 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합니까?
긍정적인 도전 정신이고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 원죄의 열매들이고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이 땅에서 이룰 목적에 마음이 가닿는다는 것 자체가 원죄에 먹혀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죄가 뭡니까?
7절에 보면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원한다는 건 죄가 나를 쇄도해서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러니 죄를 다스려야 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첫 번째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에게 주어지는 게 죄입니다.
히브리어로 죄를 말할 때도 헬라어의 죄와 똑같이 과녁을 빗나간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마음이 첫 번째로 가닿아야 될 대상이 하나님인데,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닿는 게 죄에요.
다른 것에 가닿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방해물이 생겨납니다.
방해물을 제거하려고 할 때 죄가 가중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죄를 다스리라고 그런 거예요.
죄가 도사리고 있으면서 너를 향해 쇄도하려고 한다, 그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첫 번째로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가서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게 죄인데, 빗나간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엄청난 범죄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다스리지 못하면 죄에 먹히게 되고, 죄에 먹힌다는 것은 방해물을 제거작업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내 마음에서 원하고 붙들었던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가려고 하는데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려는 것이 바로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에 먹혀버린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벨의 제사로 예표 되고 있는 십자가사건이 복음인데, 그 복음을 받아들이면 왜 방해가 없어지는 겁니까?
복음사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땅에서 우리 마음이 가닿아야 할 대상을 찾는 원죄적 체질이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 유전 죄의 경향이 죽는 거예요.
유전 죄에 먹혀버린 나의 인격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유전 죄와 원죄가 나타날 때의 특징이 뭡니까?
하나님 말고 자꾸 이 세상에서 마음이 가닿아서 그걸 갖고 싶어요. 그걸 원하게 돼요.
이게 유전 죄의 경향이라는 거예요, 빗나간 성향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에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죽어버리면 그냥 끝나느냐?
세상에 대해서 죽은 마음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이건 반드시 매일 이루어지고, 매일 말씀에 근거돼야 되고, 매일 기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버리면 이 땅에서 마음이 가닿아서 이루고 싶은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상 주심을 믿는다는 말처럼 하늘에서 이미 내 마음은 다 충족되고 상을 받아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갖고 싶은 것이 없어서 방해꾼이 없습니다.
잘 살던 남편과 아내가 생명보험금에 마음이 닿으면 방해물로 변해버려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선왕이 내 마음이 왕위에 먼저 가닿으면 방해꾼으로 바뀌어버려요.
근데 내 마음이 이 세상에서 가닿을 대상이 없어요. 그러므로 방해꾼이 없어지는 겁니다.
아! 요거 신기하지 않아요, 여러분?
방해가 없는 삶을 사는 거예요.
예를 들면, 예수님은 얼마나 방해꾼이 많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방해꾼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방해꾼이 누굽니까? 가룟유다에요.
가룟유다가 방해를 한다고 끼어들었지만 방해가 효과를 내지도 못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가룟유다와 함께 예수님의 생애를 방해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눈곱만큼도 예수님의 생애를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방해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에 원래 갖고 계시던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맙니다.
이상한 거예요.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었어요.
가인과 비교해봅니다.
가인은 아벨을 돌로 쳐 죽였어요, 돌에 맞아 죽는 스테반의 모습과 돌로 쳐 죽이는 가인의 모습을 비교하면, 가인은 돌로 쳐 죽이면서도 분하고 억울하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억울함이 없고 화가 없고, 오히려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가인은 괜히 억울한 거예요.
동생의 제사를 가만히 보니 하나님이 받으셨어요.
그러니까 제사를 통해서 동생이 간접적으로 형을 자꾸 고발하는 겁니다.
‘형이 잘못됐어, 이 세상에서 농사지어서 부자 되겠다는 그 마음이 제사를 드리면서 죽어야 돼! 형이 곡식을 얻어서 하나님께 드릴 때, 곡식을 갈아서 내가 갈려 죽는다는 생각으로 드려야 돼!’ 자꾸 얘기를 하는 거예요.
화가 납니다, ‘그럼 내가 농사를 잘 지어서 부자 되지 말라는 얘기냐?’
그러니까 아벨의 제사가 얘기합니다, ‘부자 되지 말라는 얘기다, 왜 곡식 부자 돈 부자가 되려고 하느냐, 하나님 부자가 돼야지!’ 자꾸 얘기합니다.
하나님 갖기 위해서 다 버려야 된다, 그런데 버리지도 못해요, 체질이에요.
하나님 말고 다른 걸 붙들려고 하는 내가 죽어야 된다고 자꾸 얘기를 하는 거예요.
화가 납니다, 이런 방해꾼이 어디 있습니까?
근데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 스테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방해꾼이라고 생각하지를 않는 거예요.
예수님도 가룟유다가 방해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방해꾼을 제거하려고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 방해꾼이 예수님을 제거하려 한 거죠.
제거하려고 하셨다면 못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사는 자들입니까?
날마다 기도하면서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붙잡는 게 왜 필요하나 하면, 2006년 11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시즌 1이 끝났습니다, 그리고도 계속하는 얘기는 십자가 얘기에요, 다 알아요, 다 아는데 왜 말씀을 자꾸 하느냐 하면, 말씀이 전해지는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계심을 아는 것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이 있는 것을 믿는 것과 천국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차이가 있고, 이 있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 마음을 이끌어가는 일이 말씀이에요.
여러분은 다 알아요, 아는데 마음은 이 세상에서 자꾸 하나님 말고 다른 것들에 끌려갈 겁니다. 근데 말씀을 들으면 조금 옮겨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도해야 돼요.
그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이 끌려가는 이 세상으로부터 십자가에서 죽어야 돼요. 죽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면 이제부터는 방해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
방해꾼들이 득실거려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는 시편 23편의 다윗의 노래처럼, 방해꾼들이 많고 원수들이 많다고 칩시다.
그래도 내 마음이 방해를 느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원수들로 인해 이루어야 될 것을 못 이루는 일은 없기 때문에.
원수들은 땅에서밖에 방해를 못해요.
내 마음이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께 가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원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마귀가 하는 일이고,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렇게 한다고 그러면 이 땅에서 사람과 사물과 상황 중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냥 원수들이 득실거리고 방해꾼이 득실거리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하늘에서 얻은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서 목표를 가질 때는 방해물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거기에 도달하려는데 자꾸 끼니까.
그러나 위에서부터 내려오면 고공낙하를 하게 되는 자에게는 산도 강도 광야도 방해가 아닌 거예요.
그냥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 내게 낙하하라고 하는 그 장소에서 낙하해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면 내 하루는 끝이고, 그 다음 날 또 우리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제일 처음에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운 다음에 (기도 없이는 안 돼지요) 하나님이 낙하시키시는 지점에 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벨이 죽은 것을 누가 따지고 듭니까? 아벨 자신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따지고 듭니다.
무슨 얘깁니까?
방해꾼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신다는 얘기에요.
우리 마음에는 있으면 안 돼요, 우리 마음에 방해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말고 첫 번째로 내가 마음을 딴 데 줘서 하나님 계심을 믿는 게 아니라, 딴 거 계심을 믿는 상태니까.
우리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억울해 할 것도 없어요, 억울한 감정이 드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죄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계심을 믿을 때 이 세상에서 나를 죽이는 자들이 고맙지요, 왜 그들에게 억울한 느낌을 갖겠습니까?
이 땅에서 오래 살고 잘살도록 나를 돈으로 밀어서 도와주는 사람이 내게 도움이 됩니까, 나를 죽여서 천국에 가도록 하는 원수가 나에게 도움이 됩니까?
나에게 돈으로 밀어주는 사람이 도움이 돼요?
그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마음에 좋은 것이 이 땅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원수가 나를 도와주는 사람보다 더 도움이 되는 이유는 천국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거기에 가있기 때문에.
참으로 신앙이라는 게 역설적이지요.
하여간 방해꾼 제거하려다 함정에 빠집니다.
방해꾼이 느껴진다면 내가 이 땅에서 뭔가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원죄의 활발한 성과 덕분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됩니다.
방해물 없는 인생을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아벨의 제사가 원형적으로 날마다 드려짐으로써, 방해물과 방해꾼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로 하늘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침에는 방송을 듣고 이렇게 와서 다시 글을 읽으니 더욱 은혜가 됩니다.
내 인생에 목사님 같은 분을 만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복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에 첫번째로 와 닿는 분이 늘 하나님이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살고 싶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목사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더 복이 없습니다.
인간은 마음 밭을 가는 자입니다. 가인처럼 밭을 일구고 경작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