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조회
1)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안자미(安子美)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시대에 보승별장을 지냈으며 흥년(순흥)현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순흥으로 하였고 첫째 아들 안영유를 1파, 둘째 아들 안영인을 2파, 셋째 아들 안영화를 3파로 나누었다. - 시조 자미의 묘는 경북 영주군 순흥면에 있었으나 없어지고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인구] 417,591명이 있다.(1985년)
2) 신죽산(新竹山) 안(安) -검색 안 됨.
3) 탐진(耽津) 안(安) 시 조 휘(諱): 안원린(安元璘), 탐진군(耽津君) 시호(諡號): 문열(文烈) 묘 소: 전북 전주시 삼천동
탐진(耽津)은 전라남도(全羅南道) 강진군(康津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동음현(冬音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때 영암(靈岩), 장흥(長興) 등으로 이속 되었다가 1417년(태종 17) 도강현(道康縣)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 1895년(고종 32) 강진군(康津郡)이 되었다.
탐진 안씨(耽津安氏)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에게 분적(分籍) 계통(系統)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문숙공(文淑公) 목(牧)의 넷째 아들 안원린(安元璘)을 시조(始祖)로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순흥 안씨에서 분적하고 탐진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한다.
그 후 시조 원린의 아들 우(祐)가 공민왕(恭愍王) 때 군부판서(軍簿判書)와 상호군(上護軍),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을 거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전공(戰功)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고, 찬성(贊成) 사종(士宗)의 아들 지(止)는 조선 태종(太宗) 때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다. 특히 지는 시문(詩文)에 능하고 해서(楷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당대의 명필로 명망이 높았고,
세종(世宗) 때는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왕에게 바쳤으며, 태종(太宗)을 위하여< 금자법화경(金子法華經)>을 썼다.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던 그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문교(文交)를 거절했던 일화로 유명했고,
세조(世祖)가 그의 학문을 중하게 여겼으나 민 수(閔粹)의 사옥(史獄)에 그가 제조(提調)로 있었기 때문에 연루되어 강진현(康津縣)에 좌천 되었다. 세조(世祖)는 그 곳의 감사(監司)에게 글을 내리기를 "진상하는 음식물을 봉한 나머지는 지(止)에게 주고 답례하는 글을 받아서 아뢰라."고 하였다.
성종(成宗) 때 일이다. 어느 날 신숙주(申叔舟)와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한 제신(諸臣)들이 조회에 늦게 나와 조반(朝班)에 참석하지 못하고는 왕에게 사죄를 드리기를 "마침 옛 벗이 먼 곳에서 왔으므로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 하다가 늦게 되는 줄 몰랐사오니 죽을 죄입니다."하였다. 성종이 "그 이가 누구인가"하고 묻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안 지(安止)입니다."하였다. 성종이 기뻐하면서 "나 역시 그를 보고자 하니 빨리 불러 오라.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리라"하고 종일토록 즐겼다고「소문쇄록」에 기록되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었던 우(遇)가 학행(學行)을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천거되어 현검(縣監)을 지냈고 효행(孝行)을 떨쳤으며, 찰방(察訪) 기(沂)의 아들 극가(克家)는 정 구(鄭逑)에게 글을 배우고 삼가 현감(三嘉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낙동 강변에 정자(亭子)를 짓고 호호정(浩浩亭)이라 이름 하고는 학문을 닦으며 풍월을 즐겼다.
그 밖의 인물로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 휘하로 들어가 유곡(柳谷) 싸움에서 공(功)을 세웠던 기종(起宗)과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용이 유명했으며, 효제(孝濟)는 한말(韓末)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희제(熙濟), 창제(昌濟)와 함께 탐진 안씨의 의맥(義脈)을 살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탐진 안씨(耽津安氏)는 남한(南韓)에 총2,399가구, 10,0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 竹山 安氏 (죽산 안씨) 시 조: 안방준(安邦俊)
시조(始祖) 방준(邦俊)은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이 원(李援)의 아들 삼형제(三兄弟) 중 맏아들로 본래 이름(名)은 이지춘(李枝春)이었으나
그의 두 동생 엽춘(葉春) 화춘(化春)과 더불어 왜구(倭寇)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국왕(國王)이 이를 가상히 여겨 안씨(安氏)로 사성(賜姓)하였다.
그후 그는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名)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죽산(竹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의 국구(國舅:왕비의 아버지) 로서 동지밀직(同知密直)을 겨져 우문관 대제학(右文館 大堤學)을 지낸 극인(克仁)과 그의 아들로 우왕(禑王) 떄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내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역임한 숙로(叔老)가있다.
조선조(朝蘚朝)에는 세종(世宗)의 부마(駙馬:이금의 사위에게 주던칭호)로 연창위(연昌慰)에 봉해지고 세조(世組)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던 숙로(叔老)의 손자 맹담(孟聃),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출납,병기,군정,경비, 등의 일을 맡아 보던 충주원의 종2품 벼슬)와 호조 참판(戶曺 參判)을 재낸 초(招), 관찰사(觀察使)와 병마.수군 절도사(兵馬.水軍 節度使)등을 역임한 방경(方慶)등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맹담(孟聃)의 9세손(世孫)으로 효행(孝行)과 문장(文章)이 뛰어났던 진(鎭)은 현종(顯宗)때 동래부사(東萊府使)를 겨쳐 숙종(肅宗)때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두차례나 청(凊)나라에 다녀와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 예조참판(禮曺參判)에 이르렀다.
또한 대사간(大司諫)과 대사헌(大司憲) 으로 왕(王) 에게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았던 충헌공(忠憲公) 윤행(允行)은 맹담(孟聃)의 11세손으로 형조 판서(形曺判書:법률.소송.노예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한 형조의 정2품 벼슬)룰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다. 근대(近代) 인물로는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에서 군부 대신(軍部 大臣)을 역임한 경수(駉壽)가 있는데, 그는 중추원(中樞院) 일등 의관(一等議官)을 지내고 독립협회(獨立協會)조직에 참여하여 회장(會長)으로 활약하였다.
5) 광주안씨(廣州 安氏) 【시조】 안방걸(安邦傑)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때 광주지방의 관리로 뛰어났던 인물이다. 광주의 어떤 사람이 지방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고, 그 공적으로 대장군에 오르고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본관지 연혁】
광주는 백제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지금의 한강북방으로부터 한산하 한성(漢山下 漢城) 즉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고 근초고왕25년(近肖古王25年)까지 376년간 도읍지였다.
그 후 신라 문무왕3년(文武王3年 : 663)에 한산부라 하였다가 다시 남한주라 하였다.
고려 태조23년(太祖23年 : 240)에 광주(廣州)로 개칭하고 성종2년(成宗2年 : 983)에는 12목(牧)이 된 후 8목(牧)에도 들었다가
조선 선조6년(宣祖6年 : 1577)에 부(府)로 올리고 경안면 외 23개면(慶安面 外 23個面)으로 당시에는 안산-양주의 일부가 포함된 넓은 광주였다.
인조 원년(仁祖元年 : 1623)에 유수(留守) 정2품관(正二品官)으로 승격하였다. 잠시 부윤(府尹)으로 내렸다가 동14년(同14年 : 1636)에 호란으로 천도(遷都)가 되었다.
다시 유수 겸 수어사(留守 兼 守禦使)라 하였다. 그 후 부윤으로 되어 있다가 행정개편으로 1896년에 군(郡)이 되고 시대변천으로 일부가 서울로 편입되고 또 단독시로 분리해 나가니 현재는 8개 읍면(8個 邑面)이 남아, 광주시(廣州市)로 승격하였다. 원래는 광릉(廣陵)인데 광주(廣州)로 개칭(改稱)되었다.
【득성 유래】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씨가 없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 후에 지방 유력자들이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안씨(安氏)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6) 太原 安氏(태원 안씨) 시조(始組) 만세(萬世)
시조(始組) 만세(萬世)는 중국(中國) 원(元)나라 태원(太原) 사람으로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수행하여 고려(高麗)에 왔다가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때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중국(中國)의 고향(故鄕)인 태원(太原)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우(祐)가 고려 때 공신(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10세손(世孫) 봉(鳳)은 조선조(朝鮮朝)에서 부사(府使)를, 동생 곡(鵠)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7) 안산 안씨(安山 安氏) 시조: 안자유(安子由)
<本貫地 연혁> 안산(安山)은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다.
안자유(安子由)는 고려조 충목왕 때 첨의평리(僉議平理)를 지냈다고 전해온다.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안산(安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온 듯싶다. 한편 일설에는 평리(評理)를 지낸 안맹(安孟)을 시조로 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유(子由)가 맹(孟)으로 와전된 것인 듯하다.
8) 제천(堤川) 안(安) 시조: 안적재(安迪材)
<本貫地> 제천(堤川)은 충북 동북부에 위치하며 원래 고구려의 내토군(奈吐郡, 일명 大堤郡)이다. 주요 성씨로 安씨가 있었다.
<氏族史의 개요> 안적재(安迪材)는 고려조에 평리(評理)를 지냈다고 전하며 문헌이 없어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한편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안공찬(安公贊)을 일파로 전하며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낸 안처양(安處良)의 후손으로도 전한다.
9) 주천안씨(酒泉安氏) 시조: 안정방(安挺方)
<本貫地> 주천(酒泉)은 강원도 원주(原州)의 속지(屬地)로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 (酒淵縣)이다. <氏族史의 개요> 안정방(安挺方)은 고려조에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전해온다.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주천(酒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공신(功臣)이며 原城(原州)군에 봉해진 安仲敬(安敬仲)을 일파로 전한다.
10) 공산 · 공주안씨(公山 · 公州安氏) 시조: 안익(安翊)
<本貫地 연혁> 공산(公山)은 충남 공주(公州)의 다른 이름이다. 주요 성씨로 안(安)씨가 있었다.
<氏族史의 개요> 문헌이 없어 世系나 본관의 유래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고려조('朝鮮氏族統譜'에는 조선조로 나타나 있다)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안익(安翊)을 시조로, 공산(公山)을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후손으로는 무과에 급제하고 공신(功臣)에 오른 공산군(公山君) 안경손(安慶孫)과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낸 안덕손(安德孫)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