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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장미 인터뷰]
‘직장이 필요해 최저임금이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살다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변주현 동지 인터뷰
_인터뷰 진행 및 정리 남정아, 배예주
근로기준법과 거리가 멀었던 사회초년생
저는 사회초년생일 때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어요.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해서 고3 때 취업을 나갔는데 잘 안됐어요. 졸업앨범 제작회사, 신발 운동화 디자인회사, 애니메이션 제작 하청회사, 인터넷쇼핑몰 판매사 등 여러 회사에 취업을 나갔다가 잘리기를 반복했죠. 인터넷 쇼핑몰회사에서 홈페이지를 관리할 때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3일장을 치르고 왔는데 잘린 거예요. 여긴 지금 말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이에요. 디자인을 전공했다니까 고등학생을 저임금에 부려 먹으려고 일을 시켰다가 생각만큼 못하니까 잘랐나 봐요.
학교에서 취업 알선해주면서도 최저임금에 대해 가르쳐주지는 않았어요. 선생님이 제가 회사에서 자꾸 잘리니까 수입 애니메이션 그림 그리는 곳을 소개해주었어요. 아빠가 이번에 취업한 회사 시급이 얼마냐고 물어보셔서 ‘3,800원’이라고 대답하니 노발대발하시더군요. ‘선생님이 어떻게 최저임금도 안 주는 저임금 회사에 애를 취업시키냐’면서 선생님 전화번호를 물으셨죠. (그 무렵인 2012년의 최저임금은 4,580원, 2013년에는 4,860원이었다.)
취업이 잘 안돼서 약간 우울했어요. 자존감도 낮아지더군요. 결국 집 근처 토스트가게 사장님이 ‘너는 손재주가 있으니까 네일샵에서 한번 일해보라’고 소개해주셔서 졸업 후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서비스업이니까 웃어라
네일샵은 손님들에게 밝게 보여야 한다고 제 표정을 많이 지적하더라고요. 웃는 상이 아니라면서 ‘좀 웃어라’, ‘웅얼웅얼 말하지 마라’, ‘전화 받을 때 목소리가 왜 이러냐’, 밝고 상냥하지 않다고 ‘손님 다 도망가겠다’, ‘매출 떨어지면 책임질래’ 이렇게 핀잔이 이어졌어요. 그래서 전화 받는 연습도 하고, 거울 보면서 볼펜 물고 발음 연습, 웃는 연습을 열심히 했죠. 상냥함과 웃음을 강요받는 일이 많았어요.
노동조건은 그냥 ‘막내’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했어요. 제일 어리니까 가장 일찍 출근해야 하고, 아침 청소 다 해야 하고, 밥 먹고는 설거지해야 했죠. 화장실 청소는 교대로, 마감청소는 다 같이 했지만, 막내가 뭐든 일을 더 하는 게 당연했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아주 오래 일하고, 평일 하루 쉬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월급은 가장 많은 받았던 게 140만 원이었어요. 60, 70만 원 이렇게도 받기도 했죠. 월급이 왜 그리 적었는지 이유는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때는 어땠든 직장을 잡고 한 군데서 오래 버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돈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취업 자체가 힘드니까 월급이 적어도, 받을 걸 못 받아도 말없이 일만 하게 만들어진 거죠.
일해야 한다고 버티면서 가장 힘들었던 거는 두 명의 실장이었어요. 제가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면 ‘주현아! 주현아!’로 시작했죠. 좁은 통로를 지나가면 거길 지나간다고 뭐라 하고, 밥을 먹으면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낸다고 뭐라 하고. 제가 하는 행동에 희한한 지적을 많이 했어요. 소위 ‘감정받이’를 한 거죠. 지금 생각하면 직장 내 괴롭힘이죠. 이렇게 일을 하니까 내가 싫은 게 있거나 불쾌한 게 있어도 제대로 말을 못 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가장 큰 단점이었죠.
친한 친구들은 대학에 가서 주변에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어요. 그나마 앱으로 주변 친구과 교류하고 술을 먹기도 했죠. 거기서 우연히 울산 현대중공업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어요. 그가 중공업에는 중년 여성분들이 앉아서 뭘 뚝딱뚝딱 전선을 다루는 일을 하더라면서 저게 이력서를 넣어보라더군요. 솔깃했죠. 네일샵에서 2년 넘게 버티니까 ‘앞으로 난 못 할 게 없다,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비스업이 아닌 제조업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네일샵을 나와 평택, 구미, 울산 현대중공업 이렇게 세 군데 제조업 회사에만 이력서를 넣었어요.
현대중공업 현장에서 관심받는 여성 노동자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어요. 결선일을 하는 곳이었고, 기숙사는 따로 없는데 괜찮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저는 괜찮다며 최대한 빨리 그동안 지내던 곳에서 벗어났죠. 단돈 38만 원 들고 보증금 5만 원짜리 울산 동구에 있는 고시텔에 들어갔어요. 잠만 자면 되니까 거기서 중공업 생활을 시작했죠.
서비스 업종에서 억압과 강요를 당하다가 현대중공업에 갔더니 완전히 다른 세계였죠. 일단 중공업은 남초 사회잖아요. 거기에 젊은 여성 노동자가 들어오니까 시선이 제게 쏠리면서 모르는 사람들도 저를 다 아는 거예요. 현장에 여성 노동자가 용접도 하고 곳곳에 있지만 잘 없거든요. 나이는 저보다 많으셨고. 그래서인지 밥 먹으러 가면 사람들이 많이 쳐다봤어요. 지나가다가도 ‘아가씨 어느 업체에 들어온 아가씨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어요. 호구조사를 많이 물어요. 그럼 뿌리칠 법도 한데 서비스업에서 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저는 웃으면서 상냥하게 대답하는 거죠. 그러다가 제가 누구랑 말하고 있으면 ‘둘이 사귀냐’ 하고, 군대 간 남자친구는 소문이 돌고 돌아 ‘장교’가 되어 있기도 했어요. 다른 남성 노동자에게 ‘우리 집에 가서 같이 피자 먹을래’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현대중공업 일은 내가 뭔가를 땀 흘려 노동하고 그거에 대한 성과가 나오면 착착 해내는 성취감이 있어서 힘들어도 좋았어요. 그런데 남성 노동자들이 저에 대해 가십거리처럼 맘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소문내는 건 힘들었어요. 자기보다 젊은, 어린 여성이라고 그렇게 대한 것 같아요.
또 하나는 담배를 피우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때는 제가 담배를 피울 땐데 남들이 피우는 장소에서 처음 피웠더니 채 30분도 안 돼서 사무실에 불려갔어요. 총무와 소장이 담배는 기호품이라면서도 제게 웬만하면 안 보이는 데서 피우라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재떨이가 있는 벤치에서 피울 때는 대놓고 ‘여자애가 담배를’이러면서 지적하기는 남성 노동자도 있었어요.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면 피곤한 거죠. 그냥 안 하게 되고 위축되기도 했어요.
중공업에서 ‘여자애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말도 자주 들었어요. 남성이 많은 작업장인데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분위기인 거예요. 저 일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생각하는데 저한테는 시키지 않는 거죠. 다른 사람이 하면 된다, 너는 앉아서 하는 일만 해라는 식이었어요. ‘여성은 못 할 거다’는 전제가 있다고 여겨졌어요. 처음에는 ‘커넥터 작업’을 하다가 손재주가 있다고 여기저기 투입되었는데, 나중에 반장이랑 싸우고 나서는 좌천되어서 남성만 있고 물리적 힘을 많이 쓰는 ‘포설’로 갔죠. 거기서 선에 표시하는 네임태그일을 잘 해냈더니 그제야 많은 일을 시키더라고요. 나중에는 체구가 작아서 좁은 공간 안에 들어가서 하는 일을 했어요. 저는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현장에 점점 반항심이 생겼죠. 그래서 무거운 것도 더 들고 ‘너네만 할 수 있는 거냐, 나도 이거 할 수 있다’ 이런 마음으로 일했어요.
대화에는 성희롱도 종종 있었어요. 그럴 땐 저도 똑같이 성희롱이나 음담패설로 받아쳤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그런 소리를 듣고 나면 기분 나쁘고, 그냥 넘어가자니 직성이 안 풀리니까 더 세게 받아치는 방식으로 대처했어요. 서비스업에서 일할 때 소극적이었던 성격이 변해서 반항심이 커지고, 내가 여기서 일하려면 남성들보다 세져야겠다, 남자다워져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현대중공업 일에서 ‘임금’에 대한 개념은 좀 어려웠어요. 일단 회사가 자기 임금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게 비밀을 강요했는데 노동자들이 그걸 정말 잘 지켰어요. 친해진 동료에게 형은 얼마 받냐고 물어봐도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회사는 시급, 일당, 공수, 수당, 임금 계산, 최저임금 등을 뭐 하나 제대로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어쨌든 최저시급을 받았던 것 같아요.
용접하는, 그리고 노조하는 여성 노동자
용접학원에서 용접을 열심히 배워서 2019년 현대건설기계 하청업체인 서진ENG에 입사했어요. 그런데 여성 탈의실이 없었어요. 여성 탈의실은 아예 없고 샤워장도 구석에 있어서 상당히 불편했어요. 새로 노동자가 와도 일이 힘들어서 ‘금방 가겠지’란 분위기여서 사람들이 제게 관심도 없었어요. 당시 머리카락이 짧았는데 식당에 줄을 섰을 때 누군가가 대뜸 ‘남자냐, 여자냐’고 묻는 일 정도 있었어요. 그때 당황에서 아무 말 못 했는데 기분이 나빴죠.
입사하자마자 처음에는 용접에 바로 투입되지 않고 훈련을 시켰고, 현장에 투입된 다음엔 옆에서 거들고 자재 옮겨주고 선배 노동자에게 배우다가 쉬운 부분 조금 시키면 해내고 이런 식이었어요. 선배 노동자가 검은색 글라스를 통해서 쇳물이 어떻게 가는지 살펴보라고 얘기해주었죠. 처음에는 뭔지 몰랐는데 ‘계속 보다 보면 보인다’는 조언처럼 나중에는 진짜 보이더라고요. 초기에는 내부 용접을 했어요. 모양이 별로여도 제품을 만들면서는 뚜껑이 덮이는 부분이었으니까요. 그걸 하다가 소형 암의 겉면 취부(고정된 부재를 Co2 용접기로 가용접 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어요. 용접업계에서는 취부를 용접이라고 딱히 이야기하지 않더라고요. 용접을 하지만 정확히는 취부사로 일한 거죠.
현대중공업도 그렇고 현대건설기계도 워낙 통제가 강하고 일이 힘들고 해서 좀 쉬고 싶은데 잔업을 빠지는 것조차 눈치를 줬어요. 소장은 작업자들에게 하는 말투가 아주 나빴어요. 반장들도 일을 빨리하라고 성화였죠. 용접자켓을 입어야 하는데 너무 커서 그라인드에 말려 들어갈 뻔한 아찔한 일도 있었어요. 그래서 사이즈에 맞는 옷을 달라고 수차례 말했는데도 ‘없다’고만 하고 반장은 짜증을 내더라고요.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사이즈 별로 나오는데 말이죠.
채용 면접을 볼 당시 용접학원에서 단체로 갔고 학원 선생님도 동석했어요. 그때 회사 관리자가 ‘노동조합 할 거냐’는 질문을 했어요. 저는 그때 노동조합이 뭔지 모르니까 ‘굳이 그걸 해야 하나요’라고 되물었죠. 그랬더니 회사 관리자가 ‘안 해도 된다. 하지 말라’고 말했었죠. 일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조장이 찾아와 노동조합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어요. 현대중공업에서 일할 때부터 회사에 불만이 조금씩 쌓여왔는데 건설기계에 와서는 탈의실도 없고, 도구를 이용해서 일하는데 제대로 제공도 안 되고, 일하는 데 문제라고 여겨진 점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약간 보험 가입하는 느낌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했어요.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그런데 노동조합에 가입하니까 제게 맞는 사이즈의 용접자켓이 생겼어요. 진짜 주더라고요. 여성 탈의실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말을 해도 반영 안 되는 바람에 혼자 불만을 가져왔는데, 노동조합을 하니까 탈의실이 생겼어요. 오래된 용접기가 교체되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불만을 얘기해도 전혀 개선이 안 되던 게 노동조합을 하니까 이것저것 바뀌는 거예요. 한마디로 임금 빼고는 뭐가 되긴 했어요. 그러니까 노동조합에 대해 ‘바뀌네, 다르네, 괜찮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조합이 임금협상을 하는 건 의아했어요. 왜 피켓을 들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죠. 뭔가 피부로 닿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은 잘 이해가 됐는데 임금이 오르고 내리는 건 물리적으로 잘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임금에 관한 문제는 중요한데, 어렵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 점이 있었어요.
용접복을 다시 입지 못하면서 시야가 딱!
2020년 여름, 노조한다고 해고됐어요. 회사는 코로나를 핑계로 댔지만, 결론적으로 우리 하청 노동자들이 하던 물량을 사외에 빼돌리고 정규직 노동자에게 넘겨줬어요. 만약 노조를 안 했다면 회사가 하는 말을 믿었을 수도 있었겠죠. 대기업이 노동자들을 이렇게 해고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하지만 막상 해고 이후 농성을 시작했을 때는 너무 낯설고 겁도 났죠. ‘이걸 왜 해야 하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용접학원에서 어디 용접 자리 났다고 가끔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한 1년 전까지에도 왔는데 해고되고 나서는 그런 문자에 솔직히 좀 혹한 거예요. ‘내가 여기 지금 길바닥에서 이럴 때인가’, ‘내가 이 젊은 나이에’, ‘난 지금 어딜 가서 뭘 배우면 잘할 수 있는데’ 왠지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갈등을 많이 했죠.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의리와 정의감이 있었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 그래서 하다 보니 결론적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해고 투쟁 초기에는 대기업에서 해고된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했어요. 오래된 투쟁사업장들은 실감이 잘 안 났어요.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때는 ‘왜 그렇게까지 하지? 왜 그렇게 오래 하지?’ 생각했죠. 8개월쯤에 되었을 때 고공농성 투쟁을 했어요. 농성장을 지키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터넷에 우리 기사가 났는지 검색해보게 되고 다른 노동조합 투쟁도 검색해볼 시간적 여유가 있었어요. 그런데 회사들 하는 거나 내용을 보다 보니까 다른 사업장도 똑같은 거예요. 거기서부터 시야가 딱! 넓어지기 시작한 거죠.
일할 때는 먹고 사는 데 바쁘고, 퇴근하면 집안일에 신경이 가 있어서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노조 가입하고 해고돼서는 우리 일에만 집중하고 끝나면 내 여가나 휴식을 취하기 바쁘니까 사회적 이슈는 안 봤고 내 해고 문제 외에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그런데 바뀐 거예요. 여유가 있으면 모든 걸 돌아보게 되잖아요. 내가 용접학원에 연락할까? 말까? 가끔 갈등하면서 의리로 남아 있던 모습에서 ‘다른 사업장도 우리와 똑같구나’, ‘아, 이 세상이 정말 문제인 거구나’ 생각하게 되면서 노동자로서 시야가 넓어지게 된 거죠.
그 시기가 우리 노동조합 규모가 크지 않아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생계팀, 투쟁팀으로 해고자가 나눠진 시기쯤이죠. 저는 투쟁팀으로 남았어요. 노동자로서 시야가 넓어지면서 싸우자고 생각한 점도 있지만, 새로 어딜 가서 일한다는 게 조금 두렵기도 했어요. 서비스업에 질려서 중공업에 왔는데, 근처 일자리는 다 중공업계통이고, 다른 제조업 사업장은 거리가 먼 데다 일할 엄두가 안 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일하러 가더라고요.
이후 연대를 다니면서 투쟁하는 게 적성에 맞더라고요. 그리고 취재 기사로 김진숙 지도위원 동지와 함께 같은 조선소 여성 해고자, 스물여섯 여성 용접공으로 알려지면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투쟁해야 하는’, ‘딴 데 가면 안 되는’ 분위기가 되기도 했지요. 당시 언론 인터뷰나 집회 발언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때는 투쟁의 이유와 결의가 스스로 반신반의하던 모범답안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 답대로 살고 있어요.
노동자 투쟁에서 여성 노동자 투쟁으로, 삶 속에 삶
투쟁하면서 여러 가지 고민과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불합리한 문제를 바꾸자고 노동조합을 했지만, 부족함이 있고 노동조합 안에서도 불합리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죠. 사회 전반적으로 깔린 구조적 문제에서 한 번에 탈피할 수는 없잖아요. 사회적으로 억압돼 있고 차별하는 게 노동조합 한다고 해서 하루 만에 없어지지 않지요. 그러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고민도 커졌어요. 살면서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여성스러움’을 강요받고 뭔가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억압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왔어요. 이러한 문제도 노동조합을 할 때처럼 목소리를 내면 나아지니까 여성 노동자로서 내가 여성문제에 잘 몰라도 여러 사람과 의견을 나누면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면 좋겠다는 생각에 ‘변혁적여성운동네트워크 빵과장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막상 해보니까 배울 점이 많은 거예요. 처음에는 여성의 생리 현상인 ‘월경’이나 ‘여성질환’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는 점 자체에 약간 충격을 받았어요. 사회에선 여성이 생리 현상을 겪을 때 위축되고 속닥속닥 조용히 말해야 하고, 생리대도 검은 봉지에 싸야 하고, 월경통을 말하기도 조심스러워야 했는데, 여성으로서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을 얘기하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는 관점이 놀라웠고 ‘맞아, 그렇지’ 동의했죠.
‘빵과장미’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노동자의 여러 가지 당연한 권리,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 이런 점을 생각하고 배우고 깨닫게 되고 여성만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더 넓게 제기하게 되면서 저의 삶과 시야가 달라졌어요. 그러니까 저한테서 ‘빵과장미’의 의미를 말하자면 ‘제 삶 속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현대중공업 사업장에 가서 삶이 달라졌고, 노동조합을 하면서 삶이 달라졌고, 또다시 여성 노동운동을 하니까 삶이 달라진 거죠. 저를 성장하게 도와준 거예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고 사회의 문제를 바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노조를 한다고 완전히 나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문제를 겪고 부딪히면서 같이 성장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노조 안에 여성 차별에 대한 인식이 낮다고 생각해요. 현대중공업 쪽은 남성이 많은 사업장이라 더 그렇다고 봐요. 의식적으로 교육받고 바뀌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잘 되진 않죠. 노조의 현안문제에 급급하니까 성차별 이런 문제도 뭔가 일이 생겼을 때만 그 문제를 해결하죠. 우리 노동조합 활동 중에선 후원주점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결국 사과문을 쓰고 미흡한 대처에 대한 교육을 받고 논의하는 과정이 있었죠. 다른 사업장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성평등이나 차별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의무적으로 주기적인 교육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의무적 교육에 거부 반응이 있기도 하거든요. 스스로 열린 마음, 들으려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여성 의제에 대한 부분은 노동자들이 솔직히 좀 뜨뜻미지근하죠. 약간 상관없는 일처럼 반응을 보인다든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모습은 의식이 좀 낮다는 뜻이라고 봐요. 노동조합이 사회의 평등을 위해 투쟁하기 때문에 노동조합 안에서도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는 만큼 좀 더 의식적이고 강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래서 돌봄, 돌봄, 공공 돌봄
8살짜리 동생이 또래 아이가 없는 지방의 마을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요. 그런데 동생에게 돌봄 공백이 생겨서 고민이 많아요. 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부터 밖에서 일만 해서 집안일과 육아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어요. 가족의 사연도 좀 복잡해요. 저는 아버지랑 살아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아버지가 동생을 키우면서 안 해봤던 집안일과 육아에 직장생활까지 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동생 돌봄에 맞춰 임금이 낮아도 잔업이 적은 직장으로 옮기긴 했지만, 학교 등교 시간보다 출근은 빠르고, 하교 시간보다 퇴근은 늦으니까 동생은 아침부터 혼자 밥 먹고 학교에 가고, 마치고 혼자 집에서 지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요. 동생이 어리니까 아침밥을 스스로 챙겨 먹지 못해서 굶는 일이 종종 있어요. 칫솔질도 아버지가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동생이 치과에서 치료받게 되어 속상했던 적도 있었죠. 아버지가 동생 혼자 심심하다고 강아지랑도 같이 지내자고 데려왔는데, 동생도 제대로 돌봄을 못 받고 강아지를 돌봐줄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는 불의의 사고가 나는 바람에 강아지가 죽은 일도 있어요.
우리는 돌봄을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본가를 보면 그게 너무 실감이 나고 절실해요. 이래서 ‘돌봄, 돌봄’ 하는구나 싶죠. 공공돌봄을 꼭 해야 해요. 아버지가 야근할 때는 혼자 있는 동생이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제게 전화도 자주 해요. 초등학교 가기 전에 어린이집에서 혼자 아빠를 기다리던 동생이 제가 늦게까지 노조 활동하던 밤 8시, 10시에도 전화를 걸어 통화한 적이 많아요. 사회 저출생이 심각하잖아요. 본가가 있는 동네에는 어린이가 동생 한 명뿐이에요. 그래서 동생이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면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눈대요. 또 동생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서너 명 이런 식으로 전교 학생 수가 아주 적어서인지 돌봄교실이나 늘봄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못 들어봤어요. 몸이 멀리 있지만 동생 걱정에 신경이 많이 쓰여요.
가지 많은 나무 선물을 받은 노동자
제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노동자로서 자본주의 세상을 알아가고, 생각과 고민, 투쟁이 커지는 과정에 있다고 봐요.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 나무에 가지가 많아지는 장면이 딱 떠올라요. 가지 많은 나무가 되어 가는 느낌을 받죠.
바로 곁에 있는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지금 조건에서 정규직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인 지금 저의 생각과 똑같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뭐든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르잖아요. 무조건 겪어봐야 안다는 건 아니라서 저는 겪지 않고도 문제를 알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노동자로 살다가 비정규직이 되고, 노동조합을 하고 해고되지 않았다면, 여느 노동자나 정규직과 다를 게 없이 본질을 잘 보지 못하고 투쟁에 많이 공감하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이제는 이 사회에서 열악한 조건에서 사는 사람, 해고되고 투쟁하는 사람들 말고도 그들과 다른 생각으로 사는 노동자의 모습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점점 시야가 넓어지고 연대와 단결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건 해고가 저에게 준 선물이죠.
지금 현대중공업에는 이주노동자도 늘어나고 있어요.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어요. 이주노동자 안에서도 고용형태에 따라 다르게 구분되어 있어요. 정규직 계약직, 사내하청 본공 계약직, 사내하청 초단기계약직, 물량팀. 비자도 다르고요. 사업장 이동을 가로막는 고용허가제는 심각한 문제인데 정부가 또 지역도 제한해서 어딜 못 가게 하잖아요. 정주노동자들은 외모의 차이로 이주노동자를 낯설어해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거나 대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언어의 장벽이 있어서 번역기로 이야기하고, 지회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알리는 현수막을 걸 때는 금속노조가 필요한 번역을 지원해주고 있어요. 노동조합 차원에서 아직은 기획한 사업들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지만, 이주노동자들과 어떻게 만날지도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있어요. 배울 게 많아요.
그뿐 아니라 ‘빵과장미’의 활동, 기후정의, 노동운동의 여러 가지 내용이랑 활동을 배우면서 잘하고 싶은 의지는 있지만 막상 눈앞에 노조 활동하다가 신경을 덜 쓰거나 놓치게 되는 부분이 생기고, 소홀해지는 부분이 있어서 안타까워요. 뭔가 막힌 느낌이 들 때는 울적해지기도 해요. 하지만 앞으로는 더 열심히 활동하고 싶어요. 노동자의 단결을 같이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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