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다섯시. 나는 오늘도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내 방창문 왼쪽 벽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떡하고 걸려 있다.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마주 본 나는 그 속에 흉측하게 생긴 얼굴을 본체 만체 하고 살금살금 기어 욕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이미 엄마와 언니가 아침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엄마, 제발 내 방에 거울 좀 치워 줄 수 없어?" 그러자 옆에 있던 언니가 "너 미쳤어? 여자 방에 거울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냐구." 이번에도 또 실패구나 생각하며 세수를 하러 가는 데 세면대에 서자마자 또 거울이다. '으악, 거울.' 또 다시 우울해졌다. 그러고 보니 거울에 대한 혐오감이 생긴 것도 8년째가 되어 간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초등학교 5학년 11살 무렵부터 내 얼굴을 멋대로 점령해 버린 그 유명한 여드름 때문이었다. 여드름이 청춘의 보석이라고? 아니 나에게는 청춘의 비극이다.
"빵빵." 마을 승강장에서는 유일하게 버스를 타는 학생이라곤 나 혼자 밖에 없으니 다행이었지만 그 안도감은 몇 정거장 가지 못해 산산조각이 났다. 버스가 승강장에 멈춰 서자 내 또래의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다시 버스가 출발하자 아까 버스를 탔던 남학생들의 무리 중에 비아냥거리기 좋아하는 목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야, 저 여자 애 얼굴 좀 봐, 화상 입었나 봐. 푸하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난 아무 것도 못 들은 척 하며 책을 읽었다. 하지만 고개는 점점 책 속으로 기울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거의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책상에 앉아 고개를 돌리니 짝꿍은 거울에 코를 박고서 인공 쌍꺼풀을 만들기 위해 실 핀으로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붉은 나의 얼굴을 보고 짝꿍이 한 마디 툭 던졌다. "너 여자 맞니? 꼬락서니하고는, 거울 좀 보고 다녀." 교실은 거울 천지였다. 한창 멋 부리기 좋아하는 여고생들의 손에는 필수품처럼 각양 각색의 손거울들이 들려 있었다. 비단 우리 교실뿐이랴. 외모 지상주의에 심취한 세상 모든 여성들의 핸드백 속에는 꼭 거울이 있을 것이다. 그들 속에 그저 나란 존재는 다른 나라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날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외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띠리리리리리." 4교시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전력 질주로 급식실로 향했을 나였지만 이번 달 급식 순서는 3학년이 꼴등이었으므로 난 그냥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3분이 좀 지났을까. 학생회장이자 절친한 친구인 은주가 교실 벽에 붙어 있는 전신 거울을 들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학생회실 가지." 은주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패션 모델이 되는 것이다. 학생회실 사물함에 전신 거울을 비스듬히 세워 두고 경쾌한 음악을 틀어 놓고 은주는 거울을 향해 당당하게 워킹을 하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는 키 크고 날씬한 긴 머리의 여고생이 도도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저 당당함이라니. 순간 나는 가슴이 뛰었다.
학교가 끝나고 시장통을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섰다. 무수한 상가 건물들의 유리창에 나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낯설고 싫었던지. 사실 난 얼굴에 난 여드름 때문에 속으로 말못할 고민들을 많이 겪었다. 찬물에 얼굴이 닿기만 해도 화끈거렸고, 누군가의 비웃음거리가 될까봐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생각하니 슬퍼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거울을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 나는 멋 부리길 좋아했고, 하루 종일 거울을 보며 멋을 내는 일이 나의 일과였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괴물처럼 울퉁불퉁 해진 얼굴 때문에 거울을 보는 일이 무서워졌다. 오늘도 나의 눈은 수많은 사람들의 거울이 되어 그들의 표정과 옷차림, 발걸음 등을 관찰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내 방 벽에 걸린 전신 거울 앞에 당당히 섰다. 거울 속에는 이제 것 내가 외면했던 여드름투성이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그 여자아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웃고, 울고, 찡그리며 나는 여러 가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속에는 또 다른 수많은 내가 비춰졌다. 누군가 비웃기만 했던 그래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을 이제는 내가 더 많이 사랑하겠노라고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마음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