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권위
마태복음 7:15-끝
이시웅(李時雄)
1931. 1. 25.
人社會之生活, 治之率之命之, 有各好事業而後, 社會可成, 權威有數種, 有職分的權威, 有形像的權威, 禮服也劍戟也, 此未開的時代權威也. 有人格的權威, 當時有地位之書記官, 長老者皆服從也. 此權威有背景的人格而産出權威也. 父權君權但行之於臣也子也, 而此權威永遠尙存, 余地方有長老一位, 往總會以爲會員, 皆有人格而長老反而言曰, 會員發言普通而人皆可爲, 而人格的權威甚貴重也. 吾等出街傳道于人, 人不可信用, 然而彼得一傳道三千名悔改, 此何故也? 彼得之人格可想得. 保羅以主名爲愈病, 以手巾覆之病卽愈. 見此已妖術之匠亦行使, 而魔反抗不從, 此亦人格問題也. 余於鄕間聞敎會入我邨之初, 信者一人言信之初事, 往卽醉而歸, 逢宣敎師毆打, 宣敎師笑而不抗, 此人歸而思之, 此行甚凶也. 更思欲逢宣敎師聞道, 自己之拳甚無力, 反被毆之宣敎師之言反有力也. 今日余所言之權威, 有何利益也? 今日吾敎會失權威也. 數十年前傳道, 則人感服信之, 而今日傳道人之聖役, 反勝於前而人之感服反不愈前, 此何故也? 世人有各種反抗而敎會甚無力也. 此信友皆失權威也. 敎會無人格的權威也. 此原因果何在也? 或言在外部, 而吾自體反有不足, 余於前夏讀小說佛蘭西懷疑者學, 一逢 엔실나쓰, 此人有人格故, 懷疑者反尊敬也. 今日敎會形式化俗化, 太福音書記官反無權威, 此形式化故也. 吾等讀聖書, 以法利賽敎人爲俗人, 而然吾之讀經, 或不如法利賽人乎? 法利人在敎師之地, 而無人格的權威.
인간 사회의 생활은 통치와 통솔과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각각 좋은 사업을 가진 뒤에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권위(權威)에는 두어 가지 종류가 있으니, 직분적인 권위와 형상적(形像的)인 권위가 있습니다. 예복(禮服)이라든지 칼과 창 같은 무기라든지 하는 것은 미개시대의 권위입니다. 인격적인 권위로 당시에 지위가 있는 서기관이나 장로들이 다 복종하였습니다. 이 권위에는 배경적인 인격이 권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곧 부권(父權)이나 군권(君權)은 자식이나 신하들에게 행하여지는 것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의 지방에 장로 한 사람이 총회의 회원이 되었는데 모두 다 인격을 가졌으나 장로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회원들의 발언은 보통으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나 인격적인 권위는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지만 사람들은 신용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한번 전도로 삼천 명이 회개하였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베드로의 인격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수건만 씌워도 병이 곧 나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마술사도 이미 행하던 일이었으나 마귀는 반항하여 이런 일은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도 역시 인격의 문제입니다.
내가 고향마을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교회가 우리 마을로 들어온 초기에 신자 한 사람이 처음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이야기이었습니다. 그 신자는 ‘외출했다가 술에 취하여 돌아오던 중 선교사를 만나 구타하였으나 선교사는 웃으면서 반항하지 않았답니다.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이번 행동이 매우 불쾌하였습니다. 다시 선교사를 만나 종교의 도리를 들으려고 생각해보니 자기 주먹의 힘은 매우 무력하고 구타를 당한 선교사의 말이 도리어 힘이 있었음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권위는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는 권위를 잃었습니다. 수십 년 전에 전도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감복하고 믿었는데, 오늘날 전도인의 하는 일은 전보다 나은데도 사람들이 감복하는 것은 도리어 전만 못합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 사람은 각종의 반항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가 매우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우(信友)들이 다 권위를 잃었고, 교회도 인격적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원인은 과연 어디 있습니까? 어떤 이는 외부에 있다고 하나 우리 자체가 도리어 부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난 여름에 불란서 소설 <회의자학(懷疑者學)>을 읽었는데 등장 인물인 엔실 나쓰를 한번 만나보고는, 이 사람이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의(懷疑)를 품던 자도 도리어 존경을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형식화 속화(俗化)되어 마태복음의 서기관도 도리어 권위가 없습니다. 이는 형식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읽으며 바리새의 교인을 속인(俗人)이라고 하나, 우리들이 <성경>을 읽는 것이 바리새인만 못한 것이 아닌지요? 바리새인은 교사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인격적인 권위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