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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 프쉬케의 신화는 대단히 긴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3편으로 쪼개어 게재합니다.
우선 그 첫번째의 이야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과 왕비가 살았는데, 이들에겐 딸 세 자매가 있었다. 위로 둘도 그 미모로 말하자면 예사 수준을 넘었지만, 막내딸은 이 세상의 가난한 언어로는 도무지 그 아름다움을 다 그려 낼 수 없을 만큼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막내가 아름답다는 소문이 사방팔방으로 퍼지자 이웃 나라 사람들은 막내 공주를 보러 떼지어 그 나라로 모여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막내 공주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그 때까지 아프로디테에게나 바치던 경의와 찬사를 이 막내 공주에게 바쳤다. 그러다 보니 아프로디테의 제단에 오는 발길은 날이 감에 따라 줄어들다가 급기야는 이 제단을 돌보는 이가 하나도 없게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오직 이 처녀만을 숭배하려 했다. 처녀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저마다 처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그 발치에 꽃을 뿌렸다.
신들에게나 바쳐져야 마땅할 경의와 찬사가 빗나가, 때가 되면 죽어야 할 팔자로 태어난 인간에게로 향하는 걸 보았으니 진짜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그 향기로운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골이 난 아프로디테 여신은 고개를 내저으며 호통을 쳤다.
「그래, 내 명예가 저 계집 때문에 빛을 잃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제우스까지 인정했던 저 양치기 왕1)의 판정은 허튼수작이었다는 것인가? 양치기 왕은 나와 겨루던 팔라스 아테나나 헤라보다 내가 더 아름답다면서 내 머리에 승리의 종려 나뭇잎 테를 씌워 주지 않았던가? 나의 이런 명예가 저런 계집아이에게 가로채여야 한단 말인가? 오냐, 내 기어이 저 계집으로 하여금 분수에 넘치는 아름다움을 후회하도록 해주리라.」
아프로디테는 곧 날개 달린 아들 에로스를 불렀다. 이 아들은 원래 타고난 장난꾸러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장난이 하고 싶어 근질거리던 참인데 어머니의 불평을 듣고 보니 신명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로디테는 아들에게 프쉬케2)를 지칭하여 이렇게 말했다.
「에로스, 내 아들아. 저 계집아이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움에 무슨 벌을 내리거라. 이 어미의 한을 풀어 다오. 저 계집아이가 받는 상처가 크면 클수록 이 어미의 기쁨 또한 클 것이니라. 저 교만한 계집아이의 가슴에 비천한 사내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하여, 지금 저 계집아이가 누리고 있는 기쁨과 승리감에 걸맞은 굴욕을 안겨 주도록 하여라.」
에로스는 어머니의 명령에 따를 준비를 갖추었다. 아프로디테의 뜰에는 샘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단물이 솟는 샘, 다른 하나는 쓴물이 솟는 샘이었다. 에로스는 두 개의 호박병(琥珀甁)에 각각 단물 쓴물을 담아 화살통에 매달고 서둘러 프쉬케의 방으로 갔다. 프쉬케는 잠자고 있었다. 에로스는 쓴물 두어 방울을 프쉬케의 입술에 떨어뜨렸다. 잠들어 있는 프쉬케는 바라보고 있자니 가엾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에로스는 애써 그런 생각을 지웠다.
에로스는 프쉬케의 옆구리에 화살촉을 대었다.
화살의 감촉을 느꼈음인지 프쉬케가 눈을 뜨고 에로스 쪽을 바라보았다(에로스의 모습은 프쉬케에게 보일 턱이 없었다). 눈을 뜬 프쉬케의 자태에 너무 놀란 에로스는 엉겁결에 화살을 치운다는 것이 그만 제 몸에도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러나 에로스는 자기가 입은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벌여 놓은 장난을 원상대로 회복시키는 데만 마음이 쓰여 비단결 같은 프쉬케의 머리카락에 달콤한 물을 뿌렸다.
그 뒤로 프쉬케는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받고부터는,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그 아름다움으로는 아무런 은혜도 누릴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이란 눈은 모두 프쉬케의 아름다움을 좇고, 입이란 입은 모두 프쉬케의 아름다움을 칭송했지만, 국왕이나 귀족 청년은 물론 평민조차도 프쉬케에게는 결혼을 신청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저 고만고만할 정도로만 아름다웠던 두 언니는 이웃 나라 왕자들과 혼인한 지 오래였다. 프쉬케만은 적막한 방에 홀로 남아 고독하게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의 눈만은 뜨게 할 수 없는 자기 아름다움을 한탄할 뿐이었다.
프쉬케의 양친은, 혹 자기네들이 모르는 사이에 딸이 신들의 노여움이나 사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던 나머지 아폴론의 신탁을 여쭈어보았다. 아폴론의 신탁을 풀어 보니 다음과 같은 괘가 나왔다.
「이 처녀는 인간의 각시가 될 팔자가 아니다. 미래의 신랑이 산꼭대기에서 이 처녀를 기다리고 있다. 신랑은 신도 인간도 그 뜻을 거스를 수 없는 괴물이다.」
신이 맡긴 이 무서운 점괘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프쉬케의 부모는 시름에 잠겼다. 그러나 당사자인 프쉬케는 태연자약,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 와서 무엇 때문에 제 팔자를 한탄하세요? 모두가 저에게 분에 넘치는 칭송을 퍼붓고, 입을 모아 저를 일러 새 아프로디테라고 했을 때 마땅히 한탄하셨어야 했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아프로디테라는 이름 때문에 희생된 것입니다. 저는 제 팔자를 더 이상 시비하지 않으렵니다. 저를 바위산으로 데려다 주소서.」
준비가 다 되자 공주를 모시는 행렬은 산꼭대기를 향했다. 그러나 그 행렬은 혼례 행렬이라기보다는 장례 행렬에 어울렸다. 프쉬케는 부모와 함께, 사람들의 한숨 소리에 둘러싸여 산꼭대기로 올랐다. 이윽고 산꼭대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프쉬케 하나만을 남겨 두고는 구멍 뚫린 마음을 다독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프쉬케가 산등에 서서, 공포를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고 있자 인정 많은 서풍(西風)의 신 제퓌로스가 프쉬케를 살짝 들어올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골짜기로 옮겨 주었다.
골짜기까지 올 동안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었던 프쉬케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둑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윽고 기운을 차리고 눈을 뜬 프쉬케는 주위를 둘러보았았다. 그리 멀리 않은 곳에, 키 큰 나무가 울울창창하게 들어찬, 보기에 참 좋은 숲이 있었다.
프쉬케는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숲 한가운데엔 샘이 있었다. 샘에서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샘 가까이엔 궁전이 덩그렇게 서 있었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보아 인간의 손이 쌓은 구조물이 아니라 신품(神品)의 명장(名匠)이 세운, 신의 은거(隱居)인 듯했다.
한동안 그 앞에서 탄복하여 마지않던 프쉬케는 그 궁전 가까이 다가갔다가 용기를 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프쉬케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고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둥근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황금 기둥이요, 사방의 벽은 사냥하는 광경과 전원의 풍경을 다듬고 그린 예술품 일색이었다. 조각품과 그림으로 꾸며진 벽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의식용(儀式用)인 듯한 대전(大殿)과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방이란 방은 모두 갖가지 종류의 보물과 천연 및 인공의 아름다운 작품들로 꽉 차 있었다.
프쉬케가 이런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왕이시여, 지금 보시는 것은 하나 남김없이 여왕의 것입니다. 지금 듣고 계시는 이 목소리의 임자인 저희는 여왕의 시종으로, 어떠한 명령도 더할 나위 없이 조심스럽게 힘을 다해 받들 것입니다. 하오니 우선 내전으로 드시어 부드러운 깃털 침상에서 쉬시고 혹 내키시면 욕실을 쓰소서. 진지는 가까이 있는 정자에다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하오니, 여왕께서 괘념하지 않으신다면 그리 모시겠습니다.」
프쉬케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소리만 들리는 이 시종의 말을 따랐다. 한동안 쉰 뒤 몸을 씻고 기운을 차린 프쉬케는 정자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급사도 하나 안 보이고 시종도 하나 안 보이지만 향긋한 마실 것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도 들려왔다. 누구는 노래를 불렀고, 또 누구는 수금을 탔으며, 마지막에는 모두가 한 목소리, 잘 어울리는 화음으로 노래했다.
프쉬케는 운명이 점지한 지아비를 본 적이 없었다. 지아비는 한밤중에 들어왔다가는 날이 새기 전에 나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아비의 말은 늘 사랑으로 그윽해서 프쉬케 자신의 가슴에도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넉넉했다. 프쉬케는 언제 한 번, 그렇게 황급히 떠나지 말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모습을 보여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으나 지아비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지아비는 자기에게 이유가 있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고, 또한 좋아서 그러는 것인즉 굳이 모습을 보려 하지 말라고 이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어째서 내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오? 내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건가요? 혹 이루어지지 못한 소원이라도 있는 것이오? 그대가 내 모습을 본다면, 아마 나를 두려워하거나 존경할 것이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건 그것이 아니오.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사랑뿐이오. 나는 신으로서 섬김을 받는 것보다 같은 인간으로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프쉬케는 곧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아비라는 존재가 신비스럽게 느껴질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간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자기의 그러한 운명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부모님 생각, 그러한 즐거움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언니들 생각이 프쉬케를 괴롭혔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고 보니 그 궁전도 그저 화려하기만한 감옥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지아비가 돌아오자 프쉬케는 자기 설움을 고백하고, 떼를 써서 두 언니를 그곳으로 초청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내었다.
프쉬케는 제퓌로스를 불러 지아비의 명령을 전했다. 제퓌로스는 명령을 받들어 즉시 산을 넘어가서는 두 언니를 프쉬케가 사는 골짜기로 데려왔다. 두 언니는 프쉬케를 껴안았다. 프쉬케도 두 언니를 포옹했다. 프쉬케가 언니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나랑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요.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이 막내에게 말씀만 하세요.」
프쉬케는 두 언니의 손을 잡아 궁전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만 들리는 시종들에게 두 언니의 시중을 들게 했다. 두 언니가 목욕을 마치고 음식을 들고 나자 프쉬케는 자기가 가진 보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언니들에게 보여 주었다. 도무지 이 세상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호사스러운 막내의 생활을 접한 두 언니의 가슴속에서는 질투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저 주제에 우리들을 저만치 앞질러 이렇게 호화스럽게,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니······. 이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두 언니는 동생에게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대체 지아비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었다. 프쉬케는, 지아비는 이목이 아주 수려한 청년으로 낮에는 사냥하느라고 노상 산에서 산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이러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동생을 윽박질러, 동생이 아직 지아비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두 언니의 가슴은 의혹의 그림자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두 언니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잊지는 않았을 테지? 저 퓌티아의 신탁(아폴론의 신탁)을. 신탁으로는, 네가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괴물과 결혼할 팔자라고 하지 않더냐? 이 골짜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말에 따르면, 네 지아비라는 자는 아주 무섭고 괴물 같은 배암으로, 좋은 음식을 먹여 너를 살찌워 가지고 언젠가는 잡아먹고 말 거래. 그러니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라. 우선 등잔과 잘 드는 칼을 준비하여 네 지아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추어 두어야 해. 지아비가 잠들거든 너 혼자 살그머니 일어나 등잔을 켜서 이 골짜기에 도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도록 하여라. 만일 사실이거든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괴물의 목을 도려 버려야 네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프쉬케는 두 언니의 이러한 설득에 되는 데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두 언니가 짜고 끈덕지게 권하자 프쉬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언니는 집으로 돌아갔다. 두 언니의 말은 프쉬케의 호기심을 어찌나 자극했는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저히 거스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프쉬케는 등잔과 잘 드는 칼을 준비하고는, 이를 지아비 눈에 띄지 않는 곳에다 감추었다. 그리고 지아비가 침상에 들어 깊이 잠들었을 때 살며시 일어나 등잔불을 켜들고 지아비를 비추어 보았다.
그러나 지아비는 무서운 괴물이기는커녕 신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신이었다. 금빛 고수머리가 눈처럼 하얀 목과 불그스레한 뺨을 덮고 있었고 어깨에는 이슬에 젖은 두 장의 날개가 달려 있었는데, 그 반짝이는 깃털은 봄에 피는 꽃잎만큼이나 보드라웠다. 프쉬케는 지아비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손에 든 등잔을 지아비의 얼굴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 순간, 등잔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기름 한 방울이 그만 에로스의 어깨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에로스는 눈을 뜨고는 프쉬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말 한 마디 없이 그 흰 날개를 펴고는 창문을 통해 날아올라갔다. 프쉬케는 그를 따라가려고 후닥닥 창 쪽으로 달려갔으나, 달려간 보람도 없이 그만 창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에로스는 먼지투성이가 된 프쉬케를 보고는 날아가다 말고 날갯짓을 멈추고는 이렇게 한탄했다.
「어리석구나, 프쉬케여. 내 사랑에 대한 보답이 겨우 이것이더냐? 나는 어머니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그대를 아내로 맞았더니, 그런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내 목을 도려 내려고 해? 가거라, 언니들에게로 돌아가거라. 내 충고는 가벼이 여기고 제 언니들의 권고는 중히 여겼으니 마땅하지 않은가? 내 그대에게 따로 벌을 내리지는 않을 것인즉 오직 영원히 헤어질 따름이다. 사랑이 어찌 의심과 한곳에 기거할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친 에로스는,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땅을 적시는 가엾은 프쉬케는 본 체도 않고 날아가 버렸다.
첫댓글 사랑은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