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일찍 겨울이 왔습니다. 12월도 되기 전에 큰 눈이 내리고 된 추위가 한차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화요일인 11월 26일부터 진눈깨비가 흩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이 되며 기온이 떨어지자 진눈깨비는 눈으로 바뀌어 올해의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경인 지역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밤새 이곳 중부 내륙지방까지 서설(瑞雪)이 내린 것입니다. 대설주의보까지 내려진 상태에서 다음날인 27일 아침까지 10cm쯤의 눈이 내렸고 눈은 그치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날 수요일 저녁부터 내리는 눈이 더 많아지면서 밤새 모두 30cm가 넘는 눈이 내렸습니다. 11월 눈으로는 100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이라고 했습니다. 농원은 한겨울 큰 눈이 내린 듯 설국(雪國)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습설이 내린 경인 지역에서는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습니다.
눈이 그치고 나서는 기온이 급강하했습니다. 다음날인 28일 금요일 아침은 농원 기온이 영하 8℃까지 뚝 떨어졌습니다. 이후 기온이 다시 오르기는 했지만, 추위가 이어졌습니다. 겨울이 왜 이리 따뜻하기만 하지? 언제 겨울이 오나?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의심을 어느 만큼 지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급작스레 찾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2월 초까지는 따스하겠지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난감해지기도 했습니다. 추위에 약한 과수들의 겨울옷도 입혀주고 겨울을 나야 하는 작물은 마른 낙엽 이불을 덮어줘야만 하는데 날씨의 기습을 당한 셈입니다.
서둘러 짚으로 엮은 두루마리 거적으로 아직 성목(成木)이 되지 않은 체리, 자두, 호두나무 등의 나무 밑동 부분을 감싸서 묶어주고, 양파, 쪽파, 월동시금치, 개성배추 따위의 작물 위에는 쌓아두었던 낙엽을 가져다 덮어주었습니다. 날이 너무 따뜻하기에 미루어 두었던 구근 심기를 했습니다. 말발굽 화단에 크로커스 ‘뱅가드’, 원종 튤립 분홍 꽃의 ‘라일락 원더’, 노랑 분홍의 ‘피체 벨’, 하양 분홍의 ‘레이디 제인’ 따위와 금잔옥대의 수선화 ‘벨라 에스텔라’, 샛노란 ‘케렌사’ 등 200여 구를 심었습니다. 겨울잠을 자고 봄이 되면 이곳 이국의 땅에서 꽃을 피울 겁니다.
앞으로 3개월 정도 기간의 겨울, 무엇을 하며 지낼까 생각해봅니다. 돌아보니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나름 꽤 분주했습니다. 지난해는 귀촌을 준비하고 이사를 하느라 더 바빴으나 시골살이 2년째인 올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리를 잡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냥 팽개쳐 버리다시피 했던 밭 자락을 일구고 농원 안길 화단의 자리를 잡아주는 일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내서 이것저것 두서없이 심어 가꾸는 일에 늘 허겁지겁했습니다. 다종다양한 푸성귀와 과채류는 물론 최소한 감자, 고추, 옥수수, 들깨 따위는 자급한다는 생각에서 경작 규모를 조금은 더 키웠고, 나눌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김장 채소를 가꾸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체리, 자두, 개복숭아, 호두나무, 새머루 등의 과수도 여남은 그루 심어 돌보았습니다.
뜨락의 비인 공간을 새로운 식물로 채우는 일도 버거울 만큼 시간을 쏟았습니다. 인근 지역의 산행, 이웃의 정원 방문, 식물원 답사를 통해서 채집한 여러 가지 우리의 자생 식물과 꽃나무를 수십 종, 수백 포기를 심었습니다. 여러 가지 중에서 옥매, 팥꽃나무, 산목련, 별목련, 비목나무, 분홍찔레, 무궁화, 층꽃나무, 산작약, 깽깽이풀, 처녀치마, 노랑꽃창포, 상사화와 무릇, 용담, 바위채송화, 구름떡쑥, 노루오줌, 대청부채붓꽃, 좀개미취, 산쑥부쟁이, 청화쑥부쟁이, 낙동구절초 따위가 생각납니다. 뒷산에서 옮겨온 올괴불나무, 진달래와 철쭉, 고광나무, 생강나무 등 여러 그루를 곳곳에 심었습니다. 농원 안의 복자기나무, 산사나무 등의 자리를 옮겨주고 벌개미취, 은방울꽃, 범부채, 금낭화, 매발톱꽃, 부처꽃 등 농원 안의 풀꽃들을 무더기 지어 뜨락으로 옮겨심었습니다. 개중에는 안타깝게도 살아남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울릉도 만병초와 같은 귀한 식물과 두메양귀비, 호범꼬리 등의 특산 식물도 긴 장마와 폭서의 무더위를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새롭게 심는 알뿌리 식물이나 일년생 화초도 꽤 여러 가지를 심고 씨앗을 뿌려 가꿨습니다. 달리아, 칸나와 글라디올러스, 토란 따위의 알뿌리 식물, 백일홍, 코스모스, 노랑코스모스, 과꽃, 풍접초, 채송화, 금송화 등의 일년생 화초도 여느해처럼 심었습니다. 꺾꽃이를 해서 개체수를 늘려 심은 것도 있습니다. 애스터 ‘가을 장미(Atumn Rose)’와 ‘비올레타(Violetta)’, 향소국, 산국 따위입니다. 꺾꽃이를 해서 옮겨심었는데, 때가 좀 늦기는 하지만 모두, 꽃을 피웠습니다.
올봄부터 새로이 분경(盆耕) 방식으로 바위솔 종류의 다육식물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호랑이바위솔, 문어바위솔, 솔바위솔, 솔방울바위솔, 연화바위솔, 영월좀바위솔, 백두산바위솔, 붉은바위솔, 꿩의비름, 장미세덤 등 10여 종류입니다. 모두 밖에서 겨울을 나는 것들인데, 밖으로 나다니는 고양이 ‘바다’ 와 강아지 ‘산이’란 녀석들이 화초를 들쑤시고 분을 깨는 통에 몇 가지는 망가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진돗개 강아지를 입양하고 늘어난 숫자의 닭과 집기러기를 기르는 데도 손이 좀 갔습니다. 강아지 집과 우리를 만들어 주고, 닭장에는 전기를 넣어 겨울에도 주는 물이 얼지 않도록 해주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씩은 지난해부터 시작한 목판에 글이나 그림을 새기는 서각(書刻) 공부에도 시간을 썼습니다. 마을 공동체 활동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고요.
이렇게 쉴 틈 없이 동분서주하다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한해가 다 갔습니다. 오늘이 눈이 많이 내린다는 절기의 시작인 대설(大雪)입니다.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입니다. 그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책을 읽는 일은 이따금 기차를 타고 서울로 나들이하는 잠깐의 시간뿐이었습니다. 이제 맞이한 겨울 동안은 밤이 길기도 해서 시간이 제법 많습니다. 책을 좀 읽어야겠습니다. 올겨울 처음으로 김유정에 관한 책 두 권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고교 은사이기도 했던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인 전상국 선생님의『유정의 사랑』이라는 소설과 김유정의 수필집『잎이 푸르러 가시던 님이』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간 사놓고 읽지 못한 책도 여러 권 있습니다.
겨울 동안은 틈틈이 장작 통나무를 준비하고 장작도 패야 합니다. 내년 겨울을 미리 준비하는 일입니다. 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앞동산의 낙엽송 대여섯 그루를 베어서 토막을 내고, 농원 안의 너무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와 늙은 과수나무도 베어버릴 참입니다. 때때로 눈 쓰는 일을 해야겠지요. 크게 변화된 일상의 하나인 강아지 ‘산이’와의 산책은 계속해 내갈 것이고요.
올겨울은 나의 서재 겸 공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질 듯싶습니다. 지난해 귀촌 직후부터 시작한 서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큼직한 목판에 농원의 레이아웃을 그려서 새기는 중입니다. 이 일이 끝나면 나의 좌우명으로 하고 싶은 ‘惜福’(석복)이라는 글자를 새기려고 합니다. 보통 ‘惜福謙恭(석복겸공)’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 석복은 ‘검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복을 아껴서 누린다’는 뜻입니다. 2025년 을사년 새해를 맞이하며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2024.12.7.)
첫댓글 하얀 겨울 눈과 한여름 산뜻한 화초가 조화롭군요. 거실의 불 타오르는 장작을 보니 포근한 겨울을 느낍니다. 그 속에서 독서하고 사색하고 취미생활을 누리는 석복의 생활. 愼獨입니다. 낙원입니다. 부럽습니다.
愼獨, 홀로일 때도 스스로 상간다. 惜福은 續福壽全書라는 고서에 나오는 말인데 신독과 같은 맥락의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