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과 고려(高麗)의 북진(北進)과 요구(遼寇)
태조(太祖)가 북(北)으로 나아갈 뜻을 두시고 장차 서울을 서경(西京)에 옮겨 고구려(高句麗) 옛 땅을 찾으려고 힘써 경영하였고 무고(無故)히 발해(渤海)를 멸(滅)하였다 하여 계단(契丹) 사자(使者)를 거절(拒絶)하였고 광종(光宗) 때에는 북방(北方)에 6진(鎭)을 두었더니 성종(成宗) 12년에 계단(契丹)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40만 대병(大兵)으로 침입(侵入)하거늘 강조(康兆) 이현운(李鉉雲) 등이 나아가 막다가 다 패사(敗死)하고 홀로 서희(徐熙)는 적장(敵將)과 논쟁(論爭)하여 출병(出兵)의 시비(是非)를 말하여 적장(敵將)이 이굴(理屈)함으로 압록강(鴨綠江) 내외(內外)의 땅을 다 고려(考慮)에 환부(還付)하기로 약정(約定)하였고 현종(顯宗) 10년에 계단(契丹)이 나라 이름을 요(遼)라 고치고 다시 입구(入寇)하여 나라 지경이 심(甚)히 요란하거늘 용장(勇將) 강감찬(姜邯贊)이 구주(龜州)에서 적군(敵軍)과 싸워 크게 이기니 살아간 자(者) 겨우 수천인(數千人)이러라. 이후로부터 요인(遼人)이 다시 고려(高麗)를 엿보지 못하였고 고려(高麗)에서도 북진(北進)을 중지(中止)하고 다시 내치(內治)에 유의(留意)하여 전국(全國)을 5도(道) 2계(界)에 나누고 문종(文宗) 때에는 문화(文化)가 크게 떨쳐 어진 선배가 많이 일어 나니라.
- 한글
태조가 북쪽으로 나아가 서울을 서경(평양)으로 옮겨 고구려 옛 영토를 찾으려 했지만, 발해를 무고히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거란의 사신을 거절했습니다. 광종 때는 북방에 6진을 설치했고, 성종 12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강조, 이현운 등이 맞섰으나 모두 전사했습니다. 다만 서희가 적장과 논쟁 끝에 압록강 내외의 땅을 고려에 환부하기로 약정했습니다.
현종 10년 거란이 나라 이름을 요로 바꾸고 다시 침입하자 강감찬이 구주에서 요군을 대파했고, 살아남은 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요인들은 고려를 범접하지 못했고, 고려에서도 북진 정책을 중지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전국을 5도 2계로 나누었습니다. 문종 때에는 문화가 크게 발달하여 많은 현인들이 배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