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12월 09일 주일 메시지 (예비 묵상)
시리즈 주제: 에베소서 강해7
일곱 번째 설교
제목: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
에베소서 1:15~23
설교를 위한 묵상
하나님의 경륜을 찬송하는 바울의 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라는 편지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이러이러하고 놀랍습니다!”라는 식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찬송하는 다른 경우는 솔로몬의 성전봉헌식(왕상 8장)에서 들을 수 있으며, 출애굽 시대에 홍해를 건넌 후에 부른 모세의 노래(출 15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이해하고 그 영광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의 심령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어 솟아나는 그 감탄과 찬양이 바로 그런 감동의 노래들이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 찬양의 이유를 바울은 하나씩 소개한다. 그것은 창조주의 복 주심과 부르심, 그리고 구속과 거룩하게 하심, 기업을 물려주시려고 아들들로 삼으심,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통하여 세움을 입은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되게 하심,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계속적으로 계시하심과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베푸심을 열거한다. 그 일들이 가지는 의미와 그 일들이 가져올 미래를 생각하면서 바울은 그 감격을 이 편지에 담았다.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그렇게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간략하지만 핵심을 잡아 감동적인 찬양의 마음을 담아 정리하면서 바울은 이제 성도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온 것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친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는 자신의 체험이면서 동시에 성도들을 위한 바람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비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가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도는 사실 바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바울의 기도제목, 다시 말하면 바울이 기대하는 바 그의 편지의 수신자들이 갖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그에게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계시의 영을 받아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바울의 기도제목이자 성도들을 향해 가진 소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국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기도제목, 곧 그의 소원
그러면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을 어떤 것이라고 소개하는가? 그는 더욱 자세히 풀어 설명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를 말한다고 바울은 소개한다:
1.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어떤 것일까?
2.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할까?
3.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할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망과 기업과 능력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이며 내용이며 실현가능에 대한 확신 또는 믿음이다. 그 내용을 사실 바울은 앞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뒤에서 차차 풀어갈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지금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에 대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편지의 수신자들도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가 아그립바 앞에서 한 다음의 말은 사실 여기서도 해당된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도행전 26:29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
바울이 간절히 바라던 바는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과 자신의 편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다(엡 4:1). 그것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다(빌 1:27).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가지신 목적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소망과 기업의 영광과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이기에 비밀의 경륜이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은혜의 경륜이다. 그리고 그 비밀을 깨닫고 그것을 위해 살기를 결단한 이들을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라고 부른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하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린도전서 4:1~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은 곧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준비하신 미래의 기업과 계획을 말한다. 복음은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요 경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이며 최종목적이다. 그것을 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을 우리에게 물려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클레로노미아(kleronomia)인데, 그것은 아버지가 대대로 물려받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재산이나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을 기업이라고 한다. 그 기업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며 그에 대하여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제시되었다.
그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시는 기업의 모습을 성경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모양으로 소개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충만하리라 – 하박국
2. 황무지가 장미꽃 만발한 들판이 되리라 – 이사야
3. 사자들이 소처럼 풀을 먹으며 어린 아이가 뱀과 더불어 장난치리라 – 이사야
4.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것이므로 이전 것들은 기억되지 않으리라 – 이사야
5.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께 나아가 열방을 통치할 권세를 받고 성도들과 왕노릇하리라 – 다니엘
6.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리라 – 예수님의 비유
7. 새 예루살렘이 위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리라 – 요한계시록
8. 새 영을 모든 육체의 마음에 부어줄 것이므로 어린 아이들도 청년들도 아비들도 모두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명확하게 아는 선지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꿀 것이다. – 요엘
9. 새 영을 주어 그들의 마음에 굳은 마음을 제거하리라 – 에스겔
문익환 목사의 꿈
문익환 목사(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는 군사정권의 혹독한 사상탄압과 반공교육이 강제로 시행되던 시절에 통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을 시에 담았다. 그의 시를 당시의 통치자들은 불온하다고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그의 시를 소개하는 사람들도 빨갱이라고 배척과 외면을 당해야 했다. 교회도 문익환 목사를 빨갱이라고 여겨 가까이 하기를 꺼렸다. 남북정상회담이 어렵지 않게 여겨지는 지금 그의 시를 다시 생각해 보자: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풀어버리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딩굴겠지
사십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고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꿈을 비는 마음
-시, 문익환 목사 -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 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놓고
진주 같은 꿈 한 자리 점지해 주십사 하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오?
155마일 휴전선을
해 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오?
철들고 셈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서있어야죠 -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 햇살을 타고 날아오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오?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 자리.
평화롭고 자유로운 꿈 한 자리,
부디부디 점지해 주사이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바울의 환상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본 환상이 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영광에 비교하면 지금 당하는 고난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바울에게 하나님이 주실 기업의 영광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분명하고 크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심히 크기에 반드시 그 일들이 이루어질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런 확신이 바울로 하여금 불꽃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뜨거움으로 성도들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리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연대를 정하시고 그들이 살아갈 거주지역의 경계를 정하사 나눠주신 분이라고 바울은 아테네에서 설교했다(행 17:26).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열둘로 나누어 각 지파의 거주지를 할당받은 것을 각 지파를 위해 줄로 재어준 구역인 그 지파의 기업이라고 한다(시 16:6). 그렇게 가나안 땅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거주하는 곳이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정하신 거룩한 땅이자 구별된 땅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가나안은 이제 에덴동산과 같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땅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든 이스라엘은 모여 예배하고 경배하며 절기를 지키면서 율법에 충실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광야에서처럼 ‘연애’하고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의 찬송이 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열방에게 증거할 것이다. 그것은 어둠 가운데 사는 백성들에게는 찬란한 빛이 될 것이며, 법 없이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시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지혜와 공의 그리고 자비의 법이 되고 교훈이 되어 열방을 가르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충만할 것이다.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그리고 사막이 낙원으로 바뀌고 광야에는 샘물이 흘러 생태계가 복원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하며 각 민족과 백성은 자기의 거주지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전 일은 모두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 세상을 예언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불렀다(사 65:17). 이제 다시 창조된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의 첫 메시지는 종말에 다시 울려 퍼질 것이다: “종말에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그것을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신 뒤 다시금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21:3~5, 공동번역성경
바울이 꿈꾸던 세상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려지고 소개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는 세상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을 통일하는 세상이며,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세상이다. 그 날에는 모든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것이며, 하나님이 처음부터 창조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세상을 공동으로 상속받아 더불어 왕노릇하게 될 대리인의 삶이 될 것이다. 그 영광이 하도 선명하고 확실한 것이었으므로 바울은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부활에 동참하기를 고대한 것 아닐까?
바울이 어두운 감옥에서 바라본 찬란한 영광을 우리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영광과 환상을 볼 수 있기 위해 우리의 눈을 가리던 수건을 걷어내고 벗은 눈으로 그 영광의 복음을 대면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런 각성과 재발견의 역사가 에베소서를 읽고 배우는 과정에서 꼭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30년 전,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의 통일을 꿈꾸었다. 그의 시는 그 꿈이 잠꼬대가 아니라 진담이라고 항변한다. 바울도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다들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문익환 목사는 바울처럼 환상과 비전, 곧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된 것처럼 선포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그 비전을 볼 수 없었던 우리는 그를 단지 기인(奇人)이나 빨갱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는 ‘역사를 산다’는 것이 그처럼 반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했다. 현실에서 보면 결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보이기에 밤과 낮이 바뀌는 것처럼, 하늘과 땅이 바뀌는 것처럼 도무지 실현가능성이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를 바라본 예언자들에게는 언제나 반복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30년 전에 문익환 목사가 우리들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을 부른다. 너희도 그렇게 미래의 꿈을 꾸라고. 그런 꿈을 천지신명께 점지해 달라고 빌어보라고. 그래서 나는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그런 꿈을 점지해 주실 것을 빌어볼 생각이다.
창조에서 새 창조로, 충만에서 충만으로!
바울은 에베소서의 처음 시작을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출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심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복 주심은 창세기에서 그 출발을 알린다. 창세기는 복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택하심이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등 하나님은 세상에 복을 주시기 위한 통로이자 대리인을 계속하여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을 아들들이라고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물려줄 기업을 예비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불러 그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의 섬김을 받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돌리게 하시고 찬양이 되게 하신다. 그들은 열방을 향한 빛이요 축복의 제사장들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들은 기업을 잃고 바벨론으로 다시 끌려가고 만다. 하지만 역사의 절정의 순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본래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에서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일으키시고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갖도록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사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아담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임무를 맡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며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지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존재였다.
이와 동일하게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집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그들은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일으켜져 약속의 땅으로 올려짐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머리가 되고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될 민족이었다. 열방은 그 빛으로 돌아올 민족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존귀하게 된 민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열방을 유업으로 물려 받을 민족이며 그들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게 될 민족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처럼 이스라엘 가운데서 강력하게 역사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역사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는 영광을 얻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이제 영광을 얻으신 주님은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모두 취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에 자신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셨다. 마치 흙으로 된 아담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충만해진 것처럼,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것처럼, 하나님의 집이요 성전인 교회 안에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하셔서 그의 몸이 되게 하셨다. 그 결과 이제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행하는 대리인이 되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열방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하셨고 그들의 소문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셨다. 그리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고 하늘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셨으며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충만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다. 그 일을 이루는 대리인으로 교회는 새로운 영을 받았으며 그 영으로 충만하게 된 그리스도의 몸이자 대리인이다. 이제 교회는 아담처럼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과 복으로 충만하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이 열방의 빛이 되라는 임무를 받았던 것처럼 세상의 빛이 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아담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그렇게 하여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대행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하였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개역개정성경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함을 받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셔서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능력이 창조 때에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에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셔서 모든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실 때에도 강력하게 역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때에도 그 동일한 능력이 역사한다. 바울은 우리들이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도록 간구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그런 확신 가운데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였기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고후 4:8)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동일한 능력이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음을 깊이 깨닫고 그 확신 가운데 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계속>.
에베소서 강해07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 (예비묵상).do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