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 3주 동안 속앓이를 하더니 참다참다 기여 초음파, 내시경 검사를 했다
의사의 멀쩡하다는 소견에 후유, 1초만에 모두 나은 듯, 역시 병원 체질이다
점심을 죽으로 때우고 여행떠나자 해서 제천으로 향했다
의림지이다
요즘 아주 최악의 미세먼지이다 그래서 여행이 조금은 즐거움을 반감시킨다
먼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우륵관련 유적을 살폈다


의림지에는 제비바위라는 연자암이 있다. 이 바위에서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연암, 용바위 또는 우륵대라고도 불린다. 충주의 탄금대와 더불어 우륵의 자취는 이곳 의림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현재 의림지의 우측 도로변 녹지에는 우륵의 자취를 재현하여 우륵정이 새로 지어졌으며, 탐방객을 위해 의림지 주변을 정화하는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주차장에서 오뎅 등으로 추운 날씨를 대신했다 이곳은 식용 개구리를 많이 먹나보다 값도 비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의림지를 한바퀴 돌았다
미세먼지에도 산책하는 사람이 몇몇 보였다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처음 방죽을 쌓았으며, 그로부터 700여 년 뒤인 고려시대에 고을현감 박의림(朴義林)이 다시 견고하게 쌓은 것이라고 한다. 그후 1457년(세조 3)에 체찰사로 부임한 정인지(鄭麟趾)가 크게 보수공사를 했다.

이 의림지 내 순주섬은 우리 연초재 오상렴, 학고 김이만(오시만 사위) 선조들과 관련이 깊다
최근 '한국전통문화연구' 논문에 의하면 '15~19세기 의림지의 관개·수리시설 연구'에서 제천 출신 오상렴(吳尙濂·1680~1707년)의 시문집 '연초재집(燕超齋集)'을 인용해 "1696년(조선 숙종 22) 제천 현감 홍종우(洪鍾宇·1661~1726년)가 의림지에 '작은 섬(小嶼)'을 만들고 초목을 심었다"며 이 작은 섬을 순주로 파악했다.
오상렴의 스승인 이서우(李瑞雨·1633~1709년)의 시문집 '송파집(松坡集)'에 실린 김봉지(金鳳至·1649~1675년,오정원 사위)의 '제천16경'에 '순주'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의림지 인근에 살았던 김이만(金履萬·1683~1758년)의 문집 '학고집(學皐集)'에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노라니 맑고 얕은 정도가 순주에 기록된다'는 김이만의 관찰 결과에 대해 순주의 용도가 수심과 청정도를 가늠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파악이 된다.


의림지 전체가 얼어붙어 마치 넓은 스케이트장 같았다
고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3대 수리 시설인 제천의 의림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중에서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곳은 오직 의림지뿐이다.

의림지는 용두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원을 이룬다. 평상시에 흘러오는 물은 저수지에 가두고, 홍수 때 실려오는 흙과 모래는 서쪽의 용추폭포를 통해 홍류동 쪽으로 보내는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의림지 관광안내소 앞에서는 무슨 행사가 있는지 얼음성을 만들고 있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의림지를 신라 때 ‘의림’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의림지에 위치한 정자인 경호루(鏡湖樓)의 〈경호루기〉에 의하면 신라 때 의림지는 원래 ‘임지(林池)’라 하였는데 고려 992년(성종 11) 군현의 이름을 개칭할 때 제천의 지명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泉)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어 ‘의’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의림지의 명칭에 ‘수풀 임(林)’이 들어간 것도 예전부터 항상 의림지 제방에 숲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고문헌을 살펴보면 하천이나 저수지의 제방을 축조할 때 반드시 수목을 식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목의 뿌리가 서로 얽혀 제방을 튼튼히 해주고 토양의 유실을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 의림지의 제방에는 노송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다. 이 소나무들은 군락을 이뤄 제방의 기능을 보완하고 곳곳에 위치한 정자와 어울려 수려한 풍광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의림지 제방과 호안 주변에는 진섭헌(振屧軒), 임소정(臨沼亭), 호월정(湖月亭), 청폭정(廳瀑亭), 우륵대(于勒臺) 등 많은 정자와 누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호정(映湖亭)과 경호루만이 남아 있다.

연초재 오상렴 선조가 남긴 시 하나를 살펴보며 더욱 감회에 젖는다
振屧軒晩霽用杜子美螢火韻(振屧軒에 늦게 비가 개이자 杜子美(杜甫, 子美는 杜甫의 字)의 螢火韻을 써서 지음)
오랜 비가 아직 다 개이지 않아서 積雨未全霽
바람 따라 아직도 스스로 날으네 隨風猶自飛
무지개 사라지자 이내 햇빛을 안고 虹銷仍抱暈
구름 얇아지자 문득 옷 입은 것처럼 보이네 雲細却成衣
네가래(蘋)와 개구리밥(藻)엔 밝은 거울 잠겼고 蘋藻涵明鏡
소나무와 삼목엔 산의 기운이 울리네 松衫韻翠微
높은 마루에서 앞이 탁 트이니 高軒藉疎豁
함께 글짓기에 팔려 돌아갈 생각 하지 않네 共賦醉無歸
그렇게 의림지를 둘러보고 영월로 향했다
영월에 도착 아직 해가 남아있어 단종장릉을 들렀다

장릉으로 오르는 숲길, 장릉의 애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섧도록 아름답다
장릉의 능침은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 특이한 것은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졌다는 점이다. 풍수가들은 장릉 터를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한다.

장릉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4~40킬로미터에 조영되었다. 장릉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있다.

단종이 세조의 왕위찬탈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상왕복위계획이 탄로되어 죽음을 당하자 영월호장 엄흥도가 비밀리에 장례가 치러졌다.
왕릉치고는 검소하다라고 해야하나 난간석도 없고 무인석도 없고 조촐하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의 영조(營造)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더니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金誠一)·정철(鄭澈) 등의 장계로 영역(瑩域)을 수축하고 돌을 세워 표를 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이르러 대군(大君)으로 추봉하였고, 1698년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附廟)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상설(象設)은 추봉된 정릉[貞陵 : 태조의 계비 神德王后康氏의 능] 등의 예에 따라 난간과 무석(武石)을 설하지 않았고, 양식은 왕명으로 가장 간단하며 작은 후릉[厚陵 : 정종의 능]의 양식을 따랐다.

따라서, 장릉의 석물(石物)은 숙종과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능석물의 선구를 이루며, 명릉[明陵 : 숙종의 능] 이래 만들어진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은 장릉에서 그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장릉은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반 능과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이 있으며 능침 서측 수십 미터 아래에 평지를 이용, L자형 참도 끝에 능침을 옆으로 하고 정자각을 배치해 놓았다. 일반적 직선형 제향 공간과 다른 형태다. 단종이 몰래 암매장되고 능침 앞이 좁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배견정, 장판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따라다닌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사사되자 단종의 영혼은 불교의 환생 논리에 의해 두견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단종의 유배 시 따라온 시녀들은 청령포 건너 동강 절벽에 있는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들 영혼은 단종의 유택이 있는 장릉의 능선 끝자락에 와서 단종의 영혼에 절을 하고 시중을 들었다.


정조 때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기정(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은 이 이야기를 듣고 뜻을 기려 배견정(拜鵑亭)이라는 정자를 세워주고, 뒤편 바위에 '배견암'이라는 글자를 썼다.
또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32명, 조사 186명, 환자군노 44명, 여인 6명 등 총 268명의 위패를 모셔 그들을 위로했는데 이 건물이 '장판옥'이다. 장판옥 맞은편 배식단에서는 매년 한식날을 전후해 영월에서 가장 큰 문화 행사를 지냈는데, 1967년부터 단종제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들의 제사도 지낸다.

장릉 주변에는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죽음을 당한 사육신과 대의에 따라 절개를 지킨 4명의 충신을 포함해 10충신의 위패를 모신 창절사가 있고, 영흥리 일대에는 단종이 사망하자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여섯 시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민충사와 영모전 등이 있다.
이것은 엄홍도의 정려각이다

이것은 영월부사 박충원에 대한 낙촌비각이다

단종의 영월에 박충원 영월부사가 부임한 후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세 명이나 군수가 연달아 죽어나간 이곳에서 과연 박충원은 살아남을 것인가는 관심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박충원이 영월에서의 첫날을 맞는 밤이 되었다.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들더니 등골이 오싹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박충원은 이것이 영월부사들의 죽음의 원인인가 보다 직감을 하였다.


그런데 정신을 추려 다시 보니 곤룡포를 입은 귀신이 나타난 것이었다. 비록 귀신이었으나 왕의 옷을 입었으니 박충원은 넙죽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 귀신은 말하였다. "내가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도 답답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박충원 영월부사는 단종의 귀신임을 알고 그간의 연유를 여쭈었다. 단종은 신임 부사들에게 부탁을 하려고 찾아왔으나, 보는 즉시 놀라서 죽어버리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단종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지난 1457년 '사육신 사건' 이후, 삼촌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으나, 열일곱 살의 소년 단종이 이를 거부하자 목 졸려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슬 퍼런 쿠데타 세력이 무서워서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단종의 귀신이 활줄을 말한 것은 죽을 때에 목을 조른 줄이 아직도 시신에 감겨 있기 때문이다.

영월부사 박충원은 단종에게 시신을 찾을 방도를 물었다. 단종은 '엄흥도'를 찾아가라고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박충원은 즉시 엄흥도를 찾았다. 흠칫 놀란 엄흥도는 몰래 단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노라고 고백했다. 박충원은 단종의 묘를 다시 만들고 장사 지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단종의 원한은 풀리게 되고, 세조에 의해 왕조 계보에서 지워졌던 단종은 숙종시대에 와서 정식으로 복위되었다는 얘기이다.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 씨는 송현수의 딸이며 단종보다 한 살 위로 1454년 가례를 올렸다. 1455년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는데, 16세에 세상을 뜬 남편보다 64년을 더 살다가 중종 16년(1521) 세상을 떠났다. 그곳이 정업원이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의 사릉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