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알버타문학 민초 신인문학상 장원 당선작
수필
그리움 앞에 선 문장들 / 조대훈 수필가
캘거리에 둥지를 튼 지도 어느덧 2년 하고도 아홉 달의 시간이 흘렀다. 자식들을 토론토에 남겨두고 떠나온 길, 이따금 그들의 얼굴이 잔상처럼 눈앞을 스친다. 하지만 정작 내 가슴을 가장 시리게 파고드는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 심장 박동 소리를 나누며 품어왔던 아이들을, 이제는 아득히 먼 지평선 너머에 두고 살고 있다. 세계가 경탄하는 로키의 장엄한 산맥도, 에메랄드 빛 밴프와 카나나스키의 비경도, 내 마음속에 뻥 뚫린 공동(空洞)을 메워주지는 못했다. 로키의 설산도 채우지 못한 빈자리에, 아무리 찬란한 대자연의 교향곡이라 한들, 손주들의 재잘거림이 빠진 풍경은 내게 그저 소리 없는 메아리처럼 공허할 뿐이었다.
이 그리움을 달래려 매일같이 영상 통화의 작은 화면에 매달려 본다. 하지만 기계 너머의 온기 없는 화상(畵像)은 오히려 갈증을 부추길뿐,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이 아이가 내 손주요"라고 마음껏 뽐내고 싶은 나만의 허영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길에서 또래 아이들을 마주칠 때면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는 것은, 아마도 그 아이들의 얼굴에서 내 혈육의 조각을 찾으려는 간절한 몸짓일지도 모른다.
망설임의 겨울을 지나 용기의 봄으로 가면서,
캘거리의 날씨는 두 번의 겨울을 겪고도 여전히 해독 불가능한 암호 같다. 찰나의 햇살에 봄인가 싶다 가도, 회색 빛 구름이 몰아치면 동장군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 하지만 6월의 바람이 불어오니 비로소 겨울의 그림자가 슬며시 꼬리를 내린다. 이 계절의 변화처럼 저 역시 오랫동안 미뤄왔던 '글쓰기'라는 문턱 앞에 조심스레 발을 내디뎌 본다.
그간 글쓰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몇 가지 무거운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첫째는 지식에 대한 빈곤함이었고, 어려운 철학적 담론이나 화려한 외래어 앞에 서면 내 언어는 늘 작아졌다. '작가'라는 고결한 이름들 사이에 나의 투박한 문장이 끼어드는 것이 혹여 그들의 뜰을 망치는 민폐가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사자성어나 현학적인 수식어가 없어도 진심은 통한다는 작은 자존심이 내게 펜을 쥐게 한 힘이요 용기였다.
둘째는 표현의 길을 찾지 못 함이었는데, 유머를 섞어야 할지, 엄숙해야 할지, 허구와 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메마른 감수성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시인들은 돌멩이 와도 대화한다는데, 내게 돌은 그저 돌이고 꽃은 그저 꽃일 뿐이었다. 억 단위 비싼 예술품도 내 눈엔 그저 물감의 흔적일 뿐이었으니, 세상 물정 모르는 이가 글을 쓴다는 것이 스스로도 우스꽝스러웠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나의 유별난 성미와 게으름이 부딪혀 삶의 궤도를 어지럽힐까 봐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눈물로 적신 젊은 날, 아순시온의 천방지축 생활 기, 그 못다 한 기록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오래 벼르던 꿈을 출항시키려 한다.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고마운 이들의 눈빛을 이제는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를 이 자리에 세운 것은 어머니의 기구한 생애라는 거대한 서사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이주부터 해방 후의 귀국, 6·25 전쟁의 포화와 여수 피난길, 그리고 다시 이어진 미국 이민까지. 저 또한 스물 두 살 청춘에 파라과이 아순시온으로 떠나 인생의 비극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배웠듯이 "아순시온 땅바닥에 내 눈물 안 뿌린 데가 없다"던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나의 가슴 가장 깊은 곳을 후벼 파는 송곳이 되었다.
그때 그 시절, 이제 그 말 못 할 사연들을 하나씩 꺼내어 문장의 옷을 입혀보려 한다. 거창한 기교는 부릴 줄 모른다. 그저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내가 걷고 싶을 때 한 걸음씩, 내 삶의 무늬를 정직하게 기록해 나가려 한다. 그리움이 문장이 되고, 눈물이 글자가 되는 그 길 위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