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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詩作)의 시작(始作)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때까지 시(詩)라는 것을 단 한 편도 써 본 기억이 없는 이종암 시인. 당신의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은 언제부터였습니까? 예,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 생각 없이 진학한 공업고등학교에서의 부적응과 거기서 비롯된 미래 삶에 대한 막연한 고민들을 아무렇게나 적어나가던 연습장, 한 학기 만에 공업학교를 작파하고 재수하면서 처음 사귄 여학생과 마주 잡은 그 뜨거웠던 손바닥이 아무래도 제 시의 출발인 것만 같습니다. 그 후, 새로 들어간 인문계 고등학교 문학동아리에서 시를 처음 만나고 시 비슷한 것들을 써보기도 하였습니다만, 그 시작은 모방이었습니다. 출판사도 기억나지 않는 두꺼운 하얀색 표지의『한국의 명시』와『외국의 명시』속의 시들, 교과서에서 배운 현대시들을 보면서 그와 얼추 비슷하게 써내려간 것이 고등학교 시절 내 시작(詩作)의 첫 얼굴입니다. 모방에서 시작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모방(模倣)은 배움[學]입니다. 저는 지금도 모방이 모든 예술 행위의 첫 시작이고 마지막 완성의 단계까지 밀고 가는 가장 큰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언어의 나열이 고귀한 시라고 생각했던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시의 세계로 올바로 인도해준 두 사람을 만난 것은 제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문단에 막 등단한 ‘분단시대’동인 김윤현 선생님의 말씀(시에 한자나 한자어를 되도록 쓰지 마라. 너희들이 좋아하는 신경림 선생 시 봐라, 제목 말고는 한자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야 시가 구체적이게 되고 남들이 뭔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있다.)과 문예반이면서도 미술대학 진학을 위해 늘 미술실에만 죽치고 있던 3학년 류상묵 형의 얘기(시는 그림처럼 언어로 그려야 한다. 색상도 집어넣어 네가 말하려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해 봐라.)가 내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에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2. 내 시작(詩作)의 두 나침반
-미당과 장석남
80년대 한가운데를 통과한 대학시절은 그야말로 불의 시대였습니다. 저의 삶에서도 시는 뒷전이었고 지하서클 운동권 학생의 가두 시위, 사회과학 서터디 그리고 연애가 먼저였습니다. 그 시절 틈틈이 신동엽, 김수영, 김지하, 고은, 신경림, 정희성, 김남주의 시들과 막 출간된 박노해의『노동의 새벽』(풀빛,1984)을 비롯하여 김용택의『섬진강』(창작과비평사,1985), 백무산의『만국의 노동자여』(청사,1988) 같은 시집들을 읽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대학 4학년 때 전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현상 모집에 문학평론이 당선(염무웅 선생 심사) 되기도 하였습니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하고 경북 포항에서 중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문학평론 활동을 제대로 해보려 노력하였지만, 별 진척은 없었습니다. 포항의『포항문학』과 대구의『사람의문학』 같은 문학지에 시집 서평을 몇 번 썼던 것 같습니다. 문학평론을 포기하고 나니 저도 남들처럼 시를 본격적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같은 직장의 선배 시인 김만수와 몇몇 초고(草稿)를 서로 보여주면서 함께 시 공부하던 것을 그 범위를 넓혀『포항문학』의 의욕 있는 몇몇 시인들과 뜻을 모아 시동인‘푸른시’를 결성하였습니다. 본격적인 시 공부와 창작 활동에 들어간 것이지요. 저는 ‘푸른시’동인 활동의 지난 10년 동안 정말 열심히 문학 공부를 하였고, 시 읽기와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로 읽었던 책들이 J.P.리샤르의『시와 깊이』(민음사,1995)를 비롯하여 유종호, 정효구, 바슐라르의 저서들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삼국유사』와 우리 민족의 옛 그림에 관한 책(오주석과 유홍준의)들을 소설책보다 더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시집으로는 창비를 비롯하여 문지, 세계사, 민음사에서 간행된 현역 시인들의 시집들을 주로 읽었는데, 제 마음에 드는 시집을 만나면 그 시인의 다른 시집들도 모두 사서 꼼꼼하게 여러 번 읽으면서 시 공부를 하였습니다. 신경림, 이시영, 김용택, 안도현, 김사인, 황동규, 정현종, 김명인, 이성복, 최승호, 송찬호, 정진규, 서정춘, 문인수, 이하석, 송재학, 장옥관, 정일근, 문정희, 고진하, 조용미, 장석남, 나희덕, 이정록, 이윤학, 박정대, 문태준, 김선우 등이 제가 시 공부에 사숙(私淑)한 시인들입니다.
앞에서 호명한 여러 선배, 후배 시인들 가운데 저와 동갑내기 시인 장석남의 첫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1991)을 만났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92년 찬바람 불던 초겨울 어느 날이었습니다. 포항 시내 남빈동 사거리에 있는 학원사 서점에서 뽑아든 그의 시집 속 몇 편의 시를 읽는 순간 저는 기절할 것 같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명 저와 동갑인 1965년생, 27세의 젊은 시인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어휘들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며, 이렇게도 내면 깊숙한 무늬의 언어들을 유려(流麗)하게 노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맨발로 걷기」전문.
인용한 시는 장석남 시인의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스물셋의 청년이 쓴 작품이라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장석남 시인이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마땅한 직업도 없이 허허롭게 생을 걸어가던 그때의 자기 삶을 ‘맨발로 걷기’라고 명명(命名)하고 있습니다. 맨발로 길 걸어가는 시적 화자의 고달픈 삶을 형상화화고 있는 위 시는 일종의 성장통(成長痛)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것은 시 속에서 ‘눈길→발자국→냇물(물소리)→꽃’으로 변주되고 있습니다. 결핍과 전망 부재의 막막한 삶에 대한 쓸쓸한 비애를 이렇듯 구체적인 언어의 무늬로 유려하게 그려내는 젊은 시인의 장인적 솜씨가 놀랍습니다.
그의 첫 시집 표제시「새떼들에게로의 망명」도 제 뇌리 속에 오래도록 각인된 작품입니다.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전문.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망명(亡命)은 뭐고, 더구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라니! 찌르라기떼 울음 소리를 “쌀 씻어 안치는 소리”로 비유한 것도 신선하지만, 찌르라기떼 속에서 둥근 봉분(무덤)을 보는 젊은 시인의 깊은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라는 그 기투(企投)를 통해 쌀을 씻어 안치는 일과 환한 봉분을 동시에 읽어내는, 즉 삶과 죽음의 존재론적 통찰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시가 여러분은 스물 몇 살의 젊은 시인의 작품이라 믿어지시는지요.
시작(詩作) 활동을 한 번 제대로 해볼까 속으로 망설이고 있던 그때 읽었던 장석남의 첫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은, 그 후 오랫동안 저를 놀람과 절망의 양가적 감정으로 계속 짓눌러왔던 시집이었습니다. 제 몸에 시(詩)의 화인(火印)처럼 각인된 시집이지요. 잉걸(숯불)이라는 어휘도 그 때 이 시집을 통해서 처음 배웠습니다. 시집 속의 아름다운 시 몇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하늘이 붉은 얼굴로/뭉클하게 옆구리에서 만져지는 거기/바다가 문병객처럼 올라오고/그 물길로 통통배가/텅텅텅텅 텅 빈 채/족보책 같은 모습으로 주둥이를 갖다댄다(「소래라는 곳」부분)
熱띤 꽃 한 송이 속에 오솔길 스미고 있을 동안/내 숨에 사슬 끌리고 文書 없이 말뚝 박히고 너와 나 사이 이어진 國境이 정수리를 넘어가고 북어처럼 바짝 목마른/세월의 맥박들(「내가 듣는 내 숨소리」부분)
太平聖代를 잘못 운 갈매기 울음도 다 붉은 구름/이 공터에/아관파천한 풀아/자꾸 이곳으로 모여드는 풀아/풀아 파르르 치떠는 풀아/풀의 온몸이 저 붉은 구름 속을 부들부들 읽는다(「붉은 구름」부분)
계단만으로도 한동네가 되다니//무릎만 남은 삶의/계단 끝마다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위태롭게/뱃고등을 받아먹고 있다//저 아래는 어디일까 뱃고동이 올라오는 그곳은/어느 황혼이 섭정하는 저녁의 나라일까(「송학동 1」부분)
장석남의 시는 “안 보이는 나라”(「진흙별에서」)인 “내 幻의 발목뼈에 금”(「室內樂」)간 “心境”(「해변-서른 살의 불편함」) 과 “숨결들”(「숨의 사랑」)을 “푸른 풍금 소리들”(「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로 펼쳐놓은 언어들입니다. 그의 시들을 읽노라면 마치 “한쪽을 터놓은 커다란 圓舞가”(「초승달에 딸린 방 」) 내게로 건너오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빼어난 장석남 시인의 시구들을 읽으면서 그 표현력에 감탄하고, 한편으로 이렇게 쓸 수가 있을까라는 좌절감에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저는 장석남 시의 매혹에 깊이 중독되어버렸습니다. 그 후, 장석남의 시집은 물론이고 장석남 시를 언급한 잡지나 여러 평론집들을 닥치는 대로 구입해 읽으면서 그의 시 세계에 젖어드는 일은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장석남의 시는 2시집『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사,1995)을�지나, 3시집『젖은 눈』(솔,1998)과 4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2001)에 오면서 미당의 시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장석남 시인이 미당 선생의 시를 깊이 사숙한 탓이겠지요. 한편 일상의 삶에 대한 성찰과 죄의식이 중심이 된 5시집『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2005)에는 윤동주와 김수영의 빛이 어룽거리고 있습니다. 6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2010)와 7시집『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2012)에 이르면 장석남의 시 세계는 그 정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마른 빨래는 방안으로 던지고
덜 마른 빨래들을 처마 아래 건다
나뭇잎이 쩡쩡 소리내며 물든다
전기 검침원의 오토바이 소리 오솔길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나는 바지춤이 풀린 줄도 모르고 그를 배웅했다
담장 밖에 아무렇게나 몸 버린 구절초는 구절초
빈 몸의 옥수숫대 끝에서 새가 울어
건너 산이 건너온다
이해가 가지 않던 일들 몇 내놓기 좋다
덜 마른 빨래를 한번 더 손에 쥐어본다
-「처서」전문.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으로 하고 싶어
장마 큰물이 덮었다가 이내 지쳐서는 다시 내보여주는,
은근히 세운 무릎 상부같이 드러나는
검은 징검돌 같은 걸로 하고 싶어
지금은,
불어난 물길을 먹먹히 바라보듯
섭섭함의 시간이지만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으로 하고 싶어
꽃처럼 옮겨가는 목숨들의
발밑의 묵묵한 목숨
과도한 성냄이나 기쁨이 마셨더라도
이내 일고여덟 형제들 새까만 정수리처럼 솟아나와
모두들 건네주고 건네주는
징검돌의 은은한 부동(不動)
나의 유산은
-「나의 유산은」전문.
장석남의 6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와 7시집『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에서 가려 뽑은 시입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듯한데 인생의 깊은 의미를 말하고 있으며, 별 수사가 없는 듯한데 고도의 시적 수사가 사용된 작품들입니다. 몇 번 반복하여 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그저 좋다, 좋다는 말만 거듭 되뇌었습니다. 최근 장석남의 시편들을 읽노라면 물물(物物)이 자재(自在)하는 기(氣)에 언어의 손길을 얹어 무심결에 솟아나는 언어의 춤을 보는 듯합니다.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놀고 있는, 유(有)와 무(無)를 넘나드는 장석남 언어의 춤사위가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의 경지 가까이까지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등단 20년을 넘어선 이 시집들에 와서, 이제 솟을대문에 장석남이라는 문패가 빛나는 자기 시의 기와집 한 채를 온천히 세운 것 같습니다. 이처럼 높은 시의 집 한 채는 정녕 장석남 시인 혼자서의 힘만으로 세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장석남 시인이 시작 활동을 해오면서 사숙한 서정주, 백석, 박용래, 김수영, 김종삼, 황동규, 정현종 등과 같은 여러 선배 시인들의 크고 작은 영향이 그 집을 세우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장석남의 시(詩)라는 집, 그 집의 대들보 같은 역할을 한 선배 시인으로 저는 미당 서정주 선생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시적 대상 그 너머의 세계인 환(幻)을 불러내어 노래하는 시선이나 흔들림 없는 노숙한 어투, 물과 구름의 흐름 같은 가락에서 장석남 시인은 미당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당의 시를 장석남 시를 통해서 깊이 만난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에는 미당의 친일 행적과 독재정권을 찬양한 일 때문에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제가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미당의 시를 오랜 기간 꼼꼼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미당(未堂)이라는 이름의 호(號)마저도 참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장석남의 시를 거론하면서 시 한 채의 집 얘기를 했는데, 그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서정주 선생은 자신의 호를 미당(未堂)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시에 대한 자신의 집이 덜 지어졌다는 것, 아니면 끝없이 집을 지어가는 도정(道程)에 있다는 ‘미당(未堂)’이라는 이름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주지하다시피 미당은 27세 때 펴낸 1시집『花蛇集』(남만서고,1941)을 필두로 제15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詩』(시와시학사,1997)에 이르기까지 15권의 시집을, 1972년 일지사에서 펴낸『徐廷柱文學全集』을 포함하면 16권의 시집을 남겼습니다. 그 시집들은 권권 마다 우리 문학사의 한 채의 높은 집이요, 산봉우리였습니다.
저는 약 70여 년의 창작기간 동안 미당이 쓴 1,000여 편의 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 수작(秀作) 250편을 복사해서 묶어 다니며 읽다가, 다시 그 중에서 빼어난 작품 105편을 골라 제가 직접 워드를 하고 제본을 하여 저만의 책(『이종암이 가려 뽑은 미당 서정주 대표 시선』)으로 묶어서 지금도 수시로 읽고는 합니다. 몇 해 전, 지역 일간지에 소개한 여러 편의 미당의 시 가운데「密語」와「牽牛의 노래」,「대나무 통 속에다 넣어 둔 愛人의 넋에-그 통을 가진 어느 黃海가 出身의 사내가 말하기를 」라는 시를 같이 읽어보고 싶습니다.
密語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재ㅅ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눌ㅅ가에 머무른 꽃봉우리ㄹ 보아라
한없는 누예실의 올과 날로 짜 느린
체일을물은듯, 아늑한 하눌ㅅ가에
뺨 부비며 열려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눌ㅅ가에
인제 바로 숨 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花蛇集』(난만서고,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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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인부락의 족장 미당 서정주 시의 빼어남을 애써 달리 표현하여 무엇 하랴. 그냥 눈과 입으로 미당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그 가락과 서정을 내 몸에 담아두면 그만인 것을. 한국시단에서 시의 리듬감과 서사적 성격을 이 양반만큼 높은 자리에까지 밀고 간 시인이 또 있을까. 시「密語」는 서정주의 2시집『귀촉도』맨 첫머리에 나오는 시편이다. 꽃봉오리를 받아내는 삼월의 봄 하늘을 “한없는 누예실의 올과 날로 짜 느린/체일을물은듯, 아늑한 하눌ㅅ가”로 묘사하는 것 하며, 그 하늘가에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굳이 잠긴 재ㅅ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뺨 부비며 열려있는” “인제 바로 숨 쉬는” 것으로 그려내는, 또 이 모든 것을 우주의 비밀스런 언어, 즉 밀어(密語)라고 지칭하는 솜씨는 가히 일품(一品)이다. 그리고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에 일어나는 음악성은 또 어떠한가. 나도 꽃 피는 삼월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옛 동무들의 이름을 부른다. “태봉아, 팔수야 또 명자야 숙아”
牽牛의 노래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었다, 낮었다, 출렁이는 물ㅅ살과
물ㅅ살 몰아 갔다오는 바람만이 있어야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銀河ㅅ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織女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 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七月 七夕이 도라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織女여, 그대는 비단을 짜ㅎ세.
-『歸蜀道』(선문사,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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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틀 전, 그러니까 지난 8월 13일은 칠석(음력 7월 7일)날이었다.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烏鵲橋)를 놓아 사랑하는 연인 견우와 직녀를 일 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만나게 해준다는 바로 그날이다. 이 칠석(七夕)을 제재로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가 미당 서정주의「牽牛의 노래」이다. 이 시가 실려 있는 미당의 둘째 시집『귀촉도』(선문사,1948)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미당의 나이 33세에 발간되었다. 시인의 대리인물인 시적 화자인 견우가 직녀의 마음을 달래고 사랑을 건네는 이 도저한 낭만적 노래를 30대 초반의 미당이 불렀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1연의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라는 저 역설과 반어가 2연, 3연, 4연으로 이어지는 서정의 점층적 확산은 가히 놀라울만한 기교다. 그리고 5연과 6연에서 보는 시적 화자인 견우와 청자인 직녀가 처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대구의 표현 또한 절묘하다. 마지막 8연에서 화자인 ‘나는’과 대상인 ‘직녀여’라는 시어가 놓인 행간의 위치를 보라. 이러한 노래의 마지막 숨결을 놓는 시의 수사적 솜씨와 리듬감, 놀랍지 않은가. 견우성과 직녀성 사이에 흐르는 은하수를 커다란 물살로 변용하여 마치 그네를 타듯, 혹은 거대한 우주의 줄넘기를 돌리듯 하는 미당의 이 노래는 가히 탁발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나무 통 속에다 넣어 둔 愛人의 넋에
-그 통을 가진 어느 黃海가 出身의 사내가 말하기를
제 목숨처럼 사랑하던 女子가 그만 꿀컥 숨넘어가 죽으면, 그 숨결일랑 어디에다가 담아 가지고 다니는 게 그 중 좋으료? 깨끗한 남녘 시골의 밋밋한 대수풀의 큰 대나무의 그 대나무 통 속에다 담아 가지고 다니는 게 좋지 안 하료? 그 대나무 통을 가슴에다 꾸리고 헤매다니며 가끔 가끔은 수다스런 사람들이 안 보일 때에 그 대나무 통 속의 그 愛人의 숨결을 불러 내서 이얘기하고 이얘기하는 게 좋지 안 하료? 혹시라도 이런 비밀도 지켜줄 줄도 아는 金庾信 將軍 같은 사람이나 만나거들랑 그런 사람의 집에선 一宿泊도 하여 가며, 愛人아! 東海 바닷속에서 내가 건져 낸 듯이 東海 바닷가에서 만나 살던 愛人아! 西쪽으로 西쪽으로 내 故鄕으로 가면서 요로코롬 가는 것이 좋지 않으료?
-『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소설문학사,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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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가 잠자리에 들면서 뜬금없이 내 몸에서 푸른빛의 퉁소 소리가 난다고 했다. 이 무슨 소린가, 나는 화들짝 놀라 잠이 다 달아났다. 시를 쓰면서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는 서방을 나무람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미당의 「대나무 통 속에다 넣어 둔 愛人의 넋에 」라는 시를 떠올렸다. 서정주의 이 도저한 연시(戀詩)는 현실의 실제 상황이 아니라 ‘가정’의 어법으로 비롯된다. 그것이 “제 목숨처럼 사랑하던 女子가 그만 꿀컥 숨넘어가 죽으면, 그 숨결일랑 어디에다가 담아 가지고 다니는 게 그 중 좋으료? ”라는 질문이다. 시인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미당의 사랑論이다.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가 죽으면 곧장 다른 여자를 찾아나서는 게 아니라 그 여인의 숨결을 담아가지고 있겠다는 것이다. 어디에다? 대나무 통 속에다. “그 대나무 통을 가슴에다 꾸리고 헤매다니며 가끔 가끔은 수다스런 사람들이 안 보일 때에 그 대나무 통 속의 그 愛人의 숨결을 불러 내서 이얘기하고 이얘기하는 게 좋지 안 하료?”라는 이 시구는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사랑의 말씀인가. 미당의 이 아름다운 서정시에는 김유신 장군도, 서쪽 동쪽도 필요 없겠다. 이 구절 하나면 충분하겠다. 아직은 젊은 아내가 나중에 나보다 먼저 죽으면 나도 이런 순도 높은 서정시를 쓸 수가 있을까 몰라.
지금까지 미당의 시를 논했던 이 땅의 많은 평자들이 그의 초기 시와 중기 시에만 집중적으로 주목한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적 형상화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3시집『徐廷柱詩選』(정음사,1956)과 5시집『冬天』(민중서관,1968)에 수록된 여러 명편들이 미당 시의 꽃임에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 문화사를 시로 탐사해 이룩한 9시집『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소설문학사,1982)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미당의 나이 68세에 발간한 9시집『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에는『三國遺事』『大東韻玉』『高麗史節要』『練藜室記述』등의 역사서에서 그 소재를 취한 11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들은 지난 우리 선대 조상들의 얼과 정신문화의 이모저모를 시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 귀중한 자산(資産)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기 시와 중기 시만큼 시 쓰기의 공력을 쏟아 넣지를 않아 다소 소재적 측면에 머문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제게 힘과 능력이 닿는다면 불교 유식학의 세계적 거장 원측화상이나 융합 회통과 민중 불교의 원효, 민족 정신사의 최고봉 고운 최치원 선생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얼과 사상에 대해서 찬찬히 시로 노래하고 싶습니다.
3. 이종암의 언어적 춤사위
미당과 장석남 시인은 제 시 쓰기의 지남(指南)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황동규 선생의『꽃의 고요』(문학과지성사,2006)와 김사인 시인의『가만히 좋아하는』(창비,2006)이라는 시집도 제게 많은 시 공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선배 시인들은 제 시에 관해 아무런 말씀도 전해주지 않았지만, 그들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시작(詩作)의 희미한 길 하나를 이제는 발견한 듯합니다. 산문(散文)이 언어(言語)의 산보(散步)라면 시(詩)는 언어의 춤이다, 라는 어느 외국 시인의 말을 저는 늘 되새깁니다. 미당과 장석남의 웅숭깊고 유려한 언어의 춤사위를 통해서 격조 있고 독특한 저만의 언어의 춤사위를 펼치기 위해 늘 공부하고 깨어있을 것입니다. 끝내, 온전한 제 시의 집 한 채 세울 수 있도록 부지런히 땀흘릴 것입니다.
부족한 제 언어의 춤사위를 남 앞에 내보이는 게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지만, 여러분의 높은 가르침을 받는 일이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펼쳐놓습니다. 졸시「홍매도 부처 연두도 부처」는 제 3시집『몸꽃』(애지,2010)에 수록된 작품이고,「詩塚」과 「저마다, 꽃」은 한국작가회의 시분과에서 묶은 시선집『내가 뽑은 나의 시』 에 수록한 작품입니다. 먼저「홍매도 부처 연두도 부처」는 제가 쓴 시 가운데 제목이 가장 멋지게 붙여진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황사가 심하던 3월 중순의 어느 주말에 양산 통도사 한 암자를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혼자서 금강계단 바닥에 엎디어 울고 쓴 이야기입니다. 「詩塚」은 몇 해 전, 우연히『유심』誌에서 경북대 박현수 교수의 미당 시에 관한 평론을 읽다가 그의 새 평론집『황금책갈피』(예옥,2006)를 구입해 읽게 되었는데, ‘서문’에 ‘시총(詩塚)’에 관한 글을 만났습니다. 곧장 박현수 교수에게 전화로 물어 영천에 있는 장대한 영일 정씨 무덤을 직접 찾아가 '시총‘을 보고 그 느낀 바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저마다, 꽃」은 이른 봄 산야의 나무들에 각양각색으로 올라오는 연두를 보면서 ‘저마다 꽃이다’라는 화두를 제 몸에 심어두고는 시의 완결을 짓지 못하고 있다가 1년도 더 지나서 ‘다산연구소’에서 보내준 금강스님(해남 미황사 주지)의 글을 읽고는 단숨에 써 내려간 작품입니다. 그 글에서 본 단 한 개의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그 단어는 제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총림(叢林)’이라는 어휘였습니다.
홍매도 부처 연두도 부처
황사 심하던 어저께 통도사에 갔다
마음과 몸뚱어리
모래 먼지 뒤덮인 허공만 같아
대웅전 바닥에 한참 엎디어 울었다
속울음 실컷 울고 나니
내 허물 조금 보이는 것만 같다
금강계단 되돌아 나오는데
천지간 황사 밀어내며 막 눈뜨는
홍매 한 그루, 나를 꾸짖는다
암아, 암아, 세상 살면서
제대로 핀 니 몸꽃 하나 가져라
산문을 나오며 바라본 먼 산
잿빛 겨울을 지우며 올라오는
연두가 또 회초리를 든다
詩塚
말조심의 뜻으로 전해져오는 언총(言塚)을 어느 시인의 시에서 만나고는 캬- 무릎을 치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았건만, 얼마 전 한 평론집 서문에서 만난 시총(詩塚)은 왜 그리 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던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 백암 정의번의 무덤. 시총의 주인공 백암공은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적에 포위된 아버지와 나라를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어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훗날 시신도 찾을 수 없어 그 아비가 아들의 옷과 갓을 들고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하여 빈소를 마련하고, 생전에 뜻을 나누던 지우(知友)들의 애사(哀詞)를 모아 관에 담아 묻으니 세상 처음 시총이 나온 바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기룡산 기슭 십만 평의 영일 정씨 하천묘역. 장방형 묘역에 돌올하게 솟은 80여 기의 무덤들 거대한 책 속의 무슨 글자들만 같다. 시총을 찾아가 비문을 손으로 찬찬히 읽고는 엎드려 절하니 사람 묻은 곳보다 더 깊은 무덤이다. 무덤 속에 있을 여러 편의 시와 공을 추모하며 봉분을 둘러보는데, 홀연 나비 두 마리 무덤을 열고 푸르륵 날아오른다. 나비 허공으로 날아간 궤적에 일순간 펼쳐진 문장을 나는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고 태산보다 크나니, 육신이 없어져도 마음은 남아 時空을 초월하여 通한다.> 무덤 속 백암공과 지우들이 남긴 시들도 나비처럼 날아올라 하늘의 별로 빛나는가. 어둠이 깔리니 열사흘 달빛 아래 하늘의 별과 땅 위 시총의 상응이 무한정 좋다. 시공을 건너는 저 시들은 비바람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겠다. 무덤 속 하얀 언어들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꾸 내게로 건너온다.
*나는 정진규 시인의 시집『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2009)에서 언총(言塚)을, 그리고 박현수 교수의 평론집『황금책갈피』(예옥,2006)에서 시총(詩塚)을 만나 이 시를 쓸 수 있었다.
저마다, 꽃
사월 산길을 걷다가, 문득
한 소식 엉겁결에 받아 적는다
-저마다, 꽃!
연두에서 막 초록으로 건너가는
푸름의 빛깔 빛깔들
제 각각인 것 모여, 사월의 봄 숲
총림(叢林)이다
굴참나무너도밤나무개옻나무고로쇠나무단풍나무소나무오동나무산철쭉진달래산목련아까시나무때죽나무오리나무층층나무산벚나무싸리나무조팝나무서어나무물푸레나무……,
꽃을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몸의 구부러짐과 곧음
색깔의 유무와 강약에도 관계없이
온전히
함께 숲을 이루는 저 각양각색의
나무, 나무들
사람들 모여 사는 세상 또한, 그렇다
저마다 꽃이다
사람이 꽃이다
미당 선생의 어느 산문에선가 읽은 “시에는 곡절(曲折)이 들어 있어야한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수필이나 소설 같은 산문(散文)이 아닌 운문(韻文)인 시에는 자기 삶의 간절한 곡절이 들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슬픔이나 불에 덴 듯한 사랑에 빠져들 때 시인의 노래는 마구 쏟아집니다. 그러나 ‘곡절(曲折)’이라고 한 미당 선생의 말씀은 꼭 이러한 굴곡 있는 삶의 체험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람에 쌀랑대는 나뭇잎 하나를 보면서도 내면에 일어나는 무늬의 결을 곡절하게 그려내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접하면서 그것을 섬세한 무늬의 결로 읽어내고 또 그걸 가장 적확한 언어로 그려내는 솜씨야말로 시 쓰기의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각자 이 질문의 답을 이미 저마다 다 갖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이종암
1965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포항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이 살다 간 자리> <저, 쉼표들> <몸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