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등 돌림과 백허그 당함의 차이>의 줄거리:
아기를 짊어지는 방법도 진화를 거듭하여 세 가지 방식이나 생겼습니다. 전통적으로 아기를 포대기로 싸서 등에 업습니다. 그 다음에는 앞으로 매는 포대기로 아기를 안습니다. 끝으로는 아기를 앞으로 매되 앞을 보게 하여 백허그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백허그의 자세가 등 돌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밀착 여부입니다. 한자로 배반이라는 등 돌림에는 밀착 상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등돌려 놓고는 백허그 당하는 줄로 착각하는 오해가 안타깝습니다.
등 돌림과 백허그 당함의 차이
(역대상 11:1~9)
1.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다윗을 보고 이르되 우리는 왕의 가까운 혈족이니이다
2. 전에 곧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입하게 한 자가 왕이시었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있는 왕에게로 나아가니 헤브론에서 다윗이 그들과 여호와 앞에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4. 다윗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땅의 주민들이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5. 여부스 원주민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다윗이 시온 산 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6. 다윗이 이르되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우두머리와 지휘관으로 삼으리라 하였더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갔으므로 우두머리가 되었고
7. 다윗이 그 산성에 살았으므로 무리가 다윗 성이라 불렀으며
8.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두루 성을 쌓았고 그 성의 나머지는 요압이 중수하였더라
9.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등 돌림과 백허그 당함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등 돌림과 백허그 당함의 차이’
아기를 짊어지는 방법은 진화를 거듭해서 세 가지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포대기를 사용해서 등에 업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앞으로 끌어안는 방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앞으로 매되 아기가 앞을 보게 하여 뒤로 안는 자세입니다. 세 가지 방식의 공통점은 업든지 가슴에 끌어안든지 백허그를 하든지 밀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등을 돌린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을 잘 생각해보면 백허그의 자세가 등을 돌린 자세입니다. 그러나 백허그가 등 돌림과 뜻이 다른 이유는 밀착이 되기 때문입니다.
등 돌림을 한자로 말하면 배반(背叛)이라고 하는데 등 배(背)자에 배반할 반(叛)자를 씁니다.
신앙에 있어서의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렇게 구하고 물을 때에 이상하게도 우리가 등을 돌린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올바른 신앙 상태에서 하나님께 묻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백허그 당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등을 돌리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엄마가 아기를 업는 방식이 세 가지인 것처럼 선민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방식도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 등에 업히기, 하나님과 마주보고 안기기, 하나님께 백허그 당하기인데 이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선민은 신앙의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하나님과 24시간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의 방식이 엄마가 아이를 업는 세 가지 방식처럼 나타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 마주보고 끌어안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전면적으로 밀착되어 끌어안아질 때에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이 주어지게 되는데 한 마디로 에덴동산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건강 승진 돈으로 생길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밀착으로 인해 생기는 기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밀착이 이루어지고 나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등에 업으시는 형태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등에 업으시고 내 삶을 대신 살아가실 때에는 내 행위와 상관없이 삶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집에 있고 남편은 바깥에서 일을 할 때 아내가 하나님의 등에 업힌 밀착 상태가 되면 아내로 인해서 남편을 인도하시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백허그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안겨 있되 내가 삶의 현장을 바라보는 상황으로서, 하나님께 질문을 드리고 응답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내가 앞을 바라보며 눈에 들어오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은 다른 두 가지의 안기는 방식처럼 밀착은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내가 보는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실 때에 백허그의 상태가 됩니다.
다시 말해 먼저 하나님의 가슴과 나의 등이 닿는 전면적인 밀착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로 인해 내 마음의 궁극적인 기쁨이 생겨나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업으시고 내 주변의 환경들을 전면적으로 주관해 나가십니다. 백허그의 자세가 되면서 내가 보고 만지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의 죽음에 이어서 다윗 왕조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조 이야기를 하면서도 주목하는 부분은 왕조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들이 아닙니다.
앞서 심판을 받아 참담하게 죽은 사울에 대해 이야기가 되었고 본장 9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라는 말로 사울과 다윗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의 죽음과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을 대조시킴으로서 먼저 사울 왕과 대조되는 다윗 왕의 신앙의 이야기를 특이한 형태로 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왕조의 역사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이야기를 대조시킴으로서 다윗이 가졌던 신앙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관점이나 에스라의 고유한 관점을 통해서 쓰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관점에서 역사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애초에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신앙을 알기 위해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 중에서 자기 눈에 탐스러워 보이는 것들을 사유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시기로 합니다.
그리고 사울이 신접한 여자에게 물은 사건에서 에스라는 사울이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살펴보면 먼저 여호와께 물었으되 대답을 얻지 못한 이유가 이미 사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울이 하나님과 밀착함에 있어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전리품을 훔치는 모습으로 사무엘상 15장에서 기록하고 있고, 또한 28장에서 신접한 여인을 찾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13장을 보면 사울이 블레셋과 대치하던 중에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전쟁을 해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기를 칠일 간 기다릴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군대가 불안해하고 동요하면서 이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보고 다급해진 사울은 스스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는데 여기에서 이미 사울의 범죄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번제’는 할례의 언약을 준수하고자 하는 자가 하나님을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의미로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블레셋과 대치하며 마음을 빼앗긴 상태에서 승리하기 위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제사를 드린 것도 죄이지만, 더 큰 죄악의 문제는 제사의 성격을 오해하고 있었던 사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처럼 내가 끌어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을 달래고 신에게 뇌물을 드림으로써 신을 동원하려는 방식으로서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의 번제는 세상에서 당면한 문제를 끌어안게 된 마음을 문제시 삼습니다. 자녀 문제가 생겼을 때에 마음은 자녀 문제를 끌어안게 됩니다. 이럴 때 내가 문제시 삼아야 되는 것은 내 앞에 계신 하나님보다도 자녀를 끌어안은 마음 상태입니다. 이것을 문제시 할 수 없다면 선민 됨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문제시 될 때에 필요한 것이 번제입니다. 하나님보다도 이 세상의 다른 상황을 먼저 끌어들인 마음을 죽이는 것이 번제이고, 그렇게 죽고 나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끌어안는 화목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끌어안고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로 있었다면 신접한 여인의 사건에 앞서 여호와께 물을 때에도 응답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과의 백허그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고 아예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블레셋을 마음에 끌어들였던 이유는 졌을 때 잃게 될 세상 것들을 아까워했기 때문입니다. 왕위 가족 재산 나라를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고 마음에 끌어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앞에 계신데도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에스라는 앞서 이러한 사울의 이야기를 다윗과 대조함으로서 다윗은 하나님의 백허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서의 중심 주제는 다윗 왕조와 통치입니다. 그 왕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온 이스라엘이 다윗이 머물던 헤브론으로 찾아와 그를 왕으로 세우는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사무엘이 와서 이새의 막내아들이었던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사울의 사위가 되어서 블레셋과의 전쟁뿐 아니라 이방민족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발단이 되어 사울에게 쫓기는 십년간의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울이 죽은 뒤에야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서 통치를 시작합니다. 한편 칠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스보셋이 암살을 당하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의 목동 시절에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건부터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칠년 통치까지의 모든 사건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 첫 번째 한 일로 예루살렘 정복을 언급하고 이후의 일들을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라는 말로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주목한 다윗의 일대기는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전체 왕이 되는 장면이 나오고 첫 번째 한 일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일입니다. 앞서 일어났던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들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골리앗을 죽이고, 10년 동안 도피생활을 했고, 요나단과의 우정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생략된 이야기들을 다 이야기했다면 예루살렘 정복도 역사적으로 나열 된 사건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예루살렘 정복만을 이야기함으로서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신앙의 대조적인 면을 드러내는데, 예루살렘의 내용인 성전을 통해서 볼 때에만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의 차이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 되는 이유는 성전 때문입니다.
다윗의 통치는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이지만 이미 그 생애가 성전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여호와 신앙으로 일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 실패했던 제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부터 시작된 신앙이었습니다.
성전이 없던 시대에도 성막은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엘리 대제사장 때에 법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면 이길 것이라는 주술적인 생각을 가지고 법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긴 일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법궤를 다곤 신전에 안치하였으나 여러 변고가 일어나자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어 기랏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머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모세 시절부터 이어져 온 성막의 규례에 대해 모르는 자가 없었으나 그 진정한 존재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만은 그 성막의 존재 의미를 생활화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여호와 신앙이 다윗의 생략된 모든 과거가 관통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전의 존재 의미를 통해서 가질 수 있는 여호와 신앙은 사울이 실패했던 신앙인데 바로 여호와를 전면적으로 포옹하는 것이고 할례 언약의 준수입니다. 성전의 번제단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할례 언약의 의미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성막이 있던 시절부터 다윗에게는 그러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세워지게 되는데, 이는 곧 모든 선민들에게 다윗과 같은 신앙을 갖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통치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성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 왕조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만드심으로서 그 신앙을 보편적으로 확산시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에스라는 사울과의 대조를 통하여 그것을 부각시킵니다.
우리는 성전의 의미가 완성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서 먼저 하나님을 끌어안게 됩니다.
여러분이 결혼 전 연예하실 때에 지금 아내와 남편으로 살고 있는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떠올려 보세요. 하늘에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해서 포옹할 때에 그 감격이 생각나십니까? 그러한 감격으로 하나님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이렇게 끌어안고 밀착이 일어나면 이제 하나님께는 그 밀착된 상태로 우리를 등에 업으십니다.
그럴 때에 내 삶의 주변은 내가 계획하고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고려하셔서 섭리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내가 눈으로 보는 삶의 환경에 대해서는 백허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밀착한 단계에서 백허그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슴이 내 등에 닿을 때 여전히 기쁨과 만족이 있는 상태에서 내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는데 다윗이 이 상태로 살았습니다.
사울이 묻지 않아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묻지 않은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등 돌린 상태에서 하나님보다 먼저 끌어안는 게 있었고 그것들이 없어질까 두려운 상태에서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에 대답해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오늘 에스라가 우리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통하여 모든 선민에게 보편적으로 전달하고 싶어 하는 다윗의 신앙을 오늘의 신앙으로 되살려서 하나님께 끌어안기기, 하나님의 등에 업히기, 하나님께 백허그 당하기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등 돌리는 대신에 백허그 당하여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