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8회》
9. 여수 14연대 반란사건과 숙군작업
(1)여수14연대 반란 사건 요약
여수 14연대는 연대가 창설될 때부터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4연대가 창설 된 것은 48년 5월 4일인데 모체 부대인 광주 4연대에서 말썽많은 골치덩어리들만 선발하여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말썽꾸러기들의 집합체였다.
14연대가 창설 되기 전해인 47년도에는 광주 4연대 장병들이 광양경찰서를 두들겨 부순 사건이 있었고 이 일로 조암 소령이 보직해임되었으며, 이한림 소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했는데 부임한지 한달 쯤 된 시점인 6월 1일 일요일 외출 나갔다가 영암 신북지서 순경들어게 얻어맞은 사병의 복수를 한다며 4연대 1대대 초급장교와 부사관들이 총기를 휴대하고 출동하여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싸움의 원인은 경찰이 국방경비대는 경찰예비대라고 무시한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광양경찰서를 두들겨 부순 배후에는 14연대 반란의 주모자 중 하나인 홍순석 중위가 있었고 영암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군인들 중에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 같은 자들이 끼여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썽꾸러기들이 모두 이듬해(48년) 5월 4일 14연대 창설 요원으로 차출되어 여수로 내려갔던 것이다.
창설 연대장으로는 이영순 소령이 임명되었다.
이영순 소령은 창설요원 50명을 받아 여수 신월리 구 일본군 해군기지에서 창설작업을 하였는데, 신원조회를 하지않고 숫자 채우기에 급급하여 마구잽이로 여수 ㆍ광양ㆍ순천ㆍ구례ㆍ보성ㆍ고흥 등 현지에 거주하는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장정들 중에는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고 경찰과 다툼으로 사이가 안좋은 불평불만자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연대장 보직도 문제였다.
초대 연대장 이영순 소령은 1개월 반만에 해임되고 2대 연대장인 김익렬 소령은 1개월도 못채웠는데, 남로당의 지령을 받는 오동기 소령이 7월 15일부로 3대 연대장에 보직되었다.
이 오동기 소령이 10월 6일까지 연대장을 하는 동안에 이미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이가 연대에 들락거리면서 반란계획을 모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0월 7일, 즉 반란이 일어나기 12일 전에 박승훈 중령으로 연대장이 바뀌었다.
박승훈 연대장은 업무파악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당해버린 것이다.
여하간 연대가 창설 될 때 반란 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중위는 1대대 중대장이 되었고 홍순석 중위는 순천 철도중대 중대장, 지창수 상사는 연대 인사계(주임상사)로 보직을 받았다.
14연대는 밤이면 연대 인사계 지창수가 주동이 되어 병사들에게 좌익 사상을 주입시키면서 적기가를 부르고 내무반에는 인공기를 붙이고 경찰은 우리의 원수라고 강조하였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은 48년 10월 19일 저녁 8시에 사전에 짜 놓은 각본에 따라 세포조직들이 치는 타종소리와 함께 전 연대병력이 완전군장을 메고 연병장에 집합하였다.
이 때 연대 인사계 지창수가 사열대에 올라서서 "나는 연대 인사계 지상사다. 긴급정보에 의하면 여수경찰이 전 일본해군을 동원하여 우리를 포위하여 사살하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러 갈 수가 없다. 악질반동 경찰들을 먼저 손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과업을 돕기 위하여 북조선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진하고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 모두 나를 따르라!"라고 일장 연설을 하니, 사방에서 "옳소!"라고 화답했다.
이때 간부식당에서 제주도로 떠나는 동료들을 위로하는 간담회를 하고 있던 장교들이 무슨일인가? 하고 우르르 몰려나왔는데 미리 지창수의 지령을 받은 세포조직들이 총기를 발사하여 사살하였다.
그때 장교 24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부사관 26명도 즉사하였다.
지창수 일당은 미리 탄약고의 문을 열고 세포조직들에게 실탄을 분배하여 여차하면 쏘도록 각본을 짜 놓고 있었다.
이 때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여수 항에 나가 배에 싣고 갈 물자를 싣는 것을 확인하고 있어 영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창수 일당은 전 병사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여수시내로 몰려나가 삽시간에 여수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경찰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미쳐 손쓸 시간도 없이 경찰서를 반란군에게 빼앗기고 대부분 사살되었다.
자정이 된 시간에 여수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여수 중앙광장에서 인민대회가 열렸는데 인민워원장 이용기, 보안서장 유목윤, 인민해방군 사령관 지창수, 여성동맹 위원장, 청년동맹 위원장이 차례로 반란을 선동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 인민대회장에는 600여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일반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벌집을 쑤셔놓은듯 요란했다.
반란군은 첫날밤 내내 여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이튿날 아침 8시에 여수-순천간을 운행하는 통근열차를 타고 순천으로 몰려가 경찰서부터 때려부수고 야인과 경찰ㆍ공무원 등 보이는대로 사살하고 방화를 일삼았다.
그 때 순천역 철도중대장으로 있던 홍순석 중위가 반란군을 지휘하였다.
이 여파로 반란군에게 학살 당한 민간인은 1,200명, 부상자 1,150명, 행방불명 3,500명, 이재민 9,800명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5천년 한반도 역사에서 죄 없는 민간인을 고의로 살상한 끔찍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