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후기를 쓰면서 내가 언제 몽당연필에 가입했는지 찾아보았다. 2013년이었다. 그러니까 몽당연필을 2013년에 가입해놓고 2019년에 처음으로 소풍에 참여했다. 이런저런 사정을 핑계로 그간 놓쳤던 소풍들이 모두 아까웠다. 정식으로 우리학교를 첫 방문하는 나였지만, 얼떨결에(?) 조장이 되어 있었다. 조원들 모두 우리학교 방문이 처음이어서 나는 행여 실수를 할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다.
나는 소풍이 시작된 15일보다 하루 전날인 목요일 오후에 먼저 출발해 나고야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준비한 선물은 좋아할까 걱정도 하면서 예약한 캡슐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공항 집결 시간에 늦을까 긴장을 했는지 한 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깨야만 했다.
소풍 당일,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전철을 타고 공항에 갔다. 나 말고도 먼저 출발한 두 분이 계셔서 함께 방문단이 입국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방문단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실행위 분들이 귀여운 손팻말을 들고 계셨다. 공항에서 단체 후드티를 입고 드디어 나고야조선초급학교로 출발했다.
나고야조선초급학교는 나고야역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학교가 너무 작아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학교인지 모를 것 같았다. 입구에 있는 머릿돌에 시선이 갔다. 건립된 연도가 내가 태어난 해와 같았다.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끼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아이들로 북적이는 교실을 보며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특히 유치반 아이들은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러면서도 최근 유아보육 무상화 대상에서 우리학교 유치반 아이들이 제외된 사실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팠다.
5학년 학급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어머니들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주신 카레라이스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싸 온 도시락을 열고 먹기 시작했다. 나도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느라 힘들겠지만 분명 아이들은 즐거울 것이다. ^^; 나고야조선초급학교는 학생 수가 비교적 많은 편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은 왁자지껄 이야기를 서로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자녀를 키워 본 경험이 있으신 조원 한상욱 님과 장정화 님 두 분은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법을 아시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두 분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어색어색한 점심식사를 마쳤다.
첫날 저녁에는 소풍 콘서트가 열렸다. 많은 동포들이 공연장을 찾아주셨다. 한국에서 온 공연단의 공연도 물론 인상적이었지만, 우리학교 아이들의 풍물 공연과 무용, 그리고 합창은 정말 압권이었다. 우리학교를 다룬 영화들에서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지만, 역시 실제로 아이들의 움직임과 소리를 듣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오로지 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우리학교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음날 방문한 도슌조선초급학교는 나고야조선초급학교에 비해 학교는 넓고 학생 수는 적었다. 시골 분교 같은 느낌이었다. 1학년부터 차례대로 교실을 돌면서 수업을 참관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우리말 수업이었다. 아이들이 진지한 태도로 또박또박 책을 읽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날도 5학년 학급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세 여자 아이가 책상을 일렬로 붙이고 옹기종기 모여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다른 학년에 비해 5학년이 학생이 가장 적은 것 같았다. 여자 아이끼리여서 심심하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봤는데 아주 쿨~하게 남동무는 없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말해서 웃음이 났다. 선생님은 내 또래처럼 보였는데 (나이는 여쭤보지 않았지만) 교원 생활을 한 지 벌써 7년 차라고 말했다. 우리학교에서 교원을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는데 새삼 존경스러웠다.
짧은 환영식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구슬픈 노래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우리가 율동과 합창을 선보이자 이번에는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에 또 울컥.... 2박 3일간 눈물샘이 평소보다 아주 분주했던 것 같다.
아이들과 단체 사진을 찍고 배웅을 받은 뒤 버스는 다시 나고야 시내로 달려 사찰 닛타이지에 도착했다. 그곳에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위령비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정확한 숫자나 규모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당시에 희생된 조선인을 기린다는 이유로 벌써부터 우익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담한 일본의 현실을 듣는 것 같았다.
방문단이 다함께 위령비에 참배를 한 뒤 동포들의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나는 금강산에 방문한 적이 없지만, 아마도 금강산 사업이 한창일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초반의 다소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동포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숨겨왔던 흥이 폭발하듯이(?) 덩실덩실 춤판이 벌어졌다. 점점 테이블에 앉은 사람보다 일어나 춤을 추는 사람이 더 많아지더니 마지막에는 다함께 기차놀이를 했다.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마음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마지막 날. 아이치조선초중급학교를 방문했다. 여느 우리학교처럼 낡고 오래된 학교였지만, 인상적인 것이 학교의 큰 규모였다. 옛날에는 학생들로 더 북적였을 모습을 상상하며 아쉬움이 남았다.
방문단이 도착하니 체육관에서 예술 공연 한창이었다. 이날도 느낀 것은 우리학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무대에 서는 경험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점이었다. 연극을 하든, 무용을 하든, 풍물을 치든 학교 안에서도 아이들이 자기의 끼를 펼칠 기회가 많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계속해서 묻고 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등학교는 그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를 하는 곳에 불과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됐다. 물론 이날 잠깐 본 것으로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학교 아이들의 눈빛이 그토록 당당하고 초롱초롱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반부터 고급부까지 우리학교 아이들이 어떻게 배우고 성장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지켜볼 수 있었던 2박 3일이었다. 지금도 아이들의 눈망울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우리에게 연신 너무나 힘이 된다고 고마움을 표현한 어머니들의 모습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한국에서 우리학교를 응원하는 것과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리고
'소풍'행사가 조선학교 아이들과 동포들을 응원하기 위함도 있지만 역시 '통일 사업'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꼭 참가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소풍 기간 내내 수고하신 사무국과 스태프들께 감사드린다.
첫댓글 소영씨 감동 감동 또 감동이죠 !! ㅎ 아주 강력한 약을 받았지요 ? ^ ^ 송년회때 자세히 들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