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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형덕
김원웅 단재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님의 개회사
학술 토론회의 패널/ 왼쪽부터 양승동 PD연합회 회장/ 리복재 전국인터넷언론사협 공동회장/ 최상재 언론 노조위원장/ 김관태 사회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 정동익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회장
단재 丹齎 신채호 선생
탄신128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오는 12월 8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탄신 128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학술심포지엄이 3일(수)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원웅 전 국회통일외교통상의원장) 주최와 국가보훈처, 광복회, 경향신문사 후원으로 열렸다.
김원웅 회장은 “단재 선생은 우리민족이 낳은 위대한 선각자중의 한 분으로 사학자·언론인·교육자”라고 소개하고 “최근 사회일각에서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등 일제침략의 만행을 정당화하려는 해괴한 궤변과 민족혼을 멸시하고 외세의존을 부추기는 한심한 작태들이 공공연히 횡행하고 있다”며 일부 학자와 교수, 단체들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다.
행사는 1부와 2부로 진행되었으며 1부에서는 내빈소개(김원웅 기념사업회장, 보훈처 차장, 광복회 회장 등), 개회선언, 국민의례(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애국선열에 대한 추모 묵념),단재선생 약력보고, 단재논설 낭독과 김원웅기념사업회장(전.국회의원)의 개회사로 이어졌다.
2부는 김관태 단재기념사업회수석부회장의 사회로 제1주제인 ‘단재 신채호의 언론사상과 언론투쟁’에 대하여 김삼웅 전.독립기념관장이 발표하고, 토론자로는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와 정동익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이 토론하였고,
제2주제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언론활동과 언론관’에 대해서는 최상재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의 발표와 토론자로는 양승동 pd연합회 회장과 리복재 전국인터넷언론협회 공동회장(본지 대표)이 토론하였다.
위대한 역사가이자 지사적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기념사업회가 그 얼을 이어가고 있는 학술심포지엄이었다. 또한,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언론계에서 단재의 정신을 이어 가려는 노력을 보여주었고 언론인으로서 단재 선생의 언론관에서 현재의 언론인과 언론사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방안과 , 미래에 대한 지향점을 토론해 나갔다.
보훈처가 지난 1일 밝힌 바와 같이 국가유공자예우법률개정안이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국적을 회복하지 못한 단재선생을 포함한 독립운동가 300여명이 국적을 내년에 되찾을 예정이라고 발표에 대해서도 공지되었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의 탄신 128주년인 오는 12월 8일부터 단재문화예술제전이 충북 청주에서 열릴 예정이다.(기사 하단 일정 소개)
뜻있는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연락: [02] 765-0151)
⊙ 단재 신채호선생 연보(年譜) ⊙
1880년 / 12월 8일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에서 출생
1887년 / 아버지 별세, 본향인 충북 청원군 귀래리로 이사, 할아버지 사숙에서 형 재호와 한학을 공부
1898년 / 성균관 입교(3년), 11월경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투옥
1901년 / 가덕 인차리에서 신규식, 신백우와 '문동학원'설립/ 애국계몽운동
1903년 / 일본이 황무지개간권을 빼앗자, 성균관생들과 항일성토문을 작성/친일매국대신 규탄
1905년 / 성균관 박사됨,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 논설위원에 위촉됨
1906년 /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됨
1907년 /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 참가
1908년 / 순한글잡지 '가뎡잡지'를 편집 발간, 사론 ‘독사신론’발표
1910년 / 안창호등과 중국으로 망명
1911년 /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
1914년 / 옛 고구려땅 답사 이후 대고구려주의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됨
1915년 / 북경에 체류하여 '조선상고사'집필
1916년 / 소설 '꿈하늘'집필
1919년 /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충부)에 피선됨, '신대한'을 창간하고 주필활동
1920년 / 박자혜 여사와 북경에서 결혼
1922년 /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기초
1924년 / 폭력독립운동단체인 '다물단'의 선언문을 기초
1925년 /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함
1927년 /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1928년 /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발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됨
1930년 / 대련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음, 여순감옥으로 이송됨
1936년 /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함
‘단재 신채호 선생의 언론활동과 언론관’
/李福宰
1. 단재 선생의 언론관을 통해 앞으로의 언론계가 해야 할 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은 독립운동·사학·언론을 통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표방하며 조국 독립과 민족정기를 구현하고자 실천한 인물이다. 더러 언론인이면서 ‘혁명’ 전선에 뛰어든 인물이 있지만, 선생처럼 언론인으로서 문학과 사학을 겸비하고 침략자에 대해 치열하게 싸운 인물은 드물다. 선생의 파사현정破邪顯正?정론직필正論直筆과 민족언론관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표師表이다.
“…… 오호라. 망망한 지구상에 강국이라 일컫는 나라가 한 가지 고통이 없고서 능히 일어난 자가 혹 있는가. 그러므로 가로되 '굶주린 자가 복되다'하며, '핍박받는 자가 복되다'함은 모든 사람의 희망이 액운과 역경 속에서 비로소 태어남을 말함이니, 우리 대한의 역사를 말하건대 이왕에 고통이 일찍 오지 않았던가.
……오호라.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희망이 없었으므로 남겨진 결과요, 미래의 행복은 현재의 희망이 있으므로 싹틀 씨앗이니 근면할 지어다. 우리 한인아. 과거 무희망은 과거 인물이 만든 겁몽이며, 미래의 희망은 미래 인물이 쌓을 토대이니 근면할 지어다. 우리 한인아.”
이 글은 단재丹齋 선생이 1906년 <대한협회월보>에 발표한 애국계몽운동 취지문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운을 안타깝게 여기는 한편, 쇠미해진 국운을 떨쳐 일으키고자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기상과 정신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지구상 고통 없이 강국이 될 수 없고, 조국의 현실이 이와 같이 고통을 겪고 있으니 희망을 가지고 역경을 이겨내 강국이 되자고 계몽하고 있다. 당시 <동학혁명>이 끝나고 국새를 위조해 강제로 맺은<을사늑약>으로 통탄과 울분을 자아내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 독립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언론인으로써 사명을 다하고 있는 글이다.
먼저, 단재丹齋 선생은 강력한 비판정신을 지닌 언론인이었다. 독립협회,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각기 신문사에서 언론인으로써 지식인과 언론계(언론사와 언론인)가 시대조류에 따라 처신하는 행위를 통렬이 비판하고, 그들의 역사인식의 부재로 친일주구들의 역사적 관점을 비판 없이 받아 들였다는 점과 국민계몽운동에서의 일제에 부화뇌동하도록 나팔수 역할을 하며 일제의 하수인이 된 자들과 나아가 임시 정부의 활동을 낱낱이 비판을 했던 언론인은 선생이 유일하다.
당시 대다수 언론인들은 변절하거나 우리 역사를 훼손하고 민족을 배신한 자들에 대해 단재 선생의 주관과 신념 그리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은 ‘언론활동과 언론관’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그는 조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했던 일제와 민족반역행위자들에 대해서는 절대 절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세수할 때 허리도 굽히지 않았던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친일반민족행위자서의 변절과 ‘是日也放聲大哭(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늘에 목놓아 크게 운다.)’으로 민족의 아픔과 통곡을 붓을 잡아 민족적 통탄과 울분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언론인 장지연도 말년엔 조선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잡글을 올려 그들로부터 생활비를 받았지만, 단재 선생은 생업(친일반민족행위를 위한)을 위한 직업적 언론관과 언론인으로써 변신과 훼절을 한 그들에 비해 한 번도 생업적으로 지향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친일주구언론인이 되고자 했던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 등의 변신과 훼절 그리고 민족적 수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언론인들이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함에도, 이들의 반민족적행위에 대해 자각과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하지 못한 결과는 결국 광복 후 독재와 쿠데타 정권에 아부하며 부 富에 눈이 어두워 양지陽地를 지향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에 의해 외세外勢의 힘을 빌려 과거의 행위를 덮고자 민족적 개념과 역사적 관점을 터부시하고 오로지 경제적 가치관을 중시하다 보니 비이성적, 주관적 언론인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1905년<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 주필로 언론활동을 시작한 이래 단재丹齋 선생의 서릿발 같은 비판과 통찰력은 감옥에서 옥사獄死할 때까지 예리하고 강렬한 필치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고, 일제와 친일주구들에 의해 민족자존에 대해 비하할 목적으로 역사왜곡을 시작한 것을 두고, 단재 선생은 사학자로서 실증을 바탕으로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연구해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 주는 언론인이었고, 침략당해 식민지화 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비타협의 항일무장투쟁론을 제시하고 실천한 독립 운동가였다. 독립운동을 위한 언론활동 과정에서 보여준 언론인으로서의 기개와 자세는 국내외에 큰 감동을 주었고 오늘날과 이후에도 우리 언론인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비록 외세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 심각하게 위협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재丹齋 선생의 언론관을 통해볼 때, 앞으로 언론계(언론사.언론인)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2. 민족사학과 <한단고기> 같은 역사서를 국민들에게 어떻게 계몽하고 언론인들이 지향해야 할 민족자존과 역사의식에 대해
단재丹齋 선생은 투철한 민족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일제와 친일주구들에 의해 식민지화된 일제로부터 조국의 해방을 위해 민족적 사상과 이념을 정립하며 온 몸으로 투쟁한 장본이다. 선생의 일생은 부조리한 시대에서의 역사정신의 인식, 불합리한 시대에서의 민족정신의 발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서의 단군국조의 건국이념과 민족정기에 대해 실증을 바탕으로 이를 실천하는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민족의 과거와 역사를 바로 알아야 조국독립을 할 수 있고 민족의 기상과 민족정신 그리고 민족정기를 굳건히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제와 친일주구들에 의해 저질러진 <식민사관>의 역사왜곡을 부정하고 실증을 바탕으로 한 역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특히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여 단군과 부여를 정통으로 하는 역사 발전의 단계를 설정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재丹齋 선생은 우리의 역사가 본래 한반도뿐만 아니라 광활한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거대한 배달민족이었음을 우리 민족의 가슴에 아로새겨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일본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우리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획기적인 민족사를 정립하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단재丹齋 선생의 이러한 정신은1908년 8월 27일부터 자신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연재한 국한문체 논설인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총 50회까지 발표되었으며, 12월 13일자 연재 끝에는 '미완'이라고 되어있다. 이 글에서 선생은 우리 민족이 단군의 후예이며, 중심종족은 부여족임을 천명하고, 기자를 정통에서 몰아내었습니다. 단군시대로부터 삼부여(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부여족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성쇠를 살피고 있으며, 특히 고구려의 멸망을 부여족 쇠퇴의 결정적 원인으로 파악하고 이를 규명하였고, 발해의 역사가 민족사에서 빠진 것과 그 원인을 서술하였다.
이 논설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로 평가 받고 있으며, 당시 일제와 친일주구들에 의해 저질러진 단군부정론(檀君否定論)과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불식하고, 한국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일깨울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이 글에서 주목할 점은 기자(箕子)?위만(衛滿)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역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에서 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하였다는 점인데, 즉 한국 민족은 부여족?선비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토족 등 여섯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밝혀내고,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다섯 종족을 정복하고 흡수함으로써 동국(東國)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고 판단한 그의 혜안과 실증적 바탕으로 저술했다는 평이다.
이로써 <한민족이 단군의 후예>이며, ‘부여족’이 중심 종족임을 밝히고, 기자를 정통에서 몰아내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또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부여족’ 쇠퇴의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을 민족적 시각에서 비판하였다.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처음으로 왕조 중심에서 벗어나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진보적인 글로 평가 받고 있다.”(야후, 지식인 참고)
단재丹齋 선생의 역사 연구는 일제와 친일주구들에 의해 민족적 비하와 자괴감이 들도록 유발하고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간계와 술책을 일거에 여지없이 무너트리고,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과 정신을 전개하여 민족자존民族自存의 힘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새로운 역사의 이정표를 밝혀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민족자존과 역사의식에 투철했던 단재丹齋 선생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언론사와 언론인들도 현재 정식 교과서인 <국사학>과 차이가 많이 나는 ‘민족사학’ 그리고 <한단고기>같은 역사서를 국민들에게 어떻게 계몽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언론인들이 민족자존과 역사의식을 통해 민족의 미래에 대해 고취시킬 방안은 무엇인가?
3.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사는 언론인과 언론사의 초점
단재丹齋 선생의 언론활동과 언론관의 자료를 살펴보면 첫째, 현재 직업적이나 생업적인 목적에서 언론관이 아닌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과 독립을 위해서이고 둘째, 조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독립과 무도하고 극악만행을 일삼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고 셋째, 민족의 자긍심과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실증적 바탕에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 진실된 역사를 통해 민족정기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선생께서 독립운동(아나키스트 등 포함), 역사학(문학 등 포함), 언론을 당시 상황으로선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그리고 지구상 강국이 되기 위한 민족계몽운동과 실증적 바탕 위에 진실된 역사서를 집필하며 실천했지만,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순국殉國하신 ‘가장 강렬했고 가장 순수한 인물, 민족주의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이다.
선생의 생애를 연구하고 선생의 발자취를 끊임없이 찾아 새로운 자료를 발굴했던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의 발로 쓴 역작<단재 신채호 평전>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단재 선생의 삶은 그야말로 자신이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 일컬었던 역사의 정의만큼이나 치열하게, 또는 고뇌하며, 고결하게, 한점 흐트러짐 없는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또 그 삶의 무게만큼이나 선생이 남긴 업적 또한 오늘날의 참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단재는 사학자로서 민족사학의 골격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국 고대사 복원은 물론 잘못된 역사의 과오와 왜곡된 역사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이러한 단재사학의 가장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낭가사상'은 민족사상의 기원, 전승, 기능을 구명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자주독립정신을 세워 민족의 진로와 시대정식을 밝히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선생이 남긴 『조선상고사』등 수많은 저작물들은 오늘날 역사 연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언론인으로서의 단재는 결기 그 자체라 말할 수 있겠다. 선생은 일찍이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을 뿐 아니라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의 후반부 원고 집필을 도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방에 알리기도 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통렬히 비판하는 논설과 사설들을 쏟아내기도 했으며, 이 시기 애국심과 자강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해외 역사 서적을 번역(『이태리 건국 삼걸전』)하고 한국 사상의 영웅전(『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선생은 망명길에 올라서도 대동공보에 관여하고 권업신문 주필로도 활약했다. 이승만의 임시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항일신문 <신대한>을 창간하기도 했으며, 개인잡지 <천고>를 발행, 중국인과 한국인을 결속하는 항일투쟁과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열정을 불태웠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단재는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한 혁명가였다. <의열단선언문>으로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은 일제 시대 수많은 독립 선언문 중에서 내용과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생은 이 선언문에서 폭력에 의한 민중의 직접혁명을 부르짖었다. 또한 고급 밀정 김달하를 처단했던 다물단의 선언문도 집필했으며, 단원들과 함께 기거하며 조선사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아나키스트로서의 단재는 "지배계급이 민중들을 억압하거나 민중들을 속여 자신들의 지배에 복종시키고 혁명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이용하는 지배계급의 일체의 지배기관이나 수단은 파괴되고, 지배계급이 제정한 일체의 사회제도도 철폐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제도 부정되고 모든 재화의 공유제가 실시되어 일체의 착취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선생의 이러한 사상적 변화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지만 민족주의의 발전된 단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책에서는 선생에 대한 여러 다양한 의견들과 비판들을 실어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했다.”
단재丹齋 선생은 망명지에서의 가난과 함께 건강까지 잃고 말았다. 더욱이 임시정부가 위임통치(미국이 한국을 통치)론자인 리승만 체제로 출범하자 선생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조국 독립에 대한 좌절감과 ‘려순감옥’에서의 힘든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자신의 안위와 가족의 금의옥식錦衣玉食을 위해 시류에 편승하는 반민족행위자들의 길을 마다하고 불의不意와는 철저한 비타협으로 일관하고 일제에게 호적을 맡기지 않고 당당히 독립해 호적을 올리겠다던 인물.
그러나 선생은 아직도 대한민국 국적을 얻지 못하고 있다. 독립하기 전 잔악무도한 일제에게 호적을 맡기지 않겠다던 선생의 의지. 그러나 일제가 물러갔어도 선생은 호적을 얻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시절 리승만의 ‘조국을 미국에게 위임통치해 달라’는 소식을 듣고 강력하게 비난했던 단재丹齋 선생. 광복 후 미국을 등에 업고 독재와 민족 배신행위를 했던 리승만의 집권과 더불어 선생의 후손들은 호적을 얻지 못하고 지금까지 통한의 세월 속에 살고 있다.
기회주의적이고 배타적이고 정권에 아부하고 안일하고 반민족적인 일부 언론인과 상충되는 지식인들에 대해 항일 언론을 주도하고 생업적(돈벌이용 언론인) 언론인을 철저히 배격했던, 또한 이광수가 지적한 대로 “칼날 같은 의지와 절개로 뭉쳐진 사람으로 시인적 여유조차 허락지 않는 사람”인 단재丹齋 선생과 그들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민족의 탈을 쓰고 사대주의와 숭미주의 그리고 반민족행위를 일삼아 왔던 그들의 기득권으로 인해 세월의 때로 물든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과 얼이 빛을 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선생의 숭고한 뜻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에 대해 모든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언론관 초점이 강국 건설과 항일과 독립에 있다면,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사는 언론인과 언론사의 초점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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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날의 잘못된 종교관을 가지고 부자되고 더 높이 오르려고 사력을 다하는 종교 사이비성직자들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가슴에 새겨 참회의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 봉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