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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검재 김선생 신도비 명
文敬公 儉齎 金先生 神道碑 銘
계사(1653효종4)년 ~ 기해(1719숙종45)년
유명조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수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 의금부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시 문경공 검재 김선생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守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同知 義禁府春秋館事 世子右副賓客 贈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諡 文敬公 儉齋 金先生 神道碑銘 幷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세자부 이관명 찬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兼 領經筵事監 春秋館事 世子傅 李觀命 撰
생질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경연사 윤득화 서
甥姪 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 兼 同知經筵事 尹得和 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유척기 전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 領經筵事監 春秋館事 兪拓基 篆
사직(士直)을 잃은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그의 깨끗하고 기품 있으며 고아한 모습은 항상 내 마음에 황홀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사직(士直)의 아들 약로(若魯)가 하루는 쓸쓸한 내 집에 와서 말하였다. “아버님의 친우로는 어르신네 한 분만이 생존하십니다. 부디 아버님 묘의 비명을 써 주시옵소서.” 이에 나는“내 글이 어찌 우리의 사직(士直)을 영원한 군자로 묘사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예전에 나의 문장이 질박하다 하여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았던 때에도, 유독 사직(士直)만은 알아주고 마음으로부터 좋아하였다. 나와 사직(士直)과는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와, 그 소리를 가장 이해해주던 자기(子期:(鍾子期)는 백아의 거문고를 진정으로 사랑한 지인)와 같은 사이인지라, 자기(子期)가 죽자 백아(伯牙:(柳伯牙)거문고를 잘 연주하는 초나라 사람)가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린 것처럼, 사직(士直)이 세상 떠난 후로는 내가 문장을 발표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이제 사직(士直)의 비명을 쓰게 되다니 그와 나와는 자기(子期)와 백아(伯牙)사이 같은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뜻이 맞음이 있음이니라.
공에 휘는 유(楺)요. 호는 검재(儉齋)이고, 사직(士直)은 자이다. 청풍김씨는 고려 문하시중 휘 대유(大猷)에서 나왔고, 자손이 번성하여 높은 벼슬로 이어 왔으니, 휘 계(繼)는 증 집의요, 휘 인백(仁伯)은 증 이조판서로서 함께 학문과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 높았는바, 바로 공의 고조와 증조이다. 조부는 휘 극형(克亨)인데 공조정랑에 증 찬성으로 특히, 도학으로 저명하였다. 아버님은 휘 징(澄)으로 청렴하고 곧은 지조로 당대의 우뚝 하였고, 전라도관찰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머님은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양곡선생(亮谷先生) 의길(義吉)의 따님이요. 예문관 봉교 정(瀞)의 손녀로서 계사년(1653효종4년)5월20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천품이 시원하며 산뜻하고 비길 때 없이 총명하여, 한 번 쳐 본 글은 그 자리에서 암송하는 것이었고, 이를 갈 나이에 문장이 풍부하였다. 나이 들어서 남계(玄石 朴世采)선생에게 학업을 배우니, 사물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투명하고, 학식의 깨달음이 월등하여서 선생의 기대가 특별하였으며 유학의 국가발전을 의탁할 만하다 하였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 또한, 공을 귀중히 여겨서 항상 자리 하나를 비워두고 공을 맞이하였다. 갑인년(1674현종15년)에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논쟁(服喪論爭) 끝에 간특한 무리들(南人)이 일을 꾸며, 두 분 선생이 벌을 받고 쫓겨났을 때 공은, “이것이 어찌 벼슬길에 진취할 때이라.” 탄식하고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식구들과 함께 이천으로 내려가 두문불출 학문에 전념하였다.
한번은 “우리 동방 사대부 집에 가훈이 드물다. 이 때문에 가르침이 처자에게 시행되지 않았고, 그 감화가 하인에게 미치지 않았다.” 이같이 말하고 가훈일편(家訓一編)을 저술하였으니 그 대강은 검약을 근본으로 하였고, 일상생활의 행동거지에 정연한 예법이 있어 그대로 시행한 즉, 온 집안에 질서가 숙연하였고 부근에 선비들 또한, 절실히 동감하여 따라서 규칙을 삼았다.
병진년(1676숙종2년) 공이 24세 때에 아버님(의정공:議政公(감지당))이 돌아가시니, 상사제도(喪事制度)를 엄히 따라서 손수 하였기로 병중에도 단 하루 폐하는 일이 없었다.
경신년(1680숙종6년) 경신갱화(庚申更化: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과 같음)에 남인이 숙청되었을 때에, 어머님 명령으로 과거보러 갔으니 공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 계해년(1683숙종9년) 3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경학의 깊이로 누차 추천 되더니, 을축년(1685숙종11년) 드디어 예종의 창릉참봉에 임명되었고, 정묘년(1687숙종13년)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從5品), 무진년(1688숙종14년)에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으로 전직 되었고, 기사년(1689숙종15년)에는 다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때에 득세한 남인의 간흉한 무리들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기결된 반역사건처리(反逆事件處理)를 뒤엎고자 할 때, 공이 의금부에 있다는 것을 꺼려서 이천찰방(利川察訪)으로 내쫓더니, 뒤이어 멀리 귀양 보내려고 추악하게 공을 무고하는 것이 한이 없었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파직 명령만 내리시니 시샘하는 저들은 만족하지 않고, 끝내 금고 처분을 받게 하였다.
민비(閔妃:숙종의 왕비)가 폐위되어 인륜이 파괴되면서, 공은 세사를 사절하고 날마다 학문 연마에 힘썼는데, 갑술년(1694숙종20년) 공이 42세 때 임금께서 크게 각성하여, 민비(閔妃)를 복위시키고자함에 한두 사람 재상이 당황하여 모여서, 폐비 조치를 취했던 민비(閔妃)를 다시 왕비로 맞아들이려는 임금의 뜻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 수작이 해괴망측 하였다.
승정원에서도 대신들이 들어와서 회의를 거쳐서 결정하여 임금께 여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공이 놀라 개탄하여 친구에게 글을 보내 그 잘못을 역설하였다. 마침 소론영수(小論領袖) 남구만(南九萬) 영의정(領議政)이 부름을 받고, 서울 가까이에 이르러서 인편으로 공에게 취할 태도를 묻자 공이 대답하였다. “하루 지체하면 중전의 복위가 하루 늦어질 것이니 하루 지체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요.” 또, 말하기를 “인심이 물에 빠진 격으로 대의와 도리가 막혀서 암담하니 당장 급선무는, 명분과 의리를 도와서 굳게 세우는 일이오.” 그러나 남구만(南九萬)은 공의 의견을 듣지 않았으니, 지금 세자를 낳은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왕비(王妃)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다시 격하하고, 민비(閔妃)를 왕비(王妃)로 모셔 온다면, 훗날에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라는(연산군을 예로 들어서 말함) 자기 나름으로, 깊이 염려한다는 의론(議論)으로 세상을 현옥하였고, 그 추종자들이 부화뇌동(附和雷同:아무런 주관이 없이 남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좇아 함께 어울림)하여 나라의 여론이 그쪽으로 휩쓸리는 듯하였다.
공은 통렬히 물리쳤는바, 박세채(朴世采)선생이 조정에 들어와서 우선 왕비(王妃)의 명분과 왕과 부부사이 의를 돋아 세우니, 이때의 승정원과 남인소론의 재상들이 나란히 숙청되어 이로써 윤리기강(倫理紀綱)이 다시 밝아지고, 인심도 크게 안정 되었는데 명의(名義)를 소홀히 하여 죄지은 무리들은, 몹시 성내여 형편없이 공을 헐뜯었다.
이때 한 근신(가까운 신하)이 기사년(1689숙종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때에, 공이 무고 당한 상황을 밝히자 임금께서 “지난날 사헌부에서 올린 내용은 허위날조라는 것을 내가 살펴서 않은 바이다.” 하시고, 특히 복직 명령을 내렸으니 이는 신화에 대한 특별히 친절한 임금에 뜻이었다.
곧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로 하명 하니 공은 감은(感恩)하여 물러났다.
수운판관(水運判官), 호조좌랑(戶曹佐郎)으로 전직하다가 을해년(1695숙종21년)에 박세채(朴世采)선생 별세에는 9달 상복을 입었고, 이어서 전북 용담면(지금의 전북 진안군)의 현령으로 나가서는 재임기간 중 유학교육을 크게 진흥시켰다.
정축년(1697숙종23년) 45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郎)에서 정랑(正郎:정5품)으로, 무인년(1698숙종24년)에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 호조정랑(戶曹正郎)에 있다가,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나갔고, 기묘년(1699숙종25년) 증광문과에 뽑혔는데, 마침 합격자 중에서 부정사실이 탄로 난 것이 있어서, 이때 과거시험은 무효가 되었다,
이어 편수낭청(編修郞廳)에 뽑혀서 증보여지승람(增補輿地勝覺) 편찬에 참가하였고, 사재감주부(司宰監注簿)에서 장락원주부(掌樂院主簿)로 옮겼고, 신사년(1701숙종27년)에는 고양군수(高陽郡守), 임오년(1702숙종28년)에는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으로 전직 되어서, 장예원사평(掌隷院司評)으로 이어서,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종4품직) 계미년(1703숙종29년)에는 승진하여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겸 이정균역(釐正均役)으로, 그 다음에 부평현감(富平縣監)으로 봉직하였다.
갑신년(1704숙종30년) 52세에 어머님이 돌아감에 슬프게 울며, 장례에 정성을 다함이 법도 이상이기로 몸이 상하고 날로 수척하니 친구들이 염려하였으나 끝내 일관하였다. 병술년(1706숙종32년)에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이 되었고, 정해년(1707숙종33년) 황해도 연안현관(延安縣監)으로 나가, 황해도에서 으뜸가는 선정을 베푼 공으로 명주 옷감을 하사 받았고, 무자년(1708숙종34년) 56세에 다시 호조정랑(戶曹正郎)이 되었다.
요사한 재상 최석정(宰相 崔錫鼎)이 예기류편(禮記類編)과 중용학(中庸學)의 두 책을 저작하여 49편중에 넣었는데, 주자의 학설을 제쳐놓고 독자적으로 변경하고 새로운 주석을 붙인 것이다. 그는 이것을 인쇄하여 강연의 교본으로 삼기를 청하면서, 자기의 새로운 진취적인 학설이라 하여 자랑하였다.
공이 “이것은 성인의 가르침인 공이 이것은 성인의 가르침을 유도(儒道)한 반란이다” 하면서, 극렬 배척하니 선비들의 공론으로 성현(聖賢:공자(孔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을 모독하고, 그 경전을 훼손한 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였다. 윤휴(尹鑴)와 최석정(崔錫鼎)등 소론들은 더욱 성을 내어 방자하고 추하게 욕질 하였다. 공은 관직을 내놓고 조용히 집에 있었다.
경인년(1710숙종36년)에 조정에서는 최석정(崔錫鼎)의 저작을 불사르고 곧, 예빈사정(禮賓寺正)으로 공을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년(1699숙종25년) 증광문과에 합격했던 사람들은 회복시켜 주어야 할 사람이 많다는 말이 있어, 임금께서 그 공론을 채택하고 복권 시키자, 반대당은 떼 지어 양쪽에서 번갈아 공을 공박하며 해를 넘기면서 다투어마지 않았다.
임진년(1712숙종38년) 공이 64세에야 비로소 성균관사예, 시강원사서에 임명되고, 계사년(1713숙종39년)에는 봉조하 직을 띠고 사헌부장령 홍문관교리의 명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 사이에 사복시정, 사간원사간, 홍문관수찬을 임명 받았고, 또 임금이 권고하는 글까지 받았으나 한사코 사양하였다.
이에 임금의 말씀이 더욱 간곡하여 명분과 의지의 책임으로 타이르고, 연속해서 내리는 명령도 준엄하기로 공은 부득이 명을 받고 부교리 겸 남학교수(副校理 兼 南學敎授)에 올랐다. 마침 임금께서 1년 12달의 정령(政令:정치적인 명령)을 기록한 예기월령(禮記月令)을 공부하실 때에, 공은 글 따라 해석하고 장마다 은근히 경계하는 충성이 간절 곡진하였으니, 몸소 검약하고 가까이에 귀인들을 통제할 것이며, 광명한 것은 북돋우며 음침한 것은 억누를 것이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권장할 것을 아뢴 것이다.
그 중에도 가무와 여색 등 안일과 오락에 대한 경계심을 가장 강조하였다. 또 고려말기 정이오(鄭以五)의 시에 “송곳 세울만한 토지까지 모두 귀족들이 차지하여, 백성의 농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산과 개천만이 국유로 되어있다.” 이것을 인용하여 왕가에서 토지를 독차지하고 있는 폐해에 원인을 통렬히 지적하였다. 임금 앞에서 소동파(蘇東坡)의 책략을 강론하여 말하였다. “동파(蘇東坡)의 학문은 본시 중국에 전국시대의 법가(法家)인 신불해(申不害), 한비자(韓非子)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써 대의보다는 공리설(功利說)이 많습니다. 주자(朱子)도 그 학술을 공박하여 그가 이르는바, 천자에겐 반드시 사사로이 쓰는 장군이 있고, 장군에겐 반드시 사사로이 부리는 병사가 있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크게 틀린 것입니다. 국가가 맡기는데 재상과 장군보다 막중한 것이 없는 것이므로, 더욱더 공으로 뽑아야 하거늘 그 사이 사사로운 욕망이 어찌 용납됩니까.” 또 말하기를, “요즘에 당파싸움에 화는 장차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것인즉, 바라옵건대 철저히 공명정대한 도리로서 일륜의 모범을 세워 만민의 법칙을 정 하소서. 당색을 묻지 말고 현재(賢材:어진인재)를 뽑아 쓰십시오.” 한편, 또 형법이 해이해진 결과의 패해와, 백성들이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는 것의 해독을 진술하였으니, 당시의 심각한 사회병리를 절실히 맞춘 것이었다.
한 번은 홍문관에서 고사를 인용하여 송(宋)의 참지정사(參知政事)요, 주자학(朱子學)을 전공한 진덕수(陳德秀)의 한 말 중에 “편안하게 놀지 않고 부지런하면, 장수하고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본받으면 장수한다.” 이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보통 인정으로 말하면 편안히 놀면서 지내는 것이 장수하는 길 같습니다. 그러나 주문왕(周文王)은 안일함을 없앰으로써 천명을 받들어, 나라를 오래 보전하는 근본으로 하였으니 근로정신이 몸에 배어 한시도 게으르거나 황당하지 않았은즉, 날로 장중하게 강하였고, 물질 욕심을 물리치고 이로써 장수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장수한다는 것은 그 뜻이 안일함을 물리치면, 장수 한다는 것과 서로 안팎을 이루는 것입니다. 임금은 숭고한 자리에 있어서 일락을 취하고 싶은 욕망이 나기 쉬우므로, 학덕과 경륜이 출중한 신화와 조석으로 함께하여, 옳은 소리로 깨우쳐주고 일어서 정도로 인도하여, 신체를 보양하며 일락의 욕망을 끊어버리면 자연이 수명을 손상 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송(宋)나라가 글단(契丹:거란의 비표준어)에서 경시(輕視:대수롭지 않거나 업신여김)당하면, 수치(羞恥:부끄러움)를 염려해서 그 임금에게 경계(조심)하였습니다. 요즘에 저들이 우리를 우대하는 것이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는데도 오히려, 반색하며 기뻐할 뿐 오랑캐들이 흉측하고 음험한 점에는 뒤돌아 주의하는 것이 없습니다. 임금께서는 모름지기 근신(가까운 신하)들을 경계하셔서 정세의 기미를 통찰하여, 저들의 멸시를 받지 않도록 분부하시고 전하께서도 부필(富弼:중국 송나라 때의 정치가(1004~1083). 인종 때 ‘범중엄’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신종(神宗) 때 재상이 되어 보필하였다. ‘청묘법’을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았다.)말에 또한 깊이 내성(內省:자기 자신을 돌이켜 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한양으로 오는 날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공이 이때 글을 올렸다. “수는 음기이니 소인과 오랑캐의 기운입니다. 저들은 오랑캐의 무리의 속합니다. 지금 오랑캐의 사신이 성안에 와 있는 것은 하늘의 경고입니다. 이 천하의 우환은 항상, 소홀한 틈새에서 발생하는 것인즉 깊이 염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황차(況且:앞 내용보다 뒤 내용에 대한 더 강한 긍정을 나타낼 때 쓰여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말) 음이 한번 발생할 때는 큰 비가 작난(作亂:난리를 일으킴)하여, 양기를 핍박하느니 이것은, 소인 한 사람이 여러 군자 머리 위에 올라 탈 상이므로 한층 더 염려해야 합니다.”
청국사신 목극등(穆克登)이 수차 근신이 그에게 은밀히 선물을 주어 우대하는 뜻을 보이고자 청하자, 이에 대하여 공은 상소를 올렸다. “우리가 주는 선물을 그가 의리를 내세워 거절한다면 이것은 오랑캐들이 모욕을 자초하는 것이요. 그가 또 귀국하여 이번 사행 길에서는 대단히 청렴하였노라 아뢰면, 소국이 아첨하는 예물을 사용했다고 보고한다면, 그의 임금은 그 말을 굳게 믿을 것이니, 천하 사람들이 들으면 우리나라 체통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부사(副使:부지휘관)에게만 선물을 준다면 반드시, 정사(正使:사신 중에 으뜸)와 부사(副使) 사이에 서로 의혹도 생기는 것입니다.” 공의 말과 같이 과연 정사는 의심을 품고 노하니 층층 분쟁이 심하였다.
홍문관의 7일 근무하는 동안 6일은 시강원에 나가서 강의를 하며, 간곡하고 친절히 설명해 드렸더니 해 저물어서 물러 나왔다.
공은 사람들이 무사안일을 취하는 태도에 분개하여 임금에 덕을 인도하고, 보필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하였건만, 사이사이에 강직한 말로 임금 뜻을 거스른 것이 많아서 위에서는 염증을 내는 기색이 보이자, 공은 이내 물러났고 그 후로는 임금이 공의 승진을 보류 하자 공은 더욱 조정해서 불안하였다.
이때의 장령 서명우(徐明遇)가 조정 신화를 거의 모두 무고 하는 상소를 올렸고, 또 기묘년에 복원한 과거 일을 들고 공을 헐뜯고 욕하는 일이 갖가지였다.
후에 겸 시강원 문학(兼 侍講院 文學), 중학교수(中學敎授)의 명을 받았으나 글로써 굳이 사양하고 외직을 택해서 황해도 곡산부사로 나갔다. 곡산은 궁벽한 산골이라 학문을 모르는 곳 이기로 공은, 청소년들을 모아 손수 권유하여 글을 가르치니 얼마 안가서 교육이 진행되고, 먼 곳으로부터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으며, 공이 만기로 떠나 갈 때는 그 덕을 추모해 마지않고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갑오년(1714숙종41년) 62세 때 유신들이 공의 경륜과 학문을 높이 말하며 속히 조정으로 불러 드릴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는 허락하지 아니하여 직위를 받지 못 하다가 가을에 평북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올랐다.
그러나 전직 부윤이 유임됨에 따라 부수찬 겸 시강원보덕(副修撰 兼 侍講院輔德)이 되고, 다시 을미년(1715숙종42년)에는 수원부사(水原府使)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 직을 수령하였다. 그 곳에서 종래의 폐습을 없애고 어려운 백성 살림을 소생케 하였으며, 특히 유교진흥에 주력하였다.
황해도에는 예부터 율곡선생(栗谷先生)의 향약이 있었는데, 폐지되어서 일상생활에 향약이 실행되지 않고 있었다. 공이 율곡선생(栗谷先生)의 향약을 연구하고 보충해서, 알기 쉽게 작성하여 실행하니 황해도 전체의 미풍양속이 일어났다.
정유년(1717숙종43년) 공이 65세에 사간원대사관(司諫院大使館)에 지명되었다가, 취임 전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명받고 품계가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공은 청렴으로 일관하여 근무에 성실하였으니, 그 권위는 억세고 교활한 무리를 제압하고, 은혜는 극빈자들에게 미쳐서 훌륭한 치적을 거두었다.
소론영수(少論領袖) 윤증(尹拯)의 제자 이세덕(李世德)이 그 스승을 대신하여, 북을 치고 송사하는데 무고로 박세채(朴世采)선생의 말을 증거로 끌어들였다. 공이 글을 올려서 변론하였다.
“당쟁의 화난으로 인심(사람의 마음)이 중심을 잃고, 온통 변하고 주(周)나라 왕도(王道)의 대의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만약에 효종(孝宗)대왕께서 위에 모범이 되시고, 한 둘 선배의 현신이 그 뜻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밝게 펴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예의의 이 나라는 야만의 나라로 타락하였을 것입니다. 하늘이 천리에 순종하는 왕을 돕지 않고 내버려 두었으나, 예로부터 기풍과 정신이 살아있어서 인심을 밝게 하고 천리를 밝게 잡아, 종묘사직과 인간의 윤리도덕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송시암, 박세채 선생 등이 아니고 대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앞서 공이 대의를 강조한 것은 공론이며 실이 없는 것이라고 폄하한 말이, 갑자기 대가 집에서 발설되었는데 윤증(尹拯)이, 우암(尤庵)선생에게 보내려는 의서가 나옴으로써, 공이 먼저 그것을 입수하여 읽었으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윤증(尹拯)의 요지는 우암(尤庵)선생이 자기주장만 고집하는데, 강직하면서 극기궁행(克己 躬行:사욕을 이기고 실천하는 것)의 인내심이 아니며 권모술수가 많고, 대의의 실적은 없다는 항의 인바 예로부터 성현이 당시에 실행 하지 못하면, 그것을 언어문자에 기탁하였으니 주공이하(周公以下:주나라의 정치가 이후로) 모두 이러하였던 것이다.
대의를 펴는데 성공함이 없다고 이것을 공허한 것이요 진실이 아니라 할 것 같으면, 춘추에 저작(著作)도 난적을 주사를 하는데 부족할 것이며,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인 양주(楊朱:위나라의 도가 철학자)와 겸애설(兼愛說:천하의 평등과 이익 화평의 근거로 겸애를 주장한 묵자의 학설)을 주장한 묵자(墨子)등의 이단과도 구별할 길이 없지 않으랴.
애석하다 윤증(尹拯)의 80년 공부가 고작 대의는 허망한 것이란 학설로서, 세상을 그르칠 따름이다. 한림의 신하에게 임금에 고효문(告曉文)을 쓰게 하여, 널리 게시 할 것을 빌었던바 때의 왕세자대리(王世子代理:후에 경종임금)는 찬동하여 이행하게 하였다.
정유년(1717숙종43년)에 공이 임금께 밀봉의견서(密封意見書)를 올린 때부터 윤증(尹拯). 윤휴(尹鑴)등 소론의 니당(尼黨:음역의 무리)은 한층 더 이를 갈았고, 명의(明誼:밝고 옳음)가 정언(正言: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벼슬)으로 공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몹시 황급하여 재물 욕이 심하다며 추악하게 헐뜯었다.
무술년(1718숙종44년) 공이 66세에 많은 선비들이 박세채(朴世采)선생을 종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자, 젊은 소론의 대관들이 못할 말없이 천방지축 공을 헐뜯으며, 의심하는 것이 극성으로 사론을 일으켜서 공을 배척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저들은 공의 아들이 홍문관의 있어서, 부자의 기세가 등등하며 휘황하다 일렀다. 공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네 번 글을 올려 해직을 빌었으나 허락 되지 않고, 따로 공의 심사를 타일러 풀어주었다.
공은 글을 올려서 흑백을 규명해 주십사 빌었더니, 임금의 말씀이 “험악한 말이 순전히 허위 날조된 것이지만, 임금이 이미 통촉하여 밝게 알거늘 무슨 조사가 필요하랴.” 하였다. 공은 집에서 꼼짝 않은 채 몇 달간 내리 글을 올려서 사직을 청하였더니, 마지막에 가서 대신의 말에 의하면 허락되었다.
공은 우아한 지조가 깨끗하였으니 황해도, 평안도에 관찰사 취임 중에 재물 보기를 더러운 옷에 기름때 같이 보았고, 국고는 항상 가득 차 있었으며, 만기로 돌아올 때의 짐은 초라하였으니, 더욱더 저들의 말이 허망한 무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변사(備邊司:籌司(주사)라고도 함: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 유사(有司:단체 또는 자생적 모임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 당상(堂上:궁전의 댓돌 위),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등 인사발령설이 오고갔는데, 평안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성 밖에 이르러서 비장을 시켜 부절(符節:돌이나 대나무로 신표를 만든 물건)을 납부케 하고, 곧장 향리로 가려다가 임금이 몹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뵈옵고자 성 안에 들어갔더니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에 하명이 있었다.
공은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다가 후에, 한성부윤(漢城府尹)에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成均館事同知春秋館事), 전생서제조(典牲署提調)가 되었다.
공은 서울에 있으면서 거듭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있었거니와 임금께서 병환이 위중하신데도 내리 사퇴하는 것은, 신하의 분수가 아니라 하여 쇠약한 몸을 이끌고, 조정에 나가 병환시중을 들되 신병이 있는데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기해년(1719숙종45년) 3월에 시원(試院)에서 퇴근하여 돌아와서는, 신병이 발작하여 13일에 서울 댁에서 운명하였다.
위독하였을 때 정신과 기운이 태연하여 조금도 슬픈 빛이 없었고, 아들 정로(正魯)등이 후사를 물음에 대답하여 말했다. “내가 임금의 크나큰 은혜를 입어 재상자리에까지 이르렀으나 한 말씀, 한 행동도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거늘 어느 하가(어느 겨를)에 집안일을 염려하랴.”
그리고는 부녀자들을 나가있게 하고, 때 묻은 의복을 버리고, 깨끗한 이부자리를 깔게 한 다음, 염습에 비단을 쓰지 말라 명령하고 나서, 베개를 바로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해서 반듯하게 눕더니 홀가분히 나는 듯 떠났다.
이 소식을 임금께 아뢰니 내리시는 제물과 부의가 예의대로 있었고, 세자는 특히 관제를 하사하고 궁관을 파견하여 조상하게 하였다. 5월 18일에 광주(廣州) 백운산(白雲山) 서쪽 기슭 탕산(碭山)의 선영 곁 포미지원(抱未之原)에 장례 지냈다.
훗날 차남 취로(取魯)의 공훈에 따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증직되었다.
공은 큰 키에 마른체구인데 맑고 고매하여 번뜩이는 눈빛은 수십 척 멀리에 세자도 알아보았다. 시경. 예기. 논어. 중용. 대학 등의 고전의 철리가 몸에 밴 예절의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니,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교훈을 이어받고, 어진스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며, 인간의 정도를 걸었으니, 조석으로 성인들의 말을 입으로 되놰 멈추지 않았고, 손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놓지 않았다.
항상 반성하여 잘못 없기에 뜻을 더하며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밝히는 공부에 힘썼으니, 밝은 예지는 말없이 깊은 진리를 깨달았고, 한편으로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과 사명의 깊이를 통달하였고, 음과 양이 서로 굴신하는 오묘함과 곧은 것과 굽은 것이 항상 변화하는 법칙과, 고금의 정치안정과 혼란에 자취 등을 꿰뚫어 터득하여서 막히고 지체하는 것이 없었다.
부모 섬김과 제사 받들기엔 삼가 조심하여 정성을 쏟았으며, 큰 형님 섬기기를 아버지 모시듯 하였다. 일상에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는 언제나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말을 재빨리 하거나 낯빛이 별안간 달라지는 일이 없었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기색은 아예 몸에 나타나지 않았고, 상스러운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바둑, 장기의 놀이와 유교 이외의 책을 몸 가까이 두지 않았고, 떨어진 자리에 오랜 땟국이 있어도 벼슬 없는 선비와 같이 담백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데는 임금의 기색을 거스르면서도 진실을 밝히는 것을 주로하고, 국책모의에는 백년대계의 근본을 세우는 것을 책무로 하였다. 외직에 임하여서는 오로지 교화사업을 숭상하여 실시하였으므로, 그곳 사림들이 각성하여 우뚝이 활동하였다.
문장이 청수하고 어휘구사와 표현이 자재로 워서, 높은 산굴에서 한가히 나오는 구름처럼 변화가 무궁하며, 거대한 강의 물결이 멈춤 없이 도도히 흐르는 듯하였다. 시사를 논하는 문장은 문맥이 정연하고 논리가 절실하여 결론은 핵심을 다하였기로 송우암(宋尤庵)선생도 “이 사람의 문장은 학문, 사상이 광대하여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게 한다.” 하였다.
공은 인생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임금과 신하가 나아갈 길), 부자지의(父子之義:어버이나 자식이 나아갈 길), 사제지의(師弟之義:스승과 제자가 나아갈 길)를 중차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공은 송우암(宋尤庵) 선생과 그 문화생인 윤증(尹拯)과의 회니논쟁(懷尼論爭:송시열(宋時烈)이 회덕(懷德:지명)과 윤증(尹拯)의 니산(尼山:논산의 옛지명)이 있는 이후로 사제의 도리는 여지없이 파괴되었고, 근세의 자재들이 부형에 대해서나, 어린 소년배들이 장로에 대해서나 전혀 버릇이 없고, 공경의 깊은 뜻을 모르는 것은 모두 스승을 섬기는 도리가 흐려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동문의 선비가 간혹 자기 의견을 주장하여 스승의 가르침에 등지는 자가 있을라치면, 곧 의리를 들어서 간절히 책망 하였고, 학생들에게는 반드시 스승을 우러르며 장로를 공경하는 예절로써 반복하여 타이르곤 하였다.
사람의 재능 따라 권유하고 인도하는데 당당한 도리가 있었으며, 언젠가 이르기를 학문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저 일상에서 행위를 하는 도리이니, 어른들의 언행과 체험이 내 심신에 베어 있다면 학문을 터득한 것이 있다 할 것이다. 여느 때의 공부엔 주자편저(朱子編著)의 소학을 깊이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중용주자서(中庸朱子書)에 심취하여 늙어서도 흥취(興趣)가 시들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함과 사물에 접촉하며 과시하여 내세우는 일이 없었고, 열린 마음에 그 성실성이 나타났으며, 다정하고 화목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단의 학설을 물리치고 주자 이래에 정통유학을 지키는데는 그 누구보다도 강의하였다. 얻는 것, 잃는 것, 영광과 욕됨에는 전혀 기쁜 빛, 슬픈 빛이 없었고, 고아한 뜻은 관계를 떠나서 자연 속에 묻혀 사는 데에 있었다.
이전에 8회시(八會時)를 써서 그 사상을 나타냈고, 저서로는 소학집주(小學集註) 증보주자(增補朱子) 이외에 존주록(尊周錄)과 문집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원배는 완산이씨(完山李氏:(전주고호)견휜을 시조로 함)로 호군(護軍) 명진(鳴震)의 따님인데, 월산대군(月山大君휘 정(婷))의 후손으로 부덕이 있었는데 일찍 별세 하였고, 후배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군수(郡守)인 박(搏)의 따님이요, 참판(參判) 시길(時吉)의 손녀이다.
원배 완산이씨(完山李氏)께서는 무육(자식이 없음)하고, 후배 여산송씨(礪山宋氏)께서 5남 3녀를 낳았으니 맏아들은 정로(正魯)로 좌랑(佐郞)이고, 차남은 판서(判書) 취로(取魯)이고, 3남은 성로(省魯)로 도사(都事)이고, 4남은 약로(若魯)로 교리(敎理)이고, 5남은 상노(尙魯)이다.
딸은 현감(縣監) 정석조(鄭錫祚)에게, 사인(士人) 황재하(黃在河)에게, 좌랑(佐郎) 유봉(兪崶)에게 각각 시집갔다.
정로(正魯)는 생원(生員) 한석좌(韓碩佐)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아들이 없고 딸이 하나이다. 치량(致良)을 양자로 하였는데 생원(生員)이요, 딸은 심순(沈錞)에게 시집갔다. 정로(正魯)의 재취부인은 사인(士人) 이석록(李錫錄)의 딸이다.
취로(取魯)는 판서(判書) 이기하(李基夏)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딸만 둘이니 맏딸은 홍계희(洪啟禧)에게 차녀는 조정규(趙正逵)에게 각각 시집가고, 재치부인은 사인(士人) 정호(鄭鎬)의 딸로 아들 하나를 나았는데, 곧 정로(正魯)의 후사로 들어간 치영(致永)이다. 삼취부인은 사인(士人) 홍중채(洪重採)의 딸이다.
성로(省魯)는 도사(都事) 조상적(趙尙迪)의 딸과 결혼했는데, 아들 하나 치온(致溫)을 나았고, 재취부인은 사인(士人) 이수방(李秀芳)의 딸이니 아들 하나를 나았는데 아직 어리다.
약로(若魯)는 감사(監司) 이해조(李海朝)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는데, 치공(致恭), 치검(致儉)에 나머지는 어리다.
상로(尙魯)는 참판(參判) 조정만(趙正萬)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인데 모두 어리다.
맏사위 정석조(鄭錫祚)의 아들은 신검(愼儉)이며, 사위는 문과 이산배(李山培), 김인대(金人大)이다. 둘째사위 황재하(黃在河)의 아들은 리(摛), 섭(㰔)이고, 사위는 한시대(韓始大), 이성증(李省曾), 정증(鄭增)이며, 셋째사위 유봉(兪崶)의 아들은 덕중(德中)이다.
아아! 봉황과 기린과 같은 분. 온 세상이 귀하게 여겼거니, 청천백일 아래 노예들도 공을 알고 있다. 공의 따뜻하며 순수한 천품으로 독실한 학문은 극기하여 수양함이 깊고, 두터워 안팎으로 빛나게 투철하고 규모와 제도는 오로지 정자. 주자를 따랐으니, 법제정에서 언론의 옳고 그름은 의리를 주로 하였고, 학술과 언행은 세상에 모범이었다.
그러나 교육이 퇴폐하고 인심이 물깊이 빠져버린 듯 오간데 없고, 공자가 밝힌 춘추의 대의를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여기며, 사제 간에 도리를 관례 때 한 번 쓰고 버리는 변모처럼 하며, 명분과 의리의 참뜻이 변하여 파괴되면서 급기야 혼란은 극에 이르렀다.
공은 이 풍조를 몹시 두려워하여 엄준한 말로 배척하며 저지한 일이 많았으니 이에, 군소배들이 성을 내어 들고일어나 공격의 화살이 그 한 몸에 집중되어, 조정에서는 공이 편안한 날이 하루도 끝내 없었다. 그리고 하늘은 공이 있어야 할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고, 또 장수(수명이 김)를 베풀지 않아서 그 훌륭한 포부의 한 두 가지도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오호! 이는 운명이 아니겠느냐.
예전에 공과 나는 동심(한 가지 마음)이요, 막역하였는데 우리 당에 신익중(申翼仲)과 셋이서 시국을 개탄하여 울먹였거니와 익중(翼仲)은 병석에서 우리에게 간곡히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국사는 그래도 힘써 바로 해야 합니다. 두 분께서 노력하십시오.” 아! 나와 공은 근심으로 지세우면서 수년간 노심초려(勞心焦慮:마음으로 애썼다) 애쓴 사이엔 그래도 나라 일에 얼마간 보탬이 있었고, 별세한 신익중(申翼仲)의 부탁에도 조금이나마 부응하였다.
그러나 공이 세상 떠난 후로 사특한 소론의 주장들이 극성을 부리더니, 마침내 노론대신들이 왕세제(후에 영조)를 선동하여, 역모를 꾀한다는 참소를 경종(景宗:장희빈의 소생)에게 올려서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이건명(李健命)의 4대신이 누명으로 죽게 하였다.
이 같은 큰 화가 하늘에 가득하고 인간의 윤리도덕 없어지니 국가는 위태로워졌다. 회상하면 예전에 우리가 목숨 걸고 붙잡으며 애간장 태우며 지키려던, 나라 위한 명의(名義:명분과 의리)와 윤리(倫理:인륜을 다스리다)의 공이 일락천장(一落天丈) 여지없이, 천길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공과 신익중(申翼仲) 두 분의 영혼은 저승에서도 얼마나 쓰리고 저리랴. 이 늙은 몸은 남아 있어서 슬픔을 구할 곳도 없으니 내한이 끝이 있으랴.
이에 명(銘:새김)을 써서 이르도다.
猗歟玄翁(의여현옹) : 아름답도다 현옹
間世名賢(간세명현) : 세상에 나기 드문 명현이여
公承厥緖(공승궐서) : 공은 그 실마리를 이어 받았으니
儘有淵源(진유연원) : 모두 연원이 있음이니라
精粹之姿(정수지자) : 맑은 정기 순수한 천품에
輔以學力(보이학력) : 학문의 깊이로 더욱 빛나도다.
如彼良玉(여피양옥) : 저와 같은 양옥에
而加磨琢(이가마탁) : 갈고 닦기를 더하였으니
潛心理妙(잠심이묘) : 마음깊이로 깨달은 이치가 오묘하고
識解超卓(식해초탁) : 인식하고 이해함이 탁월하며,
論說沛然(논설패연) : 논설은 큰비 내리듯 상쾌하여
氷解凍釋(빙해동석) : 문제와 갈등을 얼음 녹이듯 풀었도다.
世敎之衰(세교지쇠) : 전통의 가르침이 쇠퇴하고
詖淫滔滋(피음도자) : 사악함이 날로 성함에
距闢之責(거벽지책) : 이단을 물리치는 책임을
非公伊誰(비공이수) : 공이 아니면 누가 다하였는고.
憤不顧身(분부고신) : 의분으로 내 몸 돌보지 않고
隻手障川(척수장천) : 한손으로 계천을 가로막으며,
扶植正論(부식정론) : 정론을 북돋아 심은 그 공로는
功存斯文(공존사문) : 우리 유도사회(유교를 가르침으로 하는 사회)에 살아 있도다.
象咻羣猜(상휴군시) : 뭇 소인배들의 지껄임과 시새움
甘心齮齔(감심기츤) : 씹을 듯 미워하며 벼르는 작태를 달게 받아 참았으니
行止非人(행지비인) : 저들은 언행이 사람이 아니라
壁臧奚尼(벽장해니) : 기회 보며 아첨하는 니당(소론)의 무리로다.
深結主知(심결주지) : 임금님의 지우(인격이나 학식을 인정함)가 깊었기로
晩躡雲衢(만섭운구) : 늦게 높은 벼슬에 올라
金華細氈(금화세전) : 꽃무늬 수놓은 전방석에 앉아서는
講論唐虞(강론당우) : 당과 우 나라의 선정을 강의하며
漢庭分憂(한정분우) : 조정의 근심을 임금과 나누었도다.
文翁闡化(문옹천화) : 우암(尤菴)선생이 도학을 밝혀 놓음이여,
赤幟訶壇(적치가단) : 학계에 새로운 표지가 눈에 부시니
一戰定霸(일전정패) : 공은 한번 싸워서 올바른 자리를 굳히었도다.
弭節逡巡(미절준순) : 임금과 사이가 느슨해지면 웬일일고 머뭇거리고,
居寵若驚(거총약경) : 총애를 받게 되면 놀란 듯 삼가기를 더하는 사이
歲月腕晩(세월완만) : 내일이 안 보이는 암담한 세월에
憂時激昻(우시격앙) : 때로는 울분으로 울부짖었으나
丹哀鬱鬱(단애울울) : 오로지 일편단심 미어졌도다.
一堅沉沉(일견침침) : 몸에 병이 깊이 스며들어서
氣返山河(기반산하) : 그 생명의 기운이 산하로 돌아가니
痛纏士林(통전사림) : 사림의 가슴마다 저리며 아픈 슬픔
人生而死(인생이사) : 사람이 한번 살다 죽음에
全歸盖寡(전귀개과) : 사명을 다한 보람이 온전하긴 드문 것.
公受天賦(공수천부) : 공은 천부(선천적으로 타고남)를 받아
先立大者(선립대자) : 먼저 대본(큰 근본)을 세우고
彛倫賴之(이륜뢰지) : 이로써 인간의 윤리도덕을 존속시켰으니
百世有辭(백세유사) : 백세에 공을 우러르는 찬사가 있으리로다.
我銘不諛(아명불유) : 나의 명(새김)에 아첨 없이
揭示來斯(게시래사) :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도다.
병산 이관명 지음
생질 윤득화 글씨
지수재 유척기 전자
● 이관명(李觀命) : 1616~1733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영조시대에 좌, 우의정을 지낸 분으로 신임사화 때에는 평북 덕천에 유배되기도 하였고, 검재공보다 8세연하이고, 선생의 따님이 검재공의 장남 정로(正魯)의 며느리이다.
● 윤득화(尹得和) : 1688~1759 공의 생질로 자는 덕휘(德輝)이고 해평인으로 현감을 지낸 윤상명(尹商明)의 아들이다. 영조시대에 사관으로 있을 때 우암과 윤증을 두둔하는 임금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다가 삭직되었고, 대사헌이 되었을 때는 송인명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후에 예조판서에 기용되고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당대에 명필로 유명하였다.
● 유척기(俞拓基) : 1691~1767 자는 전보(展甫)요, 호는 지수재(知守齋)이고 시호는 문익(文翼)인데, 기계인으로 신임사화로 유배되었다가 영조1년에 풀려나와 우의정에 오르고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