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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불행박멸의 투트랙 전략>의 줄거리:
'투 트랙'(two-track)이란 본래 승마용 말을 훈련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인 '이제적운동'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말이 달릴 때 몸을 휘게 하여서 앞발의 궤적과 뒷발의 궤적이 다르게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주로 '전략'이라는 단어와 함께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지요. 우리의 일상은 본래부터 투 트랙으로 영위되었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궤적과 몸의 궤적이 따로 가야만 합니다. 이 궤적의 일치가 내가 겪는 모든 불행의 원천이지요.
불행박멸의 투트랙 전략
(시편 9:1~20)
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불행박멸의 투 트랙 전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불행박멸의 투 트랙 전략’
제가 여러분을 부자 되게는 못 해드립니다. 예수님 잘 믿으면 재정적으로 풍족해진다는 약속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건강하게만 살 수 있도록 해드린다든지,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다는 약속도 못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든지 안 되든지, 병이 나든지 말든지, 세상적인 일들이 형통하든지 불통하든지 여러분의 삶에서 바퀴벌레 박멸하듯이 불행을 박멸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박멸이라는 말이 좀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십자가 복음이 제시하는 투 트랙 전략으로 삶을 살면 불행은 박멸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을지라도 투 트랙 전략으로 살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을지라도 투 트랙 전략으로 살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불통하게 되었을 때라도 투 트랙 전략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 복음인 이유입니다.
투 트랙이 아닌 원 트랙 삶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구걸입니다. 구걸하면서 사는 동안에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원 트랙이나 투 트랙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몸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같이 있는 것이 원 트랙의 삶입니다. 몸이 직장에 있을 때에 마음도 직장에 있습니다.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따라갑니다. 몸이 접촉하는 것을 마음이 같이 접촉하고, 몸이 만나는 대상을 마음도 같이 만납니다. 이런 원 트랙의 삶을 살 때에 나타나는 특징이 구걸입니다. 마음이 구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와 함께 있는 이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있게 됩니다. 아내와 손을 잡고 이야기한다면 몸을 따라 마음도 아내의 손을 잡습니다. 이러한 원 트랙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마음이 아내에게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은 말씀드린 대로 공백의 상태입니다. 마음은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져 있고 인간은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를 제일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실질적으로 몸의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죽음을 더 무서워하는 이유는 원 트랙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몸이 있는 곳에서 비어있는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내와 만나는 동안에 아내에게 구걸을 합니다. 내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채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구걸을 합니다. 갓 태어난 어린 자녀를 끌어안고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빈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주기를 구걸합니다. 회사에 나갈 때에도 마찬가지로 몸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같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회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회사에서 마음의 기쁨거리나 만족거리가 없을까 생각하고 그것이 승진이나 성과나 사장님께 잘 보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원 트랙 삶의 특징인 구걸함이 우리 모든 인생의 순간에 불행의 원천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몸이 만나는 상황에 대해서 마음을 지불할 잔고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좋은 물건을 봐도 지불할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가난한 것입니다. 몸이 가 있는 그 어떤 곳이나 몸이 만나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지불할 잔고가 없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동일하게 마음을 주셨는데 이들은 마음을 어디에 썼기에 몸이 있는 곳에서 지불할 수 없게 된 것일까요?
마음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몸이 있는 이 땅에서는 마음의 잔고가 남아 있질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하여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천국에 가있는 동안에는 몸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이 사람은 불행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풍랑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신 것도 투 트랙 전략에 의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천사의 얼굴을 띌 수 있었던 것은 삶의 투 트랙 전략 때문입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지 않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우편에 앉으신 인자를 보고 성령이 충만하여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은 마음이 하늘에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투 트랙(two-track)’이라는 말은 승마 용어라고 합니다. 승마용 말을 훈련시킬 때에 말이 잘 달리기 위해서는 단순히 발만 빨라서는 안 됩니다. 척추와 허벅지를 비롯해 모든 곳이 잘 발달해야만 합니다. 이때에 투 트랙 훈련인 이제적(異蹄跡)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말이 서 있을 때에 머리와 어깨 부분을 고정시키고 엉덩이를 우측으로 살짝 빼게 합니다. 그 상태에서 곧바로 달리게 하면 앞뒤 발자국이 겹치지 않고 다르게 남습니다. 말이 곧 바로 달리면 발자국은 하나의 궤적을 그리게 됩니다. 그러나 투 트랙 훈련을 통해 머리와 허리의 방향을 치우치게 하면 앞뒤 발자국의 궤적이 겹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의 몸체를 휘게 만들어서 직선으로 달리게 하면 두 궤적이 남기 때문에 이것을 투 트랙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투 트랙이 삶의 모든 분야와 연계되며 전략으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엔안보리의 결정에 따라서 미국과 함께 북한에 압박을 가합니다. 그러나 이 압박은 대화를 위한 것으로서 압박과 대화를 병행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느 당의 대표는 이런 무식한 전략이 어디 있냐며 반대를 합니다. 대화를 하려면 대화를 하고 압박을 하려면 압박을 하라는 것입니다. 원 트랙 전략으로 어느 하나의 트랙만을 사용하라는 것인데 문재인 대통령은 투 트랙 전략을 사용합니다.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몸이 달리는 궤적과 마음이 달리는 궤적이 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1~6절까지는 다윗이 투 트랙으로 살았던 자기의 과거의 삶에 대해서 회상을 합니다. 7~12절까지는 이 투 트랙의 삶이 다윗 자기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은총임을 이야기합니다. 삶의 불행을 박멸하는 보편적 원리라는 것입니다. 13~20절까지는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또 다시 투 트랙 전략을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시편 9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삶의 투 트랙 전략입니다. 이 투 트랙 전략을 통해서 삶의 불행이 어떻게 박멸되었는가를 노래하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모든 자들에게 공히 주신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동침했을 때에 사용했던 히브리어 ‘야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지금 어려운 상황에서 투 트랙 전략을 통하여 극복하겠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7~11절 사이에서 투 트랙 전략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라는 말보다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피난처’라는 말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피난처가 마음이 가야 될 방향입니다. 또한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라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처한 곳에 환란이 주어지고 삶의 무게에 질식할 정도로 압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마음이 그곳에 남아서 하나의 트랙을 형성해서는 안 됩니다. 몸이 처한 곳에 있으면서 그 환경을 어떻게든 극복함으로서 만족하고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몸을 빠져 나와 다른 트랙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곳을 피난처이자 요새라고 하였습니다.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원 트랙의 삶을 살아가던 제자들은 몸이 있는 풍랑 속에 마음도 같이 두었기 때문에 풍랑이라는 환경에 짓눌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환경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마음은 몸과는 전혀 다른 트랙을 밟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도착하셨습니다.
10절부터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를 의지하는 것이 곧 주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제가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분에게 나 개인의 삶의 형편에 대해 구체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예로서 돈이라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돈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의지합니다. 돈이 있으면 내가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돈이라는 이름을 알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대상에 대한 이름을 아는 것이 오늘 본문의 ‘야다’라는 단어가 뜻하는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이름을 안다는 것과 의지한다는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로만 마음이 채워질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까요?
우리는 돈이 없고 건강을 잃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오래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건강이 회복되기 전에는 기쁘지 않고, 돈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기쁘지 않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겨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만 자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기쁘고 만족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자녀의 이름보다 백배 천배나 많이 불렀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의지할 곳을 향하여 움직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트랙입니다. 그러나 몸이 만나는 곳에서 의지처를 찾는다면 구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마음으로는 몸이 있기 때문에 접촉할 수 있는 것들로부터는 만족과 배부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있기 때문에 접촉하는 것들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구하고 다닙니다. 재벌들을 보면 있는 돈도 부족하게 여겨서 돈을 더 벌려고 애를 씁니다. 이들은 돈을 의지하면서 돈에게 기쁨과 만족을 구걸하며 다니는 것입니다. 재벌일지라도 ‘기쁨 한 푼 주시오, 만족 한 푼 주시오’라고 구걸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 한 푼이 없고 집 한 칸이 없어도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처로 삼게 되면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마음은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되고 몸이 있는 곳에도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11절에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시온에만 계신다고 했을까요? 시온은 곧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 예루살렘 성에만 계시지는 않습니다. 앞서 본 시편 8편 1절에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온 지면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온에는 법궤가 들어있는 지성소가 있고 회막 앞에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그 번제단에서는 오늘도 아침과 저녁으로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다른 곳에 있지만 몸이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나를 둘러쌌거나 돈 문제가 있거나 건강 문제가 악화되었거나 목회가 어려워졌다면 마음은 삶의 무게라는 압제를 당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 절대로 몸이 처한 곳에 마음이 함께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몸이 있는 환경에 잠식당했다면 이때에 예루살렘의 번제단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번제단에서 일 년 된 양이 괜히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때문에 죽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담고 있는 마음이 죄악이고, 가정에서도 배우자나 자녀나 돈을 담았던 마음이 죄악입니다. 이러한 죄악 된 마음을 대신해서 일 년 된 양이 죽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내 마음에 들어온 나의 인격이 어린양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겠다는 약속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번제를 통해서 세상이 스며든 마음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빈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할 때에 결코 버리시지 않고 그 마음을 채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몸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서 머물 때에, 마음은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만족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몸 또한 태초부터 정해진 본래 트랙을 달려갈 수 있게 됩니다.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몸이 장악되면 말과 생각도 장악되어서 본래 몸이 달려가야 할 트랙을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행 박멸의 투 트랙 전략입니다.
십자가는 상번제의 완성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몸이 접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몸이 접한 것들에서 기쁨과 만족을 구걸하려는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체질 때문에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체질은 곧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 지속되는 체질의 효과를 막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마음은 십자가 너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활동영역으로 가야만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공생애의 트랙을 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에 마음에 걱정이 되지만 이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운 것은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임을 아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가려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마음에 담으려고 하는 것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가는 방법은 단순하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돈에 의해 점령된 나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돈아 물러가라, 돈아 떨어져 나가라, 내 마음을 비워야 되겠다고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으로 가득 차 버린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가득 찬 마음을 비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과장님이 나를 윽박지르지만 과장님으로 찬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담은 복음은 우리 마음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본래의 트랙을 가게 되면 몸 또한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뜻을 따라 본래의 트랙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몸과 하나가 되어서 한 트랙을 달리게 된다면 비어있는 마음은 몸이 만나는 것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구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내에게 구걸할 때에 아내는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게 됩니다. 아내나 자녀나 돈은 그 마음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몸이 만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철저하게 마음은 십자가 너머 부활과 승천의 트랙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몸은 몸대로 하나님의 뜻의 트랙을 따르고, 마음은 하나님께 머물러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투 트랙 전략적 삶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어떤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도 해답은 단순합니다. 내 마음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트랙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해주시고, 그럼으로써 복잡한 문제에 얽혀있는 내 몸에도 본래의 계획하신 하나님의 트랙이 열리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