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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2장 23-25절
사람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시니라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밝히면서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근원이심을 밝힙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도 밝힙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받아 들였는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들은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로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자가 아니라, 들은 자로 있었고 그래서 기다리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모든 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 의하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어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13절의 말씀을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있지만 혹 그 가운데 깨닫는 자가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받아들이는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혈통에 의해서도 아니고,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의해서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증거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세례 요한의 경우 그 사명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세례 요한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사명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두 제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을 증거 하여 그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였는데, 안드레의 경우는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믿기 위해서는 들어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하지만, 전파하는 자가 궁극적인 원인이 아닌 것은 그들 역시 보내시는 자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롬10:14-15 참조).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표적 자체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표적이 있으면 더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표적도 믿음의 궁극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 갈릴리 가나 혼례를 통해 예수님께서 첫 표적으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셨지만,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지만, 나아가 제자들은 그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믿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지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종 기적을 행하시고 난 뒤 기적에 대하여 말씀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와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먹고 배부른 까닭에 그리스도를 찾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나 혼례 잔치에서의 첫 표적 이후 예수님은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이 오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원리, 돈의 원리를 보시면서 소위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시편에 있는 한 말씀을 기억하였는데, 시편 69편 9절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즉 예수님의 행보는 주의 집을 위한 참된 열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행보에 대하여 이렇게 따집니다. 요한복음 2장 18절입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경우 표적을 구한다고 말한 것처럼(고전1:22) 이런 일을 행할만한 인물인지 표적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어지는 19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2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전을 헐고 난 뒤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저들에게 진정한 표적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46년 동안 지은 이 성전을 어떻게 네게 3일 만에 일으킬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마16:4).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표적 중의 표적, 모든 표적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자 하는 표적이 무엇인가 하면 요나의 표적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의 표적이란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흘 만에 일으킨다는 것은 바로 이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표적 중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지만 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보이는 건물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얼마든지 표적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그는 참 사람이기도 하시지만 참 하나님이기도 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표적을 보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 다시 말해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어떤 놀라운 표적을 보고서 그를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습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기에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있을지라도 그 믿음은 매우 연약한 믿음, 질적으로 낮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요한복음 2장 11절은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리고 그 믿음은 요한복음 1장에서 그를 믿고 따르는 믿음보다 한층 나아진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연약한 믿음이요, 질적으로 낮은 믿음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저들의 믿음이 좀 성숙하다고 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2장 2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누가복음 24장 45절에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 이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얼마 전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이 주님께서 전에 하셨던 말씀들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주님께서도 추가적으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많은 것을 명확하게 깨닫고 믿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순절에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더욱 더 많은 것들을 아주 분명하게 깨닫고 믿을 수 있었던 겁니다(매튜 풀 주석 참조). 즉 그 전에도 믿었고 그 믿음은 표적으로 보고서 믿었지만, 그 믿음은 매우 연약한 믿음, 질적으로 낮은 믿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믿음이란 것입니다. 그런 믿음조차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되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역사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첫 표적 이후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거기서 성전 청결 사건을 일으키신 후 유월절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표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표적은 앞서 밝히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표적보다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표적을 가리키기 위한 표적이요, 그 표적을 향하도록 하기 위한 표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 없이 표적 자체만을 주목한다면 요한복음 6장에서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를 찾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에 대해 참된 믿음이냐, 아니면 그릇된 믿음이냐에 대한 논쟁도 있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할 때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이 됩니다.
일단 앞서도 말했지만 표적 자체만 보고서 믿었다고 할 때, 그리고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주어진 믿음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표적을 통해 더 나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큰 착각입니다. 첫 번째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또 그것을 통해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믿음을 거짓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적 자체만으로, 다시 말해 말씀이 없는 표적 자체만으로 믿음을 논할 수 있는가 할 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없는 표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없는 표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금도 말했지만 제자들은 첫 표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을 보았고, 그것을 통해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이 믿음을 거짓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많은 사람들 중 일부에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할 때 이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향하도록 하는 믿음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제자들처럼 그의 죽음과 부활 때까지,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 가운데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기까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바에 앞에 믿음을 주셨다고 할 때는 결코 거짓된 믿음, 그릇된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4절 전반부를 보시면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탁하지 아니하셨다는 단어는 23절에서 믿었다고 말하는 단어와 같습니다. 믿는다, 혹은 믿기 때문에 자신을 맡긴다는 단어인데, 많은 사람들은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저들을 믿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들을 믿지 않았는가? 왜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았는가? 비록 인성을 취하셨지만 죄는 전혀 없으신 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처럼 온전한 분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사람에게 자신을 맡길 필요가 있는가? 없습니다. 더구나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하나님께만 자신을 맡기시는 분으로 계시지 사람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들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4절 후반부와 25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믿지 않았다, 맡기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인간이란 어떤 존재냐에 대한 관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고 할 때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들의 영혼이 어떠한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23절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저들이 믿었다고 할 때 그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지 아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아셨다고 한다면 믿음이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결코 자신을 맡기실 수 없는 대상이라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지도 않는 자들에게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된 믿음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저들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거짓된 것, 일시적인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할 때는 저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믿고 자신을 맡길만한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요,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사람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여러분, 많은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들이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제자들의 행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성경은 믿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첫 표적을 통해서도 믿었다고 되어 있고, 이후 예수님께서 이런 표적 저런 표적을 행하실 때 믿었다는 말 자체는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더욱 분명해져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실 때 저들은 떡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떡이 없다는 것 때문에 수근 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8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그리고는 오병이어 사건, 칠병이어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 8장에서는 다음의 말씀도 덧붙여져 있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8) 즉 믿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 믿음도 연약하고 여전히 무지한 믿음일 뿐인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정작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 의해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을 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자 않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릴 뿐만 아니라 누군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는 자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부인하는 것을 맹세했고, 저주하면서까지 맹세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기에 앞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고 요약하기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고 하십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 24장 45절에서는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하실 때 어떤 질문을 합니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1:6)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상의 나라에 대해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믿음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듣지만 승천하시는 바로 그 앞에서 지상의 일을 물을 정도로 무지한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이 알려주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입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렘17:9).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돌 같이 굳은 마음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하게 되었지만(겔36:26) 여전히 남아 있는 이 부패성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잠언 21장 2절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외적 행위로 보자면 정직한 것 같아 보이지만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저들의 거짓을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불신하게 되고, 맡긴다고 하면서도 전적으로 맡기진 않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 겁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예수님께서 믿고 자신의 몸을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아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참된 믿음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믿음, 거짓된 믿음인지 다 아십니다. 특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신다고 할 때는 사람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알 수 없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그런 사람의 속에 있는 것조차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부패성을 알고 계시기에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그 믿음이 얼마나 연약하지, 그 믿음이 얼마나 무지한 믿음인지도 다 아십니다. 겉으로는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사람은 믿음이 좋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까지 다 살피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누구를 믿고 자신을 맡기겠습니까?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앞에서 미리 설명한 것처럼 예수님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즉 누군가 사람에 대하여 소개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조금 전에도 말한 것처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으로만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근본적으로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며, 때문에 맡길만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의 증언을 예수님께서 굳이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세례 요한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사명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장 7절에서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이런 말씀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31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1-39) 세례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7절에 근거하자면 그를 통해 믿게 된 자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에서는 그런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사실을 거짓이라고 말하게는 게 아닙니다. 앞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뒤에 있는 사실이 더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놓치고 앞에 있는 사실만 붙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참된 원인자가 누군지를 놓치게 됩니다. 그 말은 앞에 있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 사실이 아닌 것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까지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누가 예수를 믿는가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대상이라고 가르치며, 그리고 그 대상은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을 제외시키고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만 남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만 남게 됩니까? 믿음에 대한 강조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보다는 믿는 자에게 강조점을 두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믿음 자체가 공로가 되는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혈통도 아니고, 육정이나 사람의 뜻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 주어지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요한복음 5장의 내용으로 와서 세례 요한의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고 할 때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게 이것입니다. “...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요5:3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즉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오셔서 행하시는 모든 역사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증거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표적, 기적의 역사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세례 요한을 통해 세례를 받을 때 친히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통해 알리신 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면서 나에 대하여 증거 하셨는데, 그것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이루신 모든 역사들이 세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 사역자가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지만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의 증거 때문에 믿음이 자라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의 증거를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도구를 사용해서 일하신다는 측면에서 이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더 사실로 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심지 않았는가? 심었습니다. 이것을 심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것도 거짓입니다. 아볼로의 경우 물을 주었습니다. 이때 아볼로가 물을 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짓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물주는 이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주체가 아니라 그들은 주체이신 하나님의 도구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주체가 누구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없이 많은 표적을 보더라도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표적 중의 표적,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건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표적 자체만 주목하는 것이지, 그것이 참된 믿음과 관련해서 결과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이 얼마나 거짓된지, 그 믿음이 얼마나 일시적인지, 그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그 믿음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사람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으로도 사람에게 의탁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우리에게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믿고 맡기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도 할 수 없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속은 알 수 없지만 나무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판단하는 것처럼 사람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 신뢰를 쌓고 의지하기도 하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속기도 하는 일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어떠한 사람이든 우리가 믿고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믿고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오셔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을 맡기신 것처럼 그의 몸 된 교회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모든 것의 주체가 누구신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그래서 내 옆에 하나님이 주신 좋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만 주목되고 하나님이 주목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참되기 인정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모든 것이 무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시하라는 게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또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하지만,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신다고 할 때 우리는 바로 그런 주님 앞에 서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연약한데 연약하지 않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무력한데 무력하지 않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만 맡겨야 하는데, 주님 아닌 다른 것에 우리 자신을 맡겨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 맡기는 것처럼 하면서 다른 것에 우리 자신을 맡겨서도 안 됩니다. 전적으로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더 이상 의지이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하기 때문에, 무력하기 때문에 세상을 의지합니다. 물질을 의지합니다. 사람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 자신을 알고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을 주시도록,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부족한 것을 채워 결국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 되기까지 하나님께만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