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은 쉼없이 흘러 세월의 강이된다. 그 무심한 물결을 타고 사람들은 유심한 나날을 사느라고
얼마나 각축하고 고달픈가.
그런 인간사들은 초월적 종교관으로 볼 때는 더없이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삶의 환경과 여건이 나쁠수록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은 고통스럽고 급박해진다.
아무리 애를 써도 굶주림을 면할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서
초월적 종교관은 얼마나 허망하고 설득력 없는 객소리일 뿐인가?
또한 인간 세상의 모순 많고 갈등 많은 삶이 결코 무가치할 수만은 없는 것은
인간은 그 괴로움과 고달픔 속에서 역사를 잉태시키고 사회 진실을 발현시켜 왔던 것이다.
어쩌면 초월적 종교관도 그런 소산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은 현미경적 구체성으로 그리고 망원경적 총체성으로 그런 인간 세상을 비추고 밝히는 등불은 아닐까.
혹자는 지나친 의미 부여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현대사는 곡절도 많았고 변화도 많았다. 그래서 어려움과 아픔도 그만큼 많았다.
소설로 써야 될 의미가 큰 것도 그 까닭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현대사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분단의 강화 속에서 경제발전을 이룩해 낸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의 강화와 경제발전, 그 두 가지는 충돌을 면할 수 없는 절대 모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어려운 상황을 헤치며 오늘에 이르러 있다.
그런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오늘의 경제적 성취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아래에서는 수많은 우리들이 고통스러운 몸부림으로 서로 뒤엉키며
거대한 기둥들이 되어 떠받쳐 왔음을 본다.
그 기둥들은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과 눈물이 점철된 거대한 인간의 탑이다.
그건 숨김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그 노역들은 단순히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땅의
비극을 풀 열쇠가 될 수도 있음을 감지케 하기도 한다.
'한강'은 '아리랑'처럼 그 무대가 넓다. 세계 여러 나라로 취재를 다니면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이국땅에 뿌린 피와 눈물을 새롭게 실감하며 마음 숙연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분단 강화의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평생에 걸친 피해를 입어야 하는 뒷세대들의 이야기도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팠다
2001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