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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순의 수필세계
- 바이오필리아와 토포필리아의 교직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문학은 언어를 통해 구축된 삶의 실상이다. 그 안에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강한 의식의 주체들이 선한 지향성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몰입시켜 그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고자 한다. 포천의 작가 이운순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수필집 <쭉정이의 반란>을 내면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은 그녀는 이제 자신만의 독특한 칼라를 드러내는 데 몰입하고자 한다. 몰입해서 하는 일이란 가치 있는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는 인간은 어느 하나에 미쳐야 한다고 했다. 이운순의 수필 안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 물론 그 세계에는 압축된 삶의 진한 영혼이 서려 있다.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이운순은 삶의 근원을 찾아나선다. 바로 바이오필리아와 토포필리아의 환상적 교직이다. 작가는 유년시절을 통해 자신만의 인생론을 펼치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영역의 그 순수와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자조문학인 수필의 매력을 힘껏 발산한다.
하버드대학의 쿠퍼랜드 교수는 훌륭한 수필가는 구경꾼이요, 방랑자요, 게으름뱅이여야 한다고 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혼자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인연이라는 끈을 통해 남과 나를 하나로 묶더라도, 열정이 없으면 그것은 애착에 지나지 않는다. 이운순의 시선에는 온갖 사연이 담긴다. 사연과 일종의 인연맺기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따라서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뜻한 둥지를 찾아 나선다. 그 둥지의 실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열렬히 집착하거나 몰입하는 것은 둥지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이운순에게 그 대상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소박하게 자기 본연의 자세를 다지겠다는 생의 가치다.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위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튼튼한 삶을 더 튼튼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화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운순이 세상에 내어 놓는 <쭉정이의 반란>은 아마도 바이오필리아와 토포필리아적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집이라는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될 것 같다. 이 수필집은 생명과 향토의 교직이라는 나름의 칼라를 가지고 있어서 더욱 의미 있다. 수필은 제한된 지면 안에 주제를 내면화해야 하고, 형상화해야 한다. 이운순의 수필은 적절한 변주와 다양한 전개의 표현 기법을 통해 일정한 문학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타 수필집의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제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지는 이운순의 수필세계로 빠져보겠다.
II. 삶의 흔적과 그림자
수필은 보다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일상에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업이다. 수필의 윤기는 문학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이운순은 수필가이면서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이운순에 있어서 수필을 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다. 그녀는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영원히 기억될 무엇인가를 위해 삶의 현장을 누비며 열정을 바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자기 이상으로 사랑한다. 이운순이 문학에 심취하는 것은 자아실현의 한 방편일 것이다.
그녀는 쉰둥이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머리숱이 아주 적었고 볼록한 뒷박이이마에 훌러덩 벗겨진 머리 때문에 ‘붉은 언덕’이라 놀림을 받고 자랐는데, 그런 자신을 ‘쭉정이’라 표현했다. 학교시절 음악과 작문 시간을 좋아했고, 책 읽기를 좋아하면서 문재를 키웠고, 방송대 국문과에 적을 두면서 수필가의 꿈을 키우다가,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에세이문예 부설 문예대학, 문학신문사 문학연수원 수필반, 정독도서관 수필반, 포천문인협회 포천문예대학 문예창작 과정 등 끊임없이 문학을 공부하고, 지금도 여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녀는 그런 노력의 결과로 첫 수필집 발간으로 청향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등단 후 본격수필토론회 대상작가로 그녀의 문학과 삶은 크게 조명받았고, 이온겸의 문학방송에도 출연하였으며, 경기도문예진흥기금, 포천시문예진흥기금 수혜자가 되면서 수필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수필가 이운순은 한학을 하신 선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아 누구보다 예의 바르고 올곧고 반듯한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른 앞으로 지나가지 마라’‘누워 있는 사람 타넘지 마라’ 등의 사소한 가르침부터 평소의 언행에 대해서도 엄격한 지도를 받았다. 수필을 쓰면서도 늘 지난 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인생을 보람있고 가치있게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 수필다운 수필 쓰기가 어렵다고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히 수필을 써가는 부지런한 작가로서 저력을 발휘하여 오히려 젊은 작가들을 게을러 보이게 한다. 산업화의 물결로 인간이 기계화되고 인구급증에 따라 기존의 가치관도 많이 변모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선비 정신이 그리운 시대다. 이운순은 포용력을 가지고, 의젓하게, 베풀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후배 작가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III. 이운순의 수필세계
1. 생태, 생명과 평화, 바이오필리아에 대한 애착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수필 <슬픈 해바라기>는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설득적 지성이 담겨 있고,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운순의 수필을 관통하는 한 사상은 생태적 상상력이인간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 기반한 지각이 인간의 환경에 대한 선호와 이상향, 더 나아가서는 공간을 조직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바로 환경-인간 사이의 관계와 미학론인 바이오필리아다. 초록 이미지의 축제 공간이 베푸는 자연친화적 경향은 이운순 수필의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그녀의 수필은 녹색 대자연이 베푸는 잔치를 인생과 결부시켜 의미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식물성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문학은 절실함에서 비롯되고, 그를 자양분으로 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생명에 대한 절실함, 평화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결실의 조건이 충족된다. 많은 수필들이 생태문제와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데서 그녀의 생명존중사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문학은 한 시대의 구성원이 지닌 고유한 정신이며 체온이고, 도도한 흐름이어야 한다. 그 시대와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구성원이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위해 자기의 희생을 소진하며,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의 하나이기에, 문학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운순은 한반도의 휴전선 부근 포천에 살고 있는 작가로서 누구보다도 분쟁에 민감하다. 작가는 반 고흐의 명작 ‘해바라기’ 그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화로운 삶에 대한 인류의 소망을 전해주고자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이운순 글을 읽으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세계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욕심이 부른 참상이라는 지적이 날카롭다. 전쟁은 악이라는 그의 지론은 설득력이 강하다. 우크라이나를 열렬히 응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곧 우리 모두의 소망이 아니겠는가.
반 고호의 명작 해바라기그림이 아니라도 커다란 해바라기그림액자는 거실 벽면을 장식한다. 해바라기는 보기에도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행운을 불러준다는 설까지 더해 해바라기 그림과 함께 해바라기조화 또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뿐인가. 세계 곳곳 주방에 내집 싱크대 양념 칸에도 해바라기 식용유가 자리해있다. 대부분 그들 나라 너른 들에서 수확한 해바라기일 것이다. 그 황금빛 해바라기가 지금 미소를 잃고 슬픈 해바라기가 되었다. 전장田莊을 떠나 戰場으로 떠난 농부들이 다시 들판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슬픈 그림이 되었다.
- <슬픈 해바라기> 중에서 -
이 수필을 감상하는 하나의 포인트는 국수주의, 민족주의가 우리 삶과 사람의 감수성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전쟁 이후 어떤 삶의 전략이 가능한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러시아-우크라니아 전쟁은 ‘평화 따위는 없다.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번영뿐이다’는 슬로건 아래 독재자 푸틴이 다른 나라와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감수성을 통째로 바꾸어 낸 비극의 드라마다. 소위 말하는 ‘인간의 죽음과 속물화’의 경향이 스펙타클한 사회와 맞물려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통째로 우리가 어떻게 ‘인정 사정 볼 것 없다’의 상태, 폭력과 야만의 사회로 진입하였으며, 이 이후 삶의 양식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같이 고민해 보려고 하는 데에서 이 수필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바라기가 ‘전장田莊을 떠나 戰場으로 떠난 농부들이 다시 들판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슬픈 그림이 되었다.’는 표현은 이 수필의 압권 중 압권이다.
순간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각고의 작업을 우리는 자아 성찰이라 한다. 수필을 원숙한 인생의 문학이라 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전 세계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전쟁의 참상에서 평화사상을 관조하고 거기에서 공생공영의 길을 찾아보는 이야기를 주제로 수필화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른 비판적 사고는 특히 대상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옳고 그름을 따져 보는 태도는 잘못된 기존의 개념이나 관념을 새롭게 바꾸는 좋은 방법이다. 이 수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글에는 작가정신이 번득이고 있다. 고장난 세상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작가의 외침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곳곳에 수두룩하다. 삶에 부딪쳐 체득한 여러 가지 역사적, 시대적 상황들을 외면하지 못해서 이운순은 <슬픈 해바라기>를 자신의 작품 속에 투입시켜 반전사상으로 잘 구체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도 전쟁을 겪었고,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일어섰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대목이 좋았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응원에 박수를 보낸다. 인도적 삶의 실천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작가정신은 높게 평가된다.
거정을 안고 2박 3일을 비웠다가 돌아온 집. 그동안 물 한 모금 못 먹었을 테니 녀석에게 제발 움직여달라고 할 염치도 없다. 죽은 듯 고요하던 녀석이 내 걱정을 알았을까. 미세한 움직임으로 나를 안심시키더니 다음날부터는 아예 내 앞에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생을 다했어도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설마 제 스스로 흙에 스며든 건 아니겠지. 궁금해도 화분을 뒤져 알아볼 용기가 내겐 없었다. 채 한 달도 못되는 시간을 내 마음에 들어와 사진 몇 장, 점점이 작은 배설흔적만 남기고 간 달팽이, 주자께서 이르시던 ‘부빈접객’을 향한 후회를 남기고 떠난 달팽이를 나는 깊이 애도하노라.
-<달팽이를 애도하다> 중에서 -
그녀의 바이오필리아는 위 작품에서 절정을 이룬다. 종적을 감춰버린 ‘달팽이’ 한 마리에 대한 작가의 애도는 단순한 ‘애도’를 넘어 생명존중사상을 크게 부각시킨다. 이미 그런 사상은 ‘달팽이를 애도하다’에 나타나 있다. 달팽이의 죽음도 아니고 사라져버린 것이 애도의 대상인가 하는 것은 논외로 치고, 발단부에서 작가는 ‘녀석이 떠나고 텅 빈 벌판 같은 공허만 남았다’고 하면서, 녀석을 보내고 후회만 남은 상황에서 ‘부접빈객거후회’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달팽이의 생존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를 반성한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물질을 통해 획득되고 정신에 의해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면목은 자연의 내부에 그 뿌리를 서려 두며, 이를 근간으로 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운순의 문학은 이런 생명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이 작품은 달팽이를 지켜보면서 가슴에 서리는 서정어린 정감을 수필화한 것이다.제주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문주란에서 달팽이를 발견하고, 작가는 ‘너무 놀라 탄성이 터져 나왔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그녀가 얼마나 생명을 경외하는지를 말해준다. 순수로의 눈뜸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달팽이를 애도하다>란 수필에서 바이오필리아적 가치를 크게 고양시킨다. 그녀의 생명존중 정서는 자연과 밀착되어 있다. 이는 자연과 동화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인 것이다.
우리는 막연한 그리움으로 대자연을 동경하고 찾아 떠난다. 여러 해 전 다녀온 뉴질랜드 여행길이었다. 일정에는 있었지만 갑작스런 눈발로 통제되어 갈 수 없었던 밀포트 사운드와 마운트 쿡 관광이 불발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내 생전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를 다시 가볼 수 있을까. 호주 블루마운틴의 그 거대한 산야를 바라보면서 뉴질랜드의 아쉬움이 더했다. 밀포드 사운드호수를 다시 갈 수 있다면, 마운트 쿡 트레킹코스를 무릎건강이 허락하는 한 트레킹도 즐기고 싶은 한 자락 꿈이 허락될지 모르겠다. 현지가이드의 획일적이고 틀에 박힌 겉핥기식 여행에 아쉬움이 컸기에 드는 생각이다. 거기다 만년설 같은 빙산이 녹아 계곡을 이루고 굉음을 토해내던 초록물빛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아직도 나의 뇌리에 가슴에 귓전에도 생생히 남아 기억되는 거대한 초록물줄기였음을.
- <꿈 한 자락> 중에서 -
위 수필 결말부에서 그녀는 ‘너무 맑아 눈이 시리던 그 푸른 물 풍경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꼭 그곳이 아니라도 대자연 어딘가 한적한 곳에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본다’라고 한다. 이에 작가는 자연에서 나고 자연에서 자란 인생이니 그 외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한 그녀의 동경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녀의 에코필리아는 ‘초록’이라는 상징으로 드러나는데, 위 수필에서 ‘초록불빛’, ‘초록물줄기’ 등으로 나타난다. 친구들과의 가벼운 산행에서 만나는 야트막한 동네 야산을 작가는 무미건조하고 무료한 일상에서 만난 청량음료와 같다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대자연은 그녀에게 탄성을 지르게 하는 것이다.
“밀포드 사운드호수를 다시 갈 수 있다면, 마운트 쿡 트레킹코스를 무릎건강이 허락하는 한 트레킹도 즐기고 싶은 한 자락 꿈이 허락될지 모르겠다.” ‘빙산이 녹아 계곡을 이루고 굉음을 토해내던’ 초록물빛을 잊을 수 없다는 데서 그녀의 자연 사랑은 뿌리를 내려서 밀포트 사운드호수와 마운트 쿡 트레킹코스를 트레킹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대자연의 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 자락의 꿈은 영원히 꿈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을 위한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가 아닌가. 이운순은 이런 과학기술과 문명발달의 횡포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그 가치가 보전되고 있는 대자연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녀는 대자연이 주는 은혜로운 신비를 구졍하고 싶다는 한 자락 꿈을 통해 한적한 자연을 그리는 인류의 꿈을 보여주며, 은근히 자연의 소중한 가치를 설정하고 있다.
속설인즉, ‘제비가 줄에 집을 지으면 밥주걱 주인이 바람이 난다’는 말이 있다는데, 선친께서는 함께 늙어가는 어머니보다, 당시 처한 환경적 요인으로 내 걱정을 하셨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늦게 본 자식이다. 위에 딸네들은 다 출가하고 군에 간 오라버니 대신, 동생과 함께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처녀농군시절을 보내던 때였다. 농사일도 농사일이지만, 병약하신 어머니로 인해 부엌일에서도 놓여나지 못했다. 우리집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제비란 녀석들이 무슨 죄가 있나. 그런 내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를 쓰고 전깃줄에 흙을 갖다 붙이러드니 딸을 보호하고자 했던 선친의 뜻을 녀석들이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신기하게도 나는 그 비슷한 시기에 펜팔을 했었다. 좀 지나고 생각해 보니, 부족한 내 역량에 지치고 힘겨운 일상으로부터 돌파구를 찾고 싶은 시기는 아니었는지.
- <아버지와 제비> 중에서 -
이 수필에서의 자연주의는 ‘발전이 거듭될수록 얻은 것도 물론 많지만 잃는 것도 분명 있다.’에서 확실히 드러난다.‘얻는 것’에는 ‘물론’이란 부사를 썼고, ‘잃는 것’에는 ‘분명히’란 부사를 썼다는 데서 그 차이가 나타난다. ‘변화에 따른 부작용도 시행착오도’라는 것도 그녀의 실증주의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는 말이다. 작가에게 제비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다.‘제비가 줄에 집을 지으면 밥주걱 주인이 바람이 난다’는 속설을 믿은 아버지가 곧 출가할 딸을 위해 제비가 전깃줄에 집을 못 짓게 방해했다는 것과 농민신문을 뒤적이다 펜팔상대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그녀에게는 봄날의 추억이 되어 있다. 평화로운 풍광을 자랑하는 제주에 장기간 무임 투숙한 제비들을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녀석들처럼 노란 부리와 힘찬 날갯짓으로 여행지를 찾아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는 마무리가 눈길을 끈다. 이 수필에서의 생태지향성은 정신 작용의 밑거름이 되어 노마디즘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그러면서 자연의 고상성과 고결성을 불러일으킨다. 수필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관적인 사고다. 익숙한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수필은 제비에 대한 인식의 새로움이 돋보인다. 우리는 늘 자연으로 떠나고 싶은 지향성이 있다. 작가는 자연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소망을 제비를 부러워하는 것으로 간접화해서 전해주면서 문학적 성취를 드높이고 있다.
이운순의 수필을 읽으면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는 참다운 이의 깨달음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산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가치에의 집착을 엮어 가는 일이다. 원근과 대소를 재면서 가치와 관련을 현재화시킬 때 집착에 이를 것은 뻔한 이치다. 인간의 일상적 삶은 여기에 그 거점을 정하고 방향을 터 잡아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 수필집에서 읽히는 또 하나는 자신의 존재적 인식을 교정하는 활달함이다. 문학은 한 시대의 구성원이 지닌 고유한 정신이며 체온이고, 도도한 흐름이어야 한다. 그 시대와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구성원이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위해 자기의 희생을 소진하며,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의 하나이기에, 이운순의 수필은 문학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2. 고향, 인연과 인정, 토포필리아에 핀 사랑
이운순의topophilia, 장소에 대한 사랑, 고향, 자연 등에 대한 사랑은 따뜻한 생명자본주의의 한 축이다. 장소애란 특정장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장소애가 특히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이운순의 수필이다. 제목만 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수필에는 그녀가 거쳐간 지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묻어 나온다. 수십 편의 수필 가운데, 고향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이는 그녀의 수필세계가 토포필리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하겠다. 그녀에게 있어 ‘포천’은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으로 각인되어 있어, 자연친화적이고 향토적인 작가의 마음 속에 지금도 추억의 성으로 우뚝 자리잡고 있다. 한 축의 글은 삶의 지혜와 향토 찬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서, 비인간화된 인간과 순수를 잃어버린 우리네 삶의 지향성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점철된 소망의 결과물로 판단된다. 주제 지향성적인 측면에서 인생론적 또는 인연론적인 관점을 동시에 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작가는 인간의 이상적 삶을 현실과 격리해 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은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집착의 대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무엇을 획득하고 상실했느냐에 따라 삶의 윤기와 습기,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만, 삶 자체가 집착의 결과이듯 문학도 같은 것이다.
그리움의 텃밭 고향은 언제나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무한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되고, 생활의 지혜도 만날 수 있다. 이운순에게 있어서 고향 포천은 자연친화적인 작가의 정염과 사상이 녹아 있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겠다. 문학은 자신도 정화해야 하고 시대도 정화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동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이운순의 작품은 자신을 구원하는 글로써 거울 같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등불 같은 수필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자신의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일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과 동행자가 되어 숨겨진 그들의 아름다운 진실을 캐내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작품들은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잊고 있었던 자기에 대한 응시를 통해 인연을 감싸는 일이나, 만남을 통해 삶의 진경을 보여주는 것 모두가 수필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일이다.
반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돈이 양반인 세상이 되었어도 아버지는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발령이었을까 선출직이었을까, 잠깐의 자치위원장을 끝으로 아버지는 그저 작은 농지를 지닌 평범한 농부로 가난한 선비로 살아가셨다. 참혹하고도 긴 삼 년의 전쟁 후에는 농사일 외에 간단히 목수일을 하셨던 것 같다. 그 흔적이 남아 연장통을 채웠던 것이다. 연필을 귀 뒤에 꽂고 정교하게 재고 수평을 보고 각도를 맞추는 일, 그나마 부친의 자존심을 세운 일이 목수일 아니었을까. 사회성도 변죽도 없는 어른이 어떻게 그 일을 하셨을까. 거울에 비춘 내 모습인 양 내성적인 아버지셨기에 드는 생각이다. 어찌됐든 아버지는 일가를 거느린 가장이 분명하셨다. 부끄러움을 감춘 내면의 고독과 가장의 중압감을 쓴 담배 한 모금, 탁주 한 사발로 달래셨을 아버지, 전후 가장의 무게와 시대상이 보인다.
- <목수> 중에서 -
인생에 있어 진실을 추구하기를 외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생을 인연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진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앞으로 전진할 기력마저 빠지고 만다. 이것은 바로 자아를 버리는 일이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수필가란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또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은 새롭고 편리한 것이 나오면 가볍게 그것을 취하지만 수필가들은 사라지는 것들의 허전한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주고자 한다. 그녀는 ‘아버지는 그저 작은 농지를 지닌 평범한 농부로 가난한 선비로 살아가셨다. 참혹하고도 긴 삼 년의 전쟁 후에는 농사일 외에 간단히 목수일을 하셨던 것 같다.’고 아버지를 회고한다.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즉 과거의 현재화를 위한 노력의 하나다. 뿌리에 대한 근원적 추구가 없는 사람은 참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렵다. 수필도 그러한 생활의 자세가 요구된다.
글에 관한 한 항상 겸손해 하지만, 전후 가장의 무게를 ‘담배 한 모금’, ‘탁주 한 사발’로 표현할 만큼 이운순은 수필가로서 내공이 탄탄하다. 그녀 수필의 강점은 반드시 엑센트를 둔다는 것이다. 신변적 수필 속에서도 시대정신과 인간정신을 담고 인연을 긍정으로 껴안으면서 이타적 정신을 수필 속에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가치다. 사건이 보다 구체적이라는 것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지구력이 부족한 수필 독자들에게는 해독하는 데 힘든 시간의 고통을 덮어주고 있다. 문학을 미적 구도로 인식하고 있는 한 그녀의 수필은 언제까지나 독자의 사랑과 관심을 끌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넘쳐난다. 남아있는 연장통의 흔적으로 아버지의 자존심을 밝혀내고, 목수의 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간 이 수필 역시, 힘의 문학을 지향하면서, 수필문학의 위상도 함께 드높일 수 있는 수필이라 하겠다.
연속되는 ‘덤’ 같은 사랑은 지인들의 따듯한 마음이 있어 가능한 행복이다. 지역의 산업화로 인구가 대거 유입되고 사방 농경지였던 지역이 유명무실하게 푸른 들판을 갉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대대로 농사를 짓던 분들에게 농사는 천직이다. 경작지가 줄어들었다고 농사일을 멈추지 않는다. 습관처럼 봄이면 씨 뿌리고 가을이면 걷어 들이는 고귀한 기쁨을 마다할 리 없지 않은가. 그 손수 지은 수확물의 나눔은 소리 소문도 없이 시작된다. 어느 해 추석, 고향에서 막 돌아와 두 형님이 싸주신 사랑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계단 끝에 고구마박스와 감 말랭이를 발견했다. 경남을 고향으로 둔 고마운 이웃이 빈집에 놓고 간 情이다. 마침 형님들도 많이 주셨기에, 고마운 성의를 덜어내고 농사가 없는 이웃집에 고구마 나눔을 했다. 그 다음 날은 또 다른 이웃이 고구마와 싱그러운 호파다발을 보내왔다.
- <덤> 중에서
이운순의 수필 <덤>의 핵심 키워드는 ‘고향’ ‘고마운 이웃’ ‘나눔’이다. 우리가 수필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본래적 자아를 찾는 일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복잡하고도 삭막한 도시 생활과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본래적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수가 많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의 상실은 곧잘 삶에 지친 사람들을 패배주의로 몰아가기 일쑤다. 현실적 자아와 본래적 자아라는 괴리감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을 어떠한 형태로든 극복하기 위한 절박한 노력은 누구에게나 일생 동안 끊임없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수필은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작가에게 큰 행복을 주며, 그것의 실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농촌에 아직도 인정이 살아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구마와 호파다발’로 상징되는 시골 인심을 나눔으로써 ’덤‘ 같은 사랑이 가능하다고 하는 주제의식을 내면화한 이운순의 수필 <덤>은 벤자민을 키우면서 발견한 ’덤‘의 사랑을 날개 없는 천사를 둔 지인에게서 받은 정나눔으로 전이시켜서 수필에 문학성을 더하였다. 나눔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가치를 품고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두엄 밭에 버려진 성난 녀석들은 봄볕을 받아 일시에 새싹을 밀어 올린다. 부지깽이도 싹이 난다는 멋진 계절이 아닌가. 전쟁으로 홑몸이 되신 두 분이 만나 사 남매를 낳으셨다. 앞선 가정에서 아들만 낳아본 어머니는 첫 딸을 낳고 무척이나 기쁘셨다는데 아버지 반응은 ‘평생 도둑이라는데 또 딸이야?’였단다. 아버지께는 아들 하나와 두 분의 따님이 있으셨고 두 딸 모두 출가한 상태였다. 삼 년 뒤 아버지가 바라시던 아들이 태어났다. 노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실력이었고 공부도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쉰둥이인 내가 태어났다. 하도 작고 못난 쭉정이 같은 그 아이는 쉰 넘은 부친과 마흔 넘은 어머니, 나는 소위 말하는 노인자제로 그렇게 세상에 났다. 머리숱은 아주 적었고 볼록한 됫박이마에 훌러덩 벗겨진 머리 때문에 ‘붉은 언덕’이라 놀림을 받던 여자아이는 아주 볼품이 없었다.
- <쭉정이의 어린 날> 중에서 -
세상의 모든 것이 수필 안에 놓여져 있는 소도구다. 사랑도 아픔도 이 안에 어우러져 있는 일종의 소품이라고 볼 때, 수필은 하나의 우주다. 수필을 쓸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감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먼저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야 된다. 이운순은 자신을 ‘쭉정이’로 묘사하면서 어린 날의 자화상을 솔직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수필 장르의 특성을 빌어 잘 나타내고 있다. ‘머리숱은 아주 적었고 볼록한 됫박이마에 훌러덩 벗겨진 머리 때문에 ‘붉은 언덕’이라 놀림을 받던 여자아이는 아주 볼품이 없었다.‘라는 자신에 대한묘사와 단상이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매우 구체적이다. 수필을 쓸 때 신체 부분이 소재가 되는 수가 많다. 그만큼 인간중심주의는 인물의 가치를 중시한다. ’붉은 언덕‘ 또한 자신의 인물 특징을 문학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쭉정이‘는 자신의 모습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자신의 시선에 드러난 사람들, 특히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 가족들의 모습들이 전부 압축되어 이미지로 나타난 것이 ’쭉정이‘다.
’하도 작고 못난 쭉정이 같은그아이는쉰 넘은 부친과 마흔 넘은 어머니, 나는 소위 말하는 노인 자제로 그렇게 세상에 났다.‘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솔직한 표현은, 그녀의 표현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하겠다. 발단부에 ’쭉정이‘를 개념화하고, 전개부에 가서 자신의 모습과 그리고 폐병으로 피골이 상접한 남편을 둔 어느 젊은 여인을 또 ’쭉정이‘로 의미화하고, 결말부에 가서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통틀어 ’쭉정이‘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이 글의 전략화가 매우 돋보인다고 하겠다. ’싹 낼 볍씨를 물에 담그면 쭉정이는 모두 물에 뜬다. 단단한 알곡은 두고 물에 뜬 볍씨는 건져내어 두엄 밭에 흩뿌려진다. 탈곡할 때 바람에 날리는 빈탕 말고, 알맹이가 반도 안 차 도정할 때 깨어져 싸라기가 되는 놈이 이른바 쭉정이다.‘ 이런 상관화없이 어찌 본격수필이 되겠는가. 아이러니의 연속인 삶, 운명의 장난 같은 작가의 삶은, ‘가족 중에 집을 떠난 사람이 있으면 어디서든 굶지 말라고 부뚜막에 밥을 떠놓는 관습대로 오라비 군 생활 36개월, 아버지 상청 1년까지 그 일을 했다’라는 이 수필의 마지막 대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문학상시상식과 동인지 출간안내 생신축하연도 좋았다. 기다리던 식사시간에는 마치 아기 새에게 모이를 물어다 주듯 아내를 위해 연신 이것저것 챙겨주는 그녀 사랑님의 모습은 절로 미소를 부른다. 사랑님의 나지막한 중간키는 이 작가와 눈높이가 더 잘 맞을 것 같아 보기 좋았고, 바람직한 애처가 모습이라 좋았다. 얼마나 재미있게 사는지 더 묻지 않았지만, 언니의 마음으로 엄마 같은 마음으로 건강하고 예쁘게 살아주기만을 기도해본다. 어머니의 오랜 뒷바라지가 이현주 작가를 있게 했다면 오늘은 사랑님의 외조가 빛난다. 장애를 극복한 그녀의 진솔한 이야기가 독자의 가슴을 울릴 테니 그녀의 내일은 더 밝게 빛나리라.‘스페인인가, 어디던가 벌써 여러 해 연락을 해오고, 선물도 보내오고 그래요.’이 작가의 근황을 자랑하시는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이 깊고도 진하게 전해온다.
- <아기새, 연인이 되다> 중에서 -
아기 새 여인과의 인연이 주는 의미를 새겨 보면 우리는 이운순의 확실히 남다른 인생관에 수긍하게 된다. 인식의 형상화가 빛나는 부분은 주제를 사랑으로 일반화하는 부분인데,“어머니의 오랜 뒷바라지가 이현주 작가를 있게 했다면 오늘은 사랑님의 외조가 빛난다”는 표현이다. 대체적으로 좋은 수필들은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화 전략들이 매우 체계적이다. 이 수필에는 김현주 장애인 작가에 얽힌 일화가 삽화로 놓여 있다. 이는 주제의식을 설득적으로 구체화하는 전략이요, 수법이다. 이처럼 소박하고 진실한 경험의 용해와 절제된 감성은 이운순 수필의 품격을 드높인다고 하겠다. 문학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이러한 이유와 당위성 때문에 작가는 작가로서의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수필은 세상의 아름다운 향기를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수필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고, 노력의 흔적이다. 장애인 아내의 성장을 도와주는 남편, 그리고 장애인 딸을 위해 헌신을 다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감동을 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는 문학상 시상식을 주시하면서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준 아기 새 같았던 한 여인을 잊지 못한다. 이 수필의 가치는 ‘사랑은 위대하다’는 것을 수필을 통해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간 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원숙한 인생의 맛을 느끼며 살기 위해 수필을 씀으로써 세상의 구원에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첫 수필집을 내고 문학상을 수상했던 날의 잊을 수 없는 한 여인에 대한 기억으로 수필을 썼다. 이는 건강한 생활인의 자연적 부화라는 측면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부가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의 공감대 위에서 작가가 만남의 인연을 통해 일상의 윤기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 이타주의의 확산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V. 나오며
순간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각고의 작업을 우리는 자아 성찰이라 한다. 수필을 원숙한 인생의 문학이라 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인생 저편에서 바이오필리아와 토포필리아 사상을 관조하고 거기에서 얻은 지혜를 주제로 수필화했다는 것은 수필의 교훈성과 효용성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수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한 작가의 성장에 대한 개인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생명주의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애향적인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또한 이운순의 수필들은 소중한 인연의 끈으로 묶고 있는 작가의 아름다운 포천 사랑이 질펀하게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출생의 흔적에 대한 그 기억들은 분명 지금이 행복하기 때문에 환기되는 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의 가슴에 살아 있는 마을은 항상 생명의 파도가 넘실된다. 인연된 사람들의 정 줄기와 함께 오늘도 그녀의 심저에는 초록물결이 흐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문학이 되어야 한다. 거울이니 등불이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의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수필이 상상력이나 예리한 관조, 지적 통찰의 체로 걸러지지 않은 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수필은 삶과 세계에 대한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 있어서 이운순의 작품은 향기로운 문학이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운순은 글감을 세태와 인연 속에서 찾아내는 작가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는 버폰의 표현에 정확히 맞는 언행 일치의 삶을 사는 작가이기도 하다. 문명비판이란 따끔한 질책이 담겨 있는가 하면, 한 가정을 편안하게 리드해가는 여인으로서 일상 속에서 느끼는 편편들에 대한 다소곳한 정감을 수필 속에 용해시켜 내는, 가슴 따스한 작가다. 차분함과 여유에서 나오는 그녀의 글에는 오늘을 사는 생활인의 가슴 저린 애환이 있고, 따스한 정이 소리 없이 흐른다. 그녀 수필의 특성인 식물성과 애향성은 무미건조한 단조로움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은 한다. 바이오필리아와 토포필리아는 성찰의 시간을 부여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작가에게 유의미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문제의 한 켠에는 언제나 초극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선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운순의 수필집은 말해준다. 사람들은 그 세계를 통해 삶의 기쁨을 만끽하고, 처절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벽으로 해서 어쩔 수 없이 각박한 삶을 자처해 그 길로 들어서기도 도망치기도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자의 마음가짐이다. 물질만이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나를 있게 한 과거의 끈으로 튼튼한 미래를 창조하려는 창조적이며 포용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노동의 가치는 어떤 잣대로도 가늠하기 어렵다’는 표현에서그녀가 추구하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가 드러난다. 그녀는, ‘왜가리가 날아드는 걸 보면 아직 생태계가 살아있다는 게 분명하다’고 안도하면서, 수고롭고 사랑이 충만한 삶의 현장을 가슴에 담고, 이를 바탕으로 나눔의 가치와 사랑의 미학을 실천하며, 바이오필리아와 토포필리아 나무를 키우고 있다. 그 나무들이 빚어내는 그늘이 시원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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