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꽃들의 모임
2020. 1. 향기 이영란
화관/정운 이영도
봄이 가네 훨훨
꽃잎을 흩으며 가네
낙화에 쌓여 나는
화관을 이고 섰네
날리는
꽃가루 속에
그냥 묻히어 섰네
오라 어서 그대 오라,
그 푸른 의상 곁들이고
향연 주악보다
더 겨운 이 꽃자리에
황홀한
기약을 안고
화관이 지켜 섰네
석류/정운 이영도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 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정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유성/정운 이영도
밤마다 긴 세월을
뜬 눈으로 밝히더니
아득한 꿈길처럼
기약 없는 그리움에
구만리
창창한 속을 뿌리치고 내려라.
절벽/정운 이영도
못 여는 것입니까?
안 열리는 문입니까?
당신 숨결은
내 핏줄에 느끼는데
흔들고
두드려도 한결
돌아앉은 뜻입니까?
아지랑이 /정운 이영도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나잇살이 실핏줄 속까지 부드럽고 꼼꼼히 들어앉아 여자들의 몸은 고요하고 단단하면서 동글동글했다. 마흔 아홉 줄에 들어선 여자들끼리 모이면 동네어귀를 걷거나,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식당을 가거나 혹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숙소에 앉아서 자분자분하게 있어도 괜찮았다. 늘 식구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짐을 챙기던 여자들에게 자기 한 몸만 건사하는 일은 그저 눈 뜨고 숨만 쉬면 되는 일만큼이나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백합, 수국, 수선화 여자 셋이서 하는 계모임이었다. 조금씩 돈을 모아서 여행을 가거나 밥 먹고 차 마시자고 내는 비용이었는데, 아직 여행다운 여행을 못갔다. 만나는 횟수도 아무렇게 정했다. 그래도 되는 사이였다. 돈이 조금씩 쌓여가자 여자들은 곗돈을 헐어서 그릇세트를 장만하기도 했다. 백합은 겨울코트를 살까 집 안에 필요한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살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음식물 처리기를 사겠다고 하면 수국과 수선화는 꽃잎이 놀라 날아가도록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이번 모임에서는 산양면 작은 펜션에다 숙소를 잡고, 저녁 바베큐를 위해 고기와 소세지, 버섯, 맥주 등을 사와서 한껏 분위기를 냈다. 백합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전부 다 사 먹거나 사 와서 먹자고 했는데, 수국과 수선화는 웃으면서 쌀과 김치, 밑반찬들을 준비해 왔다. 마음이 맞는, 결혼한 여자들끼리의 여행은 마음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웠다. 실은 여행에서 '마음이 맞는' 부분이 거의 모든 부분이다. 모범생들인 여자들이었지만 그 날만큼은 늦도록 맥주 잔을 기울였다. 조금 많다 싶은 안주를 아주 천천히 집어 먹으며 목적지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수선화는 매사에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수국은 펄펄 끓다가 금새라도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감정이 좌우로 오가는 사람이어서 수선화의 평온함이 부럽기도 했지만 술에 술 탄듯 물에 물 탄듯한 그녀의 감정이 이해가 잘 안되기도 했다. 왜 흥분할 일이 없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셋 중에서 백합이 제일 할 말이 많았다.
백합의 남편은 골프와 캠핑을 많이 좋아했다. 골프는 남자 혼자 치러 나가는 일이어서 상관없었지만 캠핑은 다른 문제였다. 남자는 캠핑 동호회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며 인생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을 좋아했지만, 백합은 춥거나 더운 것도 싫을 뿐더러 더 싫은 일은 생판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었다. 물론 캠핑 준비를 하는 일, 먹을 걸 챙기고 돌아와서 뒷처리를 하는 일도 힘들었지만, 늦게 본 아들이 자연을 접하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을 유일한 위로거리로 삼았다. 남자는 캠핑을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더 시원한 장치를 사고, 더 따뜻한 난로를 두 세대 마련하고, 캠핑 가서 요리하는 일을 더 도맡아 하고, 낯선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없도록 텐트에서 쉬도록 배려했다. 텐트 안에서 여자는 학교에서의 밀린 업무와 밀린 집안 일을 두고 전전긍긍했다. 남자는 아흔이 다 되어가는 자신의 어머니가 노인성 치매를 비롯한 여러 질환으로 병원에 갈 일이 많아졌을 때에도 그 때마다 아내를 데리고 다니고 싶어했다. 백합은 시어머니에게 싹싹했다. 누구에게나 싹싹한 그녀는 어머니의 요양사와도 수시로 통화하면서 증상을 살폈다. 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를 위한 절차를 밟고 의사와 상담을 할 때도 영리했다. 남자는 아내에게 기대고 싶어했다.
여자의 올해 목표가 자신이 잘하는 것과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이라 말했다. 자신은 캠핑 가는 일이 너무나 싫은데, 캠핑을 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다고 했다. 그런 말을 꺼낼 때 남편이 보이는 극단적인 태도와 말들, 캠핑을 힘들어 하는 자신을 위해 그렇게 배려함에도 불구하고 그 배려를 알아주지 않는데 대한 섭섭함을 토로한다고 했다. 시어머니 병원진료에도 굳이 자신이 함께 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꼭 같이 가기를 원하는 남편에게 잘라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싫다고 했다.
다른 여자들은 말했다. 남편과는 한 번씩 되돌아 갈 다리를 잘라내는 각오를 하고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의견과 여자에게는 늘 남편과 아이가 중심이고, 대화의 촛점이 남편과 아들에게 있어서 당장 자아를 찾겠다는 목표를 이루는 일이 어려워보인다고 말하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다른 여자들은 속으로 늘 남편과 아이 이야기만을 소재로 삼고, 아들에게 읽히기 좋은 책과 몸이 점점 불어나는 아들이 해야 할 운동, 남편에게 사 주고 싶은 옷들을 듣는 것에 대해 피로감을 느꼈다.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여자들은 봉평동의 아름다운 거리를 함께 걸었다. 수국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지만 다른 여자들은 한사코 거절했다. 사진은 찍어주는 것이지 자신들이 대상은 아니라 말했다. 함께 들른 책방에서 수국이 고른 책은 청마의 시집과 그의 연인이었던 이영도의 책을 샀다. 그녀의 그리움과 숱한 연정의 사리들이었다. 수국은 생각했다. 현실에서 순수물질은 존재하지 않듯이, 그녀의 그리움들로 만들어진 순수한 언어들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고. 공주와 왕자가 만난 이후의 삶은 밀고 밀리는 피 말리는, 자칫 서로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수도 있는 칼을 품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오히려 그런 긴장의 역학관계의 사이가 더 건강하지 않을까 하는.
허나 그녀가 고요하게 품은 사랑의 정열은 누구보다 뜨겁지 않았나 싶다. 단아하고 고운 그녀의 인상에서 풍기는 이미지로는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청마와 주고받은 사랑의 언어는 발칙하고, 고혹적이었다. 개별적 사랑은 그런 뜨거움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연정의 뜨거움으로 구워져 굳어버린 언어는 그녀의 생을 지탱해 낸 강력한 지원이었을 것이다.
서문에서 그녀는 말한다.
뭐라고 말씀이 따로 있겠습니까. 서러우면 입 닫고 그리우면 가만히 가락 울릴 저의 노래가 있었을 뿐입니다. 때로 하늘같이 창창한 그리움이 있어 황홀한 무지개를 엮어 가다가도 그냥 자주 서럽기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업는 저의 성품인가 봅니다. 이 분하고 슬픈 동경이 무슨 증세처럼 앓려질매 이 시조를 써온 것이니 하잘것없는 노래 쪽들인즉 그대로 호젓한 생애의 반려요 의지였던 것입니다.
글을 남긴 쪽은 말하고 있되 청마와 육신의 삶을 함께 한 다른 한 쪽의 지난한 삶도 있을 것이다. 삶이 그러한 것이긴 하되 심히 가혹했으리라 짐작해 보지만, 세상은 자신의 심경을 남긴 사람을 헤아릴 뿐이 아니겠는가.